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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 제1공화국 당시 벌어진 정치테러 사건.
1957년 5월 25일에 야당 국민주권옹호 투쟁위원회가 자유당의 독재를 규탄하기 위해 서울 장충단 공원에서 시국강연회를 열었다가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동대문파 정치깡패들의 테러로 집회가 파탄난 사건.
제1공화국과 이승만 정권의 독재에 지쳐있던 서울시민 20만명은 이 시국강연회를 듣기 위해 참석하였다. 오후 3시에 민관식 의원의 사회로 시작한 강연회는, 대권주자 조병옥의 연설순서가 되자 갑자기 조직폭력배 50여명이 몽둥이를 들고 단상에 난입해서 앰프를 불태우고 깽판을 치기 시작했다. 결국 강연회는 4시 반 경에 중지될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될때까지 경찰은 나타나지도 않았으며, 조직폭력배들이 사라진 이후에야 중부경찰서장이 나타났다.
이후 1957년 6월 8일에 제25회 임시국회 본회의에서 집회방해행위를 경찰이 방치한 이유, 이 사건이 경찰의 배후조종 또는 묵인하에 저질러진 것인지의 여부, 폭도들에 대한 수사가 지연되는 이유 등에 대하여 이호 법무부 장관과 이익흥 내무부 장관에게 집중적으로 추궁하였다. 그러나 야당의 장택상 의원이 질의 도중 이승만 대통령을 식민지대통령이라고 지칭한 발언이 문제가 되어 여당이 징계동의를 발의하여 야당의원 전원이 퇴장한 채 표결을 강행하는 등 파동이 있었다.
이후 깡패들을 데리고 직접 현장에 난입했던 행동대장 유지광만이 가벼운 처벌을 받았고, 이들의 윗선 그러니까 이정재, 조열승, 임화수 등 동대문파 상층부와 권력의 비호 의혹에 대해선 전혀 수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당연한거 아닌가
이 사건으로 인해 그동안 자유당의 독재에 시달려있다가, 핍박받는 야당의 모습을 본 국민에게 자유당이 민심을 잃는 점과 언론이 이들 조직폭력배에 대해 깡패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에도 동대문파 정치깡패들은 자유당의 비호아래 계속 날뛰다가 4.18 고대생 습격 사건으로 여론의 역풍을 맞았고, 이후 모조리 박살나게 된다.
2 야인시대
야인시대의 중요 사건/사고 | |||
부민관 폭탄의거 사건 | 중앙극장 습격 사건 |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 |
단성사 저격 사건 | 황금마차 습격사건 |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 |
충정로 도끼 사건 | 고대생 습격 사건 | 국회 오물 투척사건 |
김두한, 조병옥, 유진산을 비롯한 야당인사들이 장충단에서 집회를 열려고 하자, 이정재는 유지광에게 집회를 방해 하라고 지령을 내린다.
그리하여 집회 당일날 유지광의 지휘하에 권상사가 스피커를 폭발시키는 것을 신호로 유지광의 부하들이 조병옥을 욕하면서 연막탄을 던지고 돌멩이와 폭력으로 야당 사람들을 마구 짓밟았으며 이로 인해 조병옥은 머리에 돌을 맞고 후퇴하고 집회는 완전히 개발살나고 최동열은 사진을 찍다가 권상사에게 마운트까지 당한다.
하지만 이는 처음부터 자유당에 타격을 주려는 김두한의 계략이었고, 현장에 있던 기자들에 의해 사건이 일파만파로 퍼져나가 빡친 이승만은 당장 제대로 수사해서 주범을 잡아오라고 곽영주에게 명령한다.
어떻게든 유지광을 빼내오는데 성공한 곽영주와 이정재였으나, 언론에서는 경찰이 대충 조사했다면서 가만히 있지 않았고 역시나 다시금 빡친 이승만의 닥달에 의해 결국 유지광은 구속당한다. 그러나 그냥 구속당하는게 아니라 명동파도 물귀신처럼 같이 끌고 가버렸고, 유지광은 자유당의 빽으로 아주 잠깐동안 감옥에서 극진히 대접받으며 있다가 출소했다.
정치적 사건과 폭력배들의 사건에서 한발짝 뒤에서 관망하는 경우가 많았던 최동열이 사건 자체에 휘말리는 드문 경우로[1] , 유지광이 출소할 때도 그에게 전혀 꿀리지 않고 한마디 쏘아붙히는 카리스마를 보여준다.
후에, 이기붕이 이정재의 이천 선거구를 뺏어가려고 하자, 이정재는 반발하고 저항했는데, 자유당은 이전까진 묵인해두었던 이 장충단 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동대문파의 조직원들을 잡아들여 사실상 동대문파가 토사구팽 당하게 되었다.- ↑ 그 이외엔 보안법 파동(일명 2.4파동, 1958년 12월 24일에 민주당의 약진에 당황한 자유당 세력들이 지방자치법과 국가보안법 개정으로 야당의원들의 단상연설때 할 발언내용까지 규제하려 하자 반발하는 야당의원들을 무술경찰들을 동원해 막고 강제로 보안법을 개정한 사건)때 국회 내부에서 다른 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다가 경관들에게 얻어맞는 장면이 조금 나온다. 그 이전에 유진산, 조병옥 등 야당의원들도 맞는 장면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