독일 제국군

  • 이 문서는 독일 제국 시기의 군사 조직에 관한 것입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군대에 대해서는 독일 국방군 문서를, 현대 독일의 군대에 대해서는 독일군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large.jpgmunich_sailors_l.jpglarge.jpg
육군해군공군

ImperialGermanWarEnsign.png
3군 공용으로 쓰인 군기인 전투 깃발.



독일 제국군 군가와 영상.

Deutsches Heer
독일군[1]

표어: Gott mit uns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2][3]

독일 국방군의 전신

1 정의

1871년부터 1918년까지 독일 제국의 국방을 담당하던 군대이다. 프로이센 왕국의 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여러 소국들을 통일한 이후, 보불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의 대관식을 거행한 후,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는데 그 때부터 제1차 세계 대전 종전일인 1918년 11월 11일까지 존속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나치 독일의 군대였던 독일 국방군의 정신적 지주 겸 계승 대상이 되었다.

2 역사

넓게 보면 제국군의 기원은 프로이센 왕국 시절부터이다. 사실상 프로이센 왕국이 여러 소국들을 병합하여 독일 제국으로 거듭났었다 하더라도 군대는 크게 바뀐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뀐 것이라곤 시대별로 약간의 복장 개정 뿐.

제국군의 전성기는 당연히 비스마르크 시기. 보오전쟁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대파하였으며, 보불전쟁에서는 프랑스군을 대파하였다. 이후 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는 1914년까지 독일군은 유럽 최강의 지상군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는 제국군이 병사들을 오랫동안 훈련시켜서가 아니라[4] 뛰어난 참모체계를 갖추고 이를 체계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시스템을 먼저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뛰어난 참모체계는 전쟁에서의 승패에 있어선 오히려 독이 되었는데, 이는 군사 참모들이 문민통제를 무시하고 허황된 전장 목표를 제시하거나, 정치와 외교를 무시한 군사작전을 펼치는 바람에 전쟁을 필요할 때 제대로 끝내지 못했기 때문.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으니 동원을 멈추라는 빌헬름 2세의 명령을 무시하고, 외교적으로 큰 의미를 지닌 벨기에의 독립 역시 깔아뭉개며 시작한 1차대전이 그 대표적인 예. 1차대전 당시 독일군은 물론 다수의 연합군을 상대로 우수한 전과을 올렸으나 정치적으로는 만들지 않아도 되는 적을 만들어내기만 반복했고, 결국 미국이 연합군으로 참전하면서 패망한다.

3 뛰어난 전술적 능력과 뒤떨어진 전략적 안목

아예 개전 초부터 양면전선에 놓인 최악의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여러 전투에서 수많은 승리를 거둔 것과 패배하면서도 상대에게 큰 출혈을 강요하는 등 전술적인 면에서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가장 강력했던 군대임에는 아무도 부정하지 못한다. 게다가 앞서 설명하듯 다른 나라 군대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긴 신교대 훈련기간, 그리고 초고도로 빡센 군사훈련 등은 제국군 하나하나를 정예병으로 만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국제관계에 대한 무지와 만성적인 물자부족, 그리고 후진적인 보급 체계 등 대국적인 전략적 안목은 매우 뒤떨어지는 군대였다. 그 결과 독일군은 전술적인 면에서는 큰 성과를 여러 차례 거두지만 대전략에서 밀리면서 적군에게 주요 전략적 이점을 계속 내주며 전쟁에서 패배하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마른 전투 당시 소 몰트케슐리펜 계획이 자기에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본인 멋대로 수정하기에 이른다. 물론 이것은 갑작스런 러시아군의 동프로이센 침공 때문이라는 변명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서부전선에 파견시킨 우익의 80% 가량을 갑자기 동부로 빼어버려 우익을 크게 약화시킨 점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게다가 더 충격적인 사실은 원본 슐리펜 계획도 매우 비현실적이고 앞뒤가 하나도 맞지 않는 전략적으로만 보면 빵점짜리 계획이였다는 점이다(...) 애초에 6주만에 강대국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내고 3주 이내로 다시 러시아로 군사를 돌려 러시아의 항복도 받아낸다라는 게 말이 쉽지 그리고 마른 전투 도중 소몰트케는 클루크, 뵐로 등 다른 야전사령관과는 전혀 소통을 하지도 않았고, 애초에 세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아 소통할 생각조차 없었으며, 루프헤르트라는 작자는 자신의 출신지인 바이에른의 명예를 세우겠다라며 자기 멋대로 상부의 명령도 무시하고 독단적인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이쯤되면 국방군이 아니라 일본군의 선배가 아닌가 싶다

결국 온갖 병크와 삽질을 거듭하여 마른 전투에서 대패한 소몰트케는 참모총장에서 해임되고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새 참모총장이 되는데 이 인간도 전략적 안목은 크게 떨어졌다. 베르됭 전투 당시 프랑스군의 전력을 무시하고, 헛된 공세를 펼치다가 엄청난 인력낭비를 하였으며 이는 심지어 최소 1917년 말에나 예정되었던 제국군의 인력난[5]1916년 초에 겪게 만들었다(...) 결국 팔켄하인은 깔끔하게 베르됭에서 대패하고 참모총장에서 물러난다.

팔켄하인 이후,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참모총장, 에리히 루덴도르프가 참모차장이 되어 사실상 군사정권을 수립하였는데, 이들은 1918년 3월, 러시아와의 종전협정을 체결하고 마지막 최후의 공세인 '춘계 공세' 를 감행한다. 하지만 이 때에도 단기간에 파리를 함락시켜 프랑스를 항복시키고, 영국과 미국과의 종전협정을 체결하겠다는 헛된 망상과 오로지 전술적 승리로만 전쟁에서의 승리를 달성하겠노라는 말 같지도 않은 호언장담을 하더니만, 같은 해 7월에 연합군이 대대적인 반격에 들어가자, 단기간의 승리만을 목표로 두고 있던 제국군은 제대로 쉬지도 못한 상태에서 연전연패를 거듭했고, 결국 그동안 점령해오던 서부전선 점령지를 모두 다 토해내는 상황까지 만들어버렸으며, 종국에는 전쟁에서 패배하는 상황까지 연출해냈다.

근데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는 바이마르 공화국 성립 이후에도 자신들은 전혀 잘못이 없고, 제국의 군대는 열심히 싸웠는데 민간 정부. 즉, 내부로부터의 배신자들 때문에 전쟁에서 패배한 것일 뿐 이라면서 끝까지 실책을 인정하지 않았다. 즉, 모든 전쟁계획을 본인들이 구상했으면서 전략적으로 완전히 실패하자 그 모든 책임을 민간인들에게 돌린 것이다. 아 씨바.. 할 말을 잃었습니다

과거에는 독일 제국군이 1차대전 최강의 군대라고만 포장되고 미화되어 오다가, 요즘에는 존 키건 등 여러 1차대전 전문가들에 의해 전술적인 안목은 몰라도, 전략적인 안목에 있어서는 영국군, 미군, 프랑스군에 비해 매우 뒤떨어졌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

참고로 독일군 특유의 전략적인 안목의 어두움은 21 년 후에도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4 제국군의 제식장비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동맹군 보병장비
개인화기볼트액션 소총게베어 1871, 게베어 1888, 게베어 1898, 만리허 M1893/95, 만리허-쇠나워
반자동소총 / 기관단총젤프스트라더 M1906, 몬드라곤 M1908, 젤프스트라더 M1916, 헬리겔 1915, MP18
권총독일제보어하르트 C93, 마우저 C96, 드라이제 M1907, 루거 P08, 마우저 M1910/14
오스트리아-헝가리제라스트&가서 M1898, 로트-슈타이어 M1907, 슈타이어 M1912, 프로머 슈토프
지원화기기관총경기관총마드센 M1902, 호치키스 M1909, MG15nA, MG08/15, MG08/18, MG14/17
중기관총호치키스 M1900, 스코다 M1909, 슈바르츠로제 M.07/12, MG08
대전차화기탕크게베어 M1918
화염방사기벡셀아파라트 M1917
박격포그라나트베르퍼 16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동맹군 기갑장비
전차
중전차A7V
프로토타입LK I, LK II, A7V, A7VU, 트레파스바겐, 그로스캄프바겐, PzZug II 장갑열차, 오리온바겐, 오버슐레지엔
노획전차Mk. IV, Mk. A 휘펫, FT-17
장갑차E-V/4 에르하르트, P.A.1, 오스트로-다임러 장갑차, 란치아 안살도 강갑차, 뷔싱 A5P, 롬펠 장갑차
제1차 세계대전의 독일 제국군 항공기
전투기포커 아인데커, 알바트로스 D시리즈, 할버스타트 시리즈, 포커 Dr.1, 지멘스 슈커트 시리즈, 포커 D.VII
폭격기타우베, 고타 G IV, AEG G.IV
기타 항공병기체펠린 비행선
제1차 세계대전기의 독일 해군 군함
연습함드랏해
건보트일티스, 파터란트, 그라프 폰 괴첸, 칭다오, 아터, 폴붸르츠급
어뢰정 / 함1898급, 1906급, 1911급, 1913급, 1914급, 1916급, 1917급, 1918급
잠수함U보트
항공모함I
경순양함헬라, 가젤급, 브레멘급, 쾨니히스베르크급(1905), 드레스덴급, 노틸러스급, 콜베르크급, 마그데부르크급, 카를스루에급, 그라우덴츠급, 필라우급, 비스바덴급, 쾨니히스베르크급(1915), 브룸머급, 퀼른급
장갑순양함퓌르스트 비스마르크, 프린츠 하인리히, 프린츠 아달베르트급, 룬급, 샤른호르스트급, 블뤼허
방호순양함클라스 플레밍급, 빅토리아 루이제급
순양전함폰 데어 탄급, 몰트케급, 자이들리츠급, 데르플링거급, 마켄젠급, 에르자츠 요르크급
전함
프리 드레드노트급브란덴부르크급, 카이저 프리드리히 3세급, 비텔스바흐급, 브라운슈바이크급, 도이칠란트급
드레드노트급나사우급, 헬골란트급, 카이저급, 쾨니히급, 바이에른급, L 20 α
기타G-101급, 제어들러
취소선: 건조 취소

5 전쟁 범죄

누가 독일 국방군의 선배 아니랄까봐 이들이 저지른 전쟁 범죄도 만만치 않다.

우선 독가스의 선제 살포. 제국군의 1915년 제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염소가스를 살포하는데, 살상용 가스의 살포는 이미 1899년 헤이그 협약에 의해 엄연히 금지된 사항이였다. 물론 가스 자체로만 보면 1914년 국경 전투 도중 프랑스군이 먼저 살포하긴 했는데 그것은 살상용이 아닌 엄연한 최루 가스에 지나지 않은 것이였다. 결정적으로 1914년 프랑스가 살포한 최루 가스는 제국군의 진격을 늦추는 효과는 있었어도 그로 인한 제국군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반면 1915년 이프르 전투에서 제국군이 뿌린 염소가스에 의한 연합군 사망자는 무려 1시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15000명이나 되었다!

그리고 벨기에 강간 또한 대표적이다. 1914년 8월 3일, 슐리펜 계획대로 독일 제국은 선전포고도 없이 벨기에를 침략한다. 당연히 손쉽게 합병될 줄 알았던 벨기에는 생각 외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오합지졸에 불과한 벨기에군이 애국심과 저항심으로 똘똘 뭉쳐 세계 최정예인 제국군을 곤란하게 만든 것이다. 제국군은 벨기에에서 한 달씩이나 발이 묶였고 유럽의 약소국에 불과한 작은 나라에 고전하였다는 것 자체에 화가 난 제국군은 벨기에를 점령한 이후에 민간인들에게까지 폭력적으로 대하기에 이른다. 물자와 식량 수탈은 기본이였고 이 사건의 이름 그대로 강간도 저질렀다. 그리고 제국군이 벨기에에서 저지른 가장 끔찍했던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루뱅 학살디낭 학살. 이 사건들의 시초는 벨기에의 소도시 루뱅에서 시작되었는데 제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주둔지 근처에서 한 제국군 병사가 사살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벨기에 주둔 제국군은 크게 놀랐는데 주둔지 근처에 성당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제국군은 "아마 성당 근처에서 빨치산들이 숨어서 우리 병사를 쏜 걸거야" 하면서 아무런 증거도 없이 지들 멋대로 판단하였고, 자기네 병사의 보복을 한 답시고 그 성당을 불지르고 만다. 그리고 밖으로 나오는 사제들과 신부, 수녀들을 총살하였으며 빨치산으로 의심된다 싶은 민간인들을 마구잡이로 잡아서 총살하였다.

약 400명 가까히 되는 벨기에 민간인들이 루뱅에서 죽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제국군이 빨치산 잡는답시고 여기저기 불을 놓는 바람에 불에 타서 없어진 가옥도 수 십채였다고 한다. 루뱅 시의 유서깊은 대학루뱅대학교루뱅도서관도 이 때 제국군이 놓은 불로 인해 불탔었다고 한다. "루뱅 독일 병사 사망 사건"으로 잔뜩 예민해진 제국군은 벨기에 전역에서 빨치산 토벌에 열을 올리는데 빨치산 토벌 명목으로 민간인들이 가장 많이 죽은 곳이 바로 디낭 시. 무려 674명의 민간인이 무고하게 사살되었다고 하며, 희생자 중에는 노인아기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근데 황당한 건 당시 제국군이 저렇게 해서 진짜 빨치산을 한 명이라고 잡았는지도 의심스럽지만, 과연 루뱅에서 제국군 병사를 쏜 사람의 정체가 벨기에 빨치산인지도 불분명하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사건이 밤에 일어난 것으로 미루어볼 때, 피아식별이 잘 되지 않는 상태에서 자기들끼리 총을 쏜 것이였다는 설도 존재한다.

이 때문에 루뱅에서는 백년이 지난 지금도 독일 국기를 게양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

또한 제국군은 세계 최초로 민간인을 상대로 폭격을 가한 군대이기도 하다. 파리런던에 하루가 멀다하고 폭격을 가했는데 당시 독일 제국 공군들 가운데 프랑스와 영국 민간인들에 대하여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인간은 거의 없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1917년 3월 22일, 러시아 제국 포로들을 대상으로 생체실험을 자행하기도 했다. 그 포로수용소의 이름은 뮌스터 포로수용소였는데 그 포로수용소는 쾨니스베르크에 있었으며, 그 환경은 매우 열악했고, 하루가 멀다하고 제국군들의 구타가혹행위가 이어졌다고 전해진다. 당시 제국군은 포로로 잡힌 러시아 포로들에게 인종 별로 노래를 부르도록 시켰고 그것을 녹음하였는데,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 가운데에는 일본 제국의 압박을 피해 제정 러시아로 망명하여 러시아군에 입대한 고려인들도 있었다. 때문에 당시 고려인들이 한국말로 부른 아리랑이나 민요가 아직까지 남아있다.[6]

당시 독일 제국군은 인종 별로 발성을 하는 방법이 다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당연히 독일인들의 발성 방법이 가장 우월하고 진화되어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결국 이 실험 역시 자기네들 좋자고 한, 타인종 차별에 의거한 실험이였다. 제국군들은 노래만 부르라고 시키지 않았다. 포로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그들의 얼굴을 강제로 석고로 본을 뜨는 짓까지 저질렀다. 여하튼 1차 대전이 끝난 이후, 러시아군 포로들과 고려인들의 행방은 묘연하였고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단, 추측되는 바로는 열악한 수용소 생활로 인해 병사하였거나, 제국군의 생체실험에 이용당해 죽었을 거라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현재 독일 동부지역에는 당시 러시아군 포로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비가 세워져 있는데, 상당수가 이름 없는. 정확히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는 포로들이다.

이 외에도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당시 동부전선에서 철군하면서 우크라이나 지방의 민간인들을 수탈하고 노예로 잡아갔다고도 한다.
  1. 나중에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국가방위군(Reichswehr)" 의 "육군(Reichsheer)" 과 구별하기 위해 독일 제국군(Deutsches keiserliches Heer)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당대에는 그저 "독일군" 이라고 불렸다.
  2. 이 표어는 나치독일까지 계승된다. 나치 독일군 전 장병의 허리띠 버클에 새겨진 문구이기도 하다.
  3. 헬싱의 주인공 아카드의 장갑에 적힌 문장이기도 하다.
  4. 독일군의 병사 훈련기간은 4주로, 그렇게 긴 편은 아니었다. 2년동안 훈련을 받았네 뭐네 하는 소리가 있는데, 독일군의 전체 군복무기간은 기병, 기마포병 3년, 나머지는 2년이다. 신병교육기간이 2년이면 독일군은 훈련소 기간을 마치니 제대하는 괴상한 군대가 된다. 오히려 1차대전 전까지 모병제를 유지하면서 장기간의 훈련(무려 13개월동안 훈련받은 병사가 있다고 한다)을 유지한 영국군 병사들의 질적 수준이 월등했다. 자세한 것은 https://www.bl.uk/world-war-one/articles/training-to-be-a-soldier 참조
  5. 이것도 독일 군부가 만약 전쟁이 1917년 말까지 끝나지 않고 계속 답보 상태이면서 최악의 상황까지 몰렸을 경우로써 예측한 시간이였다.
  6. 특히 김 그레고리 라는 고려인이 부른 아리랑이 전해내려오는 것이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