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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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stification by Faith, 이신칭의(以信稱義)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로마서 1장 17절(개역개정)
복음은 하느님께서 인간을 당신과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인간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성서에도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 사람은 살 것이다." 하지 않았습니까?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 1장 17절 (공동변역)

1 소개

영어로는 가톨릭이나 개신교나 Justification 이고 한국어 번역시엔 개신교에선 이신칭의, 가톨릭에서는 의화(義化)라고 번역한다.

믿음으로써 의롭다고 칭함 받는 것이다. 서방교회의 핵심 교리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 마르틴 루터와 이후 개신교에서 강조하기 때문에 개신교의 교리로만 알고 있는데, 서방 교회가 공유하는 교리이며 해석과 개념이 다를 뿐이다. 즉 가톨릭에서도 정통 교리이다.

  • 이신칭의에 대한 천주교의 입장은 관련 목차 참조.

종교개혁시기 해석을 두고 개신교와 가톨릭의 분리된 가장 큰 계기이며 둘 사이의 가장 큰 신학적 갈등이 있었으며, 도리어 현대에 와서는 교회통합의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마르틴 루터는 가톨릭 교회의 부패상보다 신학이 잘못 되었음을 근거로 교회를 비판했기 때문인데[1] 이신칭의가 옳다면 모든이가 자신만의 사제가 되기에(만인사제설) 고해성사도 필요 없고, 사제계급도 필요 없으며, 로마교회의 수위권도 필요 없고, 선행의 보고를 무기로 면벌부나 성유물도 필요 없으며, 수도원이나 성지순례 고행 등도 필요 없다는 논지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루터에 의하면 교회를 서게 하고 넘어지게도 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교리 이다.


2 성서의 근거

구약에서도 '하나님(하느님)의 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다만 '의롭다 함(칭의)'라는 표현은 나오지 않는다. 비슷한 표현이 있다면 '언약 관계에 있다'는 문구이다. 구약에서 하나님(하느님) 부족한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고 불러서 관계를 맺는다. 이러한 언약 관계가 신약에서 구체화 된다고 본다[2]

신약에서는 사도바울의 서신에서 의롭다 칭해진다.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특히 개신교에서는 로마서의 이신칭의를 토대로 성서 전체를 맥락을 해석한다.


2.1 신약

기독교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로 오직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칭함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포인트는 '의롭다고 칭함받는다'라는 부분이다. 실제로는 죄인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선언해주시는 것이다.

이 개념은 유대 사회 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 일부가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기 시작하면 할례를 받아야한다는 주장에 맞서 사용되었다.

그는 할례나 율법이 아니라 믿음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로마서 4장 2절의 말마따나 절대적인 신 앞에서 인간의 행위로 자랑할 것은 없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죄를 짊어진 속죄제[3]로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값없이 의롭다 선고 받았다.

어떤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죄가 사함받고 구원에 이른다는 기독교의 구원교리인 것이다.


3 전개

3.1 종교개혁 전후

종교개혁 시대 이전 이신칭의를 다룬것은 서방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이다. 적어도 3세기 이전 바울의 서신의 이신칭의 신학에 대해선 언급이 거의 없다. 동방교회에선 이부분에 대해서 이후에도 별 논의가 없었다.[4]

아우구스티누스는 펠라기우스와의 원죄, 은혜, 자유의지 등의 논쟁에서 인간은 수동적이고, 절대적인 하나님의 섭리를 강조했다. (자세한 내용은 전문서 참고) 여기서 칭의를 근거로 신약성서를 해석하면서 아우구스티누스의 논리는 서방교회의 정통이 되었다.[5]
칭의론에 대한 연구는 상당기간 잊혀졌다.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5~6세기 지역 공의회에서 언급된 바는 있지만 그 이후 학자들의 인용빈도가 매우 적고 거의 잊혀져 갔다.

그러나 중세 스콜라 철학 시대에는 철학자들에게는 칭의론은 매우 중요한 주제로 다루어졌다. 스콜라 철학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인 토마스 아퀴나스도 당연히 칭의론을 연구한다. 당시 스콜라철학은 그리스 시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운동물리학의 영향을 받았기에[6] 칭의 이전에 은혜의 주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가톨릭 교회의 칭의론은 아퀴나스 신학을 바탕으로 고해성사등의 성례전의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스콜라 철학 시대가 저물어 가고 새로운 길(Via moderna)라는 새로운 사조가 15세기부터 유럽신학계에 퍼지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오컴의 면도날로 유명한 오컴의 윌리엄이 사변적이고 논리적인 스콜라 철학에 반기를 제시하며 이성의 영역과 신앙의 영역의 분리를 주장했는데,[7] 이러한 사조를 실재론에 반대되는 개념이라 하여 유명론이라 한다. 처음에 루터도 한때 에르푸르트 대학에서 철학도로 유명론의 영향을 깊게 받고 있었다. 유명론의 대표격인 오컴주의자들의 구원론 견해는 "하나님은 구원받고자 하는 이들에게 은혜를 저버리시지 않는다" 로 요약할 수 있는데 루터도 초기 신학의 입장은 이와 비슷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입회하고 수도생활과 사제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계율을 지키면서도 죄인이 스스로 자격을 갖춰 하나님의 의로움에 다가설수 있다는 주장에 점차 회의적이었다. 그러던 중 로마서의 연구와 유명한 '탑 체험'을 겪으며 인간은 스스로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 했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 칭할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루터에 의하면 인간은 완전히 타락하여 자유의지는 악으로만 기울기 때문에 따라서 스스로 인간은 내재적인 의로움이 없으며 믿음을 통해 의롭다 칭해질 뿐이고 속성은 여전히 죄인이다. 의로움은 하나님에게서 인간에게 전가되는 것으로 보았다.

다만 루터는 생애 동안 엄청난 양의 저작을 썼지만 칭의 이후 인간이 어떻게 변모하는지 그 이후의 삶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이들이 칭의 받는지에 대해서 저작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루터는 그때그때 이슈에 대하여 질문에 응답하고 자신의 견해를 발표하는 짤막한 글들을 많이 썼지, 신학을 체계화고 정리하는 조직신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8]

그렇기 때문에 같은 시기 남독일 츠빙글리 계열 마르틴 부처와 루터의 동료 필리프 멜란히톤 등은 루터의 견해를 받아들여 독자적인 칭의론을 연구했고 칭의 이후의 성화 단계(의로움 이후 완전해지는 단계)를 제시했다. 한 세대 후 신학자 장 칼뱅이 종합하여 개신교 내부의 여러 신학을 체계화 시킨다. 루터의 기본적인 입장을 온전히 받아들였고 정리하자면

  • 칭의는 법정적이다
  • 칭의는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뤄진다.
  • 인간에게 내재적인 의로움이 없기 하나님의 외재적인 의가 전가되는 것이다.
  • 칭의와 성화는 구분되나 분리될 수 없다.[9]
  • 칭의는 하나님이 외부에서 개입하시는 일이며, 성화는 사람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역사하시는 일이다.
  • 칭의 후의 삶에서 선행은 필수적이다.

이와 같은 견해는 현재 대부분의 개신교회의 입장이다.

(추가바람)


3.2 현대 개신교 교파 간 차이점

개신교파에선 종교개혁시기 이신칭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종교개혁시기 루터와 칼뱅주의에 날을 세웠던 재세례파 마저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개교회주의 성향이 있는 개신교 특성상 같은 교단이라도 목사나 신학자에 따라 갈리기 때문에 각 교단의 입장이 교단에 속한 목사나 신학자의 입장과 동일하진 않다. 대표적으로 알베르트 슈바이처만 하더라도 이신칭의는 바울시대 율법주의를 경계하려는 산물이지 신약성서 복음의 핵심적인 문구와 거리가 멀다고 주장했었다.

대체적으로는, 상대적으로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받아들인 감리회와 성결교회, 구세군과 성공회 일부[10]는 이신칭의는 받아들이지만 부드러운 편이고 루터와 칼뱅의 영향으로 루터교회와 칼뱅주의 개혁교회(=장로회)에선 종교개혁시기의 바탕한 엄격한 해석을 하고 있다.

다만 장로회 내에서도 루터의 이신칭의 구원론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드물다. 사실 마르틴 루터의 루터교회에서 조차 종교개혁 시기 순수 루터를 따르는 의견과 수정하는 의견이 대립할 정도 였다.

이신칭의 신앙이 강한 교파일 수록 예배의 예전성을 덜 신경쓰는 경향이 있다. 예전성을 신경쓰는 로마 가톨릭, 정교회와 성공회 고교회파와 달리 복음주의 개신교 교파들은 '믿음이 중요한 것이지, 형식에 너무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이다.


3.3 오해와 의문점

종교개혁시기부터 이신칭의 구원관에 대한 오해가 있어왔다. 특히 윤리의 부재에 대해서 비판이 있었는데 마르틴 루터는 이에 대해 구원은 복음으로 하는것이고 선행[11]은 의인이라 칭해진 결과로 따라온다며 구원관과 윤리관의 분리를 주장했었다. 그래서 칭의 그리고 땡 하면 뒷단계는 없다고 생각할수 있는데 칭의 뒤의 성화도 종교개혁 시기 부터 개신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논제다. 따라서 개신교의 신학에는 윤리가 없다고 비난하는 건 제대로 알지 못한 비난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은 종교개혁시기부터 오해를 불러오는데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로 인하여, 믿음을 통해 구원 받는다가 정확하다. 믿음이란 믿는다라는 행위가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 또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믿음이라는 길을 통해서 구원받는다는 표현이 적합하다. 이는 종교개혁시기 평신도 물론이고 신학자 사이에서도 오해를 불러오기 때문에 루터가 직접 여러번 글을 써서 적극적으로 반박한 내용이다.

또한 구원 받았으면 아무 짓이나 저질러도 되는가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물론 종교개혁시기에도 과격 개혁파와 재세례파에서 율법 폐지를 주장했으나 루터나 칼뱅은 이러한 주장을 단호히 배격했다. 루터는 의인이며 동시에 죄인 (simul iustus et peccator) 이라는 개념을 내세우는데 죄인이 하나님의 은혜로 의인의 옷을 입었을뿐 죄인의 속성은 그대로라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신칭의 구원관은 당시 유럽에서 만연한 타락의 기조를 바로세우고, 개인의 양심을 회복 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2] 왜냐하면 이전에는 개인단위의 양심과 구원을 강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전 15세기 이전 문맹률이 상당히 높았기 때문에 성서에 접근할만한 식자층이 적었다. 따라서 믿음 보다는 당시 시대상에서 교회에서 가르침에 의존하는 측면이 컸기 때문이다.
반면 현대적으론 의미가 퇴색되어 개인의 구원에만 관심을 가지게 된다는 비판도 있다.

기독교의 칭의와 구원교리는 행위도 중요하다. 야고보서 에는 분명히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나와 있다며 행위 없는 개신교 믿음이라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는데 개신교 내부에서도 이 토론은 오래된 논쟁이다. 대체로 현재애는 이것이 상충되는 관계라든가 다른 개념으로 보지 않고, 상호보완적인것으로 보고 있다. 일반적으로 장로회 같은 칼뱅파의 경우 선한 행위는 칭의의 증거라고 여기며 웨슬리안 계통 교파들은 칭의 이후 구원에 다다르는 성화의 과정으로 여긴다. 그래도 둘 다 선행을 구원받은 자의 징표 정도로 본다는 점은 비슷하다.


4 천주교의 입장

천주교는 종교개혁시기 마르틴 루터의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주장에 대해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성서근거와 가톨릭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 당연한 것이지만 루터가 주장한 오직 믿음 에서 '오직 (Sola)'을 틀렸다고 보았다. 중세 가톨릭 성경의 정본 불가타에서 명백히 오직을 뜻하는 구절이 암시가 없는데다가 그런식으로 해석하면 야고보서와 충돌하기 때문.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개인의 영역이라기보단 교회의 역할이라고 보았다.[13]

단순히 마음으로 믿을 뿐만 아니라 행위로서 믿음을 증명하며 성화에 이르러야 한다는 구원관을 갖고 있다. 애초에 개신교처럼 '인간은 원래 의롭지 못한데 하나님이 믿는 자를 의인이라고 칭해 주신다'는 관점이 아니라 세례성사[14][15] 자체가 인간을 하느님의 자녀로 의롭게 만들어 준다는 관점을 교리로 내세운다. 그리고 세례성사를 통해 주입된 하느님의 은총을 보존하면서 지속적으로 의로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개인적인 노력으로서 선행이 필요한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한국 천주교에서는 의화로 번역한다.

루터나 칼뱅을 비롯한 개신교 신학자들은 믿음으로써 칭의에 다다른 사람이 은혜의 열매로서 선해지고 선한 행위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가톨릭은 마음으로 믿는 것과 몸으로 하는 선행이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다시 말해 개신교의 구원관에 나오는 소위 칭의와 성화는 서로 구분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에) 선행을 통해서 본인이 세례성사로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얻은 의를 유지해 가야 한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행위와 믿음을 완전히 분리해 버리고 선행을 믿음의 결과, 구원의 증거로만 여기는 개신교식 이신칭의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5 현대적 이신칭의

앞서 서술했던 대로 현대에 와선 이신칭의론으로 갈려졌던 서방교회가 이신칭의 합의를 통해 대화에 나서고 있다.
그 결과 가톨릭 교회에선 1999년 루터교회, 2006년 감리회와의 이신칭의(의화) 일치선언을 통하여 어느정도 일치를 이뤘는데 대략 다음과 같다.

  • 원죄의 결과 모든 인간은 칭의가 필요하다.
  • 하나님(하느님)의 은총은 값없이 주어지고, 칭의(의화)는 전적으로 하나님(하느님)의 은혜이다.
  • 우리는 칭의를 받으므로 하나님(하느님) 앞에 의롭다고 선언 받는다
  • 의롭다 하심 받은 자들은 모두 성령에 의해 계속 새롭게 세워지고 선행할 수 있는 동기와 능력을 제공받는다.

자세한것은 '루터교 세계 연맹'과 '교황청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위원회'의 《의화합동선언문》등을 참조 바람.


칭의론에서 아직 신학적으로 갈리는 문제는 인간론 부분에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차이이다. 가톨릭에서는 인간안에 내재적인 의로움이 있기 때문에[16] 하나님의 은혜가 주입된다고 보는 측면이라면 개신교에서는 완전히 타락하여 내적인 의로움이 없고[17] 오로지 하나님의 의로움이 전가(transfer) 되어야 한다고 본다.

또하나는 칭의의 법정적 의미로 해석하는 개신교 칭의를 사건(event)로 보는 측면이 강하다.가톨릭 입장에 차이가 있는데 가톨릭에서는 죄인인 인간이 다시 하느님과의 관계의 회복 측면으로 바라보는 점이 다르다.


성화단계에 있어선 많은부분의 일치를 이루었는데 트리엔트 공의회 이전 온건 가톨릭 신학자(콘타리니 추기경)와 이미 온건 개신교 신학자(필리프 멜란히톤) 이래 서로 개념상의 문제로 다른 개념으로 이해하여 오해를 불러일으킨 측면이 크다고 본다. 현재는 가톨릭 교회에서도 '성화'라는 개념을 들어 설명하지만 16세기 당시에는 개신교 신학자 마르틴 부처, 멜란히톤, 장 칼뱅 등의 견해를 전혀 인정치 않았기에 가톨릭에선 의화(Justification)의 개념만을 사용하여 개신교 신학에 반박했기 때문인데, 가톨릭 의화 개념은 개신교의 칭의와 성화 개념을 모두 포함한다고 보면 비슷하다.
  1. 작센지역 면벌부종교개혁의 직접적 사건이긴 하지만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부패를 직접 비판하는것이 아니라 중세 스콜라 철학이 교회를 잘못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봤다. 다른 문제는 부차적이라는 셈
  2. 이신칭의 (앨리스터 맥그래스)
  3. 유대의 제사 중 한 종류로, 죄를 지었을 때 정해진 몇가지 동물 중 하나에 죄를 전가시켜 죽인다.
  4. 인간의 지위에 대해 신성화(신화)의 관점이라 서방교회 해석과 다르다고 한다. 동방에선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관부터 해석상 틀리다 여겼으며 10세기 이후 아우구스티누스의 라틴어 서적이 그리스어로 역번역 되었지만 역시 인정받지 못했다.
  5. 가톨릭에서 펠라기우스 주의는 이단 선언되었고, 변형된 펠라기우스 (반펠라기우스주의) 또한 역시 이단으로 선고된다.
  6. 이교도 철학의 개념을 받아들이는 문제에 있어 교부시대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의 지식이라도 하나님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다면 무방하다. 오히려 비유를 들어 하나님께서 금은 재화를 이교도에 맡겨두신것으로 기독교인이 찾아서 써야한다며 적극적으로 장려한 반면 역시 이전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는 이런 접근에 반대했다. 이교도의 신앙이 결핍된 지식은 성경과 관련이 없다는 반박.
  7. 그리하여 현재 근대 철학의 선구자로 꼽힌다.
  8. 마르틴 루터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신학교수, 저술, 설교, 목사 양성, 각지 교회와 신학자들의 문답등으로 엄청난 격무에 시달렸다. 그리고 예정에 대해 크게 언급하지 못한건 재세례파들이 자신들을 선택받은 백성, 기존 가톨릭교회와 지배세력들을 가나안 백성이라며 쳐죽이는걸 정당화 했기 때문이다.
  9. 가톨릭 교회는 성화 역시 의화에 포함되는 개념으로 둘이 구분되지도 않는다고 주장한다.
  10. 성공회는 기본적으로 칼뱅주의의 영향을 받아 온건한 예정론 구원관을 취한다고 하지만(39개 신조), 특정 구원관을 신자에게 강요하지 않으며 감리교식 구원관이나 천주교식 구원관을 취하는 성공회 신자들도 존재한다.
  11. 세속적인 선행과 다르다. 이 부분에 대해서 가톨릭은 교회에서 인정한 선행, 루터는 하나님 보기에 합당한 행동이라 본다.
  12. 하인리히 하이네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관하여(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
  13. 중세 가톨릭 신학자들도 개인도 가능하다고 보는 학자도 있었지만 소수설이었다.(다만 당시에도 이단 소리 들은 것은 아니다.)
  14. 가톨릭에서는 세례를 받음으로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며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제대로 형성된다고 가르친다. 이런 교리도 세례 여부에 관련없이 믿음 그 자체로 칭의된다는 개신교와 다르다.
  15. 여기서 infused righteousness(의로움의 주입)라는 개념이 등장하는데 가톨릭 교회의 의화 교리는 의화가 한번에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세례성사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지속적인 성사와 고백, 속죄, 그리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주입된다는 것이다. 칼뱅파는 의로움의 전가를 주장한다.
  16.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대로 자유의지속에 선과 악이 있지만 악으로 균형추가 심하게 기울어있어 악을 행할수 밖에 없다고 본다.
  17. 루터와 칼뱅은 인간은 악으로 완전히 타락하여 자유의지는 죄를 짓는 방향만으로 간다고 본다. 결론은 비슷하지만 신학전제와 개념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