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과생

豫科[1]

1 일제강점기 조선/일본 구 학제의 예과생

대학 본과에 입학하기 이전의 예비과정을 이수하는 학생을 의미한다. 위에서 설명한 현대 한국의 의학계열로 국한된 예과 과정이 대학 전 과정으로 확대되었다고 하면 일단 설명이 된다.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의 구 교육과정은 유사하기 때문에 동시에 서술한다.

일본의 구 학제는 소-중-고-대로 이어지는 단일 학제가 아니기 때문에 학교의 종류에 따라 여러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대체적으로

  • 소학교 6년
  • 중학교(구제) 5년 : 고등학교에 진학하는 경우는 중학교 4년차 이후 바로 고등학교로 진학가능.
  • 고등학교(구제)/대학(예과) 2~3년
  • 대학(본과) 3년(의학부는 4년)

의 형태를 취했다. 여기서 중등교육은 중학교로 종결되고, 고등학교는 대학 예과와 마찬가지로 본격적인 고등교육을 이수하기 위한 준 고등교육기관으로 존속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이들 고등학교를 현재 중등교육에 해당하는 신제 고등학교와 대비되는 의미로 '구제 고등학교'라 칭한다.

제국대학에는 대학 예과 과정이 존재하지 않았고, 대신 전국에 있는 이들 8개 구제 고등학교가 예과 과정을 대신하였다. 구제 고등학교의 경우 입학 정원이 사실상 본토에 있는 제국대학과 정원이 같았기 때문에 이들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무시험으로 제국대학 본과에 진학할 수 있는 특혜가 주어졌다.[2] 이들 구제 고등학교는 도쿄, 센다이, 교토, 카나자와, 쿠마모토, 오카야마, 나고야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들 고등학교는 숫자로 학교 이름이 붙어 각각 1~8고등학교로 불렸다. 이외에도 지역 이름을 딴 네임 스쿨이 존재했다.

반면 대학 예과는 사립대학에 설치되어 있었으며,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않더라도 이들 대학 예과에 입학하면 일관제로 역시 무시험으로 해당 대학의 본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학 본과는 3년의 졸업연한을 가졌으며, 이 시기 대학 1학년이나 2학년은 사실상 현재의 대학 3~4학년생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일본과 대비되어 조선의 학제는

  • 경성제대 설립 이전
    • 보통학교 5년
    • 고등보통학교 4년
    • 전문(?)학교 2~3년 : 이 당시 일본령 조선의 전문학교는 사실상 이름만 스스로 전문학교라고 붙였지 전문학사 학위가 인정되지 않는 사실상 '각종학교' 같은 성격이였다. 연희전문학교, 보성전문학교도 이 시절에는 전문학교라는 타이틀을 붙일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학제상으로 무늬만 전문학교인 이 학교 졸업장이 내지(일본)의 중학교 수준으로밖에 인정될 수 밖에.
  • 경성제대 설립 이후 : 대학 설립과 맞물려서 각급 학교의 명칭은 과거 그대로였으나 수학년한을 일본의 소학교, 중학교와 통일한다.
    • 보통학교 6년
    • 고등보통학교 5년
    • 전문학교 2~3년 : 이 시기가 되어서야 연희전문, 보성전문 같은 학교들이 정식으로 '전문학교'로 인정 받게 된다.
    • 대학(본과) 3년 : 경성제국대학 딱 하나뿐이다.

으로 되어 있었다. 이는 조선인을 위한 학교에 해당하는 학제였으며, 경성중학, 용산중학 같은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학교의 경우 일본 본토와 동일한 학제를 취하였다. 몰론 조선인의 입학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사실상의 차별정책이었는데, 위의 일본 학제와 비교하면 알겠지만 보통학교와 중학교의 학년이 1년씩 짧다.

따라서 조선에서 취득한 고등보통학교 학력은 일본에서 중학교 학력으로 인정되지 않았으며, 조선인들은 사실상 본토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자격 자체가 주어지지 않았다. 윤치호의 사위였던 정광현 서울대 교수가 도쿄 제국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평양교보를 중퇴한 다음 일본 본토의 중학교에 편입하여 제6고등학교로 진학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게 심하던 시절에는 전문학교 졸업도 본토 중졸로 인정되는 꽤 막장스러운 상황이었는데(...) 조선에서의 유력협력자들쉽게 말해서 친일파의 항의도 만만치 않았기 때문에 유화책을 겸해서 학력조건은 조금씩 완화되었다.

일단 1920년대 경성제국대학이 생길 무렵에는 수학연한의 통일을 이룬다는 목적 하에 보통학교 6년, 고등보통학교 5년으로 변경되었다. 그래서 적어도 학제상으로는 (내지의) 소학교=보통학교, 중학교=고등보통학교가 되었지만 실제로 이를 제대로 인정해 준 것은 아니였다. 즉, 구제 고등학교에서 고등보통학교 졸업장을 중학교 졸업장으로 인정 해 주는 경우보다는 인정 안하는 경우가 많았다. 1938년 내선일체를 내세운 일제가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의 명칭을 일본 본토와 동일한 소학교, 중학교로 통일함과 동시에 같은 자격을 부여하기는 했지만, 왜 그렇게 했는지는 각자 생각해 보라.

그래서 일제 말기로 갈수록 고등보통학교를 막 졸업하고 일본 본토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예가 많이 늘어났다. 일례로 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한 서돈각은 대구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다음 마쓰야마 고등학교에 입학하였고, 역시 서울대 교수를 역임한 민석홍은 서울에서 경기고등보통학교(현재의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한 다음 제8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단 이는 제국대학에 한정된 내용이었고, 사립대학의 경우 전문학교를 졸업했으면 바로 대학 본과로 입학할 수 있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다. 많은 조선인 유학생이 사립대학을 선택한 이유였다. 사립대학에는 학부 코스와 전문 코스(전문학교)로 나누어서 운영하는 예가 많이 있었는데 조선 유학생은 전문 코스를 많이 이수하였다. 일제 때 대학을 졸업한 사람의 이력을 보면 'XX대학 전문부 졸업'이 많이 있는데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서 '고등보통학교'만 나와도 공부를 많이 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았는데, 대학 전문부나 전문학교를 나와도 그리 꿀릴 것이 없었다. 대학 학부로 진학한 사람들은 대개 고위 관료가 되어 출세를 한다거나 아니면 말 그대로 공부가 재미있어서 학자의 길을 밟고 싶어서 그런 경우였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조선에는 경성제국대학 설립때부터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도 구제 고등학교가 단 1개교도 설치되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에 설립된 유일한 제국대학인 경성제국대학은 자체적으로 예과를 운영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제국대학이 예과를 설립한 거의 유일한 사례.

거의 유일한 사례라고 하는 것은, 대북제대도 나중에 예과를 만들기는 했기 때문이다. 초창기에는 경성제대의 예과도 2년이었지만 후에 예과도 늘려서 고등학교와 동일한 3년 과정으로 만들었다. 조선 내 전문학교 졸업생은 경성제국대학 본과 편입(선과)이 가능했으나, 그렇다고 경성제대 예과생과 동등한 취급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대만의 예과과정으로는 대만총독부 부설 대북고등학교가 있었으며, 일본 정부는 원래 대만에는 제국대학을 세우지 않고 고등학교로 퉁칠 생각이었다. 하지만 "조선에도 세워줬는데 왜 대만에는 안 세우나요? 대만 무시함"?이라는 대만 총독의 항의로 결국 대북제대가 개교하게 되었다.

문제는 위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고등학교의 졸업생은 무시험으로 일본 제국 전역의 제국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권리를 주었으며, 이는 내지와 외지를 구분하지 않았다. 당연히 대북고등학교 졸업생은 아무도 대북제대에 가지 않았다(...). 실제로 대북제대 문정(文政)학부[3]의 경우 교수 숫자가 학생 숫자보다 많았으며, 문정학부 철학과의 경우 2년에 신입생이 1명 오는 개막장스러운 상태가 유지되었다(...). 결국 대북제대도 나중에 예과를 세우게 된다.

전후 조선과 일본이 모두 미국식의 6-3-3-4제 단일 교육과정을 채택함에 따라 예과는 폐지되었다. 조선의 경우 어차피 경성제대의 예과밖에 없었기 때문에 5년제 고등보통학교(이미 1938년에 중학교로 개칭)를 6년제 중학교로 확대하고(1951년 3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로 분할) 경성제대를 서울대학교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자연히 사라졌다.

일본은 조금 더 복잡해서 각 대학 예과는 신제 대학의 교양과정으로 편입되어 점차 4년제로 고정되었고, 구제 고등학교의 경우 각 지역에 있는 구 제국대학의 교양학부로 편입되거나 아예 자체적으로 국립대학이 되어 최종적으로 1950년에 모두 폐교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어 위키백과 참고. 대만의 대북고등학교는 1945년 대만성립사범학교, 1955년 대만성립사범대학을 거쳐 1967년 국립대만사범학교가 되었다.

1.1 사관학교의 예과

일본육군사관학교는 유년사관학교[4]의 일종으로 육사 예과를 두었고 사관학교는 본과로 취급했다. 육사 예과를 나올 경우에 계급은 상병 수준으로 사관학교에 진학할 수 있다. 당시 육사는 예과와 본과를 모두 거치는 사람들이 많았고 다른 고교 교육을 받다가 본과만 편입하는 일은 드물었다. 자위대에 들어서는 방위대학교 생도를 일반 고등학교에서 선발한다.

단 이와는 별개로 자위대생도고등공과학교 같은 부사관 양성 시스템은 여전히 고등학생 뻘을 상대로 교육한다. 이는 한국의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와 비슷한 체계로 예과라고 볼 수는 없다. 미국의 JROTC는 기존에 다니는 고등학교에서 보이스카웃처럼 따로 하는 것이니 예과로 볼 수 없고.

2 현대 한국의 예과생

의대, 치대, 한의대, 수의대의 6년 교육 과정(예과2년 + 본과4년) 중에서 예과 과정 중에 있는 학생을 말한다. 나무위키의 학과 항목에서 영미식 학과개념을 이해한다면 이런 식으로 소속 교수도 없는 학생만의 조직을 "과"로 부르는 것이 얼마나 우스운 갈라파고스적 명명인지 깨닫게 된다.

참고로 각종 병원에서는 예과보다는 본과 성적을 주로 보므로 예과 시기엔 좋은 학점을 받으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

2.1 의대의 경우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지만, 의학 지식은 사실상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하다.

심지어 소속 단과대가 의과대학이 아닌 경우도 수두룩하다. 국립 대학의 경우 자연과학대학 소속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때의 성적은 대부분 후에 써먹을 데가 없는데다가 배우는 과목들도 의학 과목이 아니라 수학, 물리, 화학, 생물학 등이다.[5][6]

애초에 이런 대학에서 예과를 두는 이유가, 본과를 들어가면 스케쥴이 매우 빡세져서 다른 학과처럼 교양 수업과 전공 수업을 병행할 수 없게 되기 때문에 교양과목을 미리 끝내놓고 오라는 것.[7] [8] 최근의 경우에는 커리큘럼 확장으로 이 기간에 원래 위에서 배우던 과목이 내려오기도 하고, 통계학이나 윤리학, 의학개론 등을 배우기도 한다. 그리고 이 때에 배우는 물리, 화학, 생물, 특히 화학과 생물의 기초 지식은 생각보다 많은 도움이 된다.[9] 필수라고 할 순 없어도 알아두면 생각보다 많이 좋다.

정리하자면 예과 때 배우는 과목은 다음과 같다. 보통 예과 1학년때는 물리, 화학, 생물등의 기초과학과 글쓰기나 윤리나 철학같은 일반적인 교양 과목을 수강한다. 예과 2학년때는 전국의 의과대학이 기초의학을 점점 예과로 내리는 추세여서 분자세포생물학, 생화학, 생리학, 해부학등의 기초의학과 의료 윤리, 의료 통계, 의사학, 의학개론, 의학용어 등의 과목을 배운다. 사실, 이런 어려운 교양과목은 어렵기 그지없는 본방으로 들어가기 전 기초 소양을 테스트한다고 생각하면 된다. 너님이 이 정도를 소화해내지 못하면 본방은 절대 불가능하다 이런 소리.

일부 학교에는 공부와 학점에 목숨을 건 사람들을 '옵세', 열심히 노는 사람들을 '마구리'라고 칭하는 은어가 존재한다.

2.2 수의대의 경우

학교마다 차이가 크다. 사실상 의대들에서는 거의 사라졌다고 하는 놀고먹은 예과생인 학교도 있고, 예1부터 해부실습을 돌리고 시간표도 짜주는 학교가 있다.

수의과대학에 예과가 생긴 것은 1990년대 후반의 일로 그 전까지는 예과 없이 일반 대학과 마찬가지로 4년제였다. 사람을 다루는 의학대학보다 적게 배워도 상관 없다는 의식이라고 보면 된다.[10] 그러나 사람이든 동물이든 해부학 및 관련 지식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고 점차적으로 의대 수준의 교육과정이 되다 보니 막바지 4년제 시절인 1990년대 초반에는 수의과대학 강의시간표는 의과대학 이상으로 빡빡했고 교양과목의 수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당연 타 학과 1학년 같은 대학의 낭만은 사치 of 사치.[11] 견디다 못해 수의과대학도 2+4년제로 바꾸게 된다.

2.3 치대의 경우

추가바람.

2.4 한의대의 경우

대부분의 한의대에서 예과 시기에 중요한 해부학 과목들(비교해부, 일반해부)이 제일 높은 학점으로 배정되어 있다. 화학, 생물, 기타 교양과목도 의대처럼 학교측의 세심한 배려(?)로 같이 배정되어 있다. 문제는 거기에 다시 말이 교양이지 본과 올라가면 필수나 다름없는 한문(의학, 고전)이나 중국어도 배정된다는 사실. 이 때 적응 못해서 어버버하다가 유급의 쓴 맛을 볼 수도 있다. 물론 어느 정도 적응되면 나름대로 즐거운 예과 생활이 가능하긴 하다. 그렇더라도 시험때가 되면 머리를 쥐어 뜯어야 하지만. 가끔 이 무렵 정규과목 공부는 제대로 안하고 침통이나 임상서를 들고 다니는 예과생들을 볼 수 있다.

2.5 여담

거의 모든 본과생이 이 시기를 부러워한다. 대부분의 예과가 필수이수과목 때문에 절반 정도는 선택의 여지가 없지만(심지어 기초과학 과목같은 것도 예과생 전용으로 열리는 학교가 절대 다수다.), 그래도 절반은 선택할 수 있어서 수강신청 대란이 끼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음대 교양필수라든가, 미대 교양필수라든가, 사회대 교양필수는 여자 냄새를 맡아보고 싶은 예과생의 도피처이다. 본과에 진학하면 다시는 겪지 못할 수강신청 대란...(실제로 본과에 올라가면 수강신청 할 일이 없어서 개강 후에 대표가 공지 띄우면 그때 가서야 하고, 심할 경우 기말고사 직전까지 안하다가 성적 입력 기간에 교수 호출에 과사에 빌고 학교 본부 가서 시말서와 반성문 내고 수강신청 한 걸로 해주기도 한다.)
  1. 정이란 의미가 있는데 "예"자를 藝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이 자료를 보면 알겠지만 그래도 한자가 많이 쓰이던 1992년에도 그런 학생들이 많았을 정도로....
  2. 나중에는 꼭 그렇지만도 않게 된다. 고등학교 항목의 구제고등학교에 관한 서술을 보면 알겠지만 최종적으로는 구제고등학교를 입학하면 제국대학과 관립의과대학에의 진학이 보장되는 특전이 있었다고 보면 된다.
  3. 경성제대의 법문학부와 비슷한 커리큘럼
  4. 유럽에 존재했던 제도로 중고등학교뻘 학생들에게 군사교육을 시켰다.
  5. 다만 성균관대울산대중앙대가 예외로 취업시 예과 성적이 반영된다. 통합 커리큘럼으로 기초의학과목의 상당부분~대부분을 예과에서 처리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학전문대학원 병행 이후 들어온 학생들은 그렇게 할 수가 없으므로 타 학교와 비슷할 듯 싶다. 의대 체제 복귀가 결정되었으니 다시 바뀔 가능성도..
  6. 그러나 성균관대의 경우 의전 병행 체제가 되면서 07학번부터 예과성적이 반영되지 않는다.
  7. 병행의 문제라기보다는 기본적인 소양을 갖추기 위함이 더 크다. 상당수의 교양이 선택이 아니라 필수로 지정된 걸 보면 더더욱 그렇다.
  8. 그렇기 때문에 아무리 맨날 처 노는 예과라지만 고대의대의경우 2년간 75학점 및 핵심교양들의 최저학점(핵교 수강신청 뚫기가 만만치 않다...)을 채워야되고 전공과목의 경우 의예과 1학년 때는 다음학기나 내년에 대체과목을 들으면 된다지만 2학년 2학기 때 전공과목에서 F받으면 1년 유급하는 건 마찬가지이므로 의외로 예과 졸업하기가 만만치 않아 예3하는 학생들이 나온다...
  9. 특히 본과에서 기초과목(특히 생화학, 생리학)을 공부할 때 화학과 생물학 지식이 많이 필요 혹은 도움이 된다.
  10. 그 시절에는 수의과대학이 독립된 단과대학으로 유지되지 못한 대학도 많았다. 농과대학 수의학과 같은 식의 편제도 많았다.
  11. 이는 약학과도 마찬가지라서 4년제 시절에는 엄청나게 빡빡한 강의시간표을 자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