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안(도시)

(서안에서 넘어옴)
600px
시안성(장안성) 고루.[1] 시안시의 상징. 1384년에 건립되었고, 현재 남아있는 중국의 고루 중 가장 규모가 크다.

1 개요

시안(西安, 서안, Xī'ān). 중국 산시성(陝西省)의 성도.

옛날에 '장안(長安, 창안)'이라고 불리던 곳이 바로 이 도시다. 송나라(북송) 시대 이전까지 낙양(洛陽, 뤄양)과 함께 중국의 양대 도시로 번창했었다. 이후 다소 쇠퇴하였고 명나라 때 서안부(西安府)로 개칭되었다가 현재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안시로 이어지고 있다. 워낙 유명한 도시였기에 서울이나 수도(首都)를 가리키는 대명사인 '장안'도 이 장안에서 따왔다.[2] 이 표현은 조선 후기까지도 쓰였다. '장안의 화제가 되다'라는 말도 여기서 나온 것.

이 도시의 이름에서 '오래 되고 큰 도시의 성 안', '수도'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2 역사

download?fid=642241b84448b5b80d1841bbc81fa3d7&name=W020100905603734210917.jpg
download?fid=642241b84448b5b8b87441bbc81fd1d7&name=2004-11-16-lddlmfyt1.jpg
당대 사찰복원도


download?fid=642241b84448b5b87d4b41bbc81fd6d7&name=d-12.jpg
당대 장안성 복원도

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특히 유서깊은 곳이다. 역사에 등장한 때가 전설적인 주나라 시기이며, 그 후로 낙양과 함께 중국의 양대 수도로 번창했다. 그래서 역사가 2000년 정도 될 정도로 굉장히 오랜 도시다.

일단 지형의 조건이 상당히 특이하다. 도시와 평원을 둘러싼 산악지대[3]가 원형의 성벽처럼 만들어져 있으며, 서쪽에는 황하, 북쪽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른다. 특히나 장안을 둘러싸고 보호받는 경지면적이 의외로 넓어 관중평야는 낙양의 5배 넓이로써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불린 옥토의 땅이었다.사천? 이는 만일 국가급 전쟁에서 포위당했을 때 식량을 자체적으로 대량조달하기 쉬우므로 오래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서쪽 방면의 산악지대는 대규모라서 통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덕분에 주변지역에서 장안으로 오려면 황하를 타고 위수로 진입하든지, 아니면 동쪽 산악지대에 있는 함곡관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동쪽은 함곡관으로, 여기서 중원과 관중이 구별된다.[4] 한마디로 말해서 방어하기 편리한 곳치고는 교통사정도 좋다는 이야기다.

장안의 인근 지역을 도읍으로 삼았던 서주진나라를 생각하면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후 907년까지 2140년간 장안과 인근 지역은 중국의 중심이었다. 장안은 낙양(洛陽, 뤄양)에 견주어 서도(西都), 서경(西京) 또는 상도(上都)라고도 불리기도 했으며, 낙양과 함께 송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 장안과 낙양이 고대 중국의 수도였던 것은, 당시 황하와 그 지류 유역이 중국에서 가장 농업생산력이 풍부했었고, 따라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5]

중국 고사에는 관중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關中者得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고대사에 있어서 그야말로 핵심적인 지역이었으며, 진나라 진시황전한 유방은 이 장안이 포함된 관중 일대를 기반으로 천하를 얻었고, 오호십육국시대전진(前秦)과 후일 수나라의 전신이 되는 남북조시대북주(北周), 당나라 이연 역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화북을 통일한 바가 있다. 사실상 고대 중국을 통일했던 6개 국가 중 4개의 국가가 그 시작이 관중 지방이었으니 고대 중국에 있어서 장안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6]

2.1 주나라 ~ 진(秦)나라

주나라(서주)의 도읍지 호경도 인근에 위치했는데[7], 종주(宗周)로 불리며 성주(成周)라 불린 낙읍이 동방 경영의 중심지로 기능하는 동안, 주나라의 본거지로 기능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수도인 함양(기원전 350~206)[8]이 인근에 있었다.[9]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장안은 함양 외곽의 일개 향리였다. 그러나 결국 함양은 항우에게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장안은 한나라(전한) 고조 유방 때 처음 도읍했던 낙양에서 천도하면서 사실상 새로 세워진 도시다. 파괴된 함양을 위수 남쪽에 재건했는데, 그게 장안이었던 것. 이 때부터 상당히 몰락한 지금까지 시안은 주요 대도시 중 하나가 되었다.

2.2 한나라

한나라 장안성 평면도

한나라 때의 장안은 지금 시안의 북서쪽 시가지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10], 비단길의 시작점이었다. 한무제 시대 장안은 제국의 수도로서 가장 번영했다. 당시 장안성의 대부분은 장락궁과 미앙궁 등의 궁궐과 관청들이 차지하고 있어, 황제와 고급 관료들을 위해 설계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11] 이 당시 장안성의 모양은 북쪽이 북두칠성, 남쪽이 남두육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 두성(斗城)이라 불렸다.

왕망이 난을 일으켜서 전한이 멸망하고, 잠시 나라의 수도로 상안(常安)으로 개칭되었으나, 적미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는 다시 낙양으로 천도했으나, 후한 말기 헌제동탁낙양을 불태우고 다시 장안으로 수도를 옮겼다. 이곳은 비교적 서량과 가까우며 이 때문에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이 결성되자 자신의 근거지인 서량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천도해서 병력과 물자를 쉽게 조달하려 했다.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에게 밀릴 경우 강족저족 등 서량에 사는 이민족들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

그러나 당시 장안은 적미군의 폐허를 제대로 복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단 우격다짐으로 대충 복구했으나, 동탁이 죽고 이각, 곽사가 난을 일으키고, 삼보의 난으로 장안은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또 헌제는 이를 떠나 조조에 몸을 의탁, 조조는 허창을 수도로 삼았다.

2.3 위진남북조

그러나 이 후 조위를 세운 조비는 수도를 다시 낙양으로 옮겼고 조예는 낙양을 호화스럽게 복구했다.
조위가 성립되자 수도의 자리를 다시 낙양에게 빼앗긴 뒤 영가의 난으로 또다시 초토화가 되었다.(...) 낙양(뤄양)과 함께 북송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 그 이후 당나라 때 다시 수도가 되었다

2.4 , 시기

당나라 장안성 평면도

수나라 문제 때 한나라의 장안성 토질이 염화되어 거주에 부적절해지자 현재 시가지가 있는 위치에 장안을 재건했는데, 이때는 수문제가 즉위 전 받았던 작위인 대흥군공에서 이름을 따와 대흥(大興)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수양제가 낙양을 재건하여 동도로 칭한 후 천도해 배도(陪都)가 되기도 했다.

장안의 두 번째 전성기는 당나라 때의 도읍지였을 때다. 당나라의 창업주 당고조는 618년 대흥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름을 장안으로 개칭했다. 장안성은 외성의 길이가 동서 9.7㎞, 남북 8.6㎞에 달했으며 동서남북의 성벽에 각각 3개씩 총 12개의 성문이 있었다. 내부는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어[12] 엄격한 통금이 실시되었고[13],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 앞으로 곧게 뻗은 폭 150m의 주작대로를 경계로[14] 동서 지역인 장안현과 만년현으로 나뉘어졌다. 장안현과 만년현에는 각각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라는 상업 전용구역이 설치되었는데, 특히 서시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점 역할을 해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장안성 남동쪽에는 당현종 때 준설해 생긴 곡강지(曲江池)가 인근의 부용원(芙溶園)과 더불어 명승지로 유명했다. 장안성 내에는 당나라 황실의 정궁인 태극궁(太極宮)과 당현종이 친왕이었을 때 살았던 저택을 궁궐로 증축한 흥경궁(興慶宮)이 있었다. 이외에도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정전이 중국 역사상 최대 크기의 건축이라는 함원전을 가진 대명궁이 장안성 외성 북쪽에 맞닿아 당고종 때 건축되었다. 최전성기에는 장안의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당시 전 세계에서 이와 맞먹는 규모의 도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슬람 제국의 수도인 바그다드 뿐이었다.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하던 장안은 황소의 난을 겪으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904년 주전충당소종을 협박해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장안의 궁전과 관청 건물을 철거해 자재를 이송하고 황실과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켜 이후 두 번 다시는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

2.5 오대십국~현대

후량 때 대안부(大安府)로 개칭되었다가 후당 때 서안부(西安府)로 개칭되어 관중의 중추도시로 머물렀으며 이자성의 난순나라의 일시 수도(서경(西京)이기도 했고 현재까지 중화인민공화국의 시안시로 이어지고 있다.1100년의 역사를 한번에 뛰어넘었다

2.6 쇠퇴

장안이 망한 이유는 지력 쇠퇴와 당나라 이후의 기후 변화 때문이다. 수천 년간 중국의 중심지로 개발되다 보니 당나라 시기에 이르면 지력이 쇠퇴하면서 관중 분지의 생산력이 감소, 식량 자급조차 쉽지 않은 상황이 되었다. 이미 후한 대에 농사에 치명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나, 적절하게 밀이 전래되면서 밀농사를 지어 버틸 수 있었다. 그러나 당나라 중기부터는 정치적 혼란으로 인해 버틸 수 있을 만큼의 토지, 관개시설 관리가 이뤄지지 않으며 농업 인프라가 붕괴했고, 이후부터는 토지염화가 악화되는 방향으로 악순환이 반복된다. 한때 전 중국에서 가장 풍요로운 곳이라던 관중 지역이 아니게 된 것이다. 수나라의 대운하 개발은 강남 지역의 물자를 관중 지역으로 수송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당나라 이후 건조하고 추워지면서 농사에 적합하지 않은 기후가 되어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15] 게다가 당나라 말기 정치적 불안은 외부 물자를 수송할 대운하 통제의 상실로 이어져 장안이 수도로서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결국 주전충당 소종을 움직여 낙양으로 천도하고, 장안을 파괴하면서 장안은 더 이상 중국사에서 수도로 등장하지 않게 되었다. 이후 중국사의 중심은 이곳으로부터 좀 더 동쪽(해안)지역으로 옮겨갔는데, 양쯔 강 유역이 개척되고, 북방민족이 흥기하고 북쪽으로도 영역을 넒힘에 따라 장안과 낙양은 중국사의 중심에서 사이좋게 밀려나게 된다.[16] 그나마 북송은 수로가 거미줄처럼 연결되어 수운이 용이한 개봉부를 수도로 삼기도 했으나 북송을 마지막으로, 중국의 중심지는 완전히 동부 해안 지역으로 넘어간다. 이후 왕조들은 항저우(남송), 난징(초기의 중화민국)과 베이징(, , , 명(영락제 이후 남명 이전까지), 및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에 도읍한 것도 그 때문.

3 현재

지금은 지방도시로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청이 한때 임시수도로 삼으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공산당 전선을 시찰 온 장제스장쉐량이 잡아가둬 제2차 국공합작을 요구해 결국 성사시킨 시안 사건 등 역사에는 꾸준히 등장하고 있다.

현대에는 중일전쟁 때 전투가 벌어져 중국군과 일본군은 시안에서 싸웠다. 그 과정에서 시안을 위시한 섬서성 일대에 대기근이 들어 수백만 가량의 아사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막장의 극치를 느낄 수 있다.

최근 시안 시는 개방 도시로 지정되어, 유라시아 대륙의 연결통로이자 중국이 추진하는 서부대개발의 교통요지로서 중국 서부 최대의 도시가 되고 있다.[17] 개혁 개방 이전에도 시안은 중국 경제의 중요한 지위를 차지해 왔지만, 최근에는 경제발전이 더욱 가속화 되고 있다. 그 원인으로는 성 안의 공업에서 중공업의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크고, 국방 산업 등의 특수 공업을 기반으로, 경공업이나 기술 개발력을 중시한 공업 정책의 결과이며, 최근에는 하이테크 신기술 산업 개발구, 경제 기술 개발구, 곡강 신구, 생태구, 염양국가 항공 하이테크 기술 산업 기지의 「4구 일기지」를 설치해, 첨단기술의 개발과 산업화를 추진하는 경제정책이 적용되기 때문이다.

4 유적들

시안의 벽. 경악스러울 정도로 높고 넓다.[18] 성벽 위에 사람들이 서 있다. 코에이 삼국지 게임을 즐기던 사람들에게는 악명높은 3중 성벽으로 유명한데, 지금도 시안은 성벽을 중심으로 안쪽이 중심가다. 성벽은 거의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물론 삼국지 시대의 것은 아니고 명나라 때의 것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 [19] 성벽 위로 올라가서 둘러보는 것도 가능한데, 대단히 높고 두꺼운 성벽이 둘레 14km 에 달한다. 아예 위에서 자전거나 전동차를 대여해주기도 할 정도.[20] 성문에 따라 다르지만 어떤 문은 아래로 차도 다닌다.[21][22] 도시 자체도 역사적 볼거리가 많은 곳이고, 근교엔 저 유명한 진시황릉 병마용역덕후라면 한번쯤 방문해 볼만한 가치가 있는 도시.

여하튼 역사가 무진장 길기 때문에 로마카이로, 교토처럼 지하철도 마음대로 못넣는거 아니냐는 얘기가 많이 나온적도 있으며 실제로 시안 지하철 건설계획 자체는 1970년대부터 있었지만 비용문제때문에 오랜기간동안 검토만 되다가 본격적으로 착공에 들어간건 2006년이 되어서부터고 2011년이 되어서야 1호선이 개통되었으니 그렇게까지 틀린 얘기는 아니다(...) 다만 현재는 2호선까지 개통된데다가 3-6호선 공사도 진척되고 있기때문에 적어도 로마처럼 지하철 노선을 대대적으로 착공못하는 사태까지는 피했다(...)

한국에서 가는 관광객도 많은 편이라 교통편도 괜찮다. 북서쪽에 있는 이웃 도시 셴양에 공항이 있고, 인천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이 각각 매일 1회씩 직항으로 왕복운항한다. 그 외에 심천항공도 화,토요일을 제외하고는 1회씩 왕복운항한다. 소요시간은 3시간 내외. 중국동방항공중국남방항공도 매일 왕복운항하는데 직항이 아니라 경유라서 시간이 오래 걸린다.

5 삼국지 시리즈에서의 장안

삼국지 3에서는 3중 성벽으로 돼있고 한 가운데의 내성은 너비가 좁아 수비하기에 적합하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2단의 성벽을 뚫고 들어가는 것부터가 일이다.

삼국지 5에서는 외곽에 외성 2개가 있고 본성은 서쪽과 북쪽에 관문이 있어서 한중과 안정, 하변, 홍농에서 침공해 오기 상당히 까다롭다. 반대로 완성에서는 수비가 허약한 본성의 남동쪽에서 공격할 수 있는데 수비측이 이를 역이용하여 본성을 포기하고 관문만 막은 채 외성을 본거지로 삼고 있으면 이건 이것대로 난관이다. 한 가지 재밌는 점은 한중에서 공격할 떄 완성에서 공격하는 진입로로 2개 부대를 별동대처럼 투입할 수 있는데 이것이 자오곡을 통해 기습한 부대가 아닐까라는 추측도 있다. 완성에서의 진입로면 상용쪽 진입로인가 싶기도 하지만.

삼국지 11에서 최대 규모의 도시이다. 공터가 22개인 도시는 낙양, 장안 둘 뿐인데, 낙양은 관문, 항구가 3개인 반면, 장안은 5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오히려 함곡관은 낙양, 무관은 완에 가깝다. 그래서 실질적인 갯수는 3개라고 보아도 될 것 같다.

영안, 상용과 함께 맵의 서부의 관문 역할을 하는 도시로, 동관을 통한 수비가 매우 용이하다. 반면 천수, 한중에서의 공격은 넓은 필드때문에 수비가 쉽지 않고 장안에서는 무관을 얻을수가 없어서, 수비에 있어서는 낙양보다 확실히 불리한 면이 있다. 원래대로라면 한중 방면은 악명 놓은 진령산맥으로 거의 막히다시피 해야 되고, 천수 방면 역시 녹록치 않으며, 무위 방면은 소관이 막고 있어야 하지만, 역대 삼국지 시리즈 중에서 소관을 등장시킨 시리즈는 없다(....)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시안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장안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북을쳐서 시간을 알리는 곳
  2. 반면 일본의 수도(교토)의 별칭은 낙양이다.한국은 서한, 일본은 동한
  3. 진령산맥
  4. 여담으로 함곡관은 두 개가 있다. 하나는 흔히 알고 있는 함곡관으로 시안과 뤄양의 사이에 있으며(후한-삼국시대의 홍농에 있다. 지금 지명으로는 링바오 시의 북쪽.), 사실은 이게 관중과 중원을 구분하는 경계로 볼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후한시대 낙양이 수도가 되면서 수도 방위용으로 옛 함곡관과 낙양 사이에 함곡관을 새로 만든 것이다.
  5. 본디 중원이란 이 지역만을 한정하여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지금의 척박함을 생각하면 믿기 어려울 정도지만 말이다.
  6. 나머지 2개의 국가 중 후한(後漢)은 낙양을 기반으로 하였고 진(晉)의 전신인 위(魏)는 허창을 기반으로 하고 낙양으로 천도하였다.
  7. 현재 시안의 남서쪽에 있는 호현이라는 곳이 호경이 있던 곳이다.
  8. 전국시대 중기 때까지는 옹(雍)이었으나, 효공 때 천도했다.
  9. 위수 건너편 북쪽에 있었으며, 지금도 그 자리에 셴양이 있다.(함양을 중국어로 읽으면 셴양이 된다) 정확히는 진나라 당시보다 서쪽에 있다. 시안 기준으로는 북서쪽. 아방궁은 현재의 서안과 호경 사이쯤에 있었다.
  10. 위성 지도로 보면 회색빛인 시안 시가지와 달리 묘하게 방형의 녹색빛이 도는 곳이 있는데, 한대의 장안성 모양과 일치한다.
  11. 그래서 인구 자체는 낙양이 훨씬 많았다. 장안이 속한 경조윤의 인구는 대략 70만 명 정도였는데(이 중에서 장안의 인구는 25만 명 가량), 낙양이 속한 하남군의 인구는 170만을 훌쩍 넘는다.
  12. 각 방은 내부에 난 십자형 도로에 의해 네 구역으로 구획되었다.
  13. 당나라 중기부터 통금제도가 해이해지기 시작해 후기로 가면 유명무실화되었다.
  14. 얼마나 폭이 넓은지 비교하면, 대한민국에서 가장 폭이 넓은 도로인 서울특별시 세종로의 폭이 100m이다.
  15. 하지만 그렇다고 사막화된 것은 아니다. 시안은 지금도 온난대반습윤 기후에 속하고 강우량이 적당하며, 사계절이 뚜렷하다.
  16. 낙양도 입지가 좁아 이전 시대에 비해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에 역부족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17. 이에 대해서는 일대일로 문서를 참조하면 더 자세히 알 수 있다.
  18. 장안은 예로부터 우주방어로 악명이 높았다.
  19. 이것은 문화대혁명기간 동안 성이 박살난 베이징 시와 매우 대조적이다. 베이징 성은 문혁 때 철거되었고 현재는 그 안에 베이징 지하철 2호선을 넣었다.
  20. 자전거 대여 시 100분 안에 반납하면 추가요금을 내지 않아도 된다. 자전거를 빌릴 때 보증금과 대여료를 낸다.
  21. 신서유기에 잘 나온다.
  22. 성벽 내 각 방향의 대로로 들어가는 문들은 차량이 통과한다. 당연히 작은 문은 사람들이 통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