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문서 : 오키나와/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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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Okinawan three kingdoms.jpg |
삼산시대의 판도 |
삼산시대(三山時代)는 류큐(오키나와 현 + 아마미 군도) 역사의 시대구분 가운데 하나로, 오키나와가 남산(南山), 중산(中山), 북산(北山)의 세 왕국으로 나뉜 시대를 말한다. 삼산시대의 시작은 북산이 독립한 1322년 경에서 시작하여 쇼하시(尚巴志)가 오키나와를 통일한 1429년까지 이어진다. 이들은 글자를 뒤집어서 산남(山南), 산중(山中), 산북(山北)이라고도 한다(단 산중은 거의 쓰이지 않은 듯하다). 각 나라의 왕이 명나라에 책봉 받은 칭호는 유구(류큐)국 산남왕, 유구국 중산왕, 유구국 산북왕이어서 중산만 山이 뒤로 가고 나머지 둘은 山이 앞으로 가는 형태로 썼다. 이후 통일 류큐 왕국의 성립은 중산에 의해 이뤄져서 중산이 류큐 왕국의 별칭으로 쓰이게 되고, 류큐 국왕의 대외 칭호도 업데이트 없이 멸망할 때까지 유구국 중산왕을 쓰게 된다.[1]
이 시기는 구스쿠시대에 포함된다.
다만 이 세 왕국들 뿐만 아니라 사실상 독립적인 세력들도 몇몇 존재했다. 게다가 세 왕국들도 중앙집권국가가 아닌 여러 아지[2]들의 동맹체 수준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시기는 오키나와의 역사서인 《중산세보(中山世譜)》 뿐만 아니라 중국의 《명실록(明實錄)》,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도 일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1383년에는 명나라의 영락제가 오키나와의 왕국들에게 그만 좀 싸워 정전을 명하기도 했으며, 이후로도 각 왕국들이 조공을 바쳤다는 기사들이 나온다.
2 북산
북산 北山 | ||
존속기간 | 1322년? ~ 1416년 | |
위치 | 오키나와 섬 북부 | |
수도 | 나키진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언어 | 류큐어 | |
민족 | 류큐인 | |
종교 | 류큐 신토 | |
주요사건 | 1322년? 건국 1416년 중산에 의해 멸망 | |
성립 이전 | 에이소 왕조 | |
멸망 이후 | 류큐 왕국 |
1322년 경, 오키나와를 다스리던 에이소(英祖) 왕조가 쇠락하자, 섬 북부 하네지(羽地)의 아지였던 하니지(怕尼芝)가 사촌이었던 나키진(今帰仁)의 아지를 쓰러뜨리고 스스로 북산왕(北山王)에 즉위하였다. 하니지는 나키진을 북산의 수도로 삼았다.
하니지의 출신은 불분명한데, 일설에 의하면 에이소(英祖)의 차남이었던 와키가와(湧川)의 아지가 그의 할아버지였다고 한다. 한편 1392년 혹은 1395년까지 북산을 다스렸다고 하는데, 이렇게 되면 재위 기간이 70년이 넘고, 아무리 오키나와가 장수촌이라지만 전근대 사회의 평균 수명을 고려했을 때, 기록의 오류이거나 여러 왕들이 하니지라는 이름을 이어가며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건국 이전의 거점이었던 하네지와 이름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그곳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왔을 가능성이 있다.
이후 명나라에 조공을 한 번 바쳤다는 기록이 전부인 2대 북산왕 민(珉)을 이어 3대 한안지(攀安知)가 즉위했다. <중산세보>등에서는 무예가 절륜했으나 음학무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때문에 나고, 하네지(羽地), 쿠니가미(国頭)의 아지들이 불만을 품게 되었고, 이들의 힘을 모아 1416년 중산의 쇼하시(尚巴志) 왕이 쳐들어오게 되었다. 북산의 거성 나키진구스쿠가 꽤나 견고하여 곤경을 겪게 되자 쇼하시는 한안지의 부하장수 모토부 테이하라(本部平原)를 뇌물로 꾀는 수법을 썼다. 결국 성은 함락되고, 분노한 한안지는 자신의 보검 치요가네마루로 테이하라와 일기토를 벌여 베어죽였다. 그러나 전세가 이미 기울게 되어, 한안지는 치요가네마루로 성을 지키는 영험한 수호석을 베고 자결을 시도했다. 그러나 검에 깃든 영력때문에 실패하였고,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냐 한안지는 강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다. 그렇게 이나라가 대표국이 되는 일은 없었다
이후 류큐왕국에서는 '북산은 중산에서 멀기 때문에 사람들의 교화가 쉽지 않으며, 기질이 용맹한데다가, 지형이 험하여 난이 일어나기 쉽다.'고 하며 북산감수(北山監守)라는 관직을 두어 통치하였다. 류큐의 전투민족이었나.
오키나와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하 후유(伊波普猷)에 따르면 북산의 사람들은 주로 수렵으로 살았다고 한다.
3 중산
중산 中山 | ||
존속기간 | 1350년 ~ 1406년 | |
위치 | 오키나와 섬 중부 | |
수도 | 우라소에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언어 | 류큐어 | |
민족 | 류큐인 | |
종교 | 류큐 신토 | |
주요사건 | 1350년 삿토 즉위 1406년 쇼하시의 침입으로 멸망 | |
성립 이전 | 에이소 왕조 | |
멸망 이후 | 류큐 왕국 |
1350년 우라소에를 중심으로 오키나와를 다스려오던 에이소 왕조는 삿토(察度)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전설에 의하면 삿토는 천녀(天女)의 아들이었다고 하는데, 중산세보에 실린 내용은 한국의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와 흡사하다. 원래는 가난하였으나, 카츠렌구스쿠(勝連城)의 딸과 결혼하여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에이소 왕조를 멸망시켰을 때, 나라의 금고를 열어 철을 사들여 무기와 농기구를 만들었다.
이 당시 나하의 쿠메촌(久米村)이 형성되었다. 이곳에는 중국 복건성 계통의 도래인들인 쿠메36성(久米36姓)이 모여살았다. 이들은 주로 외교나 무역 업무를 담당했으며 통일 류큐 왕국이 건국되고 나서도 이들이 역할은 계속되었다.
한편 이시가키 섬, 미야코지마 섬 등 멀리 떨어진 사키시마 제도에서 조공을 받기도 했다.
1396년 삿토의 아들 부네이(武寧)가 즉위하였다. 1405년 사시키(佐敷)[3]의 아지였던 쇼하시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이후 중산왕의 칭호는 쇼하시의 아버지인 쇼시쇼가 가지게 되었으며 쇼하시에게도 이어졌다.
이하 후유(伊波普猷)는 중산의 사람들이 주로 농업을 하며 살았다고 보았으며, 때문에 이 지역이 가장 먼저 나라다운 나라를 형성하였다고 생각했다.
4 남산
남산 南山 | ||
존속기간 | 14세기 초 ~ 1429년 | |
위치 | 오키나와 섬 남부 | |
수도 | 초기 : 시마소이오오자토(島添大里)[4] 후기 : 시마시리오오자토(島尻大里)[5] | |
정치체제 | 군주제 | |
국가원수 | 왕 | |
언어 | 류큐어 | |
민족 | 류큐인 | |
종교 | 류큐 신토 | |
주요사건 | 1337년? 쇼삿토 즉위 1388년 오에이지의 쿠데타 1429년 중산의 침입으로 멸망 | |
성립 이전 | 에이소 왕조 | |
멸망 이후 | 류큐 왕국 |
정확히 언제 건국되었는지는 불확실하나, 14세기 초에 오오자토(大里)의 아지였던 쇼삿토(承察度)가 섬 남부의 아지들을 규합해 건국한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쇼삿토라는 이름이 오오자토와 비슷한 것으로 보아 북산왕 하니지(怕尼芝)처럼 여러 대 동안 물려쓴 이름일 수도 있다. 이 당시 남산의 수도인 오오자토는 섬 동부의 시마소이오오자토(島添大里)였다.
1388년 쇼삿토의 숙부이자 시마시리오오자토(島尻大里)의 아지였던 오에이지(汪英紫)가 왕위를 찬탈하였으며, 남산의 중심지도 시마시리오오자토로 이동하였다.
1415년, 남산의 마지막 왕인 타루미(他魯毎)가 즉위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횡포한 성격이었으며 주색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1429년 중산왕 쇼하시에 의해 남산이 멸망하였고, 통일 류큐 왕국이 세워지게 된다.
이하 후유(伊波普猷)는 남산의 사람들이 주로 어업을 하며 살았다고 생각했다.
5 대외 관계
명나라가 세워진지 4년이 지난 1372년, 명나라는 중산에 사절단을 파견에 명나라의 건국을 알리고 입공을 요구했다. 삿토는 북산과 남산보다 앞서기 위해 동생 다이키(泰期)를 조공사로 보냈다. 하지만 이에 질세라 1380년 남산의 쇼삿토, 1383년 북산의 하니지가 사신을 파견하여 명나라와 외교관계를 맺었다.
삼산시대의 세 왕국들은 앞다투어 명나라에 조공을 바쳤다. 가장 국력이 강했던 중산이 42회, 남산은 24회, 북산은 11회 조공을 보냈다. 이 조공 기록들을 통해 당시 세 왕국의 국력을 어림잡아 볼 수 있다. 중산의 경우 농업이 발달하여 문명이 발전하였고, 특히 중국에서 쿠메36성을 비롯한 도래인들을 통해 선진 문물을 많이 받아들여 가장 강한 국력을 지녔던 것 같다. 북산의 경우 면적은 중산과 남산을 합친 만큼 넓었으나 지형이 거칠어 농경에 부적합했고, 때문에 가장 뒤쳐졌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키나와는 조선과도 관계가 있었다. 1389년 중산왕 삿토가 고려 조정에 왜구에게 잡혔던 포로들을 돌려보내면서 유황과 후추 등의 조공을 바쳤다. 그러면서 교류의 뜻을 내비치자, 고려에서 김윤후(金允厚)[6]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교류가 시작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1394년 중산왕 삿토가 남산의 쫓겨난 왕자 쇼삿토(承察度)를 되돌려 보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으며, 1398년에는 남산왕 온사도(温沙道)가 진주에 망명을 해오자 태조가 불쌍히 여겨 옷과 식량을 내려주었으나 그 해 사망했다고 한다. 온사도는 오오자토(大里)를 소리대로 한자로 쓴 것으로 보인다.
일본과도 교류가 있었다. 중국과의 교류가 쿠메36성을 통했던 것과 달리 일본과의 교류는 일본에서 온 승려들이 담당하였다.
6 참고 자료
- <고류큐의 정치>, 이하 후유 씀, 전성곤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 <류큐 왕국>, 다카라 구라요시 씀, 원정식 옮김, 소화
-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호카마 슈젠 씀, 심우성 옮김, 동문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