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尹宅重
1913년 11월 12일 ~ 2002년 1월 26일
대한민국의 전 관료이자 정치인으로, 호는 오천(鳴川)이다.
1913년 전라북도 익산군(현 익산시) 낭산면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 보성전문학교 법학과(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가서 주오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후 귀국하여 전라북도 교육청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였다.
8.15 광복 후 한국민주당에 참여하였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전라북도 익산군 갑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국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무소속 강세형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단국대학교 학장을 역임하였다. 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무소속 강세형[1] 후보에게 설욕하였다. 같은 해 12월 신 국가보안법을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날치기로 통과시킨 사건에서 무술 경관의 폭력에 의해 부상을 당하였다.
1960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8월부터 1961년 5월 초까지 문교부(현 대한민국 교육부) 정무차관을 역임하였다. 그리고 1961년 5월 초순부터 문교부 장관에 임명되었으나 5.16 군사정변으로 인하여 보름만에 경질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단명 교육 부처의 수장 재임 기록이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전라북도 이리시-익산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민주공화당 김성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역시 민주공화당 김성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신민당 지도위원회 부의장을 역임하였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통일당 후보로 전라북도 이리시-익산군-군산시-옥구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민당 김현기 후보와 민주공화당 채영철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정치 은퇴 후 민족통일국민운동본부 상임공동대표, 민족사바로찾기국민회의 의장 등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