斯文亂賊
사회문화의 그지 같은 표 분석 문제를 가리킨 다고도 카더라
탕수육 소스를 조금만 찍어먹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카더라
1 개요
유교(斯文)를 어지럽히는(亂) 적(賊). 정확히 말해서 주자의 해석을 벗어난 학설을 펼치는 사람을 비방할 때 쓰는 말.
구체적 용례는 성리학이 확실하게 자리잡은 이후이다. 흔히 조선 후기 성리학이 종교화되면서 노론 치하에서 반대 세력의 인물들이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 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사문난적 논란은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문제고, 실제로는 다 정치적인 이유로 제거된 것. 즉, 조선시대의 후진성을 강조하기 위해 20세기 이후에 확대시킨 문제다.
숙종조에 송시열의 정적이었던 윤휴는 병자호란 전후로 북벌론으로 의기투합하여 송시열의 오랜 친구가 되었으나, <중용주해(中庸註解)>에서 주자의 해석 노선을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송시열과 평소 여러번 논쟁을 벌였다. 결국 그로 인해 단단히 삐친 송시열에 의해 사문난적으로 지목되었다.
또한 박세당은 <사변록(思辨錄)>을 통해 기존 성리학을 비판하다 역시 사문난적에 몰렸고, 남인의 거두 미수 허목은 어찌 유학만이 진리라 할수 있느냐는 취지의 발언을 했다가 사후 사문난적으로 몰려 매장되었고, 소론의 대부였던 윤증 등이 주자학을 비판하다 노론에 의해 사문난적에 몰렸다. 애초에 윤증과 송시열의 갈등이 서인의 노소론 분열의 시작이니 노론이 상대당들을 몰아내기 위해 썼던 스킬이라 볼 수 있다.
2 반박
일본의 주자학 연구자인 미우라 구니오(三浦國雄, 1941년~)에서 시작된 이 논지에 대한 비판은 다음과 같다.
2.1 사실 관계의 오류
대표적으로 사문난적에 대해 잘못 알려진 사실이 윤휴는 송시열이 사문난적으로 몰았기 때문에 사약을 받아 죽은 것으로 많이 알려져있지만 윤휴가 사문난적으로 지목된 것은 효종 때인 1653(효종 4년)년이고, 정작 사약을 받아 죽은 때는 경신환국, 즉 1680년이다. 이때의 죽음은 사문난적과 관계도 없다. (항목 참조.)
오히려 앞서 사문난적으로 몰린 후 관직으로 진출하려고 하자 송시열이 반대하였는데, 남인은 물론 같은 서인까지도 능력있는 윤휴를 혼자 싫어한다고 해서 반대하느냐고 항의하여 송시열이 한발짝 물러섰다. 끊어진 관계는 복원되진 않았지만, 최소한 송시열은 이 시점에서 윤휴의 비판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효종이 죽기 1년 전인 1659년(효종 10년)과 현종이 즉위한 1660년에는 아예 송시열이 그를 다시 천거(!) 했다. 이때 이유태는 윤휴의 사상이 의심스럽다며 그를 추천하는 일은 중단할 것을 권고했고, 이후원은 그를 등용했다가 후에 화를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하는 등 일부 서인의 반대 여론이 일었다. 심지어 이후원은 "공이 옛날에 윤휴가 주자를 공척한 것을 두고 배척하며 이단이라고 하였는데 이제는 세자로 하여금 이단의 학문을 배우게 하려는 것이오?"[1]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 송시열은 "주자도 육상산을 극력 공박하여 이단이라고 하였지만 상산이 남강(南康)에 이르자 주자는 여러 문하생들로 하여금 상산에게서 강학을 듣게 하였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일이 진실로 (옛날로부터) 이어받은 것입니다."[2]라는 말로 대답했다. 즉, 같은 당파의 여러 사람들이 말렸는데도 주자를 끌어오면서까지 강행했다는 것.[3]
이런 것을 보면 이 시기 까지만 해도 송시열은 (그 속마음이야 어떻든) 윤휴를 인간적으로 비난하거나 적으로 돌린 것 같진 않다. 주자의 행적까지 끌고온 것을 보면 학문적인 이견 정도로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망할 사문난적이지만 그걸 관용하는게 주자가 일찌기 보인 대인의 풍모였다고 생각했다든가 이러한 태도는 이 직후의 일인 예송논쟁 초기까지도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후에 이것이 정치적 이슈로 불어나고 나서야 송시열은 윤휴를 참적(讒賊), 적휴(賊鑴), 흑수(黑水)라고 멸시하기 시작했다. 윤휴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다고 송시열의 미움을 샀던 윤선거의 묘비명으로 불거진 송시열과 윤증과의 갈등도 현종 년간(1669년 이후)이다. 이것이 송시열과 윤휴, 그리고 윤증의 애증 관계의 실체(선후 관계)다.
2.2 학파간 갈등의 실체
우선, 조선 후기의 학자들 중에는 일본 유학의 경우처럼 성리학 그 자체를 부정하고 본격적으로 비판한 경우는 사실상 없다. 소위 실학자라 불리는 사람들도 성리학적 기반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이 아니다.
실제로 예송 논쟁 이전에는 그렇게 학파간의 갈등이 심각하지 않았다. 예컨데 남인의 거두 허목의 학설은 보다 온건했기에 김수홍이나 원두표, 유계 같은 서인들 일부도 지지하는 사태(?)까지 있었다. 남인들이 서인의 소현세자 일가 복권 주장을 효종을 부정하고 소현세자 정통을 부정했다고 정치공세를 한 뒤, 연이어 윤선도가 송시열의 예론을 극렬하게 비난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내부단속을 하기 전까지는 이들은 허목의 주장을 대놓고 지지하기까지 했다.
덧붙여, 윤휴와 허목의 학설은 지금 시각에서 보면 퇴보적으로 볼 수 있는 학설이기도 하다. 윤휴의 중용 주해의 논지를 간단히 정리하면 유학적 성인이 될 인물은 오직 군주에 국한되며 존비귀천의 사회구조를 실현하는 것이 예법이므로, 예법의 실천이 학문의 핵심이 된다라고 볼 수 있다. 옛 시각이든 지금 시각이든 까여도 싸다. 이는 유학적 성인의 소양이 모두에게 있다고 판단한 송시열에게 이 설은 말도 안되는 학설이었고 급기야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비판하게 된 것이다.
흔히 사문난적은 보수적인 견해를 유지하는 인물들이 신진적인 세력을 견제할 때 사용하던 스킬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조선성리학의 주축인 퇴계와 율곡의 학설만 봐도 주자의 견해를 그대로 답습하는 것이 아니었다. 퇴계의 주리론은 주자의 기본 전제와 어긋나는 학설이고, 율곡은 "주자라도 틀린 소리를 하면 틀린 거다"라고 말한다. 조선 성리학에 대한 막연한 편견들은 대부분 조선 시대 문집을 읽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만연한 편견들과 달리 송시열이 주자의 의심가는 해석을 정리한 <주자대전차의>를 지었고 <주자어류소분>을 지어 주자를 독자적으로 재해석한 적도 있다.[4]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기는 그가 갑인환국 이후로 귀양을 가서 윤휴가 전면에 나섰다가 숙종에게 찍혀 사사당하는 바로 그 시기였다. 성리학의 폐해 운운하는 사람들 중에 율곡전서나 송자대전을 훑어보기라도 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결론적으로 송시열은 귀양 중이라 윤휴를 사문난적이라고 죽일 수도 없었다.
심지어 그 송시열도 주자의 학문적 한계를 인정한 적이 있었다.[5]
한 마디로, '주자의 해석과 다른 해석을 했다'라는 타이틀 때문에 실제 그들의 해석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윤휴, 허목, 박세당 등은 졸지에 개혁자가 되었고 그렇지 않은 송시열, 송준길 등은 졸지에 '수꼴'의 수괴로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덧붙여 흔히 이 시대에 대해 설명할 때 사문난적 문제를 들면서 성리학은 말 그대로 "학"(學)이 아닌 "종교(敎)"로서 변질된다고 설명하는 예도 있는데 역시 오류. 敎라는 글자에 종교성이 두드러지는 건 20세기 이후 용례다.
2.3 덧붙여
위에서 열거된 정도의 사례는 현대의 학계에서도 흔히 일어나는 문제다. 역시 보편적 사례를 특수 사례로 왜곡하는 논리인 것.
후기의 조선은 새로운 사조에 대하여 폐쇄적 경향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양명학, 고증학을 금지했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말하면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다만 왕양명이 쓴 글은 내용이 주자학와 일치하지 않는 게 옥의 티라고 여기긴 했지만 문장이 뛰어나다고 평하고 다른 사람에게 추천했다. 또한 고증학은 세도 정치 시기에 잘만 들어왔다-이건 북학의 대두와 소중화 사상의 쇠퇴와 관련있는 듯-.). 거기에 고증학은 따지고 보면 아예 성리학과 분야가 다르다고도 할 수 있다.
"한 글자라도 의심을 품으면 요망하다 하고, 글귀를 서로 비교하면서 고찰하기라도 하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하니, 정주(程子·朱子)의 글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옛 경전은 어떠하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의 학문은 노둔함을 면하기 어렵다"
위와 같은 성호 이익의 비판은 현대에도 보수적 학자의 행태에서 발견되는 보편적 현상이다. 보편적으로 일어나는 폐단을 조선 왕조 특유의 폐단으로 왜곡하는 것이 일제 식민사관의 전형적인 논리다. 항목 참조. 게다가 조선 스스로를 비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제보다 과장된 말임을 알 수 있다(원래 무언가를 비판하는 사람은 실제보다 문제를 과장하는 경향이 있다. 한 예로 ). 당장 송시열도 주자도 틀릴 수 있다고 했고, 옛 것에만 집착했다면 성리학 내부의 다양한 견해 차이가 어떻게 발생했겠는가?
그러나 요새 아무리 보수적인 학자라도 옛 것에 의심을 품거나 비교분석하기만 해도 그것을 죄악시하진 않는다. 오히려 격동적인 발전을 겪었고, 지금도 겪고 있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미래'라는 말이 강박적으로 강조되지 '옛날'이 신성화되는 일은 없다. (그래서 전통을 존중한다는 본래적 의미의 보수가 자리잡지 못했다.) 지금도 정부 부처에 어떤 단어가 들어가는지를 생각해 보면 된다.
이런 수준의 보수적 생태는 일반적인 학문이 아니라 근본주의적 성향이 강한 종교들에서 강하게 드러나는데 - 대표적으로 근본주의적 성향이 다수파인 한국 개신교, 그리고 로마 가톨릭과 조계종의 근본주의적 부분들 - 이는 일반 사회의 보수성과는 차원이 다르기에 단순히 '어디서나 보이는 것'으로 넘어갈 일은 아니다. 하지만 이건 문과 학문, 특히 철학의 보수성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당장 한국 좌파계에서 사민주의를 만든 베른슈타인을 개량주의라며 경멸하고, 자본론이나 폴라니 정도나 인용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비판은 전근대 시기와 현대를 동등 비교한다는 한계가 있다. 당장 유럽도 그리스로마의 학문에만 매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조금만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보면 조선 시대와 현재의 학문적 이단의 의미가 차원이 다르다는걸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애초에 지금 한국의 지식인들은 정부를 비판하거나 위험한 사상을 주장해도 목숨에 지장은 없다. 조선 역시 전근대 사회치고 비교적 그러한 것에 대해서는 제도적으로는 의외로 유연했다.[6] 반면 옆 나라인 청나라의 경우 문자의 옥으로 인해 학문 연구가 씨가 말라 당시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청나라에서 성리학은 물론이고 심지어 왕양명의 학문조차도 보전이 어려울 지경이라고 한 바 있다. 거기에 더해 일본이 비교적 양명학이 흥한 것은 사실이지만 에도 막부도 주자학을 관학으로 삼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양명학을 탄압한 적은 적지 않다. 반면 조선은 선비들이 사회적으로 양명학을 디스할지언정 나라에서 양명학에 특별히 태클을 걸었다는 건 특별히 없다(정확히 말하지면 국가 관료에게는 성리학 이외의 사상이 금기시되긴 했지만 그 외에게는 관대했다.).[7] 그리고 조선이 반드시 사상적 폭이 좁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 수 있다. 가령, 18세기에서 19세기 초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가장 크리스트교가 흥한 동네가 조선이다.[8]
식민사관의 극복은 중요하지만 인정할 것은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 것이 짱이라는 재야사학의 경향성에 치우칠 수 있다. 애초에 유교가 만악의 근원도 아니며, 그렇다고 완벽한 정치 이념도 아닌 것이다. 사문난적은 조선의 이념으로서의 유교의 경직성을 드러내주는 작은 예일 뿐이다. 애초에 조선의 학자들 중 성리학을 크게 부정한 사람을 찾기 힘들고, 대부분이 성리학적 기반 하에서 학문을 전개해나갔다는 자체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생각해 보면 된다(하지만 이건 조선 유교의 경직성 말고 어지간한 주장은 성리학만으로도 충분히 주장할 수 있었다는 면도 있다.). 특히나 유불선 중에서 불과 선을 깊게 공부한 선비들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 이이는 절에서 불경 공부를 했었다고 성균관에서 왕따까지 당했었다(이건 이이가 국가 관료이기 때문으로, 국가 관료가 아니라면 상관없는 일이다.). 흠좀무- ↑ 公嘗斥尹之攻斥朱子而曰, 是異端矣. 今乃欲使世子學異端之學耶? - <송자대전습유> 권8, 오재이공유사
- ↑ 朱子力攻陸象山爲異端, 而象山至南康, 朱子乃使諸生聽講於象山. 余今日事, 實有所受也. - <송자대전습유> 권8, 오재이공유사
- ↑ 물론 여기에 대고 이후원은 "당신도 원래 하기 싫은거 억지로 하면서 참 포장 쩌시내요."라고 깠다.(...)
- ↑ 이러한 일련의 학술적 활동들은 송시열 개인에게서만 끝난 것이 아니고 그 학맥 내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한원진의 <주자언론동이고> 또한 이러한 게통의 산물.
- ↑ 특히 심성론에 있어서 미발(未發)에 대한 정의를 내릴 때, 이러한 태도를 보인바 있다.(안은수, 「尤菴 心性論의 특징과 의의 : 未發論을 중심으로」, 『조선의 주자학과 실학』, 혜안, 2009, 190~191쪽.) 관련 기록은 <송자대전> 권113에 있으며, 원문은 "前稟諸說, 多蒙印可, 自幸謏聞之不甚悖理矣, 惟未發之旨, 迄未相契, 豈前所稟者辭不達意, 以致如此耶? 朱先生於此, 亦不免前後異同."로 되어있다.
- ↑ 가령 성호 이익은 우왕신씨설을 대놓고 깐 바 있다.
- ↑ 단적으로 소론의 강화학파와 같이 종친 등이 양명학을 한 것도 있고 송시열도 왕양명을 옹호했다? 퇴계 이황이 양명학을 비판하긴 했지만 그 이황도 양명학에 영향을 받아 자기 사상을 정립했다.
- ↑ 정확히는 천주교가 흥했다 볼 수 있는데 비록 19세기들어 본격적으로 천주교가 조선에서 탄압당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실 전체적인 탄압의 레벨은 일본이 더 심했다. 이 지역에서는 아예 에도 막부 초기에 내전을 치른 전적도 있고, 후미에로 대표되는 혹심한 탄압을 했다. 중국의 경우는 선교전략이나 문화적 차이 때문에 천주교가 그닥 전파되지 못해 조선이나 일본급으로 탄압을 할 일은 없었다. 탄압이 없던 건 아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