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다케유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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宗武志(종무지)
1908년 2월 16일 - 1985년 4월 22일

쓰시마 종가의 35대 당주이자 영문학자 겸 시인[1]으로서 대학교수를 지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의 남편었으며, 조선 최후의 부마로, 조선에서 유일하게 재혼한 부마이기도 하다.

1 결혼 이전

대마도 도주 소(宗) 씨 가문의 후손으로, 백작이었다. 이 사람의 선조가 바로 임진왜란 당시 대마도주였던 소 요시토시이다. 본래 외가의 성씨를 따라 구로다 다케유키(黑田武志)라는 이름을 썼으나, 친가인 소 가문의 대가 끊길 위기에 놓이자 구로다에서 소로 성씨를 다시 바꾸어 친가를 계승했다.

중학교는 쓰시마 중학을 나오고 이어 도쿄에 있는 황족&화족 학교인 가쿠슈인[2] 고등과를 졸업했다. 이어 일본 최고 명문인 도쿄제국대학 영문과를 졸업했다. 영어 작문과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했다고 한다.

아버지 소 요리유키(宗和志)와 어머니 구로다 레이코(黑田鏻子)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데이메이 황후[3]의 오빠인 쿠죠 미치자네(九條道實)가 다케유키의 후견인이 되어주었다.

2 덕혜옹주와의 정략결혼

일제강점기 당시 세간에 애꾸눈에 못생겼다는 소문이 돌았으나 사실 미남영문과를 나온 엘리트였다.[4] 이런 소문이 난 이유는 민족 감정과, 귀천상혼으로 해석될 수 있는 백작 신분 때문인 듯하다. 덕혜옹주와 소 다케유키는 결혼이 확정되고 나서 결혼 전에 사실상 얼굴확인이나 다름없는 맞선자리를 가졌다. 아버지를 죽인 나라 사람과의 강제혼인이기 때문인지, 결혼식 전날에 울다가 잠들어서 결혼식 날 사진을 보면 덕혜옹주의 눈이 부어 있다.[5]

3 아내와의 관계

예전에 알려져 왔던 것과 달리 덕혜옹주와의 관계는 그렇게 나쁘진 않았고, 오히려 아내를 성심성의껏 신경써주고 걱정하는 자상한 남편이었다. 이런 것이 덕혜옹주의 조현병 치료에는 별 도움이 안 되었던 것이 문제이지만. 그래도 아내의 상태를 걱정하고 안타까워하는 시를 남긴 적도 있다.# 딸 정혜의 출산 이후 덕혜옹주의 정신병이 심해졌다. 당시에 정신병은 사회적 낙인이라고 할 정도로 부끄러운 취급을 받았기에 다케유키는 신분상의 이유로 덕혜옹주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6] 그저 안마사만 불러서 마사지만 받게 했다.

1947년 신적강하[7]를 당한 이후 생활이 어려워지자 결혼 20년만에 이혼을 하게 된다. 다만 강제 이혼은 아니었고, 영친왕&이방자 여사 부부와 합의하여 이혼한다. 소 다케유키는 이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8] 가츠무라 요시에(勝村良江)라는 일본 여성과 재혼하였고, 이후 장남 다츠히토 (立人), 차녀 와키 (和木), 차남 나카마사 (中正)의 2남 1녀를 더 낳았다.

1970년대에 한국으로 돌아간 덕혜옹주를 만나러 찾아가지만 궁녀가[9][10] 막아서서 만나지 못했다. 그 뒤 레이타쿠(麗澤) 대학의 교수로 활동하다가 1985년 사망, 쓰시마 섬에 있는 역대 대마도주 선친들의 묘지인 반쇼인(滿松院)에 함께 안장되었다.[11]

덕혜옹주와의 정신병이 결혼 전부터 있었고, 출산 후에 심해졌음에도 결혼생활을 유지하려고 애를 쓴 정황은 있지만, 조선 황족과의 결혼으로 상당한 지참금을 받아 부유한 생활을 누리다 신적강하 이후 재산을 몰수당해 생활이 어려워지자 덕혜옹주의 정신병원 입원 및 이혼이 일어났기 때문에,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해도 좋은 남편이라고 하기는 힘들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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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의 소 다케유키.

4 딸 정혜의 자살

딸의 이름은 정혜(正惠)로 바를 정(正)과 덕혜옹주의 은혜 혜(惠)로 지었으며, 일본식 발음으로는 마사에이다. 덕혜옹주가 병이 있다 보니 다케유키가 정혜를 데리고 조선 왕실 행사에 참여하고 딸의 그림을 그리는 등, 딸의 육아를 다케유키 본인이 한 듯 하다. 또한 정혜가 덕혜옹주에게서 배운 조선말을 친구들 앞에서 했다가 놀림을 당한 이후 어머니를 증오하게 되어 모녀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사에는 여자 가쿠슈인을 졸업한 후 와세다대학 영문과를 졸업했고, 같은 대학 출신인 스즈키 노보루와 결혼했다. 결혼 후 노보루가 처가의 성씨를 따라 '스즈키'에서 '소'로 바꾸었는데, 이는 장인 다케유키의 요구였다.

덕혜옹주와 다케유키가 이혼하고 1년 후인 1956년, 갓 결혼한 새댁이었던 마사에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되었다. 이때 현해탄(대한해협)에 뛰어들어 자살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근거 없는 소문이다. 유서에 의하면 야마나시 현과 나가노 현을 경계로 하는 고마가타케 산에 자살하러 간다고 했는데, 사실인지는 불명. 분명한 건 이후 마사에를 본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실종 신고 후 7년이 경과할 때까지 어떠한 생존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망 처리되었다.

5 인간성

그와 관련된 사료가 거의 없어 그의 인간성에 대해 잘 알기 어렵다. 하지만 얼마없는 사료들을 조합해보면, 좋은 남편은 아니여도 좋은 인간임은 틀림없다. 덕혜옹주에 대해 남편으로서 의리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정신병을 수치스럽게 여기던 당시의 문화를 극복할 만큼 깨어있는 사람은 아니었다.

본인은 덕혜옹주와의 결혼생활에 대해서는 아무런 평도 남기지 않았으며, 평소에도 입에 일절 올리지 않아 그가 덕혜옹주에 대해 무어라 했는지에 대한 증언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만년의 수필에서 "25년은 나의 인생의 공백기였다"고 짧게 언급했을 뿐이다.
  1. 본인의 시집도 있고, 쓰시마 섬 전래 구전 민요를 모은 저서도 있다.
  2. 패전 후로는 평민에게도 개방되었으나, 여전히 부유하고 지체 높은 집안의 자제들이 다닌다고.
  3. 다이쇼 덴노의 아내이자 쇼와 덴노의 어머니.
  4. 다만 사시였다. 애꾸눈이라는 소문도 여기서 비롯된 듯하다.
  5. 이 전 문서에 덕혜옹주가 남편이 추남이란 소문을 믿고 울었다고 되어 있었는데, 둘은 결혼전에 한 번 만났으므로 덕혜옹주가 기억상실증에라도 걸리지 않는 한엔 얼굴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6. 설령 데려갔어도 당시의 의학 수준으로는 이렇다 할 대안을 찾기 힘들었을 것이다.
  7. 다이쇼 덴노의 직계 자손들을 제외한 나머지 방계 황족들과 화족들이 모두 평민 신분으로 전락한 것.
  8. 1955년. 이방자 여사의 기록에 의존한 거지만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9. 당시 낙선재의 비서실장이었던 이공재 씨였다고도 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면회를 일절 허용하지 않으니까 돌아가라"는, 어찌 생각하면 그래도 결혼생활 동안에는 나름대로 남편으로써 의무를 다하려고 애썼던 다케유키 입장에서는 억울하다고도 느낄 수 있을 만큼 냉정하게 내쳐서 돌려보냈다고.
  10. 다만 사람들에게 다케유키의 인간성이나 결혼생활은 알려져 있지 않고, 다케유키의 의지로 결국 이혼하고 그 전후로 덕혜옹주는 사실상 방치 내지는 버려졌기 때문에 '덕혜옹주를 버린 남편'이라는 말이 틀린 건 아니니 이해못할 일은 아니다.
  11. 이 묘원 반쇼인은 이즈하라 항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한국에서 보기 힘든 거목이 가득하고 조선 국왕이 하사한 물건이 전시되어 있는 등, 대마도에서 그나마 역사적인 볼거리라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아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