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本の軍事史 . Military history of Japan. 일본의 군사사를 설명하는 글이다. 근현대 일본제국의 일본군의 항목이 너무 길므로 이렇게 따로 분리하였다. 주로 일본어 위키백과와 영어 위키백과를 참고하였다.
목차
1 조몬 시대
기원전 14,000년부터 기원전 300년 경을 가리키는 조몬시대에는 마을이 발견되고 여러 주거형태가 발굴되고 있지만 전쟁이 있었는지는 학자들간에 의견 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2 야요이시대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250년을 가리키는 야요이 시대 초기에는 한반도를 거쳐 청동검이 전래됐다. 중국 대륙이나 한반도와 달리 일본에는 청동검이 들어오고 얼마 안 돼 철검이 들어왔다. 중국의 사서인 위지에 따르면 왜인들은 나무 활을 쓰고 화살촉은 대나무나 철, 뼈로 만든 것을 사용한다고 하였다. 옻칠을 한 나무갑옷이 출토됐다.
3 고훈 시대
이 시기에 이르면 일본 열도에서 쇠로 된 칼을 제작하는 게 가능해진다. 이세기에 이르면 일본의 작은 소왕국들은 서로 시비를 털기 시작했으며 서서히 야마토 정권 휘하로 통합된다. 5세기에 이르면 철제 방패도 등장하고 승마의 풍습도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에 한반도를 공격해 신라, 백제, 고구려와 싸우고 있었으며 더 나아가 임나일본부설에 따르면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고 있었다(남선경영론(南鮮經營論)고 주장하나 가능성은 영 좋지 않다.
4 아스카 시대/나라 시대
야마토 정권이 등장하면서 일본의 서부는 점차 고대왕국의 형태를 갖춘다.[1] 7세기에 야마토 정권은 백제를 돕기 위해 4만7천의 군사를 파병하였으나 백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하였다. 그후 당나라와 신라가 고구려까지 멸망시키자 일본으로 쳐들어올 가능성을 대비하여 규슈 지방에 방어 요새를 설치하였다.
이 시기의 군인 무장. 더 자세한 내용은 일본갑옷 문서 참조.
신라와 당의 침략을 막기 위한 군은 군단(軍團)이란 이름으로 불렸는데 율령에 근거한 고대왕국의 군대였다. 성인 남성 3명 중 1명을 군인으로 징발했다. 그러나 상비군은 실제로는 적었다. 실제 작전을 할 때는 원정군을 편성했는데 병사 만 명(1군)에 장군을 뒀으며 3만명(3군)이 되면 대장군을 뒀다. 이 때 오히려 발해와 손잡고 신라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의 신라 침공 계획 참조.
8세기 말까지 신라나 당이 쳐들어오지 않자 군단제는 점차 퇴색한다. 에조와 전쟁을 벌일 때 원정군을 편성하고 임시직으로 막부랑 정이대장군을 두기도 했으며 상설 지휘부로 진수부를 설치하고 진수부장군이 지휘 통술케 했으나 상비군은 점차 쇠퇴한다. 그러나 규슈는 예외적인데 나당을 방비하고 신라구가 8세기에서 9세기 경에 기승을 부렸기 때문이었다. 왜구와는 달리 한국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는 존재지만 일본 서부에선 이들 때문에 징병제가 일부 유지됐다.
5 헤이안 시대
10세기와 12세기에 이르면 율령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다. 지방의 세력들은 점차 호족으로 변해갔고 수탈이 심해지자 일본 민중 중엔 도적이 많이 출현했는데 중앙정권은 이를 통제할 능력이 부족했다. 이때는 도호쿠 지방 국경선 너머로 준동하는 원주민인 에미시들과 조정간의 전쟁이 격화되던 시기로 당시 일본 동북부는 에미시라 불리는 이민족들이 거주하는 지역으로, 이때 에미시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며 기동력을 갖춰 전쟁을 했고 이들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동전을 바탕으로 싸움에 능숙한 민족으로 이름이 높았다. 우리가 생각하는 사무라이(갑옷입고 칼차고 말타는)도 원래는 에미시들 특유의 것 이었는데 나중에 일본이 받아들였다. 일본 조정은 수차례에 걸쳐 이들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고 에미시들이 귀순하면서 이들을 군역에 동원한다. 이 귀순 에미시를 부수(浮囚)라고 불렀는데 이들을 통괄하던 각 지역의 수장들은 싸움의 능한 이들의 전법을 배워 자신들의 장비를 개량하게 되며, 이때 사용한 타치는 칼날의 휨 자체는 크지 않았지만 손잡이는 휘어 있으며, 이 스타일을 토대로 에미시의 도검인 와라비테타치와의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2] 이것을 일본의 무사들이 도입했으며 마상전투에 걸맞게 휘어진 칼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초기형 일본도 타치(太刀)에 해당된다. 말을 타고 오오요로이(大鎧)를 입고 활을 쏘는우리가 생각하는 사무라이(갑옷입고 칼차고 말타는)도 원래는 에미시들 특유의 것 이었는데 나중에 일본이 받아들였다. 초창기 사무라이의 모습은 에미시의 영향이 적지 않았다. 그러자 지방의 태수급인 코쿠시(國司)들에게 군사 권한을 위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종사한 무인들을 지배세력으로 격상시킨 것이 사무라이였고 일본도의 개량 또한 많이 이뤄졌다. 병장기로는 나기나타와 활을 주로 사용했고, 갑옷(오오요로이)은 화살에 대한 방어력을 가장 신경써서 만들었다. 많은 지역에서 여러 무사들이 거병을 했지만 각각의 군대 규모는 크지 않았기 때문에 무력이 뛰어난 일부 무사가 큰 활약을 했다.
해상에서는 수군도 등장했는데 이들 중 일부는 탈영하여 왜구가 되어 인근 해역의 상선을 약탈했다. 이 무렵의 선박은 노와 돛을 모두 갖추었지만 전투시에는 노만으로 추진했고, 해전 전술은 원거리에서 화살로 견제하다 접현하여 승선전투를 벌이는 원시적인 형태였다.
그리고 소헤이 즉 승병 또한 등장했는데 한국이나 중국에선 유사점을 찾기 힘든 완전히 다른 군사집단이었다.[3] 이름은 헤이안(平安)이었지만 전혀 평안하지 않은 시대였다. 겐페이 전쟁을 거쳐 가마쿠라 막부가 성립되면서 혼란은 종식된다.
6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13세기에 중국을 지배한 원나라는 고려를 데리고 여몽연합군을 편성하여 일본을 침략했는데 태풍 등으로 실패로 끝났다. 일본에겐 군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 정도 대규모 군사력이 일본 열도에 상륙한 것은 일본 역사상 최초였고 이후에도 주일미군을 제외하면 없다. 특히 일본에는 이전에 화약무기가 쓰이지 않았기 때문에, 이때 원정군이 가져온 화약무기는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7 무로마치 시대
가마쿠라 막부는 일단은 여몽연합군을 물리쳤지만 땅을 얻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전한 무사들에게 논공행상으로 제공할 토지가 없었다. 결국 무사들은 막부에 반기를 들었고 새 막부를 세운다. 새 막부는 이에 그치지 않고 덴노의 지위까지 넘보면서 두명의 덴노가 존재하는 혼란한 남북조 시대가 열린다. 이후 북조가 융성하자 남조는 흡수통일되고 만다.
이 무렵에도 전투의 양상은 무예에 능한 무사들간의 개별적인 대결이 중심이었기 때문에 병장기의 크기가 경쟁적으로 커졌고, 나가마키나 노다치노다지 같은 기형적으로 큰 형태의 날을 가진 무기가 나타난다.
고려 말 왜구의 침입과 거의 겹치는 시간대로, 왜구들이 준 정규군마냥 전술을 능숙하게 사용하고 장기간의 육상 원정을 소화해냈다는 점에서 남조가 북조에 흡수된 뒤 실직한 호족들이랑 무사들이 생존을 위해 고려를 침입해온 것이라는 의혹이 있다.
8 전국시대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지면서 일본은 지방별로 전국 다이묘가 출현하여 전국시대에 이른다.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 교역하면서 조총과 같은 신무기도 도입된다. 전국시대 후반부가 되면서 이전처럼 일부 무사집단의 무용에 기대는 중세적인 전쟁 양상은 거의 사라졌고, 아시가루와 같은 하급 병졸을 창이나 조총 같은 제식 병기를 들려주어 집단 전투에 맞게 훈련시켜 써먹게 되었다. 자연히 일본의 군사력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반면 조정이나 막부와 연계된 수군 및 해적집단이 급감하면서 해전 전술은 답보상태에 머물렀다. 조총이 도입되었고 선박이 접현에 좀더 유리한 형태로 바뀌고, 전쟁의 규모가 커지면서 이전보다 훨씬 거대한 선박들(안택선, 니혼마루 등)이 건조되었다. 그러나 전술 자체는 헤이안 시대에서 달라진 것이 없었고, 정규 수군을 육성하기보다는 왜구들을 고용하여 해상전력으로 활용할 뿐이었다.
9 도요토미 정권
전국시대를 종식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누적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반도를 공격해 초기에는 제도가 빈약하고 경험이 부족했던 조선을 제압하지만 곧 이순신의 등장으로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빼앗기고 육상에서도 전투 경험이 누적된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군에게 패퇴하고 전황은 악화되었다. 대규모 회전에 맞게 훈련된 일본 육군은 공성전과 게릴라전으로 진행되는 한반도 전장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고, 왜구의 변형이었던 일본 수군은 함선을 빼앗는 전투에만 단련되어 있었으므로 함선 자체를 파괴하는 조선 수군의 함포 전술 개념에 모진 고난을 겪게 된다. 이때 조선군이 사용한 거북선이라든가 신기전과 대장군전, 비격진천뢰 같은 생소한 무기체계 개념은 일본에도 도입되어 일본 사정에 맞게 개발, 사용되었다.[4]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전쟁은 끝나고 새로 정권을 잡은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조선과 명과의 평화적인 관계를 회복한다.
10 에도 막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일본은 200년에 가까운 평화기를 보낸다. 요새의 숫자도 급감한다. 그리고 쇄국이 이뤄지며 군사기술은 정체된다. 여기에는 각 번의 군사력을 약화시켜 막부에 저항할 수 없도록 하려는 에도 막부의 의도도 있었다. 그러나 일부 일본 서부의 번들은 이래저래 서양과 중국 등과 거래를 하며 외부의 발전상을 전해듣고 있었다.
흑선내항 이후 막부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지자 막부를 타도하고 신정부를 세우자는 주장이 여러 번을 통해 퍼져나간다. 사츠마와 조슈, 도사 등의 여러 번들이 서양 무기를 수입해 무장했고 사쓰에이 전쟁이나 시모노세키 전쟁 같이 서구와 교전을 하기도 하고 또는 거래를 하기도 하면서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군사교리를 개별적으로 터득해 나갔다. 중앙정권은 새로 막부군을 설치하여 막부를 유지하려 하지만 결국 보신전쟁에서 막부를 지키려는 여러 번과 막부군은 패배하고, 메이지 유신으로 신정부가 수립된다.
11 일본 제국 시절
일본군 항목 참고. 일본 군사사의 최전성기이자 동시의 흑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