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

역대 세르비아/유고슬라비아 국왕
밀란 1세알렉산다르 1세페타르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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Александар Обреновић(Aleksandar Obrenović)
1876~1903

1 개요

세르비아 왕국의 2대 왕. 세르비아의 알렉산다르 1세로도 불린다. 여기서의 세르비아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성립 이전의 세르비아.

겉으로 보기에는 유럽 중소왕국의 평범한 국왕 같이 보이는 이 왕의 가장 흥미로운 점이 있다면 만화 프린세스를 현실세계에서 실현했다는 점[1]과 자신의 암살이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비효과였다는 점이다.

간단하게 정리하자면, 국민들과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어머니를 추방시키면서까지 자기보다 신분이 낮은 여자, 그것도 어머니의 시녀였던 과부와 결혼해서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잃고 왕의 자리도 다른 가문에게 뺏긴 인물이다.

2 초기 생애와 왕위 계승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는 세르비아 왕국의 초대 왕인 밀란 1세와 나탈리 케쉬코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바로 밑의 남동생은 태어난 지 며칠만에 죽는 바람에 유일한 후계자가 되었다.

아버지 밀란 1세가 세르비아 자유주의자들의 헌법 개정과 부부간의 불화로 인해 왕위를 내놓고 프랑스 파리로 망명하면서 알렉산드르는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알렉산다르는 초기에는 섭정위원회의 꼭두각시에 불과했으나 성년이 되자마자 친위 쿠데타를 일으켜 입헌군주제전제군주제로 되돌려놓고 프랑스로 망명갔던 아버지를 도로 귀국시킨다. 이 과정에서 몇몇 자유주의자들의 반발이 있었으나 여기까진 그럭저럭 잘 넘어갔다. 나름 중립외교도 열심히 해서 그럭저럭 평범한 군주로 남을 뻔했는데…

3 문제의 결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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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이 바로 드라가 마신. 비앙카스타 로디트예쁘기라도 했지, 정말 현실은 시궁창이다

문제는 왕의 결혼에서 터졌다. 알렉산다르가 좋아하던 여자는 하필 자신보다 12살이나 많은 어머니의 시녀이면서 과부였던 드라가 마신이라는 여자였는데, 당시에는 이러한 결혼은 귀천상혼으로 취급되었기 때문에 원칙대로라면 윈저 공처럼 왕위에서 물러나든가 프란츠 페르디난트처럼 그들 사이의 자식의 계승권을 포기했었어야 했다. 문제는 원래 한미한 가문이었던 오브레노비치 왕조는 윈저 왕조합스부르크 왕조와는 다르게 후계자 대타들이 없었다는 점, 다시 말해 후계자가 없어서 왕조가 단절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이다. 게다가 왕족들의 결혼정책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사례처럼 외교관계에 큰 도움을 주는데, 약소국가인 세르비아 입장에서는 강대국과의 제대로 된 외교정책은 필수요소였다.

그러나 비욘 카칸 표르도바처럼 사랑에 눈이 먼 알렉산다르 왕은 부모와 국민의 반대를 무릅쓰고 드라가 마신과 결혼하여 왕비로 올렸다. 그 과정에서 부모를 외국으로 추방시키고 결혼에 반대하는 국민들을 탄압하면서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 세르비아는 난장판이 되었다. 그래서 이 결혼이 성사된 결정타는 러시아 제국니콜라이 2세가 결혼식에 참석하고 증인까지 되어주었기 때문인데 문제는 러시아 제국은 귀천상혼이 멀쩡히 살아있던 국가였다는 점. 니콜라이 2세 항목을 보면 알 수 있지만 이 사람은 정말 정치적 감각이 무능했기 때문에 세르비아 국민들 상당수가 반대하는 이런 무리수 결혼식에 참석한 것이다. 자기 딴에는 사랑을 맺어주는 좋은 일하는 줄 알았겠지

당연하게도 드라가 왕비에 대한 나쁜 소문이 계속 퍼졌기 때문에 알렉산다르 왕이 드라가 왕비를 실드치면 실드칠수록 내려갈 평판만 계속 내려가는 꼴이 되어버렸다. 당장 유럽의 경우 연상연하 커플에 대해 한국보다는 관대한 편이긴 했지만 그래도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나면 평판이 나빴다.[2]

하지만 평판이 마이너스가 될 정도로 결정타를 먹인 것은 따로 있었다. 드라가 왕비가 나이가 많아 자식을 보기 힘들 것 같으니 기존의 왕위 계승의 법칙을 어기고 드라가 왕비의 남동생, 즉 자신의 처남을 다음 후계자로 지정하면서 세르비아 정세는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당연한 일이지만 차기 왕위 계승자라는 왕의 처남은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피가 한 방울도 안 섞인 일개 평민이다. 게다가 그 처남이라는 사람은 국가에 공적을 세운 적도 없다. 이런 자가 왕이 될 수 있다면 막말로 세르비아 국민 중 어떤 사람이라도 왕이 될 수 있다는 것인데, 이런 막 나가는 후계자 선정을 한 왕을 일반 국민들은 당연하게도 미쳤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런 일을 저지르게 만든 왕비도 자신의 한미한 집안에 왕위 계승자를 만들기 위해 왕을 꼬셨다는 생각을 안 가질 수 없게 만들었다.

게다가 알렉산다르는 나름대로 중립외교를 펼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화친했는데, 이것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증오했던 당시 민족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세르비아 국민들의 감정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행동이어서 더더욱 비난을 받게 되었다.

4 암살

결국 알렉산다르는 국민들의 신임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는데, 몇몇 세르비아 군인 장교들은 이 자식 안 되겠어 빨리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이라는 심정으로 아예 비밀조직을 만들어 왕을 암살하는 쿠데타를 모의했다.

첫 번째 시도는 1901년에 왕비의 생일 파티장에서 시도했는데, 눈치를 채는 바람에 실패. 2년 뒤인 1903년 밤중에 왕궁을 습격했는데, 이때 알렉산드르 왕은 축지법을 써서 비밀통로를 통해 탈출할 기회가 있었지만 하필 비밀통로가 왕비의 옷장에 가로막히는 바람에 탈출에 실패하고 옷장에 숨어있다가 왕비가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를 외치는 바람에 암살자들에게 들켜서 총을 맞고 암살당했다. 왕과 왕비의 시체는 토막내어 내장이 드러난 채로 왕궁 비료더미에 던져졌다가 다음 날 낮에 시신을 수습해 장례를 치렀다. 참고로 알렉산다르를 암살한 그 비밀조직은 바로 제1차 세계대전의 시발점이 되는 오스트리아-헝가리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암살한 검은 손이다. 애당초 검은 손의 최초 창설 목적은 알렉산다르의 암살이었다.

세르비아 국민들은 이 왕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했다. 죽고 나서도 안습.

5 암살 이후

그 후 검은 손은 오브레노비치 가문의 경쟁 가문인 카라조르제비치 가문의 페타르 카라조르제비치를 페타르 1세라는 이름의 왕으로 추대했다. 알렉산다르의 가문인 오브레노비치 가문은 알렉산다르의 암살로 대가 끊기고 사실상 멸문당했다. 물론 전임 왕 밀란이 다른 여자에게서 본 아들(알렉산다르의 이복동생)이 하나 있었지만 이쪽은 사생아라서 정통성이 약한 데다가 알렉산다르 오브레노비치가 워낙 뻘짓을 한 바람에 왕위 계승을 할 엄두도 못 냈다.[3]

당시 유럽은 군주제 체제가 아직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유럽 각국은 이 쿠데타에 대해 비난의 목소리를 냈고, 결국 새로 즉위한 페타르 1세는 형식적으로 검은 손 단원들을 처벌하는 바람에 이후 검은 손은 지하조직이 되면서 오스트리아-헝가리프란츠 페르디난트 황태자를 암살하고 완전히 해체당한다.[4]
  1. 비욘 카칸 표르도바와 일생이 80% 정도 비슷하다. 다만 가상의 세계관인 만화에 비하면 역시 현실은 시궁창이었다는 게 문제. 사실 이쪽이 먼저다
  2. 드라가 마신이 너무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당시 루머 중에 드라가 마신이 밤일로 왕을 유혹해서 결혼했다는 등의 섹드립이 널리 퍼졌었다. 당시만 해도 유럽에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연상 여자와 결혼하면 이런 악성 루머가 퍼지는 경우는 흔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12살이 많은 경우에는 그다지 비난의 대상이 되진 않았으므로 이것만 가지고는 평판이 일정 수준 이하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3. 현재 오브레노비치 왕가의 후예로서 세르비아 왕위를 주장하는 가문은 (구) 몬테네그로 왕가다. 알렉산드르의 아버지의 고모의 손녀(…)가 몬테네그로의 왕위 계승자와 결혼했기 때문.
  4. 그리고 페타르 1세는 비슷한 기능의 하얀 손이라는 단체를 지원했는데, 이쪽은 사실상 왕실 비밀 친위대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