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히토

Yoshihito. 일본에서 쓰는 이름. 황족이 쓰는 경우가 많다.

1 栄仁

1351~1416
후시미노미야 요시히토 친왕(伏見宮 栄仁親王)
옛 세습친왕가의 하나인 후시미노미야의 시조.[1]
후시미노미야를 참고할 것

2 好仁

1603~1638
다카마쓰노미야 요시히토 친왕(高松宮 好仁親王)
107대 고요제이(後陽成)덴노의 아들로, 세습친왕가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의 시조. 궁호는 본래 다카마쓰노미야(高松宮)였으나 뒷날 아리스가와노미야(有栖川宮)로 변경하여 10대 400년간 존속했다.

아리스가와노미야를 참고할 것

3 嘉仁

1879~1926
일본덴노다이쇼를 참고할 것.

4 宜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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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桂宮 宜仁親王)가츠라노미야 궁가의 문장

위의 다이쇼 덴노의 4남인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三笠宮 崇仁) 친왕의 3남 2녀 중 차남이며 셋째, 즉 아키히토사촌 동생이다. 독신으로, 만 40세가 되기 직전인 1988년 1월 1일에 자신의 큰아버지인 쇼와 덴노로부터 '가츠라노미야(桂宮)'[2]라는 미야케를 하사받았다. 경칭은 전하이며 영어로는 "His Imperial Highness Prince Yoshihito of Katsura"라고 한다. 가쿠슈인 재학시절에 친구들은 그를 '미카사'로 불렀다. 황족이라 성씨가 없어서 아버지의 궁호를 대신 사용했던 모양. 대놓고 이름을 함부로 부를순 없으니까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에 1971년부터 1973년까지 오스트레일리아유학했다. 그후 1974년부터 1984년까지 10년 간 NHK에서 근무하다가 일본농협, 일본산림박람회, 일본공예회 등에서 이사로 일했다.

궁가를 창설한 지 얼마되지 않은 1988년 5월 26일에 자신의 침실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급성경막하출혈이 발병한 것으로 침실에서 넘어져 머리를 크게 다친 것으로 추정된다. 급성경막하혈종으로 의식불명으로 있다가 8월에 의식을 회복하였다. 11월에 퇴원하였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큰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장례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재활 치료를 받아 1991년 11월부터 휠체어를 타고 공무를 하였다.

한국에서 요시히토의 존재는 듣보잡이고, 형 토모히토가 재일교포에게 했던 일에 비해 요시히토는 친한파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에게 망언을 하는 입장도 아니기 때문에 일본 황족 최대의 듣보잡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러한 입장이지만 일본에서는 그래도 자기 나라 황족이라고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일본인들이 기억하는 요시히토의 모습은 오른쪽 눈을 찡그린 채[3] 안경에 콧수염을 기르고 휠체어를 타고 행사에 참석하는 모습으로 기억되는데 이건 요시히토가 쓰러진 후 공개활동을 재개한 1991년부터 2008년까지의 모습이고, 쓰러지기 전 그의 모습은 수염이 없고 휠체어 없이 잘 걸어다니는 모습이기 때문에 일본인들이 다소 의아해한다. 사진에서 보듯 당뇨합병증으로 한쪽 눈을 잃었으며, 말년에는 형 토모히토 친왕과 마찬가지로 발병으로 인해 성대를 적출하면서 목소리를 잃기까지 했다. 게다가 2008년 패혈증이 발병하면서 요시히토는 집에서 거의 누워지냈고, 2014년 죽을 때까지 외출을 거의 하지 않았다. 안습

보통 결혼을 하면서 궁가(미야케)를 창시하는 게 통례임에도 독신인 상태에서 궁가를 창시하게 된 까닭으로, 여종을 건드려서 그랬다는 소문이 있었다(…). 최근주간지 보도에 의하면 일본 피겨 스케이팅 연맹 임원 아리자카 아키코(有坂昭子)와의 내연관계가 거의 정설처럼 알려져 있다. 실제로 일본 야후에서 아리자카 아키코를 치면 바로 연관검색어로 가츠라노미야가 나올 정도. 문제는 아리자카가 요시히토보다 3살 연상에 아들 하나 딸린 이혼녀였다는 것. 1988년 5월에 요시히토가 혼수상태로 아리자카를 찾았고, 이때 소식을 들은 아리자카는 삿포로에서 단신으로 상경하여 이때부터 병수발을 들면서 같이 살게 되었다는 얘기다.

물론 정식으로 결혼한 사이가 아니기 때문에 아리자카의 신분은 어디까지나 가츠라노미야의 고용인. 이에 대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건 없다. 밝힐 리가 없잖아 이와 별개로 설령 그들 사이에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고 해도 현행 황실전범에서는 서자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지 않으니 큰 의미는 없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냐

독신인 상태로 궁가를 창설했으므로 가츠라노미야의 구성원은 여타 궁가와 달리 당주 1인 뿐이며, 그의 죽음과 함께 단절된다. 황위계승순위는 6위. 그의 후순위 계승자는 없다(…)


2014년 6월 8일 심장마비로 급서(急逝)하였다. 아울러 그의 부친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三笠宮 崇仁) 친왕 부부는 아침에 가벼운 산책을 할 정도로 건강하고 금슬이 좋은데 아들 3명을 모두 먼저 보내는 비극을 겪었다. 일본/왕실에 남은 왕족 21명 중에서, 이제 남성은 5명뿐이다. 남동생 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은 딸 3명만 남겨두고 2002년에 사망, 형 토모히토 친왕도 2012년에 딸 2명만 남겨두고 사망하였고, 두 사람 모두 아들이 없어 미카사노미야 가문은 절손될 예정이다.

2015년 6월 8일 , 황실과는 별도로 1주기 추모제를 지냈다.
  1. 栄仁을 '나가히토'로 읽는다는 설도 있으나 '요시히토'로 표기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2. 에도시대의 4대 세습친왕가의 하나인 가츠라노미야(桂宮)와는 이름만 같을 뿐 무관하다. 이는 요시히토 친왕의 개인문장인 계수나무(桂, 가츠라)에서 이름을 딴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3. 요시히토처럼 병으로 눈을 실명할 경우에는 동공에 초점이 없거나 각막이 투명해지기 때문에 눈이 점차 감겨지고 나중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에만) 완전히 눈이 감겨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