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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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성혜림(成蕙琳)
출생1937년 1월 24일, 경상남도 창녕군
사망2002년 5월 18일, 러시아 모스크바 (65세)#
본관창녕 성씨
가족아버지 성유경, 어머니 김원주의 1남 3녀 중 차녀
남편김정일
아들김정남

1 소개

북한배우 출신이며, 김정일아내들 중 하나. 김정일과는 불륜을 통해 가까워졌다.

2 생애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석리마을에서 대대로 갑부였던 성유경(成有慶)과 김원주의 1남 3녀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창녕 성씨 홍양공파 26세손으로 22세조인 아석공 할아버지때 가세가 흥하여 '아석공파'로 불리기도 하였다. 현재도 창녕군은 창녕 성씨 집성촌이다.

아버지인 성유경은 1906년 차남으로 태어나 대가 끊긴 종가에 3대 독자(아석공의 손자)로 입양되어 만석꾼의 종가의 대를 이어 매우 부유하였다. 보성고보 16회 졸업생으로 좌익활동을 하며 해방후 남로당 중앙위원으로 있다가 46년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이후 재정부장을 지냈다. 어머니는 1907년 진남포에서 태어나 서문여고(평양여고)를 졸업하고 1920년대 민족주의 잡지인 <개벽>의 여기자까지 했던 김원주였다. 역시 좌익활동을 하여 해방후 '남조선 민주 여성동맹' 문화부장을 지냈다.

이들도 말하자면 불륜 관계인데 만석꾼집안으로 조혼했던 성유경이 신여성이였던 김원주를 만났다. 도저히 안되는 사이였지만 두사람이 일본 유학 중이던 1933년 장남인 '성일기'를 출산하였다. 대가 워낙 귀한 종가집이라 두 사람의 결합이 인정되었다.

나중에 아버지인 성유경은 월북하여 강동정치학원 제1기 졸업생이 되었고, 학원 내에 강사로도 뛴 것 같다. 이후 아들 성일기를 불러들여 강동정치학원에 수학 시켰는데 이것을 다룬 작품이 정원석의 장편 소설 <북위38도선>이다. 이후 성일기는 그 유명한 빨치산 남도부 부대의 일원이 되어 남하 하였다가 토벌대에 쫒겨서 함께 도심침투를 시도한다. 이후 성일기가 53년 12월 31일 고향인 창녕군에서 체포된 후 회유 끝에 대장인 남도부가 대구의 친척집에 있다고 신고하여 그가 체포되게 하고, 그 공로로 재판없이 석방된다. 일설에는 이과정에서 유일하게 고향인 창녕집에 남은 그의 누이인 성혜분이 성일기에게 자수를 권유하였다고 한다.

결국 성혜림의 부모는 북한에서 몽땅 숙청된 남로당원이자, 공산당이 가장 싫어하는 대지주이며, 오빠는 배신한 후 괴뢰국가 남한에서 목숨을 구걸하여 살고 있는 반동분자이다.

오빠인 성일기는 알아주는 수재였으나 좌익 사상때문에 경기중학교[1] 면접에서 떨어져서 보성중학교를 갔었고, 여동생 성혜랑은 진명여자중학교[2]에 다니다니가 동맹휴학을 선동하여 퇴학당하고 이화여자중학교[3]에 편입하는 등, 부모부터 형제들까지 죄다 공부를 잘했다.

성혜림은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속초등학교를 거쳐서 풍문여자중학교에 입학했는데, 그녀가 중학교에 다닐때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성유경은 전쟁이 진행되는 와중인 50년 9월에 두 딸 성혜랑과 성혜림을 데리고 북한으로 건너갔다. 이후 성혜림은 북한에서 평양예술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에는 1960년에 만들어진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는데 대표작으로 백일홍, 온정령 등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다시피 성혜림의 부모는 공산주의가 증오해 마지 않는 대지주이다. 동무들 바로 아오지로 직행하시오 게다가 그들의 배경인 남로당은 한국전쟁이 끝난지 3일후에 미국의 간첩 혐의로(...) 기소되어 지도부 전원 사형당하였다. 이때 성유랑도 함께 가혹한 비판을 받고 전전하다가 60년에 추방되어 소몰이꾼으로 전락했다. 어머니인 김원주 역시 당 기관지 로동신문 부장에서 평양신문으로 좌천되고, 얼마 뒤에 그 자리마저 잃었다.

성혜림에게 김정일은 첫 결혼이 아니였다. 소설 <땅>으로 알려진 월북작가인 리기영의 아들 리평과 결혼했다. 딸 이옥돌을 낳은 애엄마이기도 하였다. 하지만 유부녀인 성혜림은 시동생인 이종륜의 죽마고우인 김정일 집에서 자주 드나들다가 김정일과 불륜관계를 시작하였다. 덕분에 성혜림은 공훈배우로 입당하게 되었고, 이후 아예 김정일과 살림까지 차렸다.(언제 리평과 이혼했는지는 불명) 그리고 1971년 5월 19일에 김정남을 낳았다. 친어머니 김정숙을 일찍 여의고 편부 슬하에서 자란 김정일은 연상의 여인을 좋아했고, 김정일보다 5살 연상인 성혜림은 그런 김정일의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성혜림 역시 리평과의 결혼이 애정이 없는 중매결혼이었던 반면, 김정일과는 예술이나 취미생활에서 여러모로 죽이 잘 맞았기에 그와의 만남을 지속했다.

하지만 이게 정상적인 연애가 아니라 불륜이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행여 이 사실이 김일성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 때문에 김정일과 성혜림은 김정남의 존재를 숨겨야 했다. 결국 성혜림은 리평과 이혼하고 김정일과 재혼했다.

아버지 성유기는 한때 헝가리 통조림 공장 사장을 지나다가 공장 위원장과 다투고 추방되어 성혜림의 집에서 얹혀 살았다. 어머니 김원주도 김정일의 중성동 관저에 들어가서 94년 88세로 사망할 때 까지 그곳에 살았다. 성혜랑은 김정남의 가정교사가 되어 가족들과 함께 중성동 관저에서 함께 살았다.

이 상황에서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가 성혜림에게 참견하여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언니는 우리 오빠보다 나이도 많고 이미 한번 결혼해서 애까지 딸린 여자니까, 게다가 불륜으로 결혼했으니까 당장 꺼지시오! 물론 정남이는 내가 정성껏 키워주겠고, 언니의 노후는 잘 보살펴 주겠소. 뭐 선택은 알아서 하시오. 단, 내 제의를 거절하면 우리 아버지한테 일러바칠 거요.

시누이인 김경희로부터 이런 엄청난 소리를 들은 성혜림은 아들을 빼앗기고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신경성 질환으로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 여기에 김정일의 애정은 김영숙고용희에게 넘어간 상태라, 이미 성혜림에 대한 관심도 식어 버렸다. 결국 모스크바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게 되었다. 성혜림이 모스크바에서 치료를 받는 사이 김정일은 이미 김영숙과 결혼한 이후였다. 김정일과 사랑을 나눈 지 6년만에 그 사랑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끝나고 말았다. 역시 불륜은 몹쓸 짓이다 그 이후 성혜림은 모스크바와 스위스를 전전하며 유리방랑을 하다가 2002년 5월 모스크바의 한 병원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향년 65세.

3 사후

성혜림은 죽은 이후 모스크바의 한 공동묘지에서 이름없는 무덤에 안장되었다. 어째 김평일의 미래를 보는것 같다.

그녀의 조카인 이한영은 남한으로 망명하였고, 14년후 이한영은 성혜림의 여동생인 성혜랑에게 연락 하여 망명하게 한다. 이에 성혜랑은 96년 2월 모스크바를 탈출하였다. 그러나 이한영은 엄마와 만나지 못하고 97년 2월 15일 분당 서현동 현대아파트[4] 현관 앞에서, 북한 간첩이 쏜 총에 의해 암살당했다.[5][6] 이에 성혜랑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남한으로 오지 않고 어디선가 숨어 살고 있다.

이후 성씨 문중은 "김정일 마누라가 우리 집안에서 나왔다는 것이 알려지면 끝장이다!"라고 오랫동안 성혜림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서 보기에는 성혜림 집안에도 배신자 성일기와 그에게 자수를 권유한 여동생 성혜분, 큰아버지 성기수가 있고 북한을 탈출한 사람도 두명이나 있는 천하의 개쌍놈 집안이다. 게다가 성혜림의 부모는 북한이 제일 싫어 하는 대지주 가문 + 남로당 간부라는 2연 크리

현재도 경남 창녕군에 가면 성혜림의 생가가 남아있다.

  1. 현재의 경기고등학교. 이전 문서에는 경기중학교가 1971년 폐교되고 경기고등학교만 남았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엄밀히 말하면 선후관계가 틀렸다. 성일기가 재학 중이던 일제강점기 학제에서는 대부분이 5년제 공립중학교였다. 예과생 항목 참조. 참고로 현재의 중학교와 고등학교는, 해방 후 미국식 학제개편이 이루어지면서 이들 구제 중학이 분리된 것들이다.
  2. 현재의 진명여자고등학교로, 진명여자중학교는 1987년 폐교.
  3.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중학교는 1971년 폐교되었고, 1992년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가 신설됨.
  4. 당시 이한영이 남한에서 하던 건설사업이 어려워져 살던 저택과 세간살이를 팔고 대학선배네 집에 더부살이 했다고 한다. 서현동 현대아파트가 바로 그 곳.
  5. 그러나 이는 남한에 출판한 로열패밀리 일가의 폭로내용에 대한 보복이 연유가 아니라 남한으로 망명한 황장엽에게 보내는 경고성 메시지가 더 크다.
  6. 이한영을 살해한 간첩은 육로를 통해 평양으로 귀환했다고 한다. 즉 잡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