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민주노동당(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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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명칭스웨덴어: Sveriges Socialdemokratiska Arbetareparti (SAP)[1]
당대표스테판 뢰벤
이념사회민주주의
스웨덴 의회113석 / 349석
유럽의회5석 / 20석

1 개요

정식 명칭은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 스웨덴의 주요 정당 중 하나로 1889년에 창당되었으며 사회주의 인터내셔널에 소속된 정당으로 사회민주주의 성향이다. 1917년부터 1926년까지 첫 집권하였고, 1932년부터 1974년까지 장기집권하였으며[2] 이 시기에 그 유명한 스웨덴식 복지 시스템[3]을 구축하였다. 1974년 총선에서 패배하면서 실각하게 되었지만 1982년 총선에서 재집권하였으며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반까지의 경제불황의 여파로 1991년 총선에서 패배하며 정권을 상실했지만 1994년 총선에서 재집권하였고 2006년까지 장기집권을 하다가 2006년 총선에서 우파연합에게 패배하였다가 2014년 총선에서 다시 재집권하게 되었다.

2 이념

3 역사

3.1 초창기

초기 스웨덴 사민주의의 경우 독일 사민주의와 덴마크 사회민주주의의 영향으로 1889년에 당시 의류점 직원이었던 사람에 의해 탄생되어진다.

특히 스웨덴 남부의 말뫼지역에서 먼저 생성되었는데 이는 실제로 말뫼와 코펜하겐의 거리 차이가 그닥 나지 않기 때문이다.

3.2 페르 알빈 한손 당대표 기간

[4]

3.2.1 계급정당에서 국민정당으로

1927년 당수로 취임한 페르 알빈 한손1928년 총선에서 스웨덴 공산당과 협력하면서 노동자계급정당을 내세웠으나 패배한다. 일단 보수적인 부르주아 정당들이 공산당과의 협력관계를 문제삼으면서 전반적인 지지를 받는것에 실패했기 때문이다.[5] 그래서 한손은 조직과 노선의 전반적인 재정비를 단행하였다. 우선 핵심적인 조직기반인 LO[6]내의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계급투쟁과 같은 단어대신에 인민[7]을 자주 사용하면서 다양한 계층으로의 지지기반의 확대를 도모하였다. 또한 1931년 헬싱란드 지역의 파업에서 시위진압으로 동원된 군이 민간인 5명을 죽인 사건에서, 당내의 급진파 [8]의 반발을 무릎쓰고, 무리한 진압을 한 정부를 비판하면서 시위를 진압한 공산주의자에게도 책임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다시 분당까지 일어날뻔 했지만 타협안이 마련되면서 일단 마무리 되었고, LO의 지도부 교체를 통해 사민당과의 결속을 강화시키며 공산주의자의 영향력을 축소하는데에 성공한다. 그리하여 이듬해인 1932년 치뤄진 총선거에서 성공하여 집권에 성공한다.

3.2.2 '스웨덴 모델'을 만들다

1932년 총선 직전 대공황의 여파가 강하던 당시에 치뤄진 전당대회에서 급진파의 생산수단 소유의 사회화 주장과 한손과 지도부의 제한적 위기 관리정책을 통한 경제위기 극복 주장이 충돌했었다. 이와중에 당내 급진파에 영향력이 있던 에른스트 비그포르스가 사회화와 계획경제가 서로 다르며 사회화없는 계획경제 추진이 가능하다는 점을 주장하였고 이를 수용하였다. 집권 직후부터 실업대책과 농민에 대한 보호 지원정책[9]을 시작하였고, 1934년에는 실업보험제도를 1937년에는 모성보호지원금제도와 1938년에는 2주 유급휴가제 같은 다양한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하였다.
노사관계에서도 사민당이 집권한 이래, 노사갈등은 이어졌다. 그래서 부르주아 정당들은 사민당에게 압박을 가하였다. 사민당 정부는 입법조치로 문제를 해결할수 있다는 뜻을 전달했다. 노조인 LO는 이러한 입법조치를 통한 정부의 개입이 노조의 자율성을 떨어트릴것이라고 생각하였고, 경영자단체인 SAF또한 LO와 사민당이 어느정도 연관이 있는만큼 유리한 입법조치가 이루어질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몇년간의 협상끝에 1938년 LO와 사용자단체인 SAF가 자율적 협상으로써 스웨덴의 휴양도시 살트요바덴에서 살트요바덴 협약을 마련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 하면서 노사의 자율적인 문제해결이 가능하게 되었다.

3.2.3 전쟁소용돌이에서 중립을 지키다

1939년 11월 소련핀란드침공할 당시, 군부와 외무부를 중심으로 개입을 해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그러나 외무부 장관까지 스스로 해임하게 만들게 하면서 까지 개입하지 않을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군수물자와 필수품을 지원하고 민간인이 의용대를 조직해 파병하는 수준은 눈감아 주었다.

그해 12월에는 안정된 국가운영을 위한 거국내각[10]을 수립하였다. 그러면서 독일과의 무역협정을 체결해 철강을 독일로 수출하였다. 이후 독일이 노르웨이마저도 점령하고 1941년 6월에는 독일군의 스웨덴 영토 통과도 승인하게 되었다. 이후 1943년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독일이 패배하자 방향을 바꾸었다. 우선 연합국이 독일군의 이동열차의 횡단 중단 요청을 승인하였고, 철강 수출 규모도 줄여나갔다.

1939년에서 1945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스웨덴의 중립정책은 철저한 중립은 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중립정책은 당내에서도 불만이 제기되었고, 여러가지로 도덕적인 상처를 입게되었다.[11] 그러나 이러한 방향은 전쟁의 참화를 당한 노르웨이나 덴마크와는 달리 이를 면할수 있게 하였다. 또한 한손은 잦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국민들을 위로하고 격려했으며, 이것은 정치적으로 스웨덴을 구하려고 노력하는 이미지를 구성했으며 그와 사민당 그리고 거국내각의 지지를 높이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1944노르망디 상륙작전바그라티온 작전을 통해 독일군의 패색이 짙어진 가운데 사민당에서는 LO와 같이 전후 스웨덴 경제의 운영방향인 '노동운동의 전후 강령'을 작성하였다. 금융시장의 공적 통제와 국영 상업은행의 신설, 국가주도의 산업합리화 그리고 독과점적인 시장구조를 가진 기업이나 비효율적인 시장경쟁이 이루어지면 국가가 국유화할것을 제안하였다. 특히 중점적으로 석유유통업의 국유화가 제안되었다. 당시 한손은 너무 급진적인 내용이라 지지기반에 타격이 될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반대했지만, 이전과는 다르게 좁아진 입지로 인해, 공식적으로 채택이 될수 밖에 없었다.결국 한손또한 옹호하게 되었다.[12]

1945년 7월 총선 이후 한손의 반대에도 거국내각을 해산하고 단독정부를 구성하였다. 이후 수상직을 맡은 한손은 1946년 10월 6일 사망하기 전까지 이 임기를 수행하게 되었다.

3.3 타게 에를란더 내각

3.4 올로프 팔메 내각

3.5 현재

4 선거결과

4.1 스웨덴 의회 선거결과

연도의석수전체 의석수득표율집권여부비고
1911년64석230석28.5%실패원내 3당
1914년 3월71석230석30.1%실패원내 2당
1914년 9월87석230석36.4%실패최초 원내 1당[13].[14]
1920년75석230석29.6%실패
1917년86석230석31.1%실패[15]
1921년93석230석36.2%소수정부수립
1924년104석230석41.1%소수정부수립
1928년90석230석37.0%실패
1932년104석230석41.7%소수정부수립
1936년112석230석45.9%소수정부수립
1940년134석230석53.8%다수정부수립
1944년115석230석46.6%소수정부수립
1948년112석230석46.1%소수정부수립
1952년110석230석46.1%연립정부수립[16]
1956년106석231석44.6%연립정부수립[17]
1958년111석231석46.2%소수정부수립
1960년114석232석46.2%소수정부수립
1964년113석233석47.3%소수정부수립
1968년125석233석50.1%다수정부수립
1970년163석350석45.3%소수정부수립
1973년156석350석43.6%소수정부수립
1976년152석350석42.7%실패
1979년154석349석43.2%실패
1982년166석349석45.6%소수정부수립
1985년159석349석44.7%소수정부수립
1988년156석349석43.2%소수정부수립
1991년138석349석37.7%실패
1994년161석349석45.3%소수정부수립
1998년131석349석36.4%소수정부수립
2002년144석349석39.9%소수정부수립
2006년130석349석35.0%실패
2010년112석349석30.7%실패
2014년113석349석31.0%연립정부수립[18]

4.2 유럽의회 선거결과

작성중 추가 바람
  1. 스웨덴어 당명을 영어로 직역한다면 'Social Democratic Workers' Party of Sweden'이 맞지만 보통은 영어로 Swedish Social Democratic Party("스웨덴 사회민주당")로 표기하는 듯하다.
  2. 중간에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거국정부 시기도 포함되어 있다.
  3. 국민의 집
  4. 이부분은 북하우스 출판사의 위기를 극복한 세계의 리더들 158~189를 참조해서 서술했습니다. 그래서 문장에서 유사한 구조가 많습니다.
  5. 보수당의 경우 사민당과 공산당 두 정당을 러시아 코샤크 기병대로 묘사해 가정을 파괴하는 모습을 선거 포스터로 담았다.
  6. 전국노동조합연맹을 의미하며, 1898년 사회민주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조직된 민간부문과 공공부문 생산직 노동자의 전국조직이다. 의외로 재미있는건 단순한 노동조합에만 그치지 않고 독자적인 연구조직을 두고 있다.
  7. 대한민국 기준으로서는 조금 윗동네와의 연계 때문에 어색하게 느껴질수는 있지만 전반적으로 국민과 비슷한 단어선택이라고 보아야한다.
  8. 상기언급한 회그룬드 같은
  9. 사실 이정책은 농민을 지지기반으로 하는 농민당과의 협력을 위한 정치적 고려라고도 볼수있다.
  10. 소련이었던 공산당을 제외한
  11. 언론검열로 독일을 비판하는 기사를 막으려고도 하였다.
  12. 그러나 이강령은 결국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타정당의 반대뿐만 아니라 전후상황의 경제예측 실패 그리고 중점적으로 추진할 석유산업의 국유화조차 미국의 압력으로 무산되었다.
  13. 득표율에서는 보수당보다 조금 뒤쳐졌다. 그러나 이후선거부터 지금까지 득표율과 의석수 모두 줄곧 원내 제1당을 차지한다.
  14. 그러나 보수당이 자유당과 연립정부를 세우면서 집권하지 못했다.
  15. 이 당시 당내 좌파가 탈당해 사회민주좌파당을 형성
  16. 농민당과의 연립정부수립
  17. 농민당과의 연립정부수립
  18. 녹색당과의 연립정부수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