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너스 군대

Bonus Army

1 개요

1932년 세계 대공황중, 미국 허버트 후버 대통령 집권기에 벌어진 병크. 전역 군인들의 생계 대책을 제대로 세우지 않으면 어떤 사태가 벌어지는가를 말해준 좋은 사례임과 동시에 더글러스 맥아더의 평판을 오늘날 바닥으로 떨어뜨리는 데[1] 아주 큰 기여를 한 사건이기도 하다.

2 참전군인 추가수당(보너스) 제도

미군미국 독립전쟁때부터 참전 용사들에게 전역후 추가수당을 지급했다. 이건 전쟁에 참여하느라 사회에 있을때보다 수입이 떨어지는데 대한 보상책이였다. 독립전쟁의 병사들중에 일병계급은 80 달러와 100 에이커의 토지를 받았다.[2] 그리고 계급이 높거나, 혹은 소득이 높았음을 입증할수 있으면 더 많이 줬다[3] .이 제도는 쭉 유지되다 미국-스페인 전쟁 때 폐지된다.당연히 이때의 병사들은 추가수당을 단 한 푼도 못받았다.

3 1차대전 때의 추가수당

1차 세계대전 직후 참전 용사들은 1인당 60 달러를 받는데 그쳤다. 전쟁 막판 수개월만 참전했음에도 10만여 명의 전사자를 냈을 만큼 생지옥이었던 전장에서 살아 돌아온 참전 용사들에게 이건 너무 적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당장 100년전 독립전쟁때보다 액수가 줄어들었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하원은 이 여론에 응해 미국내 복무자들은 1일당 1달러로 최대 5백달러, 파병 군인들은 1일 1.25 달러로 최대 625달러를 추가 지급하는 법안을 의결한다. 캘빈 쿨리지 대통령은 반대했지만, 의회는 대통령의 거부권을 찍어누르며 법안을 통과시켰다.[4] 추가 지급 대상자는 약 360 만명으로 예상되는 총지급액은 대략 36 억 달러. 꽤 큰 돈이기에 의회는 이 돈을 신탁기금을 부어 만들기로 하고 20년짜리 신탁기금을 만든다. 이 예산이 완성돼 돈을 지급하는것은 1945년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4 대공황

그런데 1929년 대공황이 터졌고, 1932년에는 미국내 실업자가 1,300 만명을 돌파했다. 많은 사람들이 실업 및 파산으로 인해 극빈층으로 전락해서 판자촌에서 연명했고[5] 당연한 일이지만 이들 중에는 1차대전의 퇴역병들도 많았다.[6]

퇴역병들은 당장 판자촌에서 연명하는 처지이니 참전수당이라도 받았으면 하고 여겼다. 그리고 그 자신도 1차대전 참전용사인 하원 의원 라이트 패트먼이 이들의 고통에 공감해 보너스를 당장 지급하는 법안을 발의했으나 후버 행정부는 원칙과 재정상의 이유로 반대했다.

이 소식을 들은 전국의 퇴역병들중 일부가 워싱턴에 가족들까지 데리고 상경했고 그 수가 무려 2만 5천명에 달했다. 퇴역병들은 포토맥 강가에 판자집을 짓고 지내면서 매일 법안 통과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들은 스스로를 보너스 원정대라 불렀고 사람들은 보너스 군대(Bonus Army)라고 불렀다. 당시 주류언론은 이들을 공산당 사주를 받아 계급혁명을 시도하는 사회 불온 세력이라고 보도했고, 소위 높으신 분들도 이들이 실제 퇴역병이 아닌, 소련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폭도로 생각했다. 후일 매카시즘으로 나타나게 되는 사회적 약자인 노동자나 사회운동가의 저항에 대한 비뚤어진 인식은 이미 이때부터 존재했던 것이다.

5 진압

즉시 지급 법안은 하원을 통과했으나 상원에서 기각되었고, 정부는 퇴역병들에게 기차표를 주며 돌아가라고 했지만 약 6천여명만이 돌아갔고 나머지는 남아서 시위를 계속했다. 한달넘게 계속된 시위에 정부는 경찰에 해산을 재촉했지만, 경찰은 시위대가 대규모인데다 궁지에 몰린 사람들이라 진압을 시도하면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나 정부는 계속 진압을 명령했고, 경찰이 진압을 시도했으나 예상대로 대규모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그 와중에 겁먹은 경찰관 한명이 발포해 버리며 시위대중 두명이 사망했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후버 대통령은 연방군을 동원하기로 결정하였고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참모총장이 직접 나선다. 맥아더는 시위대 중 진짜 참전용사는 1할 이하이며, 나머지는 소련과 공산당의 사주를 받아 체제전복과 공산혁명을 시도하는 빨갱이 폭도라고 주장했다.

맥아더는 부관인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비무장 시위대 진압에 조지 S. 패튼의 3기병대를 선두로 6대의 전차와 1개 보병연대까지 동원했다. 시위 진압 책임을 맡은 패튼은 후일 2차 세계대전에서 휘하 병사들에게 우리의 피에 굶주린 전장의 미친개라 불리던 극도로 호전적인 인물이다. 소위시절 멕시코 내전에서도 사살한 적 장군의 시체를 자동차 본네트에 매달고 다니는 기행을 선보인적도 있다.[7] 맥아더는 보너스시위대를 공산혁명을 노리는 폭도집단이라고 진심으로 믿었기에 '폭도를 제압한다' 는 사고 방식으로 초강경 진압을 강행하기 위해서 이런 호전적인 인물을 앞세운 것이다.

그런만큼 진압은 6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최루가스를 뿌리면서 기병이 돌격하며, 그 뒤를 착검한 보병이 뒤따르며 비무장 시위대를 판자촌으로 밀어넣었다. 패튼이 지휘하는 무장병력은 돌격 앞으로를 외치면서 판자촌에 돌진해서 모든 것을 불태우고, 그야말로 싹쓸어버렸다.

한편 조사결과 소련의 사주를 받은 빨갱이 폭도들이라는 몇몇 높으신 분들이나 맥아더의 주장과 달리, 시위대의 95% 이상이 진짜 퇴역병 출신 극빈층과 그 가족들로 밝혀졌다. 나머지 5% 정도는 신원확인 불가나, 혹은 군인들의 처지에 동감해서 그들을 응원하기 위해 나온 사회운동가들이였다.

진압을 명령했던 후버 대통령도 맥아더가 이렇게 막 나가자 경악해 중지를 명령했지만, 맥아더는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혈진압을 강행했다.[8] 아기 두명이 최루가스에 질식사했고 임산부 한명은 유산했으며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6 결과

"What the hell has Hoover got to do with it? Besides, I had a better year than he did."

"제기랄. 대통령은 그 연봉[9] 받고서 한 일이 뭐요? 내 성적은 (대공황에 대처하지도 못하는) 대통령보다 훨씬 낫지 않소?"
베이브 루스. 1930년, 연봉 8만 달러가 너무 많지 않냐는 비난에 응답하면서.##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평판이 크게 떨어진 허버트 후버의 공화당은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 대참패를 하게 되면서 불명예스럽게 퇴임하고 민주당의 슈퍼스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등장하면서 압도적인 지지를 받고 정권교체가 된다. 심지어 200년 넘는 미국 헌정 사상 3번 이상, 4번 재임기간으로 보낸 사람은 루스벨트가 유일하다. 그리고 공화당은 20년(루스벨트 12년+트루먼 8년)이라는 짧지 않은 기간을 야당으로 보내게 된다.[10]

물론, 허버트 후버의 집권시기에 대공황이라는 엄청난 충격이 있긴 했다. 그리고, 허버트 후버는 타임즈지가 매년 선정하는 역대 최악의 미국 대통령 10명 중 1명으로 영원히 기록되는 불명예로 남게 된다.

7 맥아더의 후일담

맥아더도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하고 유혈사태를 만들어 평판이 급락했으며, 이후 루즈벨트때 군비 감축으로 대통령에게 항명하고 의회와 싸우다 육군 참모총장에서 짤리고 한직인 필리핀 군사고문으로 쫓겨난다.

하지만 필리핀은 그의 아버지가 3대 총독이고, 2대 대통령이 맥아더의 죽마고우이며, 그가 어릴적 지내고 예전에도 복무했던곳이니 맥아더 입장에서 그렇게까지 나쁜곳만은 아니였다. 맥아더는 필리핀군의 원수계급을 받았는데, 이걸 얼마나 마음에 들어 했는지 2차대전에서 미 원수계급을 받은 후에도 필리핀 원수의 모자를 쓰고 다녔다. 그의 유명한 사진인 선글라스 + 파이프 담배 + 모자 사진에서의 모자도 필리핀 원수모.

그리고 할아버지가 영국 귀족가 출신이자 위스콘신 주지사, 아버지는 남북전쟁, 미국-스페인 전쟁, 미국-필리핀 전쟁의 소년 전쟁영웅이며, 겨우 20세에 연대장이 되고 중장 예편하고, 필리핀 3대 총독을 지낸 초 엘리트 가문이며 게다가 좌천된 지 10여 년도 지나지 않아 어떤 현실감각 없는 작자들이 정신나간 선택을 하여 그에게 다시 기회를 주는 바람에 이따위 짓을 하고도 출세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았다. 그의 진짜 몰락은 후일 한국전에서 중공군과의 전투에서 한 삽질과, 또다시 대통령의 명령을 무시해서 시작되었다.

맥아더는 훗날 대통령들에 대해 평할때, 다른 대통령들은 깠지만 후버만은 나쁘지 않았다고 평했다. 자기 하고 싶은데로 해본 시절이라 그런듯.

한편 5년간 맥아더의 부관질을 한 불쌍한 아이젠하워는 이런 짓거리에 질려 맥아더와 찢어지고 싶었지만, 이 당시는 그저 힘없는 영관이였던지라 필리핀까지 끌려가 4년이나 더 맥아더의 부관 노릇을 해야했다. 맥아더가 '너도 필리핀'이라고 했을때 엄청나게 절망했다고 한다. 아이젠하워 지못미 아이젠하워는 대대장노릇 한번 못해보고 소령~중령 시절을 보냈다. 그래도 맥아더는 나중에 아이젠하워의 진급 추천서 같은건 다 써줬다고 한다.

미국에서는 "또라이들이 군권을 잡으면 나라가 개판난다."라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축소판으로 배우고 군에 대한 문민통제를 더욱 철저히 하기 시작했다. 미국같이 강력한 국가에서 아직도 군부가 정부를 상대로 제대로 된 깽판조차 한번도 못 부린 이유는 강력한 문민통제 덕분이다. 그리고, 이 보너스 군대 사건 때문에 문민통제의 필요성이 더욱 더 부각되었다.

8 루즈벨트가 문제 해결

이때 강제해산당한 보너스 원정대는 전국에서 겨울내내 시위와 폭동을 벌이다 루즈벨트 당선 후 다시 워싱턴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루즈벨트도 원칙과 재정문제로 조기 지급은 반대했지만, 경찰이나 군대 대신 아내 엘리너를 보냈다. 엘리너는 시위대에게 폭력을 쓰는 대신 대화를 나누고 커피를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어울렸고, 루즈벨트는 당장 어디서 돈이 나오는 건 아닌지라 보너스 조기지급대신 나름 이익이 창출되는 뉴딜정책 공공건설 일자리의 제공을 제안한다. 퇴역병들은 썩 만족하지는 않았지만, 조기 지급을 요구한 근본적 원인이 먹고사는 문제였기에 이 제안을 받아들여 플로리다 키스 제도의 도로건설에 참여했다.

9 그런데 조기지급 법안 통과

그런데 1935년 이곳을 대규모 허리케인[11]이 덮치며 일하던 퇴역병 3백여명이 사망했다. 이것은 물론 루즈벨트의 책임은 아니었지만 이후 퇴역병들에 대한 동정여론이 형성되었고, 그 여론에 36년 의회는 쿨리지 때처럼 루즈벨트 대통령의 반대를 찍어누르고 조기지급 법안을 가결시킨다.

나라를 위해 싸웠는데 먹고 살기 어려워 참전 수당좀 미리 달라했더니 빨갱이 취급과 전차까지 동원해 짓밞혀서 백명에 달하는 사상자가 나오고, 이후 돈 대신 받은 일자리에서는 자연재해로 3백명 넘게 죽었으니 보너스를 미리 받았어도 새옹지마라 하기에는 너무 안습. 하지만 정부 입장에서도 돈이 없던 시절이니 어쩔 수 없긴 했다.

10 제대군인 원호법

이 사건으로 제대군인의 생계 문제 해결 필요성을 배운 의회는 1944년 제대군인 원호법(G.I Bill)을 만들게 된다.

이 법안은 참전용사에게 연금, 주택, 교육, 의료보험, 직업훈련 등에 대해 광범위한 혜택을 주었고, 2차대전 참전 용사들의 사회 재적응에 매우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이 법안덕에 전후 경제공황이 예방되고 소비능력을 가진 중산층이 확대되면서 1950년대의 완전고용 대호황기가 열린다. 다만 PTSD를 비롯 정신적 후유증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 전쟁 후유증으로 고생하는 제대군인들[12] 에 대한 원호 문제는 이 때도 해결되지 않아 베트남전 이후 다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고 이는 현재도 계속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처음에 G.I. Bill 수령을 지원할 사람이 많이 없으리라 생각했지만 전역자 230만 명이 혜택을 보았다. 이는 엉뚱한 효과를 낳았는데, G.I.Bill 덕을 본 군 전역자들의 대거 입학과 막대한 국가재정 지원 덕에 이 시기의 미국 대학은 덩치를 막대하게 불리고 기초 학문보다는 응용 학문에 신경을 쓰는, 쉽게 말해 2015년 현재 대한민국 대학교들처럼 '취업하기 좋은 학교'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학교의 운영진들은 '부모 대신에 학생들을 돌본다(?)' 정도의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들의 교내 참정권을 인정하지 않았는데, 이에 반발해 UC 버클리를 시작으로 뉴 레프트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뉴 레프트 운동의 성공에 고무된 여성들은 NOW[13]을 창설해 완전한 성 평등을 요구하였는데, 이들의 요구 중 하나가 '우리들도 G.I.Bill처럼 교육비 지원해달라!'였다.[14] 참전군인 보상이 단순히 보상을 던져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좋은 예.

11 기타

이 사건에 영향을 받아 "가열화되는 시위와 그에 따른 혼란, 그리고 참모총장 짝퉁 군부 인사가 주축이 된 미국의 파시즘 혁명"을 다룬 어두운 미래 소설 "It Can't be happened here"이 나오고, 1980년대에 나치 독일의 영국통치로 설정을 바꾸어서 드라마화가 시도되나 엎어진다. 그리고 이 시놉시스를 외계인으로 수정해서 등장한 게 다이애나가 쥐 잡아먹는 V다.

2015년 4월 26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이 부분을 다루었다.
  1. 또 하나는 한국전쟁 당시의 무모한 작전과 원폭 계획 및 항명.
  2. 약 40헥타르로 40만 제곱미터에 달해, 국제 축구장 56개를 넣고도 좀 남는 크기다. 이것 또한 천조국 스케일
  3. 소장계급은 1100에이커를 줬으며, 부농으로 유명했던 한 참전 용사에게는 비록 계급은 대위였지만 소장과 같은 1100에이커를 지급한 기록이 있다.
  4. 재적 의석의 2/3 이상 찬성이면 대통령의 거부권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5. 참고로 자유방임주의가 절정에 이르던 당시에는 제대로 된 사회보장제도 같은 건 없었고 그냥 가난하면 자선단체의 선의에 의존하던가 굶어죽어야 하는 시절이었다. 제대로 된 사회복지제도가 나온 건 2차대전 이후의 일이다.
  6. 저런 판자촌을 당시 허버트 후버 대통령의 이름을 따서 후버빌(Hooverville)이라고 불렀다. 번역하면 후버촌 정도의 어감.
  7. 사실 패튼에겐 이런 일화가 수도 없이 많아서 이정도는 기행이 아니라 그냥 일상사다.(...)
  8. 단, 발포는 하지 않았다.
  9. 당시 대통령 연봉은 7만 5천 달러였다.
  10. 반대로 민주당도 링컨~아서 재임기 1860~1884년까지 24년이나 야당으로 있었던적이 있었다.
  11. 1935 노동절 허리케인이라고 불리는 미국 역사상 세번째로 강한 엄청난 허리케인이었다.
  12. 심각한 전쟁후유증으로 미쳐 버려 정신적 치료 및 필요에 따라서는 평생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
  13. National Organization of Women
  14. 물론 그에 따른 이유는 있었다. 기술 발달로 여성의 가사노동은 편리해졌지만 인생의 목적이나 자기계발 등의 동기가 결여되어 있어 행복한 삶을 살지 못 했다는 것이 NOW를 비롯한 당대 여성 운동가들의 주장. 이게 합당한 주장과 근거인지는 각자가 알아서 판단할 일이겠지만...참고로 당시 케네디 정부에서는 '여성 지원 충분하고, 여성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 받는데요?'라고 발표했다가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