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헌부

司憲府

1 개요

고려조선 시대에 존재하였던 관청으로, 언론[1] 활동, 관리들의 행태에 대한 감사 및 탄핵 등을 주로 담당했다. 현대로 따지면 감사원 + 검찰 + 언론 이라는 거잖아. 흠좀무 또한 관리뿐만 아니라 국왕 역시도 사헌부의 눈초리를 피해갈 수는 없었고, 조선의 많은 국왕들이 사헌부의 극딜에 고통을 받아야만 했다(...) 물론 연산군 같은 인간 말종들은 제외하고 홍문관, 사간원과 엮여 삼사라는 명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전세계를 둘러봐도 사헌부와 같이 국왕의 전제를 막기 위한 기구를 설치한 곳[2]은 별로 없었기 때문에 혹자들은 사헌부를 '왕도정치를 이상향으로 내건 조선왕조 정치체제의 꽃'이라고 부를 정도. 이에 따라 대관이라고도 불렸던 사헌부의 관리들은 비록 관제상 품제는 그리 높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무소불위의 포스를 자랑했으며, 조선 중기로 넘어가면 이조전랑과 함께 고위직으로 승진하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자리가 된다.

2 역사

관리들에 대한 감찰 및 언론을 담당하던 기관은 통일신라발해에도 각기 존재했다. 하지만 '사헌부'라는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때의 일. 그렇지만 고려 시대 중간중간마다 어사대, 금오대, 감찰사 등으로 여러 차례 이름이 바뀌었고, 최종적으로 사헌부라는 이름이 자리를 잡은 것은 공민왕 때의 일이다. 고려를 이어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의 많은 유산또는 악폐습이 혁파되는 와중에도 사헌부는 존속하였으며, 오히려 군권과 신권의 조화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정치가 조선 왕조에게는 이상향이었던만큼 감찰/언론 업무를 담당했던 사헌부의 권한은 더욱 강력해진다.

태조 이후로 내부의 조직 구성 자체는 이따금 변경이 있었지만, 세종의 통치 이후 경국대전이 저술되기 시작하면서 서서히 정리가 이루어진다.[3] 최종적으로는 종2품 대사헌(大司憲) 1명 / 종3품 집의(執義) 1명 / 정4품 장령(掌令) 2명 / 정5품 지평(持平) 2명 / 정6품 감찰(監察) 13명으로 구성된다.[4] 감찰이라는 업무 특성상, 조정은 강직하여 다수 의견에 굴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당당히 말할 수 있는 젊은 인재를 사헌부에 등용하고자 했으며 보통 이조의 추천을 받은 홍문관, 성균관 출신의 젊은 문과 급제자들이 많이 등용된다.

상술하였듯이, 이들 사헌부의 대관들은 이조 전랑과 함께 사대부 정치의 꽃으로 당당한 세도를 자랑하였으며, 조선 초중기까지는 군권과 신권 사이의 조화를 이루는데 큰 기여를 한다. 하지만 숙종 시대 환국을 거치면서 서인의 독재가 시작됨에 따라 사헌부 역시 그 기능이 변질되기 시작해서 집권 당파의 거수기 노릇을 하는데 급급하기 시작했고 결국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하여 철페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업무

  • 간쟁 : 체고조넘이 잘못된 일을 시행했을 경우 이를 바로 잡고자 하는 언론 활동. 원래 간쟁은 사간원의 업무였지만 어쩌다보니 사헌부도 겸사겸사 맡게 됐다(...)
  • 탄핵 : 부정부패 혹은 사회적 논란을 일으킨 관리를 비판이라 쓰고 극딜이라 읽는다하는 언론 활동. 이 비판의 강도가 보통이 아니었던데다가, 국왕이 해당 관리를 실드쳐주면 사헌부 심지어는 사간원 관료들까지 나서서 사직서 제출하고는 '우리 의견 들어줄때까지 일 안함요'하는 경우도 잦아서 말 그대로 한 번 걸리면 끝장이었다. 문제는 조선 후기로 넘어가면서 반대 당파쪽 인물을 제거할 때 이런 수법이 쓰였다는거
  • 교육 : 의외로 여겨지겠지만 사헌부 역시 왕과 세자의 교육을 일정부분 담당했다. 가령 사헌부 관원들은 꼬박꼬박 왕의 경연 혹은 세자의 시연 자리에 참석해야 했다.
  • 서경 : 각종 법률 및 인사와 관련되어서 의정부나 육조는 해당 정책을 사헌부에게 미리 전달하고 승인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 상술한 위의 주요 업무외에도 사헌부의 주요 관원들은 의정부, 육조가 주관하는 회의에 참석하여 국정 전반을 논의하기도 했으며 의금부와 함께 대역죄인의 추국을 맡기도 했다.

4 관련 항목

  1. 물론 민심이 아니라 사대부들의 주장을 주로 담았다.
  2. 물론 전근대 한국의 주요 왕조들의 정치 체제 자체는 대부분 중국의 그것에서 모티브를 얻거나 혹은 그대로 Ctrl C V 한 것이기 때문에 사헌부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기구가 중국에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정작 중국은 조선과 동시대였던 명나라 시기를 거치면서 황권이 극대화되기 시작해 급기야는 2인자인 승상 자리조차 없애는 상황에 이른다.
  3. 가령 태종 시기에는 대관직을 다른 직종과 겸업을 허용하게 해주었던 시기도 있었다.
  4.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감찰' 업무를 수행했던 사람들에 한한 것이고 일반 행정 업무를 담당하던 말단 관직도 더 있었다. 비정규직 취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