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1 개요
요네자와 호노부의 미스터리 장편소설. 유고슬라비아 내전을 소재로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소녀 마야와 보냈던 2개월의 시간들을 주인공 모리야의 시점에서 다룬다. 조국이 내전 중임에도 귀국을 감행한 뒤 연락이 끊긴 마야의 행방을 메인으로, 2개월의 생활 속에서 생긴 사소한 의문점에 대한 일상물스러운 추리도 곁들여져 있다.
고전부 시리즈의 3권 내용이었다고 한다. 모종의 이유로 3권 원고를 낼 수 없게 되었는데, 타 출판사에서 이건 세상에 꼭 내야 하는 원고라며 제의한 것을 받아들여 등장인물을 비롯한 내용을 전체적으로 개고했다.
영어 부제는 The Seventh Hope.
2 등장인물
- 모리야 미치유키 (守屋 路行)
- 고등학교 3학년 남학생이자 이 작품의 서술자. 미스터리물 주인공답게 추리력과 통찰력이 뛰어나다. 봄비가 내리던 어느 날 먼 나라에서 온 백인 소녀 마야를 만난다. 자신의 우산을 마야에게 건네주고, 거처까지 궁리해 준다. 종종 마야의 일본 답사에 동참하여 그녀가 묻는 수수께끼들을 풀어 주기도 한다. 마야가 떠난 후에는 일 년 가까이 소식이 없는 마야를 걱정한다. 그녀의 고향과는 너무 먼 일본에 사는 그로서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지만 기억을 더듬어 단서를 모으면 최소한 마야의 고향이 어디쯤인지, 안전할 것인지 정도는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 하여 시라카와, 후미하라와 협력한다.
- 마야 (마리야 요바노비치)
- 유고슬라비아에서 온 백인 소녀. 마야는 애칭. 모리야의 묘사에 따르면 굽슬굽슬한 검은 단발머리, 새하얀 피부와 목덜미, 검은 눈, 짙고 검은 눈썹을 가진 미녀. 거기에 이국적인 외모로 일본에서는 어딜 가도 이목을 끈다. 모리야와 동갑으로 아버지의 일을 따라 세계 여기저기를 다니며 아버지가 다시 출국할 때까지 그 나라에서 생활하고 학교를 다닌다. 일본은 작중에서의 방문이 처음으로, 아버지는 오사카에 있고 자신은 '이치야 다이조'라는 일본인을 찾아 주인공이 사는 후지시바에 오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그 사람은 이미 사망한 뒤였다. 심지어 이치야 다이조는 달리 가족도 없어 생전 처음 보는 먼 동네에 혼자 낙오된 신세. 결국 역 건물에서 하루를 보내고, 정처 없이 돌아다니다 비를 피하던 중 모리야와 타치아라이에게 발견된다.
모리야의 소개로 시라카와의 집인 키쿠이 여관에 신세를 지게 되었고 일을 도우며 생활한다.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던 시절 일본인 여성을 알고 지냈는데, 그녀에게 유고슬라비아 말을 가르쳐 주고 자신은 일본어를 배워 원어민과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의사소통이 가능하다. 하지만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어려운 한자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며, 일상 대화에서 잘 쓰이지 않는 문어적 표현을 불쑥 꺼내는 등 부족한 점이 있다. 모국어인 세르보크로아트어 외에 러시아어까지 쓸 수 있지만, 일본어는 히라가나와 가타카나 정도밖에 읽지 못한다. 영어도 전혀 못 해서 '코먼 센스'나 '슛' 정도의 단어도 알아듣지 못한다.
호기심과 탐구심이 풍부한 점은 작가의 다른 작품 등장인물인 지탄다 에루와도 닮아있다. 말버릇은 '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까?'. 모리야에게 말한 바에 따르면, 6개 문화가 존재하는 자신의 조국 유고슬라비아 사람들을 하나로 규합해 7번째 문화를 만들기 위해 정치가가 되겠다는 장대한 꿈이 있다. 영어 부제가 바로 이것을 의미하는 듯.
모리야 일행과 같이 지내면서 점차 그들의 기억에서 자리를 넓혀가고 있던 그녀였지만 일본에는 체류 중이었으므로 2개월 뒤 고국으로 돌아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이별이 가까워지던 어느 날, 유고슬라비아에서 슬로베니아가 독립을 선언하고 연방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지만 마야는 끝내 귀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편지를 부치겠다던 약속에도 불구하고 편지는 오지 않았다.
- 타치아라이 마치 (太刀洗 万智)
- 모리야와 허물없이 지내는 같은 학년 여고생. 층 없는 단조로운 긴 흑발이 특징으로, 본인 말로는 어릴 적부터 긴 머리를 동경해서 길렀다고 한다. 모리야는 그녀의 외모를 '이 녀석의 외모를 평범하다고 하면 다른 여자들은 어쩌란 말인가' 정도로 평가한다. 본명은 '타치아라이'인데 그 성으로 불리는 것을 싫어한다. 날카로운 눈매에 좋게 말해서 쿨한 언행 덕에 모리야를 비롯한 주변인에게 차가운 여자로 인식되고 있는데, 자신도 그것을 잘 알고 있어서다.[1] 붙임성 있는 성격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인상만큼 차가운 사람도 아니다. 중반부에 밝혀졌는데 사실 중학교를 재수해서 모리야보다 한 살 많다. 그래서인지 고등학생 신분에 흡연자임에도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별명은 '센도'(뱃사공)인데, 모리야가 입학 직후부터 신입생의 긴장감은 어디 가고 열심히 배를 저으며 꾸벅꾸벅 조는 모습을 보고 붙여줬다고. 이 별명을 타치아라이가 마음에 들어해 모리야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마야가 고국으로 돌아간 뒤, 마야의 출신지를 알아내려 하는 모리야에게 조력을 부탁받으나 '잊고 싶다'라며 한사코 거절한다. 마야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에도.
이 캐릭터는 이후 작가의 다른 작품인 베루프 시리즈에 기자가 되어 등장한다. 고전부 시리즈가 될 뻔했던 이 작품에서, 개고를 하는 과정에 추가된 캐릭터이기도 하다.
- 시라카와 이즈루 (白河 いずる)
- 여관집 키쿠이의 따님이자 타치아라이, 모리야의 동급생으로 헤어 스타일은 단발머리. 역시 마야와 얽힐 구석은 없었지만, 여비도 거처도 없는 마야의 거처를 알아본 모리야에 의해 부름을 받는다. 여관 일을 도와주는 조건으로 마야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어, 같은 지붕 아래 지내면서 가장 마야와 오랜 시간을 보낸 인물이 된다.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너그러운 마음씨 때문인지, 한 지붕 아래에서 지냈던 것 때문인지 마야에 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일에도 적극적으로 임한다.
- 후미하라 타케히코 (文原 竹彦)
- 모리야의 표현에 따르자면 성품이 훌륭한 같은 학년 남학생. 같은 궁도부 소속이기도 하다. 모리야에 비해서 궁도에 조금 더 신경을 기울이는 듯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궁도에 목숨 걸지 않는다고. 마야와는 별로 관계없는 인물이지만, 모리야가 소속된 궁도부의 궁도 전국대회 지구 예선전에서 마야와 처음 인사를 나눈다. 이후 마야의 후지시바 답사에 따라가기도 하지만, 비중 있는 등장은 아니다. 마야의 송별회에도 참석해 이즈루의 이름 한자를 추리하는 모리야를 거든다.
마야가 돌아간 후, 대학에 들어가면서 후지시바를 떠나 멀리서 지낸다. 시라카와와 함께 마야의 출신지를 찾아내려는 모리야에게 얼굴을 내밀지는 않았지만 편지와 자료를 보내 간접적으로 도움을 준다.
- 누카타 히로야스 (額田 広安)
- 모리야, 후미하라와 같은 궁도부원이자 동급생. 후미하라의 평에 따르면 외국 팝 음악에 미쳐있을 것 같은 느낌이라고. 별다른 비중은 없다. 마야와도 궁도 대회에서 한번 얼굴을 본 것이 전부.
- 카가미 선생 (加上)
- 나이 지긋한 선생님이자 궁도부 지도 교사. 궁도부원들에게 대회 당일 활쏘기에 대해 평하고 격려해 주기도 하고, 모범 경기를 펼치기도 한다.
- 슬로보단
- 마야의 오빠. 동생 마야는 전혀 하지 못하는 영어를 잘 한다. 세르비아계가 많이 쓰는 이름으로, 요바노비치라는 성까지 고려해 보면 마야의 아버지는 세르비아계 보스니아인으로 추정된다. 작중 언급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아버지는 세르비아 사람이고 어머니는 슬로베니아 사람이라고. 언어의 문제로 편지를 어떻게 주고받을 지 애매한 상황에서, 영어 잘 하는 이 오빠의 존재는 일본의 모리야 일행과 마야의 연락망을 이어줄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그리고 그 덕에 돌아오지 않는 편지의 수수께끼는 마침내 풀리게 되었다.
3 수수께끼의 해설
이 작품에는 소소한 수수께끼 몇 개가 모리야 내외의 기억 속에 담겨 있고, 그것을 모두 아우르는 가장 큰 수수께끼인 '마야는 어디에서 왔는가?', '과연 무사할 것인가?' 가 있다. 붉은 만쥬에 대한 이야기, 이즈루의 이름에 대한 이야기, 빗속에서 우산을 들고 그냥 뛰어간 남자의 이야기 등 여러 가지가 있지만, 이 문서에서는 가장 큰 수수께끼인 마야의 출신지에 대한 시라카와, 모리야의 가설을 서술한다.[2]
시라카와와 모리야가 추리해내려고 하는 것은 '마야의 출신지'이다. 달리 할 수 있는 것이 없기에 그녀의 출신지를 알아낸다면 고향으로 돌아간 그녀가 안전할지에 대해 실마리라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다소 스포일러가 될 수 있다.
유고슬라비아와 유고슬라비아 내전, 그 하위 문서들을 참고하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3.1 시라카와 가설
시라카와 이즈루는 마야가 했던 발언 세 가지를 단서로 소거법을 적용해, 유고슬라비아의 6개 구성국을 차례로 지워가며 그녀의 출신 국가를 추측했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구성 국가는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슬로베니아가 있다. 이곳 중 어디가 마야의 출신국일까?
참고로 작중 두 사람이 추리를 하는 시점에서 이미 슬로베니아는 전쟁 종결, 독립국이 되어 가장 안전했고 몬테네그로와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또한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나, 크로아티아는 마야의 귀국 직후에 나라 곳곳에서 벌어진 전투로 우편망이 마비될 정도이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몇천 명 정도의 사상자를 내며 계속해서 전쟁 중이다. 즉 가장 위험한 두 국가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마케도니아
마야와 모리야가 빈 교실에서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 때, 마야는 전쟁이 터질 것을 알고 있었냐는 모리야의 질문에 이런 이야기를 했다.
"웅, 삼 년 전에 마케도니야에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린애들과 저는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어린애들은 저를 보고 웃었습니다. 왜 웃었나? 어린애들은 이렇게 웃었습니다. '이 사람은 스르프스코흐르바트스콤으로 말하네!' 저는 그때……."
만약 마케도니아가 마야의 출신국이라면, 마야는 '갔다'가 아니라 '돌아갔다'라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야는 일본에서 어딘가로 돌아갈 때 '돌아간다'라는 동사를 제대로 사용했다. 따라서 마야가 일본어 구사를 잘못하였을 가능성이 낮으므로 마케도니아가 마야의 출신지라면 '갔다'라고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는 마케도니아를 제외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마케도니아 아이들이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쓰는 마야를 보고 웃었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 슬로베니아
묘지를 답사하러 갔을 때 타치아라이가 왜 묘지를 보고 싶었냐고 묻자 마야는 이렇게 답했다.
"이유는 있습니다. 있지만 그것을 일본어로 못 말하겠습니다. 스르프스코흐르바트스콤이라면 설명할 수 있지만, 이번에는 마치 씨가 모릅니다."
스르프스코흐르바트스콤이란 즉 세르보크로아트어를 말한다. '흐르바트스카'는 '크로아티아'라고 마야가 말한 적이 있었다는 점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라고 생각한다.[3]
유고슬라비아의 여섯 공화국 중에서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지 않는 국가로는 마케도니아와 슬로베니아가 있다. 각각 마케도니아어와 슬로베니아어를 사용한다.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사용하는 마야는 세르보크로아트어 사용국 출신일 것이다.
마케도니아는 이미 제외했으니, 남은 슬로베니아 또한 마야의 출신국이 아닐 것이다. 시라카와는 가장 안전한 두 국가가 먼저 제외되었다는 점에 불안감을 표한다.
-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야의 귀국 전날 송별회 중, 모리야와 마야가 나눴던 대화에서 내전의 전개에 대해 마야는 이런 말을 했다.[4]
"유고슬라비야는 티토가 죽고 나서 십일 년간 내내 위기에 있었습니다. 슬로베니야는 시초입니다. 연방에서 벗어나려는 힘과 연방을 계속하려는 힘은 한번 싸움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겁니다. 다음은 흐르바트스카(크로아티아)입니다. 그다음은 아마 보스나 이 헤르체고비나(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입니다. 어쩌면 코소보도, 제가 사는 곳도 언젠가 전쟁터가 될지도 모릅니다."[5]
하지만 마야는 내전이 벌어진 상황임에도 자신의 고향 걱정을 하지 않았고, 내내 연방 전체만을 걱정했다는 점이 걸린다. 그렇다면 마야는 자신의 고향 국가에는 전쟁이 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 게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위의 발언에서 언급된 국가들은 마야가 전쟁이 번질 것이라 예상했으니 마야의 고향이 아니지 않을까.
따라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또한 제외할 수 있다.
나머지 남는 두 국가인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중에서 어디가 그녀의 고향인가, 시라카와 이즈루는 그것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3.1.1 모리야의 반론
직접 반론하지는 않았다. 모리야는 시라카와가 남은 두 국가 중에 어디인지는 모르겠다고 하자 나머지 둘 다 그다지 위험한 나라가 아니니까 괜찮지 않겠냐며, 성급히 자리를 정리하고 찻집을 나선다. 사실 모리야는 이 시점에서 무언가 스치는 게 있었기 때문에 그걸 놓치지 않기 위해 서둘러 자리를 뜬 것이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모리야는 짧게 시라카와의 생각에 대한 반론을 머릿속으로 늘어놓는다.
시라카와는 조건으로 세 가지를 제시해 네 개의 국가를 제외했다.
- 그곳에 '돌아간다'라고 하지 않고 '간다'라고 표현한 것.
- 세르보크로아트어를 안 쓴다는 것.
- 마야가 자신에게 전쟁의 화가 미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
모리야는 첫째 조건과 그에 따른 마케도니아의 제외에는 동의했지만, 나머지 두 조건은 타당하지 않다고 말한다.
-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사용 여부
슬로베니아에서 슬로베니아어만 쓰인다는 건 '주로' 그럴 뿐이다. 오직 세르보크로아트어의 사용이라는 조건에만 근거해 슬로베니아를 제외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슬로베니아 사람이라 한들 세르보크로아트어를 꼭 사용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6]
- 마야가 자신에게 전화가 미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마야가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라는 희망적인 관측에 불과하다. 마야는 그저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전쟁이 확대될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고, 만약 마야가 크로아티아나 보스니아 출신이라고 쳐도, 마야가 고향의 피해보다 유고 연방의 해체를 더 걱정했다 한들 그것이 꼭 불합리하라고 단언할 수는 없다고 모리야는 생각했다.
시라카와는 어떻게든 마야의 고향으로 추측되는 나라 목록에서 사지가 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제외시키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지겠지만 냉정하게 보면, 앞서 말한 두 조건에 근거해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를 빼는 것은 역시 적절하지 못하다.
결국 시라카와는 첫 번째 조건으로 마케도니아 하나만을 제외했을 뿐이다. 그렇게 모리야는 생각했다.
3.2 모리야 가설
모리야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에 도시가 몇 개나 될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고, 그 많은 도시 중에 하나를 골라 낼 가능성도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모리야 미치유키는 6개 공화국의 단위로 마야의 고향을 생각해보기로 하되, 이를 위해 마야의 고향에 있을 어떠한 특성에 주목하여 보기로 한다.
- '슛'이라는 단어에 대해서
마야는 정말 간단한 영어, May I help you? 정도의 문장, 코먼 센스 정도의 단어도 모른다. 모리야의 기억에서 마야가 말했던 영단어는 네 가지 뿐이다. 슈퍼마켓, EC(유럽 공동체), 밀리미터, 슛.
슈퍼마켓은 '일본에서 말하는 대규모 소매점포', EC는 '유럽 공동체', 밀리미터는 '단위'로 해석할 수 있는 평범한 단어들. 그런데 이 '슛'이라는 단어가 무언가 이상하게 느껴진다.
후지시바 시를 둘러봤던 날, 시라카와가 마야에게 손수건을 사 준 적이 있다. 슈퍼마켓에 시라카와가 들어가 있던 동안, 마야는 슈퍼마켓이 유고슬라비아에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일행을 나무랐다. 그때 마야가 했던 이야기.
"제가 사는 곳은 큰 도시입니다. 슛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모포슬루가(대규모 소매점포)는 있습니다. 웅, 하지만 식료품은 시장에서 살 때도 많습니다. 만든 사람이 직접 판매합니다."
마야는 이 말에서 유고슬라비아에도 슈퍼마켓이 있다, 식료품을 시장에서 살 때가 많다, 만든 사람이 직접 판다, 그 외에도 한 가지를 더 말했다. '슛과는 사뭇 다르다'. 문맥상 골대에 골을 차 넣는 의미의 '슛'은 들어갈 이유가 없는데 왜 슛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을까.
반면 송별회 때, 타치아라이는 사과를 던져준 이즈루에게 '나이스 슛이야, 이즈루'라고 칭찬했었다. 영어를 거의 대부분 못하는 마야는 '슛?' 이라고 반응하며 그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었다. 그러나 그 뒤의 이야기에 따르면, 세르보크로아트어로도 슛은 Sut(슈트)로 거의 비슷한 발음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야는, Shoot과 Sut를 거의 비슷한 발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뜻이라 유추해 내지 못했다. 그런데 슈퍼마켓 앞에서는 슛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꺼냈다.
사모포슬루가 얘기를 하면서 공 차기 이야기가 나올 리 없고, 더해서 Shoot과 Sut 이야기까지 생각해 보면 마야가 말한 '슛'은 공 차기, 던지기가 아니다.
만약 슛이 영단어가 아니라 일본어라면? 주도가 슛과 발음이 비슷하니, 마야는 슛을 주도의 의미로 말한 게 아닐까.(여기서 말하는 주도는 연방제 국가에서 각 주의 주정부가 소재하고 있는 도시인 주도를 말한다) 마야의 아버지는 오사카에 있다고 했다. 마야를 처음 만난 날 내가 아버지는 어디 있냐고 묻자 마야는 이렇게 답했다.
"수도는 아닙니다. 웅, 가장 큰 주도(州都)입니다."
오사카를 수도가 아닌, 가장 큰 주도라고 말한 것은 마야 생각에는 오사카가 현청 소재지(오사카는 부청 소재지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마야가 슈퍼마켓 앞 그 대화에서 '슛'을 일본어로 주도라는 뜻으로 썼던 것이었다면..
슈퍼마켓 앞에서 마야의 말을 다시 되짚어보자.
"제가 사는 곳은 큰 도시입니다. 슛과는 사뭇 다릅니다. 사모포슬루가(대규모 소매점포)는 있습니다. 웅, 하지만 식료품은 시장에서 살 때도 많습니다. 만든 사람이 직접 판매합니다."
그러니 마야는 슛, 즉 주도보다 큰 도시에 살고 있다는 말이 된다. 주도보다 큰 도시라고 한다면 주보다 큰 단위인 공화국의 수도밖에 없다. 따라서 마야의 고향은 6개 공화국의 수도 중 한 곳일 것이다. 그럼 대체 어느 수도일까.
유고슬라비아에서 수도로 불리는 도시는 공화국 갯수에 맞춰 여섯 곳이 있다.
슬로베니아 - 류블랴나
크로아티아 - 자그레브
세르비아 - 베오그라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사라예보
몬테네그로 - 티토그라드
마케도니아 - 스코페
여기서 마케도니아는 시라카와에 의해 후보에서 제외되었으므로 제외하고 들어간다. 나머지 다섯 도시 중 하나다.
-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
맨 처음 제외된다. 십 일 전쟁으로 이 도시는 전쟁터가 되었다. 류블랴나 공항은 연방군에게 폭격을 당했다. 마야는 송별회 날 이런 말을 했다.
"유고슬라비야는 티토가 죽고 나서 십일 년간 내내 위기에 있었습니다. 슬로베니야는 시초입니다. 연방에서 벗어나려는 힘과 연방을 계속하려는 힘은 한번 싸움을 시작하면 멈출 수 없을 겁니다. 다음은 흐르바트스카(크로아티아)입니다. 그다음은 아마 보스나 이 헤르체고비나(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입니다. 어쩌면 코소보도, 제가 사는 곳도 언젠가 전쟁터가 될지도 모릅니다."
마야는 자기가 사는 곳도 언젠가 전쟁터가 될지 모른다고 했다. 그런데 송별회를 하던 시점에서 이미 류블랴나는 전쟁터가 되어 있었다.
- 베오그라드, 자그레브
마야는 론덴 다리 앞에서 유고슬라비아에 유명한 다리는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런 말을 했었다.
"웅, 아주 많습니다. 제가 사는 곳은 후지시바와 비슷하게 시내 한복판으로 강이 한줄기 흐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리도 여러 개입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모스타르 다리입니다. 매년 거기에서 사람이 뛰어내립니다."
즉 강의 양 옆으로 도시가 발달하지 않은 곳은 마야가 돌아간 곳이 아니다. 론덴 다리에서의 마야의 말에 따르면 두 개의 도시를 더 제외할 수 있다. 사바 강과 도나우 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하는 세르비아의 베오그라드, 그리고 북쪽 연안에 발달해 남쪽에는 최근에야 손을 뻗은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티토그라드와 사라예보는 제외하지 않았다. 티토그라드는 정보가 부족하고, 사라예보는 시가지의 바로 한복판에 밀랴츠카라는 강이 흐른다.
따라서 베오그라드와 자그레브, 즉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를 제외할 수 있다.
마야가 처음 만났을 때 했던 농담이 있다.
"츠르나고라는 일본과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선전 포고도 완벽합니다.""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니까 일본 사람은 츠르나고라에 가면 안 됩니다. 저희 집에 츠르나고라에서 친구가 왔을 때, 일본에 가면 위험하다고 했습니다. 포로는 조약에 의해서 다루어져야 합니다."
츠르나고라에서 친구가 마야의 집으로 왔으니, 마야는 명백하게 츠르나고라 사람이 아니다. 남은 두 나라 중 츠르나고라이므로[7], 이를 제외한 나머지 한 나라가 바로 마야의 고향이 된다.
츠르나고라는 유고슬라비아의 일원이자, 일본에 선전 포고를 한 적이 있는 국가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수립되었기 때문에, 만약 1차대전 이후에 츠르나고라가 선전포고를 했다면 유고슬라비아가 일본에 선전포고한 형태가 됐을 것이다. 따라서 츠르나고라가 독립국이었을 때, 즉 1차대전 이전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1차 세계대전 이전에 6개 국가 중에서 독립국이었던 국가는 어디인가, 슬라브 해방의 기수이자 1차 대전의 당사자였던 세르비아, 그리고 강국 터키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한 몬테네그로. 둘 중 하나가 바로 1차대전 이전에 일본에 선전포고를 했던 독립국이자 마야가 말한 츠르나고라다.
마야가 쓰는 말 세르보크로아트어는 '스르프스코흐르바트스콤'이다. 흐르바트스카가 크로아티아이므로, 스르프스는 아마 '세르비아의' 라는 의미일 것이다. 또한 마야가 세르비아를 '스르비야'라고 언급했다는 점이 이를 확고히 한다.
즉 마야의 출신지로 뽑을 수 없는 츠르나고라는 몬테네그로를 말한다. 따라서 그 몬테네그로의 수도인 티토그라드는 마야의 고향이 아니다. 세르비아도 당시의 독립국이었지만, 수도에 강이 없기 때문에 이미 앞에서 제외했다.
목록에는 하나의 이름이 남는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 사라예보.
3.3 이후의 결말
이 틀 아래의 내용은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의 줄거리나 결말, 반전 요소가 직, 간접적으로 포함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내용 누설을 원치 않으시면 이하 내용을 읽지 않도록 주의하거나 문서를 닫아주세요.
마야의 고향을 알아낸 모리야는 직접 유고슬라비아로 떠나 마야를 찾기로 결심한다. 그날 밤 타치아라이에게서 전화가 걸려와 꼭 오늘 밤에 만나야 한다며 불러냈고, 모리야는 어처구니 없어 하지만 약속 장소로 나간다.
모리야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난민들이 아드리아 해를 건너 이탈리아로 도망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반대 방향으로 가는 배도 있을 테니 찾아가서 마야를 구하겠다고 말한다. 타치아라이는 냉정하게 만류하지만 모리야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타치아라이는 결국 체념했다는 듯 모리야에게 하얀 봉투를 건네주고, 그것이 바로 사라예보에서 온 마야의 편지라고 일러준다.
마야는 모리야, 시라카와, 후미하라 그 누구에게도 연락처를 알려주지 않았다. 혹시 모리야가 찾아올까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야는 타치아라이만은 비밀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녀에게만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타치아라이는 마야에게 편지를 썼고, 모리야가 건네받은 봉투가 바로 그 답장이라며 당장 열어볼 것을 종용한다.
다음은 그 편지 내용. 스포일러를 원하지 않는다면 읽지 않는 것을 추천.
편지에 감사드린다. 그러나 내 편지가 당신에게 갈 것인가.사라예보는 참혹하게 변했다. 이 편지가 무사히 일본에 전달되기를 기도한다.
나는 마리야의 오빠, 슬로보단. 동생에게 쓴 진심 어린 편지를 읽고 매우 기뻤다. 그러나 나는, 우리에게 그것이 고통스러운 일이듯 당신에게도 고통스러울 이야기를 써야만 한다. 내 동생, 그리고 당신의 친구 마리야는 5월 22일 저격병의 총에 목을 맞고 사망했다. 마리야의 무덤을 만들어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사라예보에서는 점점 제대로 된 무덤을 쓰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마리야는 당신을 사랑했다. 다른 여러 나라를 사랑했듯 그 아이는 일본을 사랑했다. 그 아이는 일본에 다시 갈 수 있기를 강하게 소원했다. 나는 그것을 일부만이라도 들어주고 싶다. 우리가 사는 곳에 평화가 돌아왔을 때(신이여, 그날이 머지않았기를) 당신이 찾아오기를 기도한다. 동생을 대신해 우리가 당신을 환영하겠다. 그것이 동생의 평안을 위한 길이기를.
편지를 읽은 모리야는 어떤 반응을 해야 정상일지 모르겠다고 독백한다. 어째서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모리야는 묻고, 너 같으면 이야기할 수 있겠냐고 타치아라이는 받아친다. 그리고 봉투에 같이 들어 있었던 무언가를 건네준다. 얼룩이 묻어 있는, 모리야가 마야에게 선물해주었던 수국 머리핀이었다. 모리야와 타치아라이는 일전에 올라간 적 있었던 산꼭대기 묘지에 그 머리핀을 묻어 주고, 글은 모리야의 씁쓸한 독백으로 마무리된다.
꿈도 희망도 없는 등장인물의 사망 전개. 유고슬라비아가 하나되기를 소망하던 소녀는 유고슬라비아가 찢어지는 과정에 휘말려 허무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보스니아 내전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내전 기간 동안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처참한 비극을 겪었고 현재까지 회복이 완전히 되지 못한 상황이다. 사라예보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있었던 전쟁범죄와 주민들이 당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만일 마야가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상당한 후유증을 안고 살아갔을 것이다.
3.4 여담
원래 이 작품은 유고슬라비아가 아닌 가상의 이국이 등장했다고 한다. 원고를 고치는 과정에서 유고슬라비아로 바꿨다고. 작가가 대학 시절 연구 과제로 유고슬라비아를 정했던 것이 이유인 듯하다.- ↑ 타치아라이는 '피에 젖은 칼을 물가에서 씻는다'라는 뜻이다. 누군가를 베고 나서 칼을 물가에서 씻는다는 뜻은 썩 유쾌하지 않을 테니..
- ↑ 작품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스포일러는 둘째치고 이해하기 다소 어려울 수도 있다. 읽어보고도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고 싶은 위키러가 보는 것을 권하며, 잘못된 부분은 얼마든지 수정바람.
- ↑ 시라카와가 카페에서 이 추리를 하던 때가 1992년인데, 인터넷 검색이 널리 퍼지지 않았던 시점이라 그런지 모리야도 자료 조사를 인터넷이 아니라 관련 도서로 한다. 그래서 세르보크로아트어가 맞는지 검색해 보는 게 아니라 흐르바트스카라는 국명으로 추정한 듯하다.
- ↑ 시라카와는 그때 취해서 퍼진 상태였기에 이를 몰랐지만, 모리야가 자신의 일기 내용을 시라카와에게 제공했기 때문에 알게 되었다.
- ↑ 여기서 주목할 점은 실제 유고슬라비아 내전도 마야의 추측과 똑같이 전개되었다.
- ↑ 실제로 그렇다. 슬로베니아 내에서는 영어, 세르보크로아트어도 사용된다.
- ↑ 츠르나고라의 선전 포고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는 일본과 전쟁 중이다, 이런 농담이었기 때문에 츠르나고라가 유고슬라비아 소속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