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블라드
이름 | 블라디미르 베아라 (Vladimir Beara) |
생년월일 | 1928년 11월 2일 |
사망년월일 | 2014년 8월 11일 |
국적 | 유고슬라비아[1] |
출신지 | 젤로보 |
포지션 | 골키퍼 |
신체조건 | 184cm / 82kg |
등번호 | 1 |
소속팀 | 하이두크 스플리트 (1947–1955)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1955–1960) 알레마니아 아헨 (1960–1963) 빅토리아 쾰른 (1963–1964) |
국가대표 | 59경기 (1950~1959) |
감독 | 프라이부르거 FC (1964–1966) 시타르디아 (1966–1967) 리예카 (1967–1968) SC 포르투나 쾰른 (1969–1970) 카메룬 (1973–1975) 퍼스트 비엔나 FC (1979) RNK 스플리트 (1980–1981) BŠK 즈마이 블라토 (1986–1987) |
1 생애
베아라의 고향은 젤로보로 현재는 크로아티아에 속해있다. 하지만 혈통은 세르비아 계통이다. 1947년 하이두크 스플리트 클럽에 입단하자마자 주전을 꿰찬 그는 1950년 처음으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그리고 그 시즌에 13실점을 기록하면서 무패 우승기록에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2] 그리고 1950년 월드컵에도 유고슬라비아 소속으로 참가하였지만 선배 골키퍼 스르잔 므르쿠시치에게 밀려 경기에는 뛰지 못했다. 하지만 그 해 10월, 유고슬라비아는 오스트리아에게 7대 2로 대패했고, 이 경기를 끝으로 므르쿠시치는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3] 그 자리는 자연스럽게 베아라의 차지가 되었다.
한 달 후,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펼쳐진 잉글랜드와의 시합에서 베아라는 놀라운 선방들을 보여주며 2대 2 무승부를 이끌어냈고, 이 시합은 비영연방팀이 잉글랜드의 홈에서 최초로 무승부를 거둔 시합으로 알려져 있다.[4]
하이두크 스플리트는 1952년 2번째 유고슬라비아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올림픽에도 참가했다. 지난 대회에서 준우승했던 한을 풀기 위해 나름 준비를 했지만 결승전의 상대가 하필이면 역대에서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팀인 헝가리였고, 유고슬라비아는 망했어요. 베아라는 여기에서 푸슈카시 페렌츠의 페널티 킥을 막아내는 등 분전했지만 결국 2대 0으로 패배하고 말았다.
1954년 월드컵은 드디어 베아라가 주전으로 처음 출전한 월드컵 대회였다. 그리고 베아라는 조별 예선에서 명성에 걸맞게 브라질을 상대로만 1실점을 허용하는 선방을 펼쳤다. 8강전의 상대는 서독. 불행하게도 베아라는 큰 부상을 입었고 그 부상으로 인해 독일에게 두 골을 허용. 결국 2대 0으로 패하고 말았다.[5]
1954-55 시즌에도 베아라는 스플리트의 우승을 이끌었다. 그리고 26경기 27실점으로 최소 실점 기록 역시 그의 몫이었다. 당시 최소 실점 2위 팀들은 36실점. 이런 그를 매의 눈으로 지켜보던 츠르베나는 이 시즌이 끝나자마자 바로 그를 영입했고, 그의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다음 해 바로 우승을 차지하고 다음해까지 우승을 차지한 것.
1958년 여름, 그는 3번째 월드컵에 참가하였다. 프랑스를 상대로는 이겼지만 탈락팀인 스코틀랜드와 파라과이와 비기는 의적행위를 하였다. 그리고 8강전. 상대는 다시 서독이었다. 하지만 베아라의 이름은 출전 명단에 없었다. 그리고 이날도 졌다. 그렇게 베아라의 월드컵은 끝났고, 1959년 헝가리와의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유니폼을 벗었다.
반면 리그에서는 계속 철벽 방어를 선보이며 2회의 우승을 더 거머쥐어 통산 7회의 우승 기록을 남기고 독일에 진출하였다. 하지만 알레마니아 아헨에서의 3년은 다리의 같은 곳이 2번 부러지는 부상의 연속. 1964년에 쾰른에서 은퇴하였다. 그 이후에는 1987년까지 여러 팀에서 감독 또는 코치를 역임하였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어린 시절에 약간 이색적인 경력으로 발레(!?)를 배웠는데 그로 인해서 탁월한 점프력을 보였다. 또한 어린 시절에 더 작은 공을 가지고 골키핑 훈련을 했기 때문에 손 기술도 좋았고 반사신경도 매우 뛰어났다고 전해진다. 프리킥시 벽을 쌓는 것을 별로 필요치 않다고 여기고 눈으로 공을 막아냈다고 하는 일화가 있을 정도. 오히려 눈빛으로 키커를 제압하는 맛도 있었다고 인터뷰했다.
그래서 별명도 철의 손을 가진 발레리노였다.
그에 관해서는 흥겹고 미학적인 것이 있다. 왜냐하면 그의 점프와 구부러진 발을 이용한 다이빙 그리고 완벽히 균형잡힌 몸은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꽉 눌린 스프링처럼 그의 발가락을 이용해 골문을 지키고 항상 튀어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밥 윌슨(전 아스날 골키퍼)
저는 세계 최고의 골키퍼가 아니예요. 그건 블라디미르 베아라죠.
- 레프 야신
3 어록
좋은 골키퍼란 내 시간대의 그처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야 해요. 그는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죠.[6]
골 에어리어 안에서의 내 자신감, 그것은 공을 쉽게 잡아낼 수 있었던 것에서 나온 것 같고, 슛을 막아내는 기술은 바바 루카[7]에게 배웠지. 그건 우리가 실제로 하던 간단한 훈련이었어요. 그는 나에게 야구공정도의 작은 공을 막게 했거든. 그러면 축구공잡기는 무지 쉬워졌지.
4 뒷 이야기
- 버스비의 아이들과 마지막으로 경기를 치른 선수 중 하나가 바로 베아라이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선수들이 베오그라드 원정 경기 이후 돌아가는 길에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5 수상
5.1 클럽
- 유고슬라비아 1부 리그 우승 7회: 1950, 1952, 1954–55(이상 하이두크 스플리트), 1955–56, 1956–57, 1958–59, 1959–60(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 유고슬라비아 풋볼 컵 우승 2회: 1957–58, 1958–59(이상 FK 츠르베나 즈베즈다)
5.2 국가대표
- 올림픽 준우승 1회: 1952
5.3 감독
- 아프리카 컵 위너스 컵 우승 1회: 1975(카메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