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신기오로 도르곤

묘호성종(成宗)[1]
시호무덕수원광업정공안민입정성경의황제
(懋德修遠廣業定功安民立政誠敬義皇帝)[2]
아이신기오로 도르곤
(애신각라 다이곤, 愛新覺羅 多爾袞)
생몰기간1612년 11월 17일 ~ 1650년 12월 31일
재위기간1643년 ~ 1650년[3]

아이신기오로 도르곤(Aisin-gioro Dorgon, 愛新覺羅 多爾袞)

1612[4].11.17 ~ 1650.12.31

1 개요

아버지이 끝끝내 이루지 못한 중원 제패를 달성한 풍운아.
명 말까지 한 발자국도 청병의 진입을 허락하지 않았던 장성에 입관하여 전 중원을 제패한 아시아 최고의 장수 중 하나. 청의 태조 누르하치의 14남. 아버지와 형 홍타이지(청태종) 밑에 중용되어 활약하였다. 청나라 팔기군 중 백기단의 초대 수령이며, 청나라 최초의 섭정이 되었다.

2 활약

1626년, 누르하치가 사망할 당시 제위를 계승할 가능성이 있었으나, 나이 많은 이복형 홍타이지가 도르곤의 어머니(오이랍트씨)를 순장시키고 제위를 계승하였다. 그 후, 도르곤은 예친왕에 봉해진다.

1628년, 청태종의 휘하에서, 몽골의 차하르 부족 정벌에 큰 공적을 세우고. 그 공적으로 머르건 다이칭(mergen daicing, 墨爾根 戴靑)[5]이라는 호칭을 받았다. 형 홍타이지는, 개인적으로는 어머니를 순장시킨 원수였지만, 영웅이 영웅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이복형 아래에서 도르곤은 종횡무진 눈부신 전공을 쌓게 된다.

1635년, 군을 이끌고 나가 몽골의 릭단 칸의 아들인 에제이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원 왕조의 옥새를 획득하였다. 이 옥새는 청태종의 칭제의 바탕이 되었다. 그 후, 병자호란에서 강화도를 공격해 민회빈 강씨봉림대군을 붙잡는 등 결정적인 활약을 하였다. 여담으로, 이후 인조가 삼도구고두의 예를 행하며 아이신기오로 홍타이지에게 항복을 하고, 소현세자와 봉림을 심양으로 볼모로 보내게 되는데, 인조가 "가르치지 못한 자식이니 부디 대왕께서 잘 가르쳐 주시길 바랍니다"라고 도르곤에게 말하니, 도르곤이 "이미 세자께서 저보다 나이가 많고, 또한 몸가짐이 바르니 저는 가르칠 것이 못됩니다"라고 겸손히 대답하였다. 잉굴다이도 그렇고, 도르곤도 그렇고 우리가 생각하는 주지육림의 혈흔이 낭자한 오랑캐와는 상당히 다른 풍모를 보였던 셈. 이후 중원재패를 달성한 도르곤은 소현을 고국으로 보내게 되지만...

1638년, 청태종의 명 정벌에 팔기군의 지휘관으로 참전하여, 만리장성을 넘어 허베이와 산둥의 40개 군현을 공략하였다.

1641년, 명과의 전쟁에서 명군을 격파하고, 이후 청의 길잡이가 될 홍승주 등을 사로 잡았다. 이 전쟁으로 청은 요동을 완전히 귀속시켰고, 명의 세력은 산해관 안쪽으로 줄어들었다.

3 섭정

청 태종이 죽자 살벌한 의정회의가 여러 번 열리게 되고, 도르곤은 그 전까지 유목민족의 관습이던 형제 계승을 내세워, 청태종의 장남인 호쇼이 파풍가(hošo-i fafungga, 和碩肅) 친왕(親王) 아이신기오로 호오거(Aisin-gioro Hooge)와 제위를 다투었지만, 둘의 세력이 비슷해 결국 청 태종의 8남인 순치제를 황제로 옹립했다. 이때 순치제의 나이는 고작 6살이였기에 도르곤은 누르하치의 동생 아이신기오로 슈르하치(Aisin-gioro Šurhaci, 愛新覺羅 舒爾哈齊)의 아들인 아이신기오로 지르갈랑(Aisin-gioro Jirgalang, 愛新覺羅 濟爾哈朗)과 함께 섭정왕이 되어 순치제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았다.

섭정왕이 된 뒤, 1644년 숭정제가 죽고 명이 멸망하자, 그는 군대를 이끌고 중원으로 쳐들어갔다. 이때, 산해관을 지키던 오삼계의 투항으로 청군은 명을 멸망시킨 이자성의 세력과 명의 잔당을 토벌하고 만주족은 중국의 주인이 된다. 또, 그는 다른 섭정왕들과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해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이 되는데, 이로써 도르곤은 황제 직위를 얻지 못했을 뿐 청나라에서 가장 강한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후로도 실권자로서 산해관 점령, 베이징 천도 등의 굵직한 일을 실행하였다. 베이징을 점령한 이후 한족들에게 변발을 강제하고 명의 관료제를 도입하는 등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렇게 살아생전 큰 권력을 누렸고, 죽어서도 황제로 추숭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죽고 난 뒤 도르곤의 세력은 급격히 와해되어 정적들이 권력을 잡아 도르곤이 역모를 꾸미고 있었다고 규탄했고, 이게 받아들여져 폐서인되고 묘가 파여 부관참시 당한다.권력무상... 건륭제 때 재평가를 받아 다시 복권되기는 했지만 황제로 추숭되지는 못하고 왕으로 끝났다.

4 형사취수

청태종의 비이자, 순치제의 어머니인 효장문황후 보르지기트씨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유목민족의 풍습이던 형사취수를 했다는 것인데, 은근히 증거가 많이 있어 대중에서는 거의 정설로 여긴다. 순치제의 등극부터, 도르곤 사후의 복수까지 맞아 떨어지는 점이 많다. 도르곤을 황섭정왕으로 책봉한 것, 태후가 혼인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장황언의 시, 태후가 어린 순치제와 매우 떨어진 궁에서 살았고 얼굴보기 무척 힘들었다는 점, 각종 문헌에서 '도르곤이 황궁 내원을 드나들었다'는 구절이 발견된다는 점, 청조 역사에서 존경받는 효장태후가 심양 북릉(베이링(北陵))의 홍타이지와 합장되지 않고, 청동릉에서도 풍수담 바깥에 안장된 점 등이 바로 그 증거들이다.

그러나 두 사람이 결혼했다는 결론을 내리기에는, 이 증거들은 다소 부족한데...

먼저 황부(父)의 경우 그 의미가 무거운 것은 맞으나, 실제 부자 관계가 아니라도 존경의 의미를 담아 父로 호칭한 사례가 (아부 등) 종종 있었기 때문에 증거로는 불충분하다. 또 장황언의 시에 태후의 혼인을 준비한다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사실이나, 장황언이 반청복명 인사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 시를 순수하게 믿기는 어렵다. 사실, 당시 도르곤은 조카인 숙친왕 호격(홍타이지의 장남)의 복진 보르지기트씨(효장문황후와 같은 커얼친의 보르지기트씨였다)를 이미 취했다(...) 그래서 이 일이 효장문황후의 일로 와전되었고, 청조를 미워했던 장황언이 이를 일부러 시에 넣었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한편 여러 문헌에서 '도르곤이 황궁 내원을 드나들었다' 는 말이 나오는 것도 맞지만, 어디까지나 '드나든' 것이지 '기거한' 것은 아니고(...), 만일 정말 도르곤이 효장과 혼인했다면 내원에 드나든 것은 죄가 되지 않을 것이나, 도르곤이 내원에 드나든 것은 후일 도르곤의 죄 중 하나로 지목된다. 효장문황후 무덤의 위치 역시, 도르곤과의 혼인 탓이 아니라 자신 때문에 굳이 남편 홍타이지의 무덤을 건드리고 싶지는 않다는 효장문황후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게다가 도르곤과 효장문황후가 정말로 혼인했다면, 순치제가 도르곤의 시신을 파내어 매질까지(!) 하는 상황을 효장이 방관한 것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여러 묘한 정황 등을 감안하면, 효장과 도르곤이 정말로 혼인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 즉 어느 쪽도 확실한 증거는 없고, 아무튼 여러 해석과 논란이 존재하는 상황. 다만 사극들은 이 두 사람이 서로 사랑했다는 설을 많이들 택하고 있고, 여러 사극들에서 그려낸 두 사람의 로맨스는 수많은 시청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5 의순공주

도르곤은 조선인 여자와 결혼하기를 원했다고 한다. 그래서 1650년 (효종 1년)효종의 딸과 혼인하려 했으나, 딸을 다시 청나라로 보내기 싫었던 효종은 혼기에 있는 딸이 없다고 거짓말했다. 당시 청나라에 효종의 딸이 겨우 2세라서 혼인할 수 없다고 말했는데, 실제론 당시 효종의 딸인 숙안공주는 15세, 숙명공주가 11세였다. 자기 딸만 숨긴 것도 아니고 조카 딸, 즉 소현세자의 딸들도 지키려고 이미 혼인했거나 너무 어리다고 거짓말을 했다. 소현세자에게는 민회빈 강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 5명이 있었으나 이 중 2명은 어려서 일찍 죽었고, 3명의 군주(세자의 적녀)가 있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이 3명 모두 조선인과 결혼하였다. 왕실 종친들도 다 딸들을 숨기기 급급했다고 하는데, 공녀도 아니고 정식 구혼 신청에 이런 반응이었으니 당시 반청 분위기를 알 만하다. 실제론 이때 효종과 소현세자의 딸들은 혼사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자라 있었고, 숙안공주는 이미 혼사가 진행 중이었다. 실제로 효종은 이 해에 소현세자의 장녀인 경숙군주를 혼인시켰고 숙안공주도 다음해 1월에 혼인시켰다.

이러던 와중 금림군 이개윤[6]이 자신의 딸을 보내기로 나서서 효종은 금림군의 딸을 양녀로 삼고 의순공주[7]로 책봉해 청나라로 보냈다. 물론 청나라에게 효종의 친딸이라며 속인 것은 아니고 종친의 딸을 대신 보내는 것으로 공식 합의하였다. 기록에는 이렇게 남아 있지만 금림군에게 어떤 압력이 있었을 개연성도 있기는 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또한 왕족이지만 가난했던 금림군이 청나라에 줄을 대기 위해 딸을 보낸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진실이 무엇이든 간에 당시는 병자호란의 상처로 인해 반청 분위기가 대단했기 때문에, 금림군은 청나라가 지참금조로 보낸 비단을 노리고 딸을 보냈다며 주변사람들로부터 온갖 멸시와 핍박을 당했다. 또한 후에 청나라에서 귀국한 의순공주도 오랑캐에게 시집간 것으로도 모자라 재혼까지 했다면 손가락질을 받았다. 하지만 금림군이 청나라의 권세를 등에 업고 뭔가를 했다는 기록은 없다. 금림군에 대한 나쁜 소문은 그를 모욕하던 이들의 악담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금림군의 의도야 어쨌든 간에, 모두가 딸을 보내는 걸 기피해서 조선 조정이 매우 난처해했다가 금림군과 의순공주 덕에 모면한 걸 생각하면, 금림군과 의순공주를 욕했던 자들은 뻔뻔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이후 의순공주가 조선에 귀국하자 금림군은 삭탈관작 당했다가 이후 복귀하는 수모를 겪었으며 의순공주 또한 공주 직위를 잃었다.

그런데 정작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오자, 도르곤의 눈에 의순공주와 시녀들의 외모가 매우 빈약(...)해서 조선 측에게 시녀들을 다시 보내라며 불평을 터뜨렸다. 처음에는 의순공주를 보고 매우 기뻐하며 '송골매'라는 별명을 지어줬다는 걸 생각해 보면 조선을 기 죽이기 위해 트집을 잡은 것일 가능성이 크다. 청나라가 사실상 중국을 평정한 상태에서 그 실권자에게 시집보내는 여자가 상대방이 화낼 정도로 추녀였다는 건 믿기 어려운 일. 아니면 단지 도르곤의 취향이 매우 특이했다거나

여담으로 이 혼담이 오갈 당시 청 측에서는 김자점 등 친청 세력에 대한 숙청, 산성의 축조 등 조선의 반청 정책들에 대해 정면으로 지적하며 조선을 강하게 압박하고 있었다. 이는 도르곤의 청혼을 조선에서 수용하고 이경석 등 일부 대신이 책임 질 것을 자청해서 청 측이 이를 수용하여 넘어갈 수 있었다. 위에 언급된 도르곤의 불평 때도 겉으로는 이러한 트집을 잡은 뒤 대놓고 "미녀들을 보내면 황부왕(도르곤)이 기뻐하고 무마해주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사신을 수십번 보내도 해결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해서 조선은 이를 수용해야 했다.

어쨌든 혼례까지 치르고 시녀들을 다시 보내는 등의 소동이 있었으나 불과 7개월만에 도르곤이 죽는 바람에[8] 어린 과부가 된 의순공주는 이후에도 다른 청 왕족에게 재가했다 다시 과부가 되는 등 우여곡절을 겪다가, 금림군의 요청으로 조선에 귀국해서 현종 때에 병사했다.

이 과정도 실록의 기록을 보면 상당히 시끄러웠던 모양인데, 도르곤 사후 과부가 된 딸을 조선 조정과의 상의 없이 이제 딸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마침 청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금림군이 청 조정에 부탁해서 사적으로 환국시켰기 때문이다. 조정에선 금림군이 나라의 허가도 받지 않고 함부로 귀국시켰다며 금림군을 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하지만 뒷일에 대한 기록이 중언부언인 걸로 보아 큰 외교적 결례가 되진 않은 듯하다. 의순공주의 귀국에 대해 청나라에서 보낸 문서에서도 '부모 형제와 떨어져서 과부로 혼자 살고 있으니 이를 가엾게 여겨 특별히 돌려보낸다'며 심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야사에서는 의순공주가 청나라로 가기 직전 강물에 뛰어들어 자결해서 시신 대신 유품인 족두리를 매장했다고 한다. 물론 의순공주가 조선으로 돌아온 것은 분명히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므로, 이런 야사는 당시 민중 사이에 퍼진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과 금림군에 대한 멸시에서 나온 이야기로 추정된다. 의순공주의 묘는 현 의정부시 금오동에 있으며 야사에 따라 '족두리묘'로 불리우고 있다.

도르곤은 의순공주 이외에도 다른 조선인 첩이 있었는데, 이 조선인 첩이 낳은 여자아이가 도르곤이 남긴 유일한 자녀다. 도르곤에겐 여러 처첩이 있어서 다른 자녀도 몇 명 낳았지만, 조선인 첩 소생의 딸을 제외하면 모두 갓난아이 시절에 죽었다.

6 창작물 에서

명말 청초를 다룬 중국 드라마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런데 일부 드라마에서는 형 청태종의 죽음에 깊게 관련되어 있거나 심지어 청태종을 암살하는 걸로 묘사되기도 한다. 이 경우는 상기한 효장문황후를 청 태종에게 빼앗긴 원한, 또는 모친을 살해당한 원한 때문인 것처럼 나오곤 한다.

불이 붙어서 끔살당하는 청나라 황자가 등장하는데, 크레딧이라든가 팜플랫에 그 이름이 도르곤이라고 표기되어 있어 역덕들이 급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이 도르곤이 그 도르곤이면 '황자'가 아니라 '황제(弟)'여야 한다. 그냥 가공의 인물로 보아야 할 듯.

  • 대청풍운
  1. 추후 삭탈.
  2. 추후 삭탈
  3. 순치제 섭정
  4. 소현세자와 동갑내기다.
  5. 총명한 전사라는 뜻
  6. 성종의 8남인 익양군(益陽君) 이회의 후손이라고 한다.
  7. 義順公主. "의롭게 순응했다"하여 효종이 내린 이름이다. 본명은 이애숙.
  8. 2차로 보낼 예정이던 시녀들은 도르곤의 사망으로 인해 다시 귀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