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일본의 역사
日本史
선대고대중세근대현대
~ A.D 538538~11851185~18681868~19451945~
조몬 시대야요이 시대고훈 시대아스카 시대나라 시대헤이안 시대가마쿠라 시대겐무 신정남북조시대무로마치 시대전국시대에도 시대일본 제국GHQ일본국
메이지다이쇼쇼와쇼와쇼와헤이세이
에미시에조,에조 공화국,홋카이도
구석기 시대
패총시대
구스쿠 시대,삼산시대,류큐 왕국오키나와 현미국오키나와 현
오키나와 현 (일본 제국)류큐 열도 미국군정부(USMGR)[1]
류큐 열도 미국민정부(USCAR)[2]
오키나와 현 (일본국)
미국 통치기 류큐 열도
American Occupation of Ryukyu Islands
미군정(USMGR), 1945~1950
미국민정부(USCAR), 1950~1972
국기
1945년 ~ 1972년
위치류큐 제도
아마미 군도(~1953)
토가라 열도(~1952)
다이토 제도
정치체제군정체제
국가원수류큐군 총사령관, 민정관
언어일본어, 류큐어, 영어
주요사건1945년 일본 제국의 패망
1945년 류큐 열도에 미군정 시작
1950년 미국민정부 수립
1972년 일본에 류큐 시정권 반환
통화B엔[3](1948~1958)
미국 달러(1958~1972)
성립 이전오키나와 현(일본제국)
멸망 이후오키나와 현(일본국)

1 개요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하고 일본에 귀속되어 있던 류큐 열도를 미국이 분리하여 1972년 류큐 열도를 일본에 반환하기까지 통치하던 시대이다. 크게 미군이 직접 통치하던 류큐 열도 미국군 정부(USMGR, 1945년 ~ 1950년)와 미국군 정부의 후신인 류큐 열도 미국민 정부(USCAR, 1950년 ~ 1972년) 시기로 구분한다. 오키나와 본토에서는 '미국시대(アメリカ世, あめりかゆー)'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2 전후 정리

1945년 6월 오키나와를 점령한 미국처럼 이 지역을 일본에서 떼어놓기 위해 류큐 정부를 세웠다(그러나 실상은 미국령이라…). 하지만 중국 본토에서 마오쩌둥의 공산당이 세를 잡아 버리고(1949), 급기야 북한한국전쟁이라는 병크를 터뜨리는 바람에(1950) 미국의 류큐 독립 정책은 흑역사가 되어버렸고, 미국은 일본과 함께 애치슨 라인에 이 지역을 집어넣으면서 공산주의를 저지할 군사 기지로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미국은 태평양 전쟁 때부터 오키나와의 전략적 중요성을 깨닫고 있었고 이후 오키나와는 동북아 미군의 거점이 된다. 동중국해 포위망의 정중앙이므로 중국이 오키나와를 손에 넣을 경우 한국과 타이완을 손쉽게 양동공세로 밀어붙이는 게 가능하며, 한국과 대만이 중국의 손에 떨어질 경우 일본과 필리핀도 무사할 수 없다. 사실상 오키나와를 포기할 경우 극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의 위협에 시달리게 되며 중국의 태평양 진출로가 생기게 된다. 오키나와 반환 및 미일안보조약에 관한 미국 내부 협의에서도 오키나와 미군기지는 가장 중요한 안건이었고 이를 보장하는 것이 최우선 목표 중 하나였다.[4]

우선 일본이 패전한 직후부터 살펴보자면, 당시 승전국이었던 미국 국내 여론은 당시 전쟁의 최고 책임자였던 쇼와 덴노(히로히토)를 당연히 전범재판에 세우려고 했으며 덴노 본인도 이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히로히토는 미국이 자신을 재판에 세우려고 시도하고 있다는 것 뿐만 아니라 미국이 동아시아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할 수 있는 데 필요한 전진기지를 원하고 있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히로히토는 당시 주일 미군 사령관이었던 더글라스 맥아더와 협상을 벌였으며 결과적으로 히로히토는 법적 책임을 권력 박탈과 재산 몰수로 끝내고[5], 전(前) 총리 도조 히데키 같은 A급 전범들만 형사책임을 지게 되는데, 그 대가로 미국에 넘어간 게 오키나와였다.

3 미군정 시대

1950~60년대 당시 일본에선 안보투쟁과 함께 미군기지 반대운동과 평화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정치인들은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해 미국 정부와 협상을 벌여 본토 내의 미군기지를 1/4까지 줄이는 데 합의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본토에서 줄어든 기지만큼 오키나와로 옮겨갔다는 거다. 이래저래 오키나와만 제대로 피해를 본 셈.

미군은 오키나와를 기지화하면서 민폐를 끼치기 시작한다. 먼저 기지 건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주민들을 총칼로 위협해 땅을 빼앗거나 헐값에 강매하도록 하였다. 오키나와 주민들은 이에 크게 분노했고, 1954년 섬 전체 투쟁(島ぐるみ闘争)을 시작하였다. 여기에 대해 미군은 오키나와의 경제를 흔드는 것으로 대응하였지만[6] 결국 땅값을 올려서 지불하는 것으로 오키나와 현민들과 합의하였다.

오키나와에 미군기지가 들어서자 이전의 행패는 애교로 보일 정도의 헬게이트급 민폐가 시작되었다. 1959년 미야모리 소학교 미군기 추락사고를 비롯하여 잦은 항공기 사고가 일어나 오키나와 현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였다. 게다가 사격 훈련으로 자연이나 농지가 훼손되고, 군사기지에서 나온 오염물질이 우물이나 하천을 오염시켰으며, 심지어 원자력 잠수함에서 방사능이 누출되기까지 했다. 미군들이 벌인 범죄에 대해서는 더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아무튼 이러한 미군의 민폐는 오키나와에서는 일상다반사였다. 1970년에는 분노가 최고조에 달하면서, 미군 병사의 뺑소니로 인해 고자 시(コザ市)에서 고자 폭동(コザ爆動)이 발발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뭔가 이름들이 참 거시기하다.

미군정 하에서는 버틸 수 없다는 분위기 속에 1960년 오키나와 조국 복귀 협의회(沖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조직되어 조국복귀운동(祖国復帰運動)이 시작되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귀속되면 평화헌법을 통해 미군 기지를 없앨 수 있다는 생각으로 진행된 운동이었다. 당시 일본 본토에서 안보투쟁에 참여거나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을 벌이던 사람들도 오키나와에서 미군기지[7]를 쫓아내기 위해 오키나와의 복귀를 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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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자 폭동(コザ爆動)과 미군정 시기 오키나와의 여러 모습들.

사토 에이사쿠 일본 총리가 1965년 오키나와를 방문, "오키나와 반환 없이는 일본에 전후(戰後)란 없다"고 연설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과 일본 사이에 오키나와 반환에 관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1969년 사토 에이사쿠와 리처드 닉슨과의 회담에서 1972년에 오키나와를 반환하는 것으로 양측은 합의하였다. 그러나 미군 기지 철수와 같은 오키나와 주민들이 원하던 의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았다.

다만 1972년 당시의 '복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지역 내에서 독립을 반대했던 사람들이 많고 오키나와 현에서도 독립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지금에 이르렀다는 설도 있지만, 독립하고자 하는 오키나와 주민들들의 입장을 묵살해 버리고 날치기로 오키나와 현 유지안을 통과시켰다는 설도 있어 두 의견이 충돌하고 있는 실정이다. 당시 주민의 24.9%는 오키나와의 독립운동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

심지어 1975년, 일본 좌파운동이 강했던 시절에는 오키나와를 방문한 일본 황태자를[8] 암살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ㅎㄷㄷ(...) 히메유리의 탑 사건. 실제로 오키나와 독립운동 단체들이나 오키나와 권익 옹호 단체들은 이런저런 이유에서 일본의 좌파계열 단체와 자주 연합해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혁신 정당이 사실상 망하다시피 한 일본에선 그나마 혁신 정당이 강한 지역으로 꼽힌다고 한다. 다만 최근 십 몇년 동안은 보수계가 현지사 자리를 차지했지만, 2014년 현지사 선거에서 마침내 뒤집혔다.

따라서 일본 '본토'에 대해 좀 오묘한 감정이 있다. 오키나와 출신 연예인이 본토 TV 프로그램에서 생각없이 기미가요를 따라부른다거나 하면 지역민들로부터 개념없다며 욕을 좀 먹는다. 1989년 히로히토가 죽었을 때도 오키나와만은 임시 공휴일로 정하지 않았으며 태평양 전쟁 전범이 죽은 것 뿐이라는 지역 언론의 비아냥까지 나왔다. 하긴 히로히토가 살아있을 때 황태자 암살 시도까지 벌어진 곳이니(...) 당시 동아일보가 오키나와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한 승려가 도쿄를 향해 큰절을 하며 히로히토의 명복을 비는데 사람들은 투명인간처럼 보듯 지나갔으며 지나가던 사람 몇몇은 이걸 보고 침까지 뱉으며 욕을 하고 갔다고 한다.

『오키나와의 눈물』(메도루마 슌, 논형, 2013) 33쪽을 보면 저자의 부친이 히로히토가 어떤 축하연에서 하객들에게 '고맙다'라고 말하는 걸 TV로 보고 "고맙습니다, 라고 해!"라고 격노했다는 부분이 있다. 장년층 이상의 오키나와 주민들이 '본토'와 덴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드러내는 상징적인 부분.

한편 대한민국에서는 미군 핵무기 철수를 포함한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에 대해 반대했었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한반도의 비상사태 발생시 전쟁 억지력의 감소를 심각하게 우려했었다.#

4 역대 지도자

역대 지도자
순서민정관
제 1대더글라스 맥아더
제 2대매튜 리지웨이
제 3대마크 클라크
제 4대존 에드윈 헐
제 5대맥스웰 테일러
제 6대라이먼 렘니처
순서고등판무관
제 1대제임스 에드워드 무어
제 2대도널드 프렌티스 부스
제 3대폴 카라웨이
제 4대알버트 왓슨 주니어
제 5대퍼디난드 토마스 언거
제 6대제임스 벤자민 람퍼트

5 관련 문서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오키나와/역사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div></div>
  1. 1945년~1950년
  2. 1950년~1972년
  3. 미국이 오키나와 한정으로 발매한 군표
  4. 『미일동맹 : 안보와 밀약의 역사』 출처
  5. 정확히 말하면 이런 점에서 민사상 책임은 진 셈이다.
  6. 전쟁 직후의 오키나와의 실질적인 화폐는 미군의 군표였다.
  7. 오키나와는 베트남전 당시 베트남을 석기시대로 되돌려보내던 B-52 폭격기의 기지로 쓰이는 등 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의 중요한 후방 지원기지였다.
  8. 바로 지금의 덴노인 아키히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