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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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大哲
1944년 01월 04일 ~

x50px KBO 역대 총재
홍재형
(9대~10대)
정대철
(11대)
박용오
(12대~14대)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정치인이다. 호는 만초(萬初)이다. 제13대~15대 국회의원 조순승은 그의 손위동서이다.

1944년 정치인 정일형과 변호사 이태영의 사이에서 경성부 종로구에서 태어났다. 당시 정일형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평양 감옥에서 수감된 상황이었는데 이태영은 이불가게를 하면서 살림을 꾸렸다. 그 상황에서 정대철을 임신하여 출산하여야 했는데 정대철의 외숙모가 치아로 탯줄을 끊어서 정대철은 배꼽이 큰 것으로 유명하였다. 아들 정호준도 국회의원이다.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였는데 동기동창으로는 민관식 전 국회부의장의 아들, 김준기 동부그룹 창업주 등이 있었다.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부, 동 대학교 대학원 법학과를 졸업하였다. 당시 김대중이 정일형의 집을 자주 방문하면서 김대중과 친해졌다.

1976년 아버지 정일형이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이듬해인 1977년 대법원 판결로 국회의원직을 상실하였다. 또한 민주공화당 장기영 국회의원이 별세하였다. 그리하여 그 해 6월 치러진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재보궐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오제도와 함께 당선되었다. 이듬해인 1978년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치러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민당 공천을 받아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민관식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조윤형의 자주구락부 계보에 속하였으며 2차 투표에서 김영삼을 지지하였다.

1980년 5.17 내란 직후 신군부의 체포를 피해 잠적하였다. 몇 달 뒤 신군부에서 잡아넣지 않겠다고 약속을 하였고 그는 전두환이 만드는 민주정의당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정치규제를 당하였다. 정치규제 중인 1982년 미국 미주리 대학교에 유학갔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종로구-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민주정의당 이종찬, 신한민주당 이민우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가 다시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김대중 총재에 의해 대변인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패배하자 대변인직을 사퇴하였다.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평화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중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평화민주당 정책위의장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대한민국 국회 문화공보위원장에 선출되었다. 문화공보위원장으로서 5공 청문회를 통해 1980년의 언론통폐합 및 언론인 해직에 대한 진상 규명에 노력하였다. 1990년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민주자유당이 창당되자 꼬마민주당과의 합당을 주장하였다. 또한 김대중 총재 직계 노선과는 거리를 두고 노승환, 조윤형 등과 정치발전연구회라는 계보를 설립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같은 해 전당대회에서 민주당 최고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이에 따라갔다. 그리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지역구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로 신한국당 박성범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새정치국민회의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 출마하여 김대중 총재와는 한 때 사이가 안 좋았다.[1] 1998년 KBO 총재에 임명되었으나 경성 비리 사건으로 구속 기소되며 곧 사퇴하였다.[2]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같은 지역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같은 해 8월의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으로 다시 선출된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치러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전당대회에서 노무현을 지지하였다. 2003년 새천년민주당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그 해 말 열린우리당 분당 때 이에 따라갔다. 그러나 2004년 1월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가 2005년 2월 대법원에서 징역 5년이 확정되었다.

석방 이후 지역구를 장남 호준에게 물려주고 민주당, 민주통합당, 새정치민주연합, 더불어민주당 상임고문으로 있다가 2016년 1월 탈당, 안철수가 주도하는 국민의 당 지지를 선언했다. 그런데 아들은 더불어민주당에 잔류했다...가 결국 국민의당으로 갔다.

2 선거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종류소속정당득표수(득표율)당선여부비고
19771977년 재보궐선거 (9대 국회 서울 1선거구)[3][4]무소속21,206 (22.0%)당선 (2위)1978년 신민당 입당
1978제10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1선거구)신민당105,983 (42.5%)당선 (1위)
1985제12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중)민주한국당70,859 (27.1%)낙선 (3위)
1988제13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중)평화민주당38,228 (39.6%)당선 (1위)
1992제14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중)민주당46,810 (53.3%)당선 (1위)
1996제15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중)새정치국민회의27,825 (43.0%)낙선 (2위)
2000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중)새천년민주당29,414 (49.1%)당선 (1위)
  1. 이때 정대철을 지원한 것이 김상현. 김상현은 또한 총재 선거에도 출마하여 김대중 총재에 맞서기도 했다.
  2. 그러나 이는 훗날 대법에서 무죄 취지 파기환송된다.
  3. 서울 1선거구는 종로구와 중구를 관할했다.
  4. 전임자 정일형(부친) 의원직 상실 및 전임자 장기영 작고. 당시 국회는 중대선거구제였는데, 우연히도 서울 1선거구 의원 2명이 동시에 공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