毛文龍
(1576년 – 1629년)
1 개요
명나라의 무장.
2 활동
2.1 조선으로 가다
1621년, 심양과 요양이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함락되자 남은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변의 진강을 점령했다. 하지만 후금의 병력이 다시 공격해오자, 7월 진강을 탈출하여 조선에 상륙하였다. 조선에서 철산, 용천, 의주 등을 돌아다니면서 이 무렵 요동에서 도망쳐와 조선에 머물고 있던 명나라의 패잔병, 난민을 수습하였고 이들을 조직하여 압록강을 건너 진강의 후금군을 습격하여 작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1621년, 후금의 아민(阿敏)은 모문룡을 치기 위하여 5천명의 군사를 이끌고 압룩강을 건넜다. 모문룡은 용천 관아에 있다가 조선인 복장을 하고 도망쳤다.
2.2 가도에 주둔하다
1622년 광해군 14년, 광해군은 모문룡에게 평안도 철산 앞바다인 가도(椵島 또는 皮島)에 주둔하도록 권유하였다. 모문룡은 동강진(東江鎭)을 설치하였으며, 명군과 난민 1만명이 모문룡을 따라서 가도에 머물게 된다. 모문룡은 명으로부터 은자 20만냥을 지원받아 동강진을 유지했지만, 좁은 섬이라 군량이 부족했으므로 조선에 군량을 강요하여 식량을 징발하였다. 이 식량이 매년 10만석에 달했다. 흉년으로 조선 측의 식량 지원이 여의치 않자 황해도와 평안도에 상륙하여 약탈을 벌이기도 했다.
모문룡의 부하들이 약탈을 과도하게 벌이자 의주 부윤 이완이 그들 가운데 몇몇을 붙잡아 곤장을 쳤으나, 모문룡은 분노하여 상국의 병사를 때리냐며 조선 조정에 항의했고 결국 이완은 벼슬이 강등되었다. 이처럼 모문룡의 군사들이 군기가 좋지 않아 조선에서는 이들의 전투력을 불신하게 되었다. 약탈이나 하는 오합지졸들이 후금의 정예병과 제대로 싸울 리가 없다는 것이다.
1622년 10월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총병을 제수받았고, 1629년에는 좌도독이 되었다.
그러나 공적은 변변치 않았다. 모문룡은 후금과 한 번도 싸우지 않았으면서 18번을 이겼다고 거짓말을 하고, 6명의 적군을 포획하고 나서 6만 명의 목을 얻었다고 명나라 본국에 거짓 보고를 올렸다.
모문룡은 자신의 허위 공적을 날조한 자서전 모대장전(毛大將傳)을 지어서 뿌리며 자신이 뭔가 대단한 일을 하고 있다고 홍보하기도 했다.
조선에 대한 무례도 심각했는데, 1624년 1월 22일, 이괄의 난이 평정되자, 모문룡은 조정에 축하 선물을 보냈다. 그런데 그게 나체의 여인을 상아에 조각해서 만든 춘의(春意)라는 누드 조각상이었다. 조선 시대에 이런 걸 보냈으니 기겁할 노릇. 춘의를 받아든 권진기는 모문룡이 무례하다고 꾸짖으며 돌려보냈다. 부하 모유견이라는 자는 말을 타고 궁궐에 들어오려다가 제지당하기도 했다.
모문룡은 가끔 조선이 후금과 내통한다는 거짓 정보를 지어내서 명나라 조정에 보고하면서 조선을 협박하였고, 심지어 모문룡이 조선을 공격하여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모문룡은 자신이 많은 명나라 난민을 보호하고 있다는 것을 구실로 식량과 은자를 조선과 명나라 양측에서 지급받았다. 하지만 정작 난민들에 대한 식량지원은 제대로 되지 않아서 가도의 명나라 난민들이 기아로 굶주리는 사태가 발생했고, 조선에서는 급히 식량을 추가 지원하였지만 난민의 규모에 비해서 엄청난 식량이 지원되는데도 굶주림이 발생하는 기묘한 일이라 모문룡이 식량을 횡령하여 후금에 팔아 넘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게 되었다.
자신이 후금과 싸우고 있다고 큰소리를 뻥뻥 치면서 정작 정묘호란 때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가도에만 틀어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1624년 12월 22일. 그의 패악이 어찌나 심했던지 인조가 장만, 남이흥 등과 접견하여 국토 방비문제 등 여러 문제를 논의하던 중에 모문룡의 군대에 대한 이야기가 오르내린다. 특히 도원수 장만의 언사는 다른 이들과 달리 더욱 과격하였는데, 그 내용의 일부는 아래와 같다.
(전략)상(上)이 이르기를,
“1년을 쓸 수 있는 저축이 있어도 부족할까 걱정인데, 더구나 한 달 양식도 없으니 앞으로의 일을 계획하기가 정말 어렵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들이 힘을 다해 꾸려나가야지 어떻게 할 수 없다고 하여 놔둘 수 있겠는가.”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서쪽의 근심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는데, 신(臣)은 한 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의 몸이야 아까울 것이 없지만 국가의 일은 어찌할 것입니까. 관서(關西)에 가면 그 쪽의 형세를 갖추어 진달드릴까 하는데, 묘당에서 선처해 주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도독(都督)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우리나라를 침해하고 있는데, 어떻게 감당해 낼 것인가.” 하니,
장만이 아뢰기를,
“모병(毛兵 : 모문룡의 병사)이 갈수록 더 침해하고 있는데, 조만간 내지(內地)에서 난동을 부릴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난동을 부린 뒤에는 격파하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말인가? 승부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다.” 하니,
남이흥이 아뢰기를,
“격파하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 하더라도 일단 이기고 난 다음에 장차 국가의 처지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였다.
장만이 아뢰기를,
“서관(西關)은 옛적부터 번화하다고 일컬어져 사행(使行)이 오갈 적에 혹 주색(酒色)에 빠지는 등 일대의 고을에 폐해를 끼치고 있습니다. 아무 일이 없는 태평시대라 하더라도 이렇게 해서는 안 될텐데, 더구나 이러한 때이겠습니까. 이번에 남이흥이 내려가게 되었으니 계칙(戒飭)해서 보내는 한편 방백에게도 하유하소서.” (후략)
1627년 4월 17일에는 모문룡의 군사들이 용골산성의 첩서를 가져가던 사람을 피살했으며, 안융창에 있던 난민을 공격하여 민가를 불태우고 백성을 마구 죽였다. 정주에 피난 갔던 조선 백성 1만여명을 공격하였으며 이들은 물에 뛰어들어 3백여 명만 살아남고 나머지는 모두 살해당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급히 병력을 보내 모문룡을 막도록 했고 충돌이 벌어졌지만 모문룡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묘호란 3개월 뒤인 6월에는 군선 50여 척을 이끌고 의주로 향했으나, 후금군 기병 20여명을 만나자 모문룡의 군사들은 모두 무기를 버리고 군선에 올라타서 도망가버렸다.
점점 횡포가 심해져서 인삼을 내놓으라는 협박을 했는데, 이는 명나라 고관이나 후금에 보내는 뇌물로 쓰기에 좋았기 때문이다. 그를 접견한 회례관 황호는 “남의 재물을 받으면 좋아하는 것이 이익을 탐하는 장사꾼과 같다.”고 혹평했다. 황호가 “지금 조선도 국고가 탕진되고 나라 살림이 어려워 줄 수 없다.”라고 거절하자 모문룡은 앙심을 품었다.
1628년 2월 26일, 자신이 하늘의 별자리를 보니 매우 불길한 징조가 있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조선의 종묘사직이 망한다는 악담을 보냈다.
1628년 10월 17일, 모문룡이 역관 장예충에게 “후금이 나를 유예로 삼으려 한다.”라는 발언을 했다. 유예는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북송 시절, 제남부의 장관을 지냈는데 북송이 정강의 변으로 초토화 되자 금나라가 세운 괴뢰국가인 제나라의 황제가 되었던 인물이다. 이에 인조는 “모문룡은 짐승과 다름없다. 황제 같은 지존에게도 꺼리는 바가 없는 자이니 예로써 책망할 수 없다. 그의 뜻을 보건대 이미 발호할 기미가 드러났다.”고 탄식했다. 실제로 명나라 천계제가 사망했을 때, 모문룡은 가도에서 이 소식을 듣고도 풍악을 연주하며 주연을 벌였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조차 없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11월 22일에는 명나라로 파견되는 조선의 사절단인 동지사 일행이 가진 은과 인삼을 강탈했다. 조선이 명나라 황제에게 바칠 조공물을 마음대로 빼앗아간 것이다.
급기야 모문룡의 하인 왕학승이 같은 집 종 15명을 거느리고 평양 인근의 군현들을 마음대로 들락거리며 약탈을 하고 심지어 고을 수령을 붙잡아 가두고 모욕하는 짓까지 벌였다.
1629년 3월, 가도에 가서 모문룡의 동정을 살피고 온 특진관 이경직은 “그의 군세가 너무나 피폐해져 있으며 군대 수를 과장하고 많은 여자들을 거느리고 살면서 명나라에 거짓 보고나 올리고 있습니다. 도망쳐 온 명나라 백성들도 달리 의지할 곳이 없기 때문에 부득이하여 와 붙어 있는 것이지, 진심으로 복종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군율도 엉망이며, 병력과 장비도 전혀 쓸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욕심은 실컷 차리면서 재물과 물자를 약탈하면서도 정작 군기는 개판이었던 것이다.
1629년 4월 27일, 원숭환은 모문룡을 산동반도의 쌍도로 불러서 군사 문제를 논의한다고 하였다. 두려움을 느낀 모문룡은 병선 40여 척에 2만 8천 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쌍도(雙島)로 출발했다.
1629년 6월 5일, 모문룡은 쌍도에 이미 와 있던 원숭환과 만났다. 원숭환은 다음날 모문룡을 전격 체포하고 그의 죄를 질책했다.
“장수가 외부에 있을 때는 문관의 감독을 받아야 하는데도 이를 거부하였고, 있지도 않은 승전 사실을 조작하여 허위 보고를 했으며, 사사로이 시장을 열어 오랑캐(후금)와 내통하였으며, 상선을 약탈하는 등 노략질을 일삼았으며, 조선 백성들을 마구 죽여 이웃 나라에 피해를 끼쳤으며, 10년 동안 수만 석의 곡식을 받아 가면서도 한 뼘의 땅도 되찾지 못하였으니 그 죄가 매우 크다. 너 같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놈을 살려둬서 무엇에 쓰겠느냐?”
그리고 원숭환은 모문룡을 참수하면서 모문룡이 가도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인조의 덕분으로 호사를 누렸는데, 탐욕스러운 성품으로 인해 조선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명나라에 수치를 끼쳤으니 자신이 황제로부터 받은 권한으로 그를 제거했다고 밝혔다. 그가 인조에게 보낸 편지는 다음과 같다.
흠명출진행변독수계요천진등래등처군무병부 상서 겸 도찰원 우부도어사(欽命出鎭行邊督帥薊遼天津登萊等處軍務兵部尙書兼都察院右副都御史) 원숭환(袁崇煥)은 조선 국왕께 첩문(帖文)을 보냅니다. 지난해 황제 폐하께 주문(奏文)을 올리는 일과 관련, 영광스럽게도 국왕께서 변변치 못한 본관을 잊지 않으시고 대도(大道)를 일러주시며 국휼(國恤)에 대해 잊지 않고 정성껏 교시해 주셨으니, 혈기를 가진 자로서 잊지 못할 바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다시 요동 지역에 나오게 되었으니 국왕과는 숙연(夙緣)이 있는 것만 같습니다. 그리고 전해오는 국왕의 소식을 들으면 마치 서로 얼굴을 대하는 듯 설레이기만 합니다. 되돌아 보건대 동이(東夷)가 제멋대로 포학한 행동을 저지르면서도 우리 중원(中原)의 봉시(封豕)는 그냥 놔둔 채 국왕의 강토만 잠식해 왔습니다. 병인, 정묘년의 전역(戰役)에서 노추(老酋)가 스스로 멸망을 불러들이고 노추(奴雛)가 두 번이나 넋이 빠질 정도로 혼이 나긴 했지만 동쪽의 산하에서는 여전히 머무르고 있으니, 이 점이 바로 내가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면서 잠 자고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애태웠던 이유인 것입니다. 그런데 황천(皇天)께서 이를 애달프게 여겨주지 않으시고 희종 황제(憙宗皇帝)를 앗아갔는가 하면, 나 역시 먼저 참소로 인해 돌아가는 비운을 맞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위신이 손상되어 떨쳐지지 못했으므로 내가 정말 부끄럽게 여기고 있었는데, 아마 국왕께서도 같은 심정으로 슬퍼해 주셨을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이제 천자께서 천고에 뛰어난 신성(神聖)함과 영무(英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중흥에 뜻을 깊이 두시어 이 조무라기 오랑캐들을 섬멸해 버리려고 하시는데, 불초 본관이 그 길을 안다고 여기시어 특별히 조칙을 내려 시골 가운데에서 불러 세우셨습니다. 제가 요동 땅을 잊지 못하는 만큼 어찌 국왕의 밝은 덕을 감히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행인(行人)이 왕래하노라면 바닷길이 아득하기만 할 것이고 게다가 탐욕스럽고 패려한 도수(島帥) 때문에 거듭 사신의 여정이 고달파질 것이기에 공도(貢道)를 서령(西寧)으로 개정할 것을 특별히 청하여 제가 마초(馬草)를 공급하여 국왕의 풍유(風猷)를 접할 수 있게끔 하였습니다. 저는 전쟁을 준비하는 일에 관련되는 것이라면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몇 년 동안 정신을 쏟아오면서 하동(河東)으로 진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대체로 군사 작전은 기세로써 제압하고 기틀을 보아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평소 기세를 쌓아두었다가 잠깐 사이에 기틀을 보아 결정을 내리는 것이므로, 한 순간의 결정을 위해 1백 년 동안 축적하는 것입니다. 국왕께서도 스스로 힘을 축적하시어 기틀을 보아 결판을 낼 준비를 하시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저도 활집을 단단히 잡아 매고 국왕과 함께 동서로 기각(掎角)의 형세를 이루어 바다와 육지로 병진(竝進)하면서 앞 뒤에서 합동 공격을 펼치겠습니다. 그리하여 다행히 하늘에 계신 영령의 도움을 받게 되면 한 번 북을 쳐서 중조(中朝)의 12년에 걸쳐 쌓인 분노를 씻고 국왕의 나라 역시 금성탕지(金城湯池)의 형세를 다시 이룩할 수 있을 것인데, 국왕께서는 이러한 뜻이 없으십니까? 모수(毛帥)는 절도(絶島)에 수년 동안 있으면서 실로 국왕 덕택으로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계획성이 없는 무인(武人)이라서 탐욕스럽기만 하여 도둑떼를 길러내며 국왕의 나라에 무리한 요구를 함으로써 우리나라에 수치를 끼치고 있습니다. 이에 황상께서 만리 밖을 밝게 내다보시고 저에게 상방검(尙方劍)을 빌려주시어 군중(軍中)에 나아가 그를 주벌토록 하셨습니다. 이는 대체로 섬에 있는 수만 명의 목숨을 보전케 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속국의 화란을 해소시켜 안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 밝으신 천자의 깊으신 의도라 하겠습니다. 군대를 해도(海島)에 머물려 두고 멀리 국왕의 나라를 바라보기만 하면서 찾아뵐 수 없는 처지이기에 사자 한 명을 하집사(下執事)에게 보낼까도 생각했습니다만, 또 종자(從者)에게 공급하는 일로 번거로움을 끼쳐드릴까 염려되었습니다. 편지만 제대로 통하게 되면 서로 다른 곳에 있어도 마음이 같아질 것이니, 오직 국왕께서는 더욱 힘써 충성스럽고 곧은 마음을 다하시어 단숨에 이 적을 멸하심으로써 왕의 공적을 마무리짓도록 하십시오. 그러면 빛나고 빛나는 황령(皇靈)께서도 실로 아름답게 여기는 동시에 이를 힘입게 될 것입니다. |
모문룡에 대해서도 따로 편지를 보내 언급했다.
“성조(聖朝)에서 매우 후하게 관심을 베풀어 주었는데도 난수(亂帥)는 패역한 행동을 하여 복주(伏誅)를 재촉하였으므로 삼가 황위(皇威)를 선포하고 함께 동녘을 평정할 것을 맹세하는 일에 대해 자문(咨文)을 띄웁니다. 살펴보건대, 본부원(本部院)이 명을 받들어 정벌하는 일을 전담하면서 날마다 오랑캐 평정할 일을 강구해 왔습니다만, 우리 내부의 적도 아직 조용히 만들지 못한 터에 어떻게 오랑캐를 진압시킬 수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귀국이 우리 중국 조정을 공경하며 따른 지 거의 2백여 년이 되어갑니다. 그런데 지난 기미년의 전역(戰役) 때에는 우리도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임했습니다마는 귀국 역시 잇따른 내변(內變)이 있어 패전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선제(先帝)께서 모문룡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귀국의 왕을 봉하는 조처를 내리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리 폐조(廢朝)를 엎고 새로이 반정한 데 따른 전범(典範)이라 하더라도 모문룡으로서는 생색을 낼 일이 아니라 당연히 명확하게 보고해야 할 사항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각건대 성명(聖明)께서 먼 나라를 자애롭게 대해주시는 인덕(仁德)을 지니셨기에, 변방의 제후국이 조근(朝勤)하는 예절을 삼가 따르게 되었다고 여겨집니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 밖에 안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륙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시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본부원은 천토(天討)의 명을 봉행하여 장차 난세를 종식시키는 데 힘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돌아보건대, 필부로 하여금 거만스레 행동하게 하면서 그냥 놔두고 죄를 묻지 않는다면, 어떻게 조정을 높이고 사이(四夷)에게 위엄을 떨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두렵고 수치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황명(皇命)을 청하여 동쪽으로 순시나와 해변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모문룡의 죄를 묻게 된 것입니다. 금년 6월 5일 군대를 쌍도(雙島)에 주둔시키고 여러 장수와 관리들을 집결시킨 뒤, 모문룡이 참형(斬刑)을 받아야 할 대죄(大罪) 12개 조목을 뜰에서 열거하였습니다. 그리고 무리에게 의견을 물으니, 모두들 죽어 마땅하다고 하였으므로 마침내 군전(軍前)에서 효시하였습니다. 이는 우리 조정의 난수(亂帥)를 제거한 것일 뿐 아니라 귀국의 화도 동시에 진정시킨 것입니다. 피도(皮島)는 원래 중국 땅이 아닙니다. 그래서 동강(東江)에 주둔시킨 한 부대에 영을 내려 서쪽으로 이동해서 진격할 계획을 세우도록 하고, 그전처럼 징수하고 토색질하여 귀국을 괴롭히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귀국에서도 해사(該司)에 통지하여 각각 강역을 안정시키고 군민(軍民)의 마음을 안온케 하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만약 그전처럼 중국 군대가 국경을 넘어 소요를 일으키는 일이 있을 경우 즉시 보고만 해주면 바로 다스려 경계시키겠습니다. 또 공도(貢道)의 경우 바다로 운행하게 되어 있어 실로 사자를 번거롭게 하기에 본부원이 이 점을 매우 염려하여 의논한 결과, 모든 조공을 한 번으로 통일하고 영원(寧遠)의 길로 바꾸도록 하는 동시에 사자 한 사람을 보내 우리의 소식을 통하도록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요동의 옛길을 택한 것은 귀국이 잊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황상께서는 천부적으로 신무(神武)한 자질을 지니시고 변방의 계책에 관심을 쏟으시니, 필시 변방의 관리들이 일에 태만한 것을 용납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그리고 본부원 역시 몸을 기꺼이 나라에 바쳐 기필코 오랑캐를 평정할 각오가 되어 있으니, 일을 미지근하게 수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제 사마(士馬)가 이미 배불리 먹고 사기가 충천하니 일을 이룰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귀국 역시 요즘 한가한 때를 이용해서 속히 군비를 정돈하고 우리와 연합하여 잃은 땅을 수복하도록 하십시오. 《시경(詩經)》에 ‘내 그대와 옷을 함께함은 어찌 그대의 옷 없음 때문이리오. 혹시라도 국가가 위급하면 창을 잡고 원수를 갚기 위해서라네.’ 하지 않았습니까. 모문룡은 오랑캐나 마찬가지로 귀국에게는 고질적인 병폐였습니다. 과거 모문룡은 귀국이 은밀히 오랑캐와 내통하며 때때로 도와준다고 보고해 왔습니다. 그러나 본부원은 귀국이 평소에 의리에 따라 우리를 순종했으니 필시 이런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황상께서도 만리 밖을 내다보시는 명철한 안목으로 흉포한 자의 말을 옳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아, 선인에게 복을 주고 악인에게 화를 내리는 것이야말로 어김없는 천도(天道)이고,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것이야말로 또한 당연히 행해야 할 인사(人事)입니다. 우리 황상의 덕은 너르고 너르시어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다 하여 버리지 않으시니, 그대의 국왕께서 충성스럽고 공경하는 마음을 대대로 밝히시면 후손에 이르기까지 왕업(王業)을 향유하게 되실 것입니다. 본부는 거듭 집사(執事)에게 바라는 바입니다. |
까기는 정말로 시원하게 까고 있다. 조선은 모문룡의 죽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입장을 표명했다.
...{전략} 모수(毛帥)가 스스로 왕법(王法)을 범하더니 과연 참형을 당했다고 들었습니다. 중국으로서는 고황에 든 병을 먼저 없앤 것이 되고, 요동(遼東) 백성에게는 호랑이 입을 빠져나와 자애로운 어머니에게로 돌아가는 결과가 되고, 우리나라의 입장에서는 종기를 시원스럽게 터뜨려 목숨을 다시 이어 회생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진정 합하께서 황상의 은총에 충분히 보답하고자 은밀하게 계책을 협찬하시어 물샐틈없이 기틀을 마련해 놓은 다음 벼락이 치듯 단호하게 결행한 결과로서 일거수 일투족을 마치 귀신처럼 기묘하게 운용하신 것이었으니, 아무리 날뛰는 간흉이라도 어떻게 계책을 써 볼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후략) |
여담이지만, 인조 연간에 정통성 문제로 명나라에 외교적인 약점을 잡히게 되자, 명나라 사신이 올 때마다 돈을 왕창 먹여서 돌아가서 나쁜 보고를 하지 못하도록 할 수 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사신 접대비[1]가 모자라서 모문룡에게 은 8만 냥을 빌려서 서신에게 돈을 물려줬다는 설도 있다.[2] 결국 이 돈은 은으로 못 갚고 인삼으로 갚았다고 한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명나라에서 빌려온 돈을 명나라에 주고 또 생돈으로 갚은 격.
2.3 모문룡 사후
1633년 모문룡 휘하 장수였던 공경, 공유덕, 경중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이들은 명나라의 진압을 피하여 청나라에 투항하였다. 이들 중 일부는 명나라 격파에 큰 공을 세워서 후일 삼번의 난의 주역이 된다. 또한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하자마자 곧바로 군대를 투입해 가도에 아직 남은 명나라 잔존 세력을 모조리 몰살시켜 버렸다.
3 평가
일반적인 평가는 가도에 주둔한 모문룡의 영향력이 극도로 미미했고 도움이 되기는커녕 조선에 민폐만 끼쳐댔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상당히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다.
3.1 긍정적 평가
모문룡이 수군으로 후금을 견제하고 있었기 떄문에 후금은 모문룡에게 위협을 느꼈다. 게다가 성씨가 같은 모택동이 게릴라전을 참 좋아했기 때문에 모문룡은 대책없이 재평가 받기 시작했다.
조선에 막대한 민폐를 끼쳤다는 점과, 청을 자극해서 조선을 공격하게 했다는 점, 그리고 그럴 때 청군과 맞서싸우는 게 아니라 가도로 달아남으로써 군사적으로 조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대로 현대 중국에서는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많다. (숭정제가 원숭환을 죽인 것이 잘못인가 글/ 주가웅원숭환(袁崇煥): 군사재능이 과대평가되었는가 글/누흔)
이렇게 재평가하는 입장은 대체로 모문룡이 조정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 결전을 회피하고 청을 배후에서 견제하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청군이 공격해 왔을 때 결전을 회피하고 섬에 틀어박힌 것이나 조선을 흡혈귀처럼 뜯어먹은 것도 군사력을 보존하고 청을 견제하기 위한 최선의 방안을 선택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문제는 모문룡의 견제가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는가인데, 효과가 있었다는 쪽은 바로 모문룡의 견제가 있었기 때문에 청이 영원성을 공격할 때에도 장기전을 벌이지 못하고 일찍 후퇴한 반면, 모문룡이 처형된 이후에는 몽골 쪽으로 장성을 우회해서 북경을 직접 공격할 정도로 적극적인 작전을 벌일 수 있었다고 본다. 즉 원숭환이 방어에서 큰 공적을 세울 수 있었던 것도 실은 모문룡 덕분이었다는 것.
이렇게 보면 원숭환의 죽음은 모문룡의 처형과 보다 직접적인 관계가 있게 되는데, 북경이 청군의 공격에 직접 노출된 것이 바로 원숭환의 죽음에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문룡을 처형한 것은 사형감이지만 원숭환만큼 능력이 뛰어난 자가 없어서 숭정제가 일단 용서했는데, 청군의 북경 공격을 허용함으로써 원숭환의 능력에까지 회의를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원숭환이 청군을 격퇴했다고는 하지만 단지 적지 깊숙한 곳에서의 기습에 실패한 청군이 물러갔을 뿐이며, 이를 기회로 본 숭정제가 추격을 명령했지만 원숭환은 딱히 이렇다할 전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이 점 또한 원숭환에게 상당히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 외에도 모문룡이 비록 부패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사업 수완이 뛰어났고 상업을 적극적으로 이끌어서 명나라 경제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는 관점도 있다.[3]
모문룡 처형 이후 청에 투항한 모문룡의 부하들이 결과적으로 청의 화포 역량 발전에 영향을 끼쳤고 막강한 수군을 이끌고 투항하여 청이 갑자기 해군력에서도 명과 맞설 수 있게 되었으며,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던 공유덕, 상가희 등은 뒷날 청의 번왕의 자리에까지 올랐다는 점에서 모문룡 처형이 어떤 결과를 낳았는지 가늠해 볼 수 있다. 원숭환의 화포를 쓴 수성전략은 적군이 강한 공성포로 맞서면 쓸모없었으니 심각한 문제였다.
3.2 부정적 평가
모문룡=원균.
그가 끼친 민폐와 무능은 거의 명나라에서 새롭게 환생한 원균이라고 봐도 좋을 정도이다. 위에도 있지만 원숭환은 그에 대해 이렇게 얘기했다.
당치도 않은 얕은 재주와 작은 그릇밖에 안되는 모문룡이 해도(海島)를 근거로 거드름을 피우면서 ‘내가 최고다.’라고 하는가 하면, 이젠 용무가 없다는 듯이 국법을 집어 던지면서 ‘누가 나를 어떻게 하랴.’ 하고 나온 것입니다. 그에게 밑빠진 독에 물 퍼붓 듯 향궤(餉饋)를 공급해 주었습니다만, 그가 실제로 견제한 일이 뭐가 있었습니까. 개진(開鎭)했다고 하는 10년 동안 요동땅을 한 치라도 회복했다는 말은 듣지 못하고, 한결같이 임금을 속이면서 그가 보여준 것이라곤 그저 많은 관원을 자신의 사유물화한 사실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자녀를 사로잡고 금백(金帛)을 약탈하여 대낮에 국중(國中)에서 강도질을 하는 한편, 항복해 온 오랑캐를 죽이고 난민(亂民)을 살륙한 것으로 날마다 사마(司馬)에게 공을 보고해 왔습니다. 그리고는 끝없이 으시대고 요구하면서 동노(東奴)를 큰 이익 챙길 좋은 보물덩이로 삼고, 아무 때고 토색질하고자 조선땅에 외부(外府)를 설치했습니다. 이는 조정만 무시할 뿐 아니라 속국에게까지 화가 미칠까 염려되었습니다. 이미 요지 부동의 형세를 이루고 있었으니, 어찌 반역자의 주벌을 늦출 수 있었겠습니까.
조선에 부린 행패는 그야말로 극심.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이 끝날 때 조선을 돕기는커녕 오히려 부하들을 보내 청군이 머리를 깎은 조선인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하고 조선인들의 목을 베어 조정에다가 청군의 목이랍시고 바쳤는데 기록에 따르면 그 수가 1만에 달했다고 한다. 더구나 조선 서해안가를 중심으로 무역하다가 밸꼴리면 약탈을 저지르고 조운선이나 지방 관아를 공격하여 관곡도 털었다. 오죽했으면 평안도 사람들을 모강도가 쳐들어온다는 말에 청나라 군대가 오는 것보다도 무섭다면서 기겁할 지경이었다.
원숭환은 조선으로 하여금 청을 치게 하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는데, 동맹국이어야 할 조선을 거의 적국으로 돌릴 만한 모문룡의 행패를 더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실제로 원숭환은 모문룡의 목을 친 다음에 조선에 편지를 보내서 모문룡이 그간 벌인 행패를 참다 못해서 죽였으니 이제 양국이 힘을 모아서 청에 맞서자는 편지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