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용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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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2년 설립된 시멘트 업체인 쌍용양회공업(주)을 모기업으로 하는 기업집단이었지만 지금은 해체되었다. 이름인 쌍용은, 쌍용양회의 첫 공장인 영월공장의 소재지인 서면(현 한반도면) 쌍용리에서 따왔다고 한다. 현재 태백선 쌍룡역이 있는 그 동네다.

2 역사

1939년 성곡 김성곤(金成坤) 회장이 대구에서 설립한 비누공장인 삼공유지(三共油脂)를 모태로 하여 국내 굴지의 그룹으로 성장, 발전하였다.

김성곤 회장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절친한 사이였는데[1][2] 1965년 공화당 재정위원장을 맡아 재벌의 정치자금 모금을 담당하였다.[3] 이후 1970년대 초반까지 공화당내 실력자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고 쌍용그룹도 이 시기 급성장했다.[4]

1940~1950년대의 면방직, 보험, 무역, 1960년대의 시멘트, 제지, 해운, 1970년대 후반이 정유, 중공업, 종합상사, 건설, 1980년대의 컴퓨터, 증권, 자동차에 이르기까지 사업을 확장해왔다. 특히 1980년대 초반 그룹의 차세대주력사업을 정하는 논의에서 조선업자동차 중에서 카매니아였던 김석원 회장이 자동차를 선택하면서 1987년 동아자동차를 인수해서 쌍용자동차로 바꾸고 집중 투자하게 된다.


1997년 외환위기 직전에는 계열사로 쌍용(무역업-현 GS글로벌), 쌍용자동차, 쌍용중공업(현 STX 중공업), 쌍용양회, 쌍용건설(아파트 브랜드로는 쌍용예가(藝家)를 쓴다), 남광토건, 쌍용화재(현 흥국화재), 쌍용정유(현 에쓰오일), 쌍용증권(현 신한금융투자) 등을 거느리고 총매출 25조원에 재계 순위 5~6위의 거대재벌이었다.

스포츠로는 그룹 산하 회사 및 학원에서 4번이나 축구단을 운영하였으며, 1990년대 중반 현대그룹이 프로야구단 창단을 시도할 즈음에 쌍용도 관심을 보인다는 언론기사가 나온적도 있으나, 구체적인 행동에 나서지는 않았다. 그리고 풋케위키에 따르면 2002 월드컵을 유치하려고 했던 1996년에 대구광역시를 연고로 프로축구팀을 창단하려고 했으나 그 뒤 IMF가 터지는 바람에 무산되었으며, 쌍용그룹 재단 소속이었던 현풍고등학교에는 아직도 축구부가 있다. 또한 창업주 김성곤 회장이 학창시절 유도를 했었고, 한때 대한유도회장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오랜 기간 유도단을 운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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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고를 전공한 이들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지나치다 한 번은 봤을 "오늘은 속이 불편하구나"로 시작되는 기업광고를 낸 곳이다. 이 작품은 1984년 스승의 날을 기념하여 주요 신문에 게재했던 것으로서, 보릿고개 시절에 유년기를 겪고 산업화 시기에 청장년기를 보낸 당시의 사람들에게 폭발적인 공감을 얻어, 지금까지도 한국적인 기업PR의 주된 성공사례로 종종 회자되곤 한다.

3 몰락

문어발식 경영과 무리한 자동차 산업 진출으로 적자가 누적되는 등 위기 요인이 계속 누적되어 오다가, 1997년 외환위기에 직격탄을 맞고 그룹이 공중분해되었다.

김석원 회장의 자동차에 대한 과도한 집착이 화근이었던 것으로 지적된다. [5] 1987년 국내에선 동아자동차를 인수하였고, 외국 자동차회사도 인수했다. 영국의 팬더 웨스트윈드라는 회사였는데, 1970년 후반에 이미 망해서 법정관리 중이던 것을 모피를 수출하던 진도그룹에서 1980년 인수하였다가 1987년 쌍용그룹에 넘긴 것이다.본격 폭탄 돌리기 쌍용은 아예 생산라인을 국내로 옮겨와 칼리스타라는 자동차를 만들었으나 1994년까지 단 78대만 판매되고 단종되었다.

1997년까지 쌍용자동차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계열사는 대부분 흑자이고 일부 계열사만 소폭의 적자였다. 시멘트, 정유, 제지 등 경기를 별로 타지 않는 업종이 중심이었기 때문. 그러나 쌍용자동차 한 회사의 적자가 그룹 전체 흑자규모의 몇 배였다. 그러길래 삼성그룹이 눈독 들였을때 팔았어야지. 회장의 과도한 관심에 따른 고급, 고가차 위주의 정책이 적자가 누적된 원인. 위의 칼리스타 같은 뻘짓도 이 때문이었다. 1990년대만 해도 소형차나 준중형차들이 한국 자동차시장의 주류였는데, 쌍용차는 이 분야에선 전혀 힘을 못쓰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정작 김석원 회장은 금뱃지를 노리고 정치판을 기웃거리고 있었다. 1996년 신한국당 공천을 받고 제15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대구 달성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되었으나, 전두환 전 대통령의 비자금 61억원을 사과상자에 담아 집에 보관하고 있다가 들통이 나면서 큰 곤욕을 치렀다.[6] 이렇듯 최고경영자가 정치외도와 각종 구설수로 그룹경영에 집중하기 힘든 사이에 경영실적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김석원 회장은 결국 쌍용자동차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당시 자동차산업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던 삼성과 업계의 만년 3위였던 대우에 매각을 제안하였으나, 삼성은 빚이 너무 많다면서 거절했고, 대우는 자기네가 똑같이 될 거라곤 생각 못한 채 쌍용그룹의 위급한 상황을 감지하고 가격을 후려쳤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는 사이에 외환위기가 닥치면서, 모든게 끝났다.

김석원 회장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7], 경영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으나 이미 늦어도 한참 늦은 상태였다. 국내외 채권단들은 김석원 회장의 경영능력을 불신하고, 직접 쌍용그룹의 구조조정을 진행하였다.

1997년 쌍용제지(주)를 미국 P&G에 매각하였고(현 쌍용C&B), 1998년에는 쌍용자동차(주)를 대우그룹, 쌍용투자증권을 미국의 H&Q AP에 각각 매각하였다. 나머지 계열사들도 매각하거나, 채권단에 넘어갔고, 현재는 쌍용양회공업(주)을 중심으로 하여 쌍용정보통신(주), 쌍용머티리얼(주) 등의 기업으로 구성된 기업집단으로서 존재하고 있다. 쌍용양회공업의 경우 산업은행, 신한은행 등의 채권단이 40% 이상의 지분을 가지고 있고 일본 태평양시멘트가 약 27%의 지분을 보유하면서 경영권을 행사하고 있어, 기존의 김석원 회장 일가와는 완전히 단절된 상태.

쌍용중공업은 당시 사장이었던 강덕수 씨가 인수하여 STX그룹의 모체가 되었다. 그런데 STX그룹도 쌍용그룹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서(...) 과도한 차입경영과 무리한 해외투자를 감행한 끝에 지금은 사실상 해체된 상황 #.

쌍용건설은 그룹에서 분리된 후 워크아웃을 거쳐 공적자금이 투입되어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최대주주가 되었는데, 캠코에서 계속 매각을 시도하다가 무산된 상태에서 자본이 완전잠식될 정도로 재무구조가 악화되어 2013년 2월 다시 워크아웃에 들어갔다가 #[8] 결국 2013년 12월 30일 법정관리를 신청했다. 법정관리 하에서 M&A가 추진되어, 2014년 12월 두바이 투자청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고 # 2015년 3월 법정관리에서 벗어났다. 김석원의 동생인 김석준 회장이 계속하여 회장직을 맡고 있기는 하나, 이는 오너로서 경영권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워크아웃 당시 채권단이나 새로운 대주주인 두바이투자청이 전문경영인으로서의 능력을 인정하였기 때문.

한 마디로 개인의 취미와 회사경영을 구분못한 무능한 재벌 2세 때문에 거대 재벌이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김석원은 마지막까지 찌질하게 회사자산 310억원을 빼돌렸다가 구속되었다. 2007년 특별사면을 받은후 재기를 모색하다가 신정아게이트에 연루되면서 다시 구설수에 올랐다.

쌍용의 몰락기는 이곳에서 더 자세하게 볼 수 있다. 망해도 잘사는 부자들 ④김석원의 쌍용그룹

4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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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그룹의 심벌마크는 회색S + 빨간색S로 이루어진 것인데 해외에서 나치 친위대의 SS와 비슷하다는 지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악명높은(?) 표준어 표기규정에 따르면 '쌍룡'이 되어야하나, 이미 사람들한테 익숙하다는 이유로 예외 판정을 받아서 사명 쌍'용'을 그대로 쓸 수 있었다.[9]

그외에 국민대학교 재단을 소유했던 적이 있는데 아직도 국민대 이사진 중에는 쌍용그룹 출신 인사나 쌍용그룹에 관련되었던 인사가 많으며 국민대 이사장도 창업주 김성곤 회장의 조카이자 쌍용그룹 총괄부회장과 쌍용양회 회장을 역임한 김채겸 씨가 재임하고 있다. 관련 기사 관련 글1 관련 글2 그리고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에 있는 현풍중·고등학교도 쌍용그룹 재단 소속이었다.

이 기업에서 발행했던 사외보인 '여의주'가 유명했는데 그룹이 해체되고 나서도 쌍용양회에서 계속 발행했지만, 2013년 4월호를 끝으로 발행이 중단되었다.

하나 지방에도 진출한 거 같다.

5 옛 계열사

  • ㈜쌍용 - 쌍용그룹의 옛날 모기업. 현재는 GS그룹에 인수되어 GS글로벌이라는 이름으로 변경되었다.
  • 쌍용건설 - 아파트 브랜드로는 쌍용예가(藝家)가 있다.
  • 쌍용C&B, 쌍용제지 - 구 쌍용제지. 쌍용그룹 시절 쌍용제지의 설립 목적이 시멘트포대전문용지(크라프트지) 제조업체였는데 그러다 사업 다각화로 미국 스카티(현재는 킴벌리크라크와 합병)와 기술제휴로 미용티슈 생산에 들어갔다. 1997년 미국 P&G에 지분이 인수되었으나 이후 전문용지 제조부문은 쌍용제지로 분사되고 미용티슈 부문은 쌍용C&B라는 명칭으로 바뀌어 미용티슈 전문업체(모나리자)에 매각되었다. 즉 지금은 쌍용그룹이나 P&G의 손을 다 떠난 상태.
  • 쌍용정유 - 현재 S-OIL로 변경되었다.
  • 쌍용양회
  • 쌍용엔지니어링 - 2001년 그룹에서 분리된 뒤 인본건설이 되었다.
  • 쌍용투자증권 - 이후 굿모닝증권으로 분리되었다가 지금은 신한금융투자로 합병되었다.
  • 쌍용자동차
  • 쌍용화재 - 현재는 흥국생명에 인수되어 흥국화재로 변경되었다.
  • 쌍용중공업 - 위에서도 언급한 강덕수 당시 CEO의 인수 이후 (주)STX로 상호가 바뀌어 STX그룹의 모체 회사가 되었다가, 이후 STX엔진, STX메탈(舊STX엔파코) 등으로 사업부문이 분리되었다. 2016년 현재 실질적인 후계 회사는 STX엔진.
  • 쌍용정공 - 2001년 그룹에서 분리된 뒤 심팩으로 사명이 변경되었다.
  • 쌍용소프트 - PC 게임을 주로 냈다. 바로 1편을 한국에 정발판으로 내기도 했다.
  • 쌍용정보통신 - 대표적인 대기업계 SI였다. 처음 설립할때의 명칭은 우신정보산업주식회사(이때도 쌍용계열)였으나 이후 (주)쌍용컴퓨터 -> 쌍용정보통신으로 바뀌었다.
  • 용평리조트 - 통일교에 인수.
  1. 삼공유지를 경영하면서 박정희의 형 박상희를 남몰래 도왔다고 하고, 해방 이후에는 박상희와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 결성에 앞장섰으며, 해방정국 시기 미군정 시기 친일경찰의 횡포에 의해 일어난 대구 10.1 사건에서 박상희, 황태성과 같이 핵심적 위치에서 활동한적 있었다. 박상희를 통해 박정희와 친해졌다고.
  2. 사석에서 자녀들의 결혼 문제를 상의할 정도였다고 한다.
  3. 당시 정부발주 공사와 해외차관의 10%를 무조건 상납하게 하였다. 재벌들도 창구 단일화로 한쪽에만 뜯기게 되자 오히려 좋아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뇌물의 제도화
  4. 여담으로 이 시기 가봉에 백화점을 세웠다가 큰 낭패를 본일이 있었다. 가봉 항목 참조.
  5. 이건 삼성그룹도 마찬가지였으나 그룹의 덩치가 다르니....그나마 삼성은 투자 초기에 발을 빼는데 성공했다.
  6. 당시 청와대와 검찰총장의 중단압력을 무시하고 사건을 수사했던 주임검사는 결국 좌천되자 사표를 제출하고 삼성그룹 법무팀으로 스카웃된다. 이 인물이 바로 훗날 삼성의 비자금을 폭로하고 삼성을 생각한다를 출판한 김용철 변호사이다.
  7. 이로 인해 1998년에 치러진 대구 달성군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사람이 바로 박근혜 현 대통령이다.
  8. 2012년 7월 이후의 건설업계는 초상집 분위기. 100대 건설사 중 20개 이상이 부도 혹은 워크아웃 상태이다.
  9. 유사 사례로 오뚜기가 있다. 씨티은행도 Citi Bank로 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