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신약 성경의 한 권으로 바오로 서간 중 맨 첫 번째로 오는 책이다.
사도 바오로가 로마 교회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로, 바오로가 3차 전도 여행 중에 있던 기원후 57년 경 코린트에서 썼다고 여겨진다. 바오로는 로마 교회의 신자들을 방문하기를 원하였으나 어떤 이유로 인해서 그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로마 교회는 바오로가 세운 교회는 아니었으며, 로마 교회의 신자들에게 보낸 이 편지에서 바오로는 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교리들에 대해 서술하였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출신 그리스도인이 섞여 있었는데, 율법을 중시하는 유대인 출신 신자들과 이방인 출신 신자들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오로는 로마서를 통해 율법을 통해 구원받는 것이 아닌 믿음을 통해 구원받는다는 것을 확실히 하였으며 이는 후대에 'justification'라는[1] 이름으로 정리되었다.
또한 편지의 후반부에서 바오로는 믿음을 통해 새롭게 된 이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지, 형제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에 대한 규범을 로마 신자들에게 제시하였다.
2 justification의 의미: 의화? 칭의?
정교회와 가톨릭, 개신교는 이 로마서의 핵심 사상 중 하나인 justification의 의미에 대한 해석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때문에 한국어 번역 역시도 차이가 난다. 서방교회라는 같은 뿌리를 두고 있는 가톨릭과 개신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예정설을 바탕으로 바오로의 justification을 매우 중요한 교리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바라보는 두 종파는 미세한 관점의 차이를 갖고 있는데 한국 천주교에서는 개신교는 각각 이를 '의화'와 '칭의'로 번역했고 이 둘이 내포하는 의미는 차이가 있다.
justification 개념은 로마서 3장 23-24절에 나오는 개념인데, 대부분의 한국의 개신교 종파에서 사용하는 개역판 성경과 한국 천주교에서 사용하는 주교회의 번역 성경에서는 여기서 명백하게 차이나는 번역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천주교 성경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3] - 개신교 개역판 성경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에 못 미치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얻는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 개신교 새번역 성경
이 번역의 차이는 어찌 보면 가톨릭과 다른 개신교 종파들의 교리 차이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가톨릭의 의화와 개신교의 칭의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단순하다. 의화는 예수의 수난과 부활로 인간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그것은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진짜로 의로워지게 된다는 것이며, 칭의는 원래 인간이란 작자들은 절대로 의로울 수 없는 존재인데 예수가 수난과 부활로 인간의 죄를 사해 주었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가 인간들에게 미쳐 의롭다 칭함 받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의인이 아니었던 자가 예수의 죄사함을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얻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이다.
이 차이가 중요한 이유는 결국 가톨릭과 나머지 개신교 종파들의 구원관이 여기서 갈라지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개신교 종파들은 인간은 의인이 될 수 없는데 예수를 믿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의인으로 칭함 받고 구원받을 수 있다 여기기 때문에 이신칭의 곧 믿음으로서 의롭다 하심을 얻고 그를 통해 구원받는다는 교리를 가지고 있다. 또한 이 해석은 로마서 1장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라는 구절과도 모순이 없고 마르틴 루터 역시 이 구조의 이신칭의를 적극 주장하였다.
또한 개신교 종파들의 구원관이 흔히 오해되기도 하는데, '칭의'는 믿기만 하고 아무짓 안해도 구원 받는다는 주장이 절대로 아니다. 이런 주장은 구원파가 즐겨하는데 전형적인 도덕무용론으로서 개신교에서도 이단 취급 당한다. 일반적으로는 '진정한 믿음을 가진 자들은 칭의 이후에는 죄를 짓더라도 진심으로 회개하고 선하게 살려 노력한다는 설명이 뒷받침된다. 그러나 칭의론 자체가 잘못 해석하면 구원파스러운 해석으로 빠지기 십상인 신학적 이론이라 이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루터를 대신하여 칼뱅과 웨슬리는 중생(거듭남)과 성화에 대한 신학적인 이론들을 재정립하여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다.[4]
반면 가톨릭의 의화는 의인들은 구원을 받고 그 의로움이 믿음에서 온다는 것 자체는 같은 그리스도인만큼 동일하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믿는 이들이 정말로 의로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가톨릭 신자도 나쁜 짓 할 수 있던데요?"라는 당연한 질문이 따라오게 된다. 여기에 대해서 가톨릭 교회는 로마서의 또다른 구절은 5장 1-5절을 덧붙여서 설명한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믿음 덕분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로마서 5장 1-5절(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번역본)
즉 가톨릭에서 말하는 의화의 내용은 '죄의 용서와 내면적 쇄신'이다. 인간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죄를 용서 받을 수 있고, 인간은 이 은총을 잃지 않도록 끊임없이 스스로를 쇄신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은 인간이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는 의지와 선행을 개신교보다 더 강조하는 편이다. 간혹 가다 가톨릭이 인간의 행위를 믿음과 동등한 구원의 조건으로 여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는 일부 가톨릭 비판자들의 잘못된 교리해석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똑같은 믿음이지만 가톨릭에서는 행함 자체를 믿음의 한 측면이라고 보기 때문에 행위와 믿음을 분리해서 보는 대다수의 개신교 종파들과는 차이가 있다. 사실 믿음이 행위를 포함한다고 보든 아니든 성경 해석 자체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신교 종파들은 행위는 믿음의 열매와 같은 것이며 참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선행으로 그 믿음을 드러낸다고 하는데 결과론적으로 놓고 보면 가톨릭과 개신교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관점 차이는 사실 교리상으로 딱히 중요한 것도 아니며 결국 표현상의 차이로밖에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이 둘과 정교회 사이의 교리적 갭이 더 큰 편이다. 그러나 개신교 신학자들 대다수는 정교회에 대해 무지하다. 야고보서에서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는 가톨릭의 교리와 개신교의 교리로 모두 설명 가능하다. 결론적으로는 가톨릭의 교리의 핵심도 결국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오는 것'이고, 행위구원론은 일찍이 교부 아우구스티누스가 발라버려서 박멸시켰기에 가톨릭에서도 이단이다.
물론 가톨릭에서 개인의 선행과 보속을 중요시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는 중세 가톨릭 교회가 이웃에 대한 자선 등의 선행을 강조하는 긍정적 효과를 낳았다. 다만 부정적 효과도 낳았는데, 자선의 본 의미가 퇴색되고 신자들이 이를 마치 일종의 퀘스트 마냥 인식하는 부작용도 있었다. 이런 부작용의 가장 극단적인 결과물이 바로 루터 시대에 독일을 뒤집어놓은 면벌부이다.[5] 그리고 널리 알려졌다시피 이는 개신교가 유럽에 출현하는 계기가 된다. 당연히 가톨릭 입장에서는 훗날 개신교를 반박하면서도, 신자들이 선행을 퀘스트로 인식하는 부작용을 해결할 필요성이 있었다. 때문에 트리엔트 공의회에서는 제6차 회기 전체를 의화에 대한 회의에 할당했으며, 그 결과로 '의화에 관한 교령(Decretum de iustificatione)'를 선포한다.[6] 가톨릭 교회의 의화론에 대한 상세한 정리는 트리엔트 공의회 문서를 참조하는 것을 추천한다.
20세기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는 justification의 해석에 대해서 가톨릭과 개신교의 대화가 늘어나고 있다. 루터교, 감리교와 의화교리 공동 선언을 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들 종파들이 기존 교리를 수정하였다기보다는, 서로 공통되는 사항들을 정리한 것에 가깝다.
의화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영문 위키백과 참조
정교회는 바오로가 말한 justification을 다른 뉘앙스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이는 동방 서방 교회의 교리상의 강조점 차이에서 기원한다. 정교회의 구원론은 '테오시스'(神化)라고 칭한다. 자세한 내용은 예정설 문서의 '정교회의 구원론' 문단 참고.[7]
그런데 어느새 로마서 자체에 대한 내용보다는, 의화vs칭의에 대한 설명이 더 길어졌다
3 동성애 혐오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이와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하느님의 법규를 알면서도, 그들은 그런 짓을 할 뿐만 아니라 그 같은 짓을 저지르는 자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 성경 로마서 1장 26~27, 32절,공동번역성서
대부분의 기독교에서 교리적으로 동성애를 죄악으로 규정할 때 레위기 다음으로 로마서를 자주 인용된다. 신약성서에서는 구약과 달리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비교적 적은데,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 이 로마서에 나오기 때문.
4 주요 내용
- 1장~3장: 문안, 유대인과 이방인의 죄
- 3장~5장: 믿음으로 의롭게 되다
- 6장: 죄에서 벗어나 의로움의 종으로
- 7장: 율법과 죄
- 8장: 성령 안에서 해방받다, 고난과 영광
- 9장~11장: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위한 구원
- 12장~15장: 그리스도인의 삶
- 15장~16장: 바오로의 여행 계획
사람은 율법을 지키는 것과는 관계없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다고 우리는 확신합니다. (3장 28절) |
이 말씀은 육정의 자녀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고 오직 약속의 자녀만이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받는다는 뜻입니다. (9장 8절) |
- ↑ 이 영문표기는 가톨릭에서는 '의화', 개신교에서는 '칭의'로 번역된다. 자세한건 후술. 일단 본 항목에서는 중립성을 위해서 불가피하게 영문으로 적었다.
- ↑ 여기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것이 칭의. 다시 말해 의로움을 칭함 받는 것이다.
- ↑ 한편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이 구절을 하느님과의 관계에만 초점을 맞추어 상당히 애매하게 번역하였다.
- ↑ 사실 위의 설명은 로마서 해석차의 간단한 설명일 뿐이고 개신교 종파들은 출발부터가 가톨릭 교리의 대다수를 뒤엎어버리고 새로 출발한 교파들이라 각주에 덧붙인 믿음과 행위에 관한 사소한 시각 차이 외에도 인간의 자유 의지나 예정설, 그리고 가톨릭의 구원관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교리인 연옥과 7성사 등 무수하게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서는 로마서와 칭의/의화의 관계에 관한 간단한 설명만 덧붙인다. 또 한가지 중요한 차이점으로는 하느님과 인간의 사이에 사제가 반드시 존재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 ↑ 사실 이것 역시도 파고 들면, 가톨릭 교리상으로는 '기부하면 보속으로 취급해드립니다'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다. 그러나 독일 지역에서는 '무전유죄 유전무죄'로 인식되었으며, 따라서 선행이 퀘스트로 인식되었던 부작용의 가장 극단적 사례라 할 수 있다.
- ↑ 간혹 현대 가톨릭은 루터파와 대화하기 위해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선언을 포기했다는 이상한 인식이 있는데, 이는 전혀 근거가 없다. 트리엔트 공의회와 같은 세계 공의회에서 말한 신앙과 도덕에 관한 선언들은, 무류성을 지닌다고 가톨릭은 해석한다. 따라서 트리엔트 공의회의 뜻에 반하는 순간, 그 즉시 가톨릭 교리에서 이탈한 것으로 간주된다.
- ↑ 다만 실질적으로는 가톨릭과 큰 차이가 없다. 어차피 가톨릭 교회에서도 의화는 곧 신화(神化)이고, 천국은 '하느님과 인간이 일치를 누리는 상태'로 설명된다. 걍 뉘앙스 차이가 요렇구나.. 하는 정도로만 받아들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