尹鍾華
이명 윤장섭(尹章燮)
창씨명 伊坂和夫
1908 ~ ?
일제강점기의 친일 관료. 창녕 군수와 종로경찰서 서장 역임.
1908년 충청남도 청양에서 태어나 공주고등보통학교, 일본 사가(佐賀)고등학교를 거쳐 규슈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했다. 졸업 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하여 경상남도 내무부에서 근무했다. 1937년 경상남도 창녕군수로 부임하여 재직하던 중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등의 전시 업무를 수행했다. 1939년 김해군수로 옮겨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용물자 조달 공출, 국방헌금 모금, 국채소화(國債消化)와 저축 장려 등의 업무를 수행하여 《지나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1940년 함경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2년 경기도 경찰부 보안과장을 역임하고, 1943년 9월 조선인 최초로 경성부 종로경찰서 서장에 임명되었다.
1943년 10월 1일자 《매일신보》에 다음과 같이 기고하였다.
근로태세 정비할 터종로는 반도의 중추지대이고 반도인 중상층 계급이 많은 곳으로 반도 민심의 동향을 결정하는 근원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에 활동가로 필승체제가 서 있지 않으면 병참기지 반도의 사명을 다하기 어려울 줄 안다. 경찰관은 민중의 선두에 서서 계몽과 지도를 하여야 할 것을 확신한다. 나는 우선 결전하 긴급 문제인 방공태세와 근로체제 정비 또는 생산력 확충 등 필승의 온갖 시책의 추진력이 되어 책임을 다하여 나가려 한다.
황민화운동추진위원회[1]의 고문과 국민총력 경성부연맹 이사로 선출되었고 1944년 조선인 최초로 경찰부장에 임명되어 황해도 경찰부 경찰부장(현재의 지방경찰청장 급)으로 해방될 때까지 근무했다.
해방 후 1945년 9월 소련군에 체포되어 평양 삼합리수용소에 수용되었다. 1946년 2월 중국의 훈춘, 러시아의 그로데코보를 거쳐 하바로프스크로 이송되었고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1949년 반민특위에 의해 소재불명으로 기소중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