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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마도노미야 노리히토 친왕(高円宮 憲仁親王) | 다카마도노미야 궁가의 문장 |
목차
1 일본의 황족
1.1 개요
아키히토 덴노의 사촌 동생. 아버지는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큰아버지는 쇼와 덴노, 할아버지는 다이쇼 덴노이다.
생전에 일본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황족 중 한 명이었다.
1.2 출생과 성장
1954년 12월 29일[1], 다카히토 친왕과 유리코(百合子) 비의 3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큰누나 고노에 야스코(近衛寗子), 큰형 토모히토 친왕, 작은형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 작은누나 센 마사코(千容子)가 있다.
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 가쿠슈인 중등과와 가쿠슈인 고등과를 거쳐 1978년 가쿠슈인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캐나다의 퀸즈 대학교에 유학하였고, 1981년 귀국한 후에는 국제교류기금에 입사하여 일반 직원들과 똑같이 일하기도 했다. 이때 노리히토 친왕은 당시 중의원 의원이었던 스즈키 무네오(鈴木宗男)[2]에게서 항의전화를 받은 적이 있는데, 묵묵히 불평불만을 다 듣고서 정중하게 사과하였다고 한다. 스즈키 의원은 나중에야 자신의 전화를 받은 사람이 황족이었다는 것을 알고 몹시 당황했다고. 의원님!! 그 전화, 왕자님이 받으셨다는데요??[3]
취미는 스포츠, 사진, 예술 등이었으며, 이들 분야에 조예가 깊었다고 한다.
1.3 결혼
1984년 4월 23일, 노리히토 친왕은 캐나다 대사관에서 열린 연회에 참가했다가 돗토리 히사코(鳥取久子)를 알게 되었다. 히사코는 실업가 돗토리 시게지로(鳥取滋治郞)의 딸로 노리히토 친왕보다 1년 연상인 1953년생이며, 가톨릭계 미션스쿨인 세이신 여학원[4] 초등과와 중등과를 졸업한 후 영국으로 이민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인류학과 고고학을 전공한 유학파이기도 했다.
만난 지 1달 만에 노리히토 친왕은 히사코에게 "Will you marry me??"라며 영어로 청혼했고, 같은 해 12월 6일 결혼했다. 결혼하여 가장이 된 조카 노리히토 친왕에게 큰아버지 쇼와 덴노는 '다카마도노미야(高円宮)'라는 새로운 궁호를 하사,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이 창설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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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의 결혼사진.
1.4 자녀
히사코 비와의 사이에서 공주 3명을 낳았다. 다이쇼 덴노의 증손녀인 이 공주들은, 1947년 개정된 황실전범에 따라 여왕이라는 지위를 얻었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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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전의 모습. 노리히토 친왕, 히사코 비, 장녀 쓰구코 공주, 차녀 노리코 공주, 3녀 아야코 공주.
3자매의 어린 시절.
- 장녀 쓰구코 여왕(承子女王): 1986년 3월 8일생. 말썽꾼으로 이런저런 구설수에 올랐던 흑역사가 있다.인용 오류:
<ref></code> 태그를 닫는 <code></ref>
태그가 없습니다를 낳고서 잘 산다.</ref> 가쿠슈인 여자대학과 영국 에든버러(Edinburgh) 대학을 중퇴, 와세다대학 국제교양학부를 졸업했다.
- 차녀 노리코 여왕(典子女王): 1988년 7월 22일생. 가쿠슈인 대학 문학부 심리학과를 졸업했고,[6] 2014년 5월 27일 약혼을 발표, 10월에 결혼하여 황족의 지위를 잃고 평민이 되었다. 신랑이 된 센게 구니마로(千家國麿)는 노리코 공주보다 15살이나 연상인 1973년생으로, 이즈모타이샤라는 신사의 제관(祭官)이다.
- 3녀 아야코 여왕(絢子女王): 1990년 9월 15일생. 가쿠슈인에서 여자 고등과까지 졸업한 후, 죠사이(城西) 국제대학 복지종합학부로 진학했다. 큰언니 쓰구코 공주에 이어 가쿠슈인이 아닌 다른 학교로 진학한 2번째 사례. 졸업 후로 죠사이 국제대학 대학원에 진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1.5 황태자 부부와의 친분
나루히토 황태자는 5촌 당숙인 노리히토 친왕과 친했다. 당숙이라지만 고작 6년 차이여서, 당숙님이라기보다는 형과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나루히토 황태자가 한창 외교관 오와다 마사코를 사모하며 그녀와 결혼하려고 애쓰던 시절, 노리히토 친왕은 두 남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만남과 대화의 시간을 갖도록 해 주기도 하였다.
한편 마사코 황태자비의 아랫동서 키코 비가 1994년 둘째 카코 공주를 임신하였을 때, 히사코 비는 "큰며느리인 황태자비가 아직 아기를 낳지 않았는데 작은며느리가 계속 임신을 하다니, 황실의 서열을 생각하고 행동하길 바랍니다." 라고 쓴 소리를 하기도 하였다. 황실로 시집온 지 고작 1년, 황실 안팎으로부터 아들을 낳아야만 한다는 기대를 받으며 부담스러울 마사코 황태자비를 우려하여 한 발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키코 비는 또 무슨 죄란 말인가. [7][8]
1.6 한국 방문
2002 한일 월드컵 당시, 일본축구협회 명예회장으로서 아내 히사코 비와 함께 한국을 방문하여 개막식에 참석하였으며, 그외에 여러 경기를 관전하였다(총 19개). 원래 일본에선 공동개최국 국가원수 자격으로 아키히토 천황의 개막식 참석을 추진하였으나, 국민정서와 과거사 문제를 고려해서[9] 우리 정부가 거부하였고, 결국 타협안으로 노리히토 친왕 부부의 공식방문이 결정되었다. 참고로 2015년 현재까지 광복 이후 일본 황족이 대한민국을 공식방문한 유일한 사례이다. 그 외에 1970년 영친왕 장례식, 1989년 이방자 여사 장례식 때 다카히토 친왕 등이 비공식 방문한 적이 있다. (이는 이방자 여사가 일본 방계황족 출신이기 때문)
노리히토 친왕 부부는 월드컵 관람 이외에 다양한 일정을 소화하였는데, 경주시에 들러서 신라의 문화유산들을 감상하고, 서울특별시의 남대문시장과 부산광역시의 자갈치시장 등을 방문해서 다양한 한국인들과 만나기도 하였다. 또한 이방자 여사가 생전에 관여했던 장애인 복지시설도 방문했다.
노리히토 친왕과 히사코 비는 한국을 둘러보며 사진도 많이 찍고 기행문도 남겼는데, 이를 신문에 연재하기도 했다. 도중에 노리히토 친왕이 사망하는 바람에 마무리는 히사코 비가 하였으며, 이를 《다카마도노미야 전하가 본 한국》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1.7 죽음과 가문 단절
2002년 11월 21일, 노리히토 친왕은 도쿄에 있는 주일캐나다대사관에서 한창 운동(스쿼시)을 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만 47세의 나이로 급사하고 말았다.[10] 2003년에 일본을 찾은 노무현 대통령 내외가 미망인 히사코 비를 위문했다고 한다.
노리히토 친왕이 딸만 3명을 두고 사망했기 때문에, 현행 황실전범에 따르면 다카마도노미야 가문은 절손(絶孫)될 예정이다. 또한 노리히토 친왕의 큰형 토모히토 친왕도 두 딸 아키코 여왕과 요코(瑤子) 여왕만을 남기고 사망하였고, 작은형 가츠라노미야 요시히토 친왕은 독신으로 사망하여, 미카사노미야 가문 또한 절손될 예정이다.
2 일본의 만화가
2.1 Pixiv작가 필명
한자로 仁人라고 쓴다.
디시인사이드 만화 갤러리에 간간히 보이는 짤방의 주인공. 귀여운 그림체에 괴상한 스토리가 특징이다.- ↑ 아키히토 덴노의 둘째 손녀인 카코 공주의 생일이기도 하다. 카코 공주는 1994년생.
- ↑ 다혈질에다가 특히 관공서 직원들에게는 고압적으로 대했다고 한다.
- ↑ 아키히토 덴노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가쿠슈인 항목을 참조.
- ↑ 미치코 황후도 세이신 여학원을 졸업했다(중등과, 고등과, 대학).
- ↑ 덴노의 손녀까지는 내친왕(內親王), 증손녀부터는 여왕이라 한다. 남자의 경우 친왕/왕.
- ↑ 아키히토 덴노의 작은며느리 키코 비도 가쿠슈인 대학 심리학과를 졸업했다.
- ↑ 그러나 이후 카코 공주를 낳자마자, 키코 비는 딸이란 말에 곧장 갓 태어난 딸의 건강 상태가 아닌, 아들을 낳는 방법을 의사에게 물었다고 한다. 처음부터 의도가 있는 임신임을 반증할 수 있는 상황으로, 히사코 비가 임신한 키코 비를 상대로 충분히 나무랄 사유가 된다.
- ↑ 그 때문에 카코 공주는 태어난 이후에도 계속 눈치를 보며 자랐고, 어렸을 때는 무척 조용한 성격이었다. 그게 피겨 스케이팅을 배우게 된 이유가 되었다.
- ↑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은 덴노의 외국 방문에 대하여 '해당국과의 과거사 문제를 종결짓고 외교관계를 정상화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런 관점에서 1970년대부터 대만과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들을 방문하였다. 지금까지 과거 일제가 침략했던 국가 중에 덴노가 공식방문하지 못한 국가는 대한민국과 북한뿐이다.
- ↑ 공식사인은 심근경색으로 인한 심장마비이나, 평소 워낙 건강했던 양반이었고 그 동안 별다른 지병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기 때문에 살해당했다는 음모론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심지어 일본 고위 관료층에서도 이 급사에 대해 여러 의혹이 떠돌고 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