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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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1580년 ~ 1658년 9월
백후(伯厚)
잠곡(潛谷)·회정당(晦靜堂)
본관청풍 김씨
출생지조선 경기도 가평군 잠곡
사망지조선 한성부 회현방 회현동

金堉

1 개요

"(김육은) 유림에서 나온 사람으로 평소에 중망을 지녔고, 그의 명예로운 이름과 역경에도 지켜낸 절개는 한 시대에 으뜸입니다. 정론(正論)이 사라지는 때에 온 조정 신료들의 어른 된 지위에 있으니, 나라 사람들의 그에 대한 기대가 마치 거센 물결에 버티고 있는 돌기둥 같습니다." [1]

조선 후기의 문신, 유학자, 사상가, 작가. 자는 백후(伯厚), 호는 잠곡(潛谷), 회정당(晦靜堂)인조 후반기에서 효종조 후반기까지 조선의 주요 고관으로 활동했다. 대동법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유명하며, 대동법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로 꼽히다보니 조선 후기 시대 인물 중에서도 손꼽힐 수준으로 많은 연구가 진행된 인물이기도 하다.

2 생애

2.1 출생부터 20대까지

김육은 외할아버지 조희맹의 집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묘팔현, 즉 기묘사화 당시 희생된 사람을 일컫는 기묘명현 중에서도 가장 높게 평가된 8명[2] 중 한 명으로 언급되는 김식의 증손자인 김흥우였고, 그의 어머니는 조광조의 동생 조숭조의 손녀딸이다. 기묘사화 후 이들 가문은 선조 원년(1568년) 복권될 때까지 오랫동안 과거에 응시할 자격, 즉 양반으로서 갖는 가장 근본적인 권리를 갖지 못했고, 이는 이들 가문의 세를 매우 궁핍하게 했다.

김육의 할아버지 김비는 기묘사림들의 정치적 복권에 힘입어 세 고을의 수령을 지냈고, 군자감 판관(종5품) 직을 지냈다. 또한 김흥우 역시 그가 22세 되던 선조 18년(1585)에 생원, 진사과에 모두 합격했다. 그러나 김흥우가 대과에 합격하기 전에 김비가 사망했으며(1590), 2년 뒤에 임진왜란이 발발(1592)하면서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김육의 가족은 고향인 평구를 떠나 강원도의 안협, 평안도의 삼등과 강동, 황해도의 안악, 송화, 해주, 충청도의 청주, 경기도 인천, 다시 해주, 연안, 안악으로 떠돌았다. 이 와중에 아버지인 김흥우가 1594년 4월 사망하면서 김육은 15세 나이로 가장이 되었으며, 19세 되던 해인 1598년 8월에는 할머니를, 1600년 1월에는 어머니를 잃었다. 김흥우는 유언으로 "네가 능히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우면 지하에서도 나는 오히려 기뻐할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김육은 부모님을 고향 평주에 합장했다. 당시 가문의 세가 워낙에 빈천하여 무덤 만드는 걸 도와줄 노비가 없었으며, 집안 내에서도 김육은 장남으로, 그 아래에 어린 남동생 하나, 여동생 둘만이 있었기에 김육은 혼자 힘으로 무덤을 만들 수밖엔 없었다. 이 일을 마치고는 김육은 전란이 막 끝난 서울로 올라가 고모에게 의지하면서 상을 치렀다. 김육은 50여 년 뒤에 이 시기를 회고하면서 부친의 사망부터 시작해 전란 와중에 8년 동안 상을 치르느라 거의 죽을 뻔했다고 말했다고 한다.[3]

김육은 모친상을 마친 다음 해인 선조 36년(1603) 사마시에 응시, 다음 해에 26세의 나이로 합격하고, 다시 그 다음 해인 1605년 2차 시험인 회시에도 합격하여 생원이 되었다. 또한 1604년 진사 윤급의 딸 파평 윤씨와 결혼했다.

2.2 회퇴변척 사건과 잠곡으로의 낙향

선조 즉위 후 사림이 집권하면서 추진한 것 중 하나는 오현종사이다. 이는 조선 전~중기 학맥의 정통이라 할만한 다섯 명, 즉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결국 광해군 2년(1610) 7월에 받아들여진다. 김육은 이때 성균관에 있었는데, 이를 대표하여 오현종사를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광해군 3년(1611) 3월, 정인홍이 상소를 올리면서 북인이 전체 사림에서 고립되는 계기인 '회퇴변척(晦退辨斥)' 사건이 터진다.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이 아닌 성운과 조식이 문묘에 올라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사실상 이 상소는 이황을 목표로 삼은 것이었으며 이는 이황과 조식 생전의 학문적 긴장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할 수 있다.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다수의 의병장을 배출한 북인은 이를 내세워 임란 이전 조정의 주류를 구성하던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았다.[4] 그리고 특히 광해군 정권은 이들 북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정권이었고, 정인홍은 조식의 제자 중심으로 형성된 북인 내에서도 가장 상징적인 인물이었기에 이 상소에는 힘이 실렸다.

하지만 성균관 유생들은 즉각적으로 이에 반발했다. 이들은 정인홍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고, 급기야 그를 청금록(靑衿錄)에서 지워버리는 일('삭적'이라고 한다)까지 해버리고 말았다. 이에 광해군은 크게 분노하여 가장 먼저 삭적 의논을 낸 자를 조사해 금고형을 내리라고 명령했다. 이에 성균관 유생들은 권당으로 저항했다.

이 당시 김육은 성균관의 재임(齋任)[5] 이었다. <잠곡집>에 따르면 청금록 삭제를 주도한 것은 김육이었으며, 스스로 상소를 올려 자신이 주도했음을 밝히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이덕형이항복 등 조정 중신들이 강하게 주장하여 김육은 금고형을 면할 수 있었다.[6]

그러나 결국 광해군 5년(1613), 김육은 성균관을 나와 온 가족을 이끌고 경기도 가평의 잠곡으로 낙향했다. 이는 계축옥사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선조에게서 영창대군을 잘 보살펴달라는 유명을 받은 일곱 대신을 비롯한 다수의 신하들이 유배되고 영창대군은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사망했으며, 인목대비의 가문에서도 다수의 사람들이 죽어나간데다 폐모 논의까지 진행된 계축옥사의 결과로 대북파만의 정권이 구축되자, 폐모살제와 이러한 일당 전제 정권에 실망하고 낙향한 사람들이 다수 발생하게 되는데, 김육도 그 중 하나였다. 특히 김육은 다른 낙향자와는 달리 지방에 가문을 지탱할 연고나 기반도 없었고, 정치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는 성균관 유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주목받은 듯하며, 이후에도 그에 대해 '청명고절(淸明苦節)이 탁월했다'는 평가가 나오는 주요 요인이 된다.

잠곡에서 김육은 직접 노동을 해 가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김육은 낙향 후 2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겨우 제대로 된 집을 마련할 수 있었으며, 산에서 나무하여 숯을 굽고, 그것을 지고 가 한양에 내다 팔아 생활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새벽에 파루를 치면 한양으로 제일 먼저 들어오는 숯장수가 김육이었다고 할 정도로 부지런히 노동에 전념했다고 한다. 김육이 이때를 회상하면서 지은 시에는 약초를 캐러 산에 올라가거나, 낚시한 뒤 밤에나 겨우 돌아오거나, 가을이 되면 추수하고 봄이 되면 밭을 가는, 당시의 일반 백성의 일상적인 노동이 잘 나타나 있다.[7]김육은 양반이자 성균관 유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나름의 권리마저 포기하고 완전히 일반 백성으로 생계를 유지한 셈이다.[8] 당시의 평균수명, 임란 이후의 고단한 일반 백성의 삶, 40대에 달하는 김육의 나이를 생각하면 김육이 다시 관직생활을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어쨌든 이후의 그의 생을 볼때 이런 고단한 생활 와중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때 체험한 일반 백성의 삶은, 이후 그의 정치인생에 있어서 민생에 대한 강한 관심과 현실감각이 뒷받침이 된 실무능력으로 빛을 발했다고 볼 수 있을것이다.

김육의 잠곡 생활은 10년만에 끝이 난다. 10년이 되던 해인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면서 광해군 북인 정권이 몰락하고, 그는 다시 관직 생활을 하게된다.

2.3 인조 시기

2.3.1 순조로운 관직 생활

인조반정 이후 반정 세력들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정권을 운영할 인물들을 확보하기 위해 인재 기용에 앞장섰다. 광해군 15년 동안 서인, 남인 측의 많은 유력인사가 이항복, 이덕형처럼 사망하거나 유배 생활로 건강을 해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사실상 명망 있고 조정에 안정감을 가져다 줄 중신이라고는 남인인 이원익 한 명만 남아있는 상태에서 인재 확보는 최우선 과제였다.

인조반정 후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광해군 조정에서 저항하다가 귀양간 사람이나 벼슬하기를 거부하고 낙향한 '지조와 절개가 가상한' 사람들을 6품직에 서용하고, 자리가 나는 대로 임명하도록 하는 대대적인 천거 인사가 있었다.[9] 이때 약 20여 명이 천거되었는데, 김육도 그 중 한 명으로 선발되어, 종5품인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김육은 천거로 기용된 것에 만족하지 않고 1623년 겨울에 문과 초시에 응시, 장원으로 급제하고 다음 해 9월에 실시된 2차 시험인 회시에는 3등으로 급제, 마지막 시험인 전시에서 다시 장원으로 급제한다. 조선 후기에 고위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문과 합격이 필요했는데 김육은 그 관문을 통과한 셈이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김육은 몽진하는 인조를 수행했고 그 공으로 충청도 음성 현감에 임명되었다. 2월에 음성에 부임한 김육은 4월에 업무에 관한 상소(음성진폐소)를 올렸는데, 이때 그는 공납 문제, 특히 고을의 크기에 따른 부세부담의 불균형 문제가 심하므로 행정구역 조정을 통해 고을별 부세 부담의 불균형을 완화하고자 하는 내용을 상소 안에 담았으며, 김육이 공납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해결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첫 번째 상소가 되었다.

이후 그는 성균관전적,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 병조정랑 등의 관직을 거친 후 다시 한번 음성현감으로 부임하기도 했는데, 임기를 마치고 한성부로 돌아갈 때는 송덕비가 세워지기도 할 정도로 업무를 잘 수행했다. 이후 사간원, 사헌부, 호패청에 속하는 관직들을 옮겨다녔다. 그는 청요직 및 주요 실무 담당 관직을 두루 거쳤는데, 이는 고위직에 오르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관직들이었다. 그러나 김육은 늦게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또한 특별한 학맥이나 인맥을 가진 사람은 아니었기에 뚜렷하게 부각된 인물은 아니었다. 이 시기 그는 과도한 호패법의 시행은 백성을 더욱 힘들게 할 뿐이며 민심이 불안해지므로 이를 중지 또는 완화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몇 건 올렸다.

2.3.2 두 차례의 호란과 대동법 시행 건의의 시작

정묘호란의 결과로 평안도, 황해도 일대가 심각한 타격을 받고, 그 외의 지역도 전쟁의 간접적인 피해를 입자 김육은 <논양서사의소>(論兩西事宜疏)를 올려 평안도, 황해도 일대의 세금 감면과 지원, 그리고 탈주한 병사들을 너그럽게 대해 줄 것을 건의했다. 1633년, 김육은 평안도 안변도호부사로 임명되어 2년여를 근무하면서 후금의 재침략에 대비했고, 이후 인조 14년(1636) 3월에는 동지성절천추진하사에 임명되어 명나라 사행길에 오른다. 후금이 요동을 점거하면서 육로가 끊기고 이로 인해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낼 수 없게 되다 보니 동지사, 성절사, 천추사의 임무를 한꺼번에 띠고 가게 된 셈. 이 사신단은 김육이 최초로 맡은 중국 사신 길임과 동시에 조선이 명으로 보낸 마지막 사신단이었다.

김육이 속한 사신단은 인조 14년 음력 6월 중순에 출발, 11월에 도착하여 15년 4월 말 무렵까지 북경에 머물렀다. 이는 예정보다 늦어진 것이다. 이렇게 일정이 지체된 이유는 간단했다. 그들이 사신단으로 간 사이 병자호란이 터져 귀국길을 잡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신단은 12월 25일 황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였을 때 병자호란이 터진 사실을 알았으며, 4월 말에 명나라 관리를 통해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이후 귀로를 서둘러 5월 14일에야 평양에 도착했다.

이후 인조 16년(1638년) 6월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 1년여를 재직했으며 이때 김육은 최초로 대동법 시행을 건의한다.[10] 이는 전임 충청도 감사 권반이 인조 4년에 작성한 대동법 관련 문서[11]를 검토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12] 충청도는 과도한 공납부담이 매우 심각했던 곳으로, 삼도대동법이 실패하여 취소된 후에도 여러 차례 도 단위에서 대동법 실시가 시도된 적이 있었다. 이는 충청도가 하삼도 중에서도 전란의 피해가 가장 가벼운 곳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내포 지역, 즉 임진왜란, 병자호란 당시 외적의 침입을 받지 않은 가야산 일대의 10여 개 고을이 땅이 넓고 기름진 데다가 조운도 편리하고, 전쟁의 참화를 겪지 않다 보니 관련 행정문서도 그대로 남아 있었으며, 집중적인 수취의 대상이 되어 조세불균형이 심각했다. 김육 또한 이를 인지하고 대동법 실시를 건의했다. 다만 이때의 건의는 아직 관련 지식이 부족했기 때문인지 과도하게 낮은 공물가[13]를 제안하여 그걸로는 기존의 정부 재정을 모두 감당할 수 없다는 지적을 받았다.

2.3.3 인조의 신뢰를 받으며 청과 조선을 오가다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한 후 인조 17년(1639)부터 20년(1642)까지 김육은 승지직을 역임했고, 가끔씩 병조참지, 홍문관 부제학, 한성부 우윤등을 맡았으나 이내 다시 승지직으로 복귀했다. 이후 인조 21년(1642)에 김육은 보양관으로 소현세자일행을 심양까지 수행했으며, 귀국 후 원손보양관,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으로 임명되었고 소현세자 일행이 잠시 조선에 나가 있는 동안 청의 요구에 따라 원손을 받들고 1642년 12월부터 1644년 7월까지 다시 심양에 체류했다. 이때 그는 북경 함락 소식을 듣는다. 북경이 함락되자 청은 소현세자 일행의 귀국을 허락했고, 1644년 12월 김육은 원접사로 임명되어 세자 일행을 맞이하기 위해 또다시 심양으로 가서 세자를 맞이한다. 소현세자가 귀국 후 2개월 만에 갑자기 사망하자 김육은 세자의 묘를 조성하는 책임을 맡아 이를 수행하기까지 했다.

이후 예조판서와 함께 세자책례도감 제조와 내의원 제조를 겸임하게 된다. 장기간에 걸쳐 왕의 명을 받드는 승지직을 맡길뿐만 아니라 청과의 외교(예조), 봉림대군(효종) 세자 책봉(세자책례도감), 그리고 왕의 건강을 담당하는 내의원의 관리 감독까지 모두 김육에게 겸임하도록 했다는 것은 그만큼 인조가 김육을 깊이 신뢰했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하지만 인조 말년에는 원손이 무식하고 어리다는 이유로 세손에 책봉하려 하지 않는 인조에게 반발하다가 호통을 듣기도 했다.

2.4 효종 시기

2.4.1 정승직에 오르다

인조 사망(1649) 당시 김육의 나이는 70세로, '치사(致仕)'를 할만한 나이였다. 이는 70세가 되면 스스로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다. 물론 명망 있는 대신의 경우라면 왕이 이를 만류하여 계속 일하도록 하는 경우가 빈번했으나, 어쨌든 70세 정도면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느슨하긴 해도 일종의 관행이었다. 김육 역시 인조의 장례를 치르고 난 뒤에는 물러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효종은 그런 김육에게 우의정을 맡겼고, 이후 김육이 일곱 차례 사직 상소를 올린 것도 모두 반려했다. 효종은 봉림대군으로 볼모로 잡혀 있던 시절 원손보양관으로 심양에 머무르던 시기의 김육과 시를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였으며, 김육은 인조시절의 관직 생활을 보면 알 수 있듯 중앙 정치 및 행정에 대해 장기간에 걸친 경험을 가진 관료였기 때문이다.
마지막 사직 상소가 반려되자 김육은 7가지의 정책 과제[14]의 해결을 요구하자 효종은 "경은 세상일에 뜻이 없어 한결같이 겸손하게 양보하여 물러나려는 생각을 마음속에서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조목별로 말한 내용을 보니, 집에 있다는 핑계로 회피하지 않고 국사를 위해 마음을 쓰는 간절한 충성이 여기에 이르렀는 바 감탄을 금치 못하겠다. 경은 모름지기 다시 사임하지 말고 속히 나와서 다스리는 원칙을 논하여 민생을 구제하라."라고 답했다.[15] 어이쿠, 세상일에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준비 많이 하셨네여. 나와서 일하시죠?

2.4.2 김육과 김집의 갈등

김집은 당시 가장 명망 높은 산림 인사로,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등을 제자로 두고 있는 당시 사림들의 대스승이었다. 그러다 보니 효종은 김집을 특히 예우했다. 이는 효종이, 병자호란 이후 당시 신료들 사이에서는 청에게 치욕적으로 항복한 인조 시기의 조정에 나가는 것을 기피하는 풍조가 있었고 이때문에 인조는 자신과 배를 같이 탄 인조반정 공신들에게 깊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인조의 정통성을 계승한데다 소현세자의 문제까지 겹치다보니 김자점의 도움을 받아야 즉위할 수 있을 정도로 정통성이 취약했기 때문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효종은 김집의 출사에 매우 공을 들였고, 그 결과 김집이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출사하자 서울 생활에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고 김집을 관행을 무시하고 종2품 예조참판에 바로 임명[16]할 정도로 극진히 대우했다. 이렇게 조정에 출사한 이들은 김집을 중심으로 뭉쳐 '산당'을 형성, 반정공신을 주축으로 형성된 두 파벌인 김자점의 낙당, 원두표의 원당과 함께 한 축을 형성했고, 김자점이 몰락하면서 사실상 당시 조정을 주도하는 세력으로 성장했다.

인조에 대한 졸곡제가 10월에 끝나자 곧 청나라 사신이 왔고 조선에서도 이에 답하는 사신을 파견했다. 김육이 다시 한번 적극적으로 대동법 관련 논의를 제기하자 김상헌은 '아직 임금의 제사도 다 안 끝났으니까 나중에 하자'는 반대의사를 표명했고 김집도 이에 반대했다. 대스승인 김집이 반대 입장을 표명하자 그 제자들인 송시열, 송준길등도 스승을 따라 반대에 동참했고, 결국 이때의 대동법 실시 시도는 좌절되었다.

당시 산당의 관심은 제도적 개편보다는 자신들을 중심으로 하는 인사 개편에 있었다. 이를 위해 산당은 김자점뿐만 아니라 같은 당파에 속한 일곱 대신들, 그리고 원당에 속한 예조 참의 이행진과 좌승지 이시해를 탄핵, 파직시켰고 김집은 인사를 담당하는 이조 판서직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후 김집은 3정승(당시 영의정은 이경석, 좌의정은 조익, 우의정은 김육)을 뛰어넘어 자신들과 가까운 원로대신인 김상헌도 인재를 추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건의를 한다. 이에 김육이 인사권은 오직 왕만이 가지는 큰 권한이라며 이에 반대, 둘은 다시 한 번 충돌했고 결국 연이어 사직하게 된다. 이에 송시열 등 산림의 주축 인사들도 김육에 항의하는 의미로 사직을 청했고, 김상헌 또한 성묘를 이유로 낙향했다.

이 상황에서 청이 개입한다. 효종 초기 김자점을 필두로 하는 친청파가 몰락하고 대청강경파인 산림층이 조정의 중추로 올라서자 청은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고[17] 군을 국경선에 배치하는 등 조선을 압박했다. 이에 아직 조정에 남아 있었고 청과 관계가 좋지 않았던 사림들 대다수는 낙향했고, 떠나지 못하고 남아 있던 영의정 이경석과 예조 판서 조경은 의주의 백마성에 유배되었다. 청은 이후 알아서 물러난 사람에 대해서나, 친청파였던 김자점이 완전히 몰락한 것 등은 문제 삼지 않겠지만 청에 적대적인 인사들을 조정에 등용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조선을 경고했고, 이 때문에 대표적인 반청 인사였던 김집, 김상헌은 조정에 욕을 끼칠 것을 우려하여 올라오지 못한다. 반면 김육은 여러 차례 사행을 다녀오면서 외교에도 밝았고, 청과의 관계가 원만했기에 금세 복귀할 수 있었다.

김육은 이 시기 대동법과 인사권 문제로 김집과 충돌하게 되면서 "스스로 보전하기가 어렵습니다."[18]라고 할 정도로 위기감을 느꼈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김집이 그만큼 당시 사림에 미치는 권위와 영향력이 매우 크고 강력했기 때문이다. 이게 어느 정도였냐면, 그 송시열조차도 후에 "대저 김집으로서도 제수받지 못한 관직을 신이 감히 무릅쓰고 받는다면, 이는 어짊을 소임으로 하는 군자의 도의에 어긋나게 되므로, 후세에 반드시 비난하기를 ‘수백 년 이래의 금석과 같은 법식이 아무개로부터 땅에 떨어졌다.’고 할 것입니다."[19]라고 말할 정도였다. 거기다 김육은 기묘사화로 화를 입고 가문이 빈천해지고 전란으로 인해 젊은 시절 몹시 고생했으므로 당쟁의 화에 특히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김육은 김집과 개인적으로 먼 관계도 아니었다. 김육과 동갑으로, 함께 근무하고 같이 술도 마시며 친하게 지내던 김반[20]의 여섯 살 많은 형이 김집이었기 때문이다. 즉 김육 개인에게 김집은 술친구의 나이 많은 형, 그것도 학식과 덕망으로 이름 높은 형이었다.

김집은 이 일과 관련하여 김육과 한평생 좋은 관계였으며, 서로 잘못한 점도 없고, 나중에 다시 만나게 되면 전과 다름없이 잘 지낼 것이며, 대동법 관련해서 의견충돌이 있었을 뿐이지 김육이 다른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옛날의 군자들은 서로 의견이 달라도 얼굴을 붉힐 일이 없다는 표현으로 서로 적대적인 관계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표명했다.[21] 즉 김육과의 충돌은 사적 감정이 개입된 게 아니라는 것. 또한 김집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로 방납의 폐단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있었고,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대동법을 나중에라도 시행하는 편이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도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22] 김집의 대동법 반대는 산림 전체의 입장이 아니라 김집 개인의 것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집 개인이 대동법을 반대한 건 삼도대동법의 실패를 체험한 김장생의 영향으로 여겨진다.

김상헌과도 마찰을 빚은 것 또한 김육에게는 거북한 것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김육이 김상헌과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 <잠곡유고>에 따르면 김육은 자신보다 10살 많은 김상헌을 스승으로 대하며 깊이 존중했었다고 한다. 잠곡으로 은거해 있을 때는 종종 김상헌의 집에 가서 세상사를 묻고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으며, 김육의 아버지 김흥우의 묘비명을 써 준 것도 김상헌이었다. 즉 그만큼 가까운 사람과도 의견충돌로 인해 사이에 틈이 벌어졌던 셈이다.

2.4.3 실권을 잡은 김육과 호서대동법

효종 2년(1651) 1월, 김육은 영의정으로 복귀한다. 이는 빈번하게 오고 가는 청 사신을 적절하게 맞이하고, 잦은 청 사신들의 방문으로 인해 대신들이 다수 낙향하면서 생긴 국정 공백을 메꾸기 위해서였다. 청의 압박에 의해 대동법에 반대하던 김집, 김상헌과 이들을 따르는 산당이 물러나게 되면서 조정 내에는 대동법에 우호적인 관료 계열의 경력을 지닌 인사들과 공신, 왕실, 외척들이 주류를 형성했다. 효종 1년 6월에 이미 민응형에 의해 대동법 실시가 다시 건의된 적이 있다는 것은 이를 입증한다. 몇 번의 논쟁 끝에 효종 2년(1651) 7월 호서대동법이 실시된다. 또한 7월 말 김육의 둘째 아들인 김우명의 딸이 세자빈으로 책봉되면서 김육은 외척이 되었고, 그 이전인 2월에는 <인조실록>의 총재관, 즉 총편집 책임자가 되었다.[23] 이로서 김육은 당시 조정의 실권을 잡게 된다.

산당이 물러난 시점에서 대동법에 대해 반대 의견을 낸 것은 원두표의 원당이다. 원두표는 당시 가장 권세가 강한 공신[24]으로, 원당의 영수이면서 대표적인 대동법 반대론자였다.[25] 또한 대동법의 실무를 총괄하게 된 이시방과의 관계도 몹시 좋지 않았다. 김육은 호서대동법이 실시되자 바로 원두표를 호조 판서직에서 몰아내도록 했고, 그 자리는 이시방이 대신한다. 원두표와 사돈관계였던 대사간 이시해가 이시방을 김자점 일파로 몰아 탄핵, 이시방이 귀양당할 때도 김육이 개입하여 이시방을 중도부처시키고, 석 달 뒤에 다시 복귀시켰다. 원두표도 이때 다시 형조 판서로 재기용된다.

지방에서도 대동법에 대한 산림의 반대가 나타났다. 보성의 전 장령인 은봉 안방준은 1652년에 지방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대동법을 실시하는 것은 잘못이라면서 강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26] 정묘호란, 병자호란 당시 의병을 일으킨 적이 있고[27], 성흔, 정철, 조헌의 문하에서 공부한 적이 있으며, 김류, 송준길과도 친분이 있었던, 호남을 대표하는 사림으로 확고한 지위를 가지고 있는 안방준의 반대는 상당한 무게가 있었다. 이에 대해 김육은 자신이 안방준과 친분이 있는데도 안방준이 이런 비판상소를 올린 것은 사사로움을 잊고 공적인 것을 받드는 지극한 정성이라 평하며, 대동법의 지속, 폐지 판단을 효종의 결단에 맡겼다. 효종은 대동법의 지속을 결정했다.

이후로도 김육은 효종 6년 7월까지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직을 번갈아 맡으며 조정의 정책을 주도했다. 이 시기 김육은 금속화폐 사용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미 효종 1년 진위사로 청에 다녀오면서 자신의 노자로 동전 15만 푼을 바꾸어 의주에서 이것의 유통을을 추진한 바 있는 김육은 당대의 실권자가 되자 동전통용책을 꾸준히 강하게 밀어붙였다. 효종 역시 이를 후원했다. 그러나 동전 통용 문제에 있어서는 평안도, 울산 등 일부 지역에서만 부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허적, 김석주 등이 숙종 시기에 상평통보 발행에 성공하게 된다.[28]

2.4.4 호남대동법 추진과 사망

나이와 질병의 문제로 김육은 효종 6년에 삼정승직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원임 대신으로 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 시기 그는 인조실록 편찬 경력 덕인지 <선조수정실록> 총재관으로 임명되기도 했으며[29] 대동법과 화폐 통용을 계속 추진했다.

호서대동법의 성공으로 효종 7년(1656)부터 호남 유생들이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해 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했는데,[30] 그 내용은 호남의 유생들은 호서대동법의 시행으로 충청도의 부담이 크게 완화되면서 전라도의 백성들이 충청도로 옮겨가고 있고, 그로 인해 남아있는 사람들의 조세와 역 부담이 심해지고 있다, 관찰사가 이런 정황을 알고 조사해 갔는데도 몇 달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다, 빨리 호남에도 대동법을 시행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백성들의 요청은 감색[31]과 넓은 토지를 지닌 토호들이 중간에 가로막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에 조정에서는 토호들이 다수 거주하는 산군(내륙)지역과 토호들이 적은 연해(해안가)지역을 분리하여 우선 연해 지역부터 대동법을 실시하고, 추후에 산군 지역까지 확대하기로 결정했다.[32] 다만 이 시기에는 효종이 세수 벌충을 위해 대대적인 노비 추쇄[33] 정책을 펴고 있었기 때문에 잠시 미루어졌다가 효종 8년 6월 노비 추쇄가 끝나자마자 준비에 들어갔다.

김육은 호남대동법의 실시에도 깊이 관여했다. 호서대동법이 성공하면서 대동법에 대한 지지 세력은 크게 확대되었고, 이에 반대하는 세력들보다 그 힘이 우위에 있었다. 원하는 고을에 선별적으로 시행하기로 결정한 후 효종 8년 11월 초까지 대동법에 대한 호남 각읍의 찬반 여론을 물어 결과를 취합, 김육이 직접 이를 효종에게 보고했다.[34] 또한 호남대동법의 주요 쟁점인 어공과 진상 물품을 어떤 형식으로 거둘 것인가에 대해서도 김육 자신의 주장인 경각사가 일괄적으로 쌀로 걷는 것으로 관철했다.

김육은 효종 9년 9월 4일 향년 7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김육은 호남대동법의 원활한 시행을 우려했으며[35], 이를 위해 효종이 대동법의 실무를 맡게 될 신임 호남 감사 서필원을 격려해주기를 성원했다.[36] 또한 자신의 뒤를 맡길 자로 송시열송준길을 지목하고, 이들을 잘 대우해 주었으면 한다는 말을 남겼다. 효종은 그의 사망 소식을 듣고 5일 동안 조회를 파했으며, 이후에도 무척 아쉬워했다.

2.5 인물됨과 평가

김육은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대사성 김식(金湜)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효행이 독실했고 장성하자 문학에 해박하여 사류들에게 존중받았다. 광해조 때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산 속에 묻혀 살면서 몸소 농사짓고 글을 읽으면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했다. 인조 반정에 이르러 제일 먼저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특별히 현감에 제수되고 이어서 갑과(甲科)에 뽑혔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 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모국이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金集)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했다. 향년 79세였다. 그의 차자 김우명(金佑明)이 세자의 국구(國舅)로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 효종실록 9년 9월 5일 김육의 졸기

허황된 말에 흔들리지 않고 굳건히 정책을 밀고 나가는데 영부사(領府事) 김육보다 더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한밤중에 자리에 누워 있다가도 그의 죽음을 생각하면 마치 나라의 기둥을 잃은 듯하다. - 승정원일기 155책, 효종 10년 3월 11일 자 효종의 발언

김육은 황희나 류성룡. 이원익이나 채제공 등과 더불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명재상으로 손꼽힌다. 특히 그는 절대 굴하지 않는 강한 추진력으로 유명했다. 대동법의 시행에 있어 그는 여러 정치적 반대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일관된 정책을 수행해 나아갔으며, 이는 화폐 유통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굽힘 없는 강한 추진력과 고집이야말로 김육의 최대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종종 이는 '한 가지를 고집하는 병통'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를 깊이 신임한 효종도 가끔은 "죽을 때까지 못 고칠 병"이라면서 그의 고집을 비판하기도 했다.

이런 강한 추진력은 김육의 여러 실무 경험으로 뒷받침된다. 현실을 무시한 탁상행정을 밀어붙였다면 강한 추진력은 그냥 옹고집이 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김육은 조정에 나섰을 때부터 주요 실무직, 특히 호패와 재정, 외교 분야와 관련된 관직을 두루 섭렵했으며, 이를 통해 현장의 상황을 누구보다 잘 알 수 있었다. 따라서 김육은 실현 가능성이 높은 정책이 무엇인가를 짚고 이를 추진해 나갈 수 있었다. 즉 김육의 추진력은 많은 실무 경험이 뒤를 받쳐줬기에 그 빛을 발했던 것이다.

물론 실무에 있어서는 김육 자신도 인정하는 그 이상의 관료[37]들이 있었으며, 김육은 구체적인 실천에 있어서는 이들과 의논하고, 이들에게 맡기는 모습을 보였다. 김육의 역할은 직접 실무를 담당하기보다는 이들 전문 관료들에 대한 정치적 보호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오로지 김육의 일관된 고집만이 대동법과 같은 개혁책의 성공 원인이라고 하는 것은 특정 개인에게만 모든 공을 돌리는 영웅사관에 불과하다.

이러한 강한 신념과 고집은 김육 개인의 행보에서도 나타난다. 회퇴변척소 사건 당시 김육은 당대 가장 강력한 정치적 힘을 가진 정인홍의 삭적을 주도했으며, 이후에도 잠곡으로 은거하여 10여 년 가까이 지내기도 했고, 청에 귀부하여 조선을 괴롭히던 매국노급 부청배였던 정명수가 사신으로 오다가 마중 나오는 사람이 김육이라는 것을 알고는 "이 사람은 나이가 많고 성질이 편협하여 우리와 서로 친하지 않다. 어째서 종사관도 대동하지 않고 온단 말인가"라면서 화를 낸 데서 알 수 있듯 위세가 강한 자라 해도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으면 결코 물러서지 않고 굽힘 없는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정책적 반대파들이 사적인 원수지간이 되지 않게끔 신중하게 처신했다. 김집이나 김상헌 등 대동법과 관련하여 그와 충돌했던 인사들은 김육과 개인적으로는 술도 같이 마시던 친한 친구의 형(김집)이거나, 아버지의 비문도 써주고 스승으로 여기던 존경스러운 이웃동네 선배(김상헌)였으며, 그들의 위명은 당대 사림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강력했다. 또한 김육이 강하게 정치적으로 견제했던 원두표는 당시 권세가 매우 강력한 인조반정 공신으로, "성품이 엉큼하고 시기심이 많으며 거칠고 사나워" 많은 사람들이 두려워하던 자였다. 이런 반대파들과 정책 측면에서의 대립을 넘어 정치적 정적이 되거나 개인적인 적이 되어버린다면 그건 김육이 추진하던 각종 정책뿐만 아니라 그 개인의 신상까지도 위기에 처할 수 있었다.

때문에 김육은 항상 이들과의 관계에 신경 썼다. 김집과의 관계는 김집이 대범하게 처신하여 원활하게 유지되었으며, 김상헌과의 관계도 크게 나빠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원두표의 경우 김육은 정치적으로 원두표를 강하게 몰아붙이고 그와 사이가 안 좋던 이시방을 적극적으로 옹호했고[38] 또한 원두표를 여러 차례 정치적으로 공격하여 그가 대동법과 관련된 사무에 있지 못하게 막았지만, 그와 동시에 원두표의 할아버지인 원호(元豪)[39]를 추증하는 사당을 세워줄 것을 건의하고 직접 원호의 시장을 쓸 정도로 원두표를 배려해 주기도 했다. 즉 김육은 정치적 반대파들을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반대파로만 머무르도록 하고 그들과 개인적인 원수는 되지 않게끔, 개인적 관계는 좋게 유지하는 신중한 처신을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김육은 또한 서인 내부의 파벌인 한당(漢黨)의 영수급 인물이기도 했다. 이는 김집을 중심으로 산림 출신의 인물들로 구성된 산당(山黨)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한강 이북지역에 모여 사는 관료계를 일컫는 말이다. 다만 이는 당대에는 그 이름이 전혀 나오지 않고, 김육 사후에 비로소 이름이 언급되는 등 실체가 뚜렷하지 않다. 반대 개념인 산당은 이미 당대에 이름이 나오고 있다.

김육에게서 주목할만한 점은 인조효종 등 당시의 조선의 왕들이 김육을 몹시 신뢰함과 동시에 산림들도 김육의 진정성을 신뢰했다는 데 있다. 김집이나 안방준 등 그와 정치적으로 대립한 거물급 산림들도 우선 김육의 진정성, 그가 산림의 신뢰를 받을 만한 군자라는 점은 일단 인정하고, 그 다음에 정책적 반대를 했다. 이러한 양측의 신뢰를 모두 얻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또한 대동법의 시행에 덕을 본 충청도 백성들은 충청도에 통문을 돌리고, 부의하려고 했던 돈으로 비석을 세웠는데 그것이 현재 평택에 있는'대동법시행기념비'[40]를 세웠다. 이는 이경석이 쓴 김육의 신도비문에서도 나타난다. 그만큼 그는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하겠다.

경기도 양평군 양근(楊根) 미원서원(迷源書院)과 충청북도 청풍 봉강서원(鳳岡書院),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강동(江東) 청계서원(淸溪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그 뒤 1704년(숙종 30)에는 가평의 유림들과 가평 지역 유지들의 공의로 건립된 잠곡서원(潛谷書院)에 제향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삼패동에 있다.

3 가족관계

두 아들(장남 김좌명, 차남 김우명)을 두었으며, 김우명의 딸이 명성왕후가 되면서 외척이 되었다. 또한 현종 말년~숙종 초기의 대표적인 외척 김석주는 그의 손자이다. 여담으로 김육은 장손인 김석주를 매우 귀여워해서 '석아(錫兒)'라는 애칭으로 불렀다고 전해진다. 이 중 김좌명은 매우 총명하고 재주가 뛰어나서 송시열이 동맹을 맺으려 할 정도였지만 일찍 죽었다. 하지만 이후 숙종 시대에 김좌명의 아들인 김석주가 송시열과 밀월 관계가 된다.[41]

일제강점기소설가김유정이 김육의 10대손이다. 차남인 김우명 가계이며, 김우명의 넷째 손자인 김도택의 후손이라고 한다.

4 저서

《잠곡필담(潛谷筆談)》
《유원총보(類苑叢寶)》
《송도지(松都誌)》
《팔현전(八賢傳)》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
《황명기략(皇明紀略)》
《종덕신편(種德新編)》

5 기타

'3월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었다.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0022770404
  1. 참고로 이 말은 사헌부 지평 이상진이 상소에서 본격적으로 김육의 정책을 비판하기 전에 쓴 말이다. 즉, 정치적 반대파도 그의 능력과 인품을 높게 사고 있었다는 의미다. (출처는 이정철이 쓴 <대동법-조선 최고의 개혁>)
  2. 정광필, 안당, 이장곤, 김정, 조광조, 김식, 기준, 신명인
  3. 잠곡유고, 권12 고모(姑母)인 의인(宜人) 청풍 김씨(淸風金氏)의 묘표, "나 김육(金堉)은 운명이 기구하여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고모에게 의지하였는데, 8년 동안 상을 치르느라 병이 들어 거의 죽을 뻔하였다."
  4. 북인의 대표라 할만한 정인홍에 의해 남인의 대표인 류성룡이 실각한 것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5. 장의(掌議) 2명(동서재 각 1명), 상색장(上色掌) 2명(동서재 각 1명), 하색장(下色掌) 2명(동서재 각 1명) 등 6명으로 구성된 성균관 유생들의 자치 운영직. 요즘 말로 하자면 학생회 쯤 된다.
  6. 이정철,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역사비평사, 2013) 345페이지
  7. 잠곡유고, 권1 <가소음(可笑吟)에 공경히 차운하다.> 약초 캐러 구름 뚫고 산 올라갔고 / 낚시한 뒤 달빛 안고 돌아왔었지 / 나무하는 늙은이나 농사꾼들과 / 세월이 오래됨에 사귐 깊었고 / 가을 서리 내리면 추수 서둘고 / 봄비가 내릴 적엔 밭을 갈았지.(하략)
  8. 박병련·곽진·이헌창·이영춘, <잠곡 김육 연구> (태학사, 2003) 81페이지
  9. 인조실록 1년 4월 8일 자 기사
  10. 이 때 안면도와 태안 반도 사이 운하를 뚫었다는 기록이 있다.
  11. 권반은 인조 1년 삼도대동법 실시 결정 당시 호조 참판으로 이익과 함께 참석한 적이 있었으며, 따라서 대동법의 재정적 요소에 대한 지식이 풍부한 인물이었다.
  12. 인조실록 16년 9월 27일 자 기사
  13. 포 1필과 쌀 2두. 즉 쌀로만 치면 약 7두 정도.
  14. 대동법 실시, 어영군을 병사(병부)에 소속, 강화도와 남한산성에 군량 비축, 삼남의 전세(田稅)를 강화도에 비축, 영남의 전세는 쌀 대신 무명으로 내게 함, 황해도의 전세는 황해도 연안 각산에 저장, 충청도와 전라도에서 정부가 실시하던 소금 전매를 중단하고 각 고을에 소속하게 할 것.
  15. 잠곡연보 인조 27년(1649) 10월
  16. 이게 얼마나 대단한 거냐면,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청요직을 두루 거친데다 왕의 신임을 받은 김육이 예조참판이 되기까지 20년 걸렸다.
  17. <통문관지(通文館志)>에 따르면, 효종 1년 청 사신의 조선 방문 횟수는 9회, 효종 2년에는 7회였다.
  18. 효종실록 1년 1월 22일 세 번째 기사
  19. 효종실록 9년 5월 5일 첫 번째 기사
  20. 서포 김만중의 할아버지
  21. 이정철, <언제나 민생을 염려하노니> (역사비평사, 2013) 387페이지
  22. 송시열은 우선 공안을 바로잡아 부담을 덜어주는 것이 급선무라고 주장했다. 대동법에 대한 그 개인의 입장은 밝히지 않았다. 송준길은 공안을 바로잡고, 대동법을 실시하고, 궁가와 세도가와 어염에 대한 세금 절감 조치를 금지하며, 내수사 폐지를 주장했다. 유계는 우선 공안을 개정해 공물가를 낮추고, 대동법을 뒤이어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즉 김집 제자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공안 개정이 선결되어야 하나, 대동법을 추후에라도 실시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23. <인조실록>은 효종 4년 7월 1일에 완성된다. 효종실록 4년 7월 1일 자 기사 참조
  24. 인조반정 당시 최명길의 묵인 또는 동의를 확인하는 공을 세워 정사공신 2등이 된다. 이후 효종 초에 김자점을 몰아냈다.
  25. 인조 초의 삼도대동법 당시 전라도 영광 군수로 재직하면서 그것이 실패로 돌아간 것을 경험한 것 때문으로 보인다.
  26. 효종실록, 효종 3년 5월 16일 2번째 기사
  27. 안방준은 <호남의병록>, <은봉전서> 등 다수의 시문과 저서들을 남겼으며, 이는 이 시기 의병 투쟁 및 당쟁을 연구하는데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지는 사료이다.
  28. 숙종실록, 숙종 4년 1월 23일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신하들을 접견하고, 비로소 돈을 사용하는 일을 정하였다. 돈은 천하에 통행하는 재화인데 오직 우리나라에서는 조종조로부터 누차 행하려고 하였으되 행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동전이 토산이 아닌데다 또 풍속이 중국과 달라 막히고 방해되어 행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었다. 이에 이르러 대신 허적·권대운 등이 시행하기를 청하매, 임금이 여러 신하에게 물어, 군신으로서 입시한 자가 모두 그 편리함을 말하였다.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호조·상평청·진휼청·어영청·사복시·훈련도감에 명하여 상평통보를 주조하여 돈 4백 문을 은 1냥의 값으로 정하여 시중에 유통하게 하였다.
  29. 효종실록 8년 1월 3일
  30. 부안의 유학자인 김상곤 등 3명의 연명장계(<승정원일기> 140책, 효종 7년 7월 11일)와 익산 유학자 소필창(<승정원일기> 141책, 효종 7년 7월 27일)등이 상소를 올렸다.
  31. 관청에서 물품의 출납을 맡아보는 감관과 담당 아전인 색리
  32. 연해지역은 전선을 만들고 수리하는 등 져야 하는 역이 많았다. 또한 관개가 되는 곳이 적은데다 여차하면 바닷물이 파고들 수 있어서 인구가 적었다. 반편 산군지역은 산에서 내려오는 물로 관개를 할 수 있어 가뭄에도 강했고, 인구도 많았다.
  33. 효종 6년(1655) 1월부터 시작되었다. 목적은 재정적자의 해소. 이 당시 강화도에 대대적인 군사시설을 확충하느라 세수가 부족했는데 '노비안에 등록된 노비 수가 19만인데 다 도망쳐서 실제로 신공을 거두는 노비는 2만 9천 밖엔 없네? 얘네 잡아와서 신공 거두면 되겠다'는 이유로 노비추쇄도감을 설치, 효종 8년 6월까지 대대적인 노비 추쇄가 이루어졌다. 다만, 추쇄에 성공한 노비는 2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실패한 정책이었다.
  34. 효종실록 8년 11월 8일 3번째 기사
  35. 잠곡 연보, 효종 9년 9월 3일 "같은 마을에 사는 상국(相國) 정태화(鄭太和)에게 심부름꾼을 보내어 말하기를, “호남에 대동법을 시행하는 일은 성상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상공께서 종시토록 힘써 주기 바란다." 하였다.
  36. 효종실록, 효종 9년 9월 5일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 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
  37. <호서대동절목>에서 김육은 직접 이시방, 남선, 허적, 김홍욱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들은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듯 나이도, 당파도 제각각이었으나 김육은 이들을 믿었으며, 이들이 없었다면 대동법은 성공할 수 없었다고 언급한다.(잠곡유고 권9 <호서대동절목의 서문> "다행히도 호조 판서 이시방(李時昉), 예조 판서 남선(南銑), 예조 참판 허적(許積)이 시종일관 한 마음으로 온갖 부역을 고르게 하고, 일에 따라 변통해서 막히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뚫는 데 힘입어서 봄가을로 거두는 공부(貢賦) 외에 다시는 갑자기 징수하는 일이 없게 되었다. 이에 공사(公私)간에 모두 안정되어 시기를 놓치지 않고 농사를 짓게 되었는바, 호산(湖山)에 사는 백성들이 저절로 태평스럽게 되고, 영해(嶺海)에 사는 백성들이 모두 자기들에게 늦게 시행하는 것을 원망하게 되었다. 그러자 당초에 이의를 제기하였던 사람들 가운데 자못 깨달아서 마음을 돌리는 이가 생겼다. 이것이 어찌 성상께서 결단을 내려 성사시키고, 제공들이 변통하여 마땅함을 얻은 결과가 아니겠는가." )
  38. 둘 사이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은 워낙에 유명해서 인조 22년(1644) 이시방에 대한 반역 무고가 있었을 당시(이시방이 공신이기도 하고 고발 내용 자체가 허황하다고 판단되었기에 이때의 무고는 그냥 넘어갔다.) 이 일을 꾸민 것이 원두표라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
  39. 임진왜란 당시 여주목사 겸 강원도조방장으로 여주 부근에서 싸웠으며, 강원도 김화 인근에서 전사.
  40. 이는 약칭으로, 정식 명칭은 '조선국영의정김공육대동균역만세불망비(朝鮮國領議政金公堉大同均役萬歲不忘碑)'이다.
  41. 김우명과는 여전히 껄끄러웠고 김석주도 숙종 초기까진 적대 관계에 가까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