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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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란 말이 생긴 근원이 된 전쟁.[1] 1274년 1차 원정과 1281년 2차 원정을 뭉뚱그려 지칭한다.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날짜
1274년, 1281년
장소
대마도, 이키 섬, 규슈
교전국1교전국2
교전국원나라
고려
가마쿠라 막부
지휘관흔도
김방경
범문호[2]
유복형
홍다구
박지량
김문비
김신†
호조 도키무네
쇼니 쓰네스케
쇼니 가케스케
다이라노 가게다카†
쇼니 쓰케도키†
오토모 요리야스
시마즈 나가히사
기쿠치 다케후사
다케자키 스에나가
미츠이 스케나가
소 스케쿠니†
병력1274년: 원나라군 2만 5천 명
고려군 1만 4천 7백 명
1281년: 원나라군:1만 명
고려군 2만 7천 명
남송군: 10만 명
1274년: 최소 1만 7천 명
1281년:약 4만 명
피해 규모1274년:몽골군함200척 침몰
1281년:연합군 14만 명 중 생존자 고려군 1만 9천 명
불명
결과
막부군의 본토방어 성공.

1 명칭

한국에서는 원나라(몽골)의 일본 원정 혹은 고려군의 중요성을 높게 사서 여몽연합군의 일본 원정이라고 부른다.

중국에서는 원군침일전쟁(元軍侵日戰爭), 즉 원나라의 일본 침략 전쟁이라고 부른다. 혹은 원일전쟁, 몽일전쟁이라고도 한다.

일본에서는 당시의 연호를 따서 1274년의 원정을 분에이노에키(文永の役, 문영의 역), 1281년의 원정은 코우안노에키(弘安の役, 홍안의 역)이라 부르며 이때 쳐들어온 여몽연합군을 원구(元寇), 몽구(蒙寇)몽고?라고 부른다.고려는? 고려구

그외 외국 사학계에서는 "몽골의 일본 원정"이라고 부르며, 고려 역시 원 제국(몽골 제국)의 일부로 취급되기도 한다(...). 이 당시 고려일본을 공략하기 위한 최일선 교두보였으며, 원나라를 위해 준비해야 했던 막대한 함선 등에서 전쟁의 한 축을 또한 담당했다. 또 1차 원정군과 2차 동로군은 합포(마산)에서 출발했다. 그러므로 한국 입장에서는 여몽연합군(혹은 여원연합군)이란 표현을 쓸 수 있다. 고려를 독립국으로 볼 것이냐에 관하여는 여몽 관계 참조. 이와는 별개로 고려의 입장에서는 절대로 달가운 전쟁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몽골과의 대규모 전쟁으로 전 국토가 피폐해져 있는 상태에서 또 다른 전쟁에 강제로 동원되어야 했기 때문. 농경지나 도시의 복구에 쓰여야 했을 인적, 물적 자원이 전쟁용으로 돌려지면서 고려 말기를 더욱 더 피폐하게 만들게 된다.

다만, 숫자와 전력상으로 보았을 때 주체는 몽골이 맞다. 1차 원정에서 몽골군은 2만 5천, 고려군은 1만 5천(전투 병력 8천)이었고, 2차 원정에서 강남군(남송의 잔당)은 10만명(함선 3500), 나머지 4만의 동로군은 몽골군 1만, 고려군 1만, 고려의 수부 1만 7천(함선 900)이 동원되었다. 한편 1차 원정에서 900척의 전선을 만드는데 4개월 동안 고려인 3만 5천 명이 동원되었다.

2 제1차 원정

1265년 몽골 제국의 5대 칸 쿠빌라이 칸남송 정복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는데 남송 정복의 계획을 주위에 묻던 중 고려 출신인 조이(趙彛)[3]가 남송과 교역하는 밀접한 나라로 일본이라는 곳이 있다면서 남송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초유(불러서 타이름)해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게 좋다고 진언했다. 이것이 쿠빌라이 칸이 일본 정복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266년 쿠빌라이가 고려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전달했는데 그 내용은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고려 재상 이장용(李藏用)은 이것이 고려에 엄청난 재앙을 몰고 올 것임을 예견했고 사신들이 바다에 어두운 점을 이용, 일부러 바다가 험난하고 풍랑이 심하다는 등 겁을 잔뜩 주었다. 이 계략은 제대로 먹혀 사신들은 겁에 질려 일본까지 가지 못하고 거제도까지만 간 뒤 본국으로 귀환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 포기할 쿠빌라이가 아니었으니, 이듬해인 1268년 쿠빌라이는 다시 사신을 보내 고려에 일본으로 가는 길 안내를 요구했고 이번에는 할 수 없이 반부(潘阜)[4]라는 관리를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와 고려의 국서를 일본에 전했다.

사신은 다자이후에 도착해 국서를 전달했고 당시 대륙의 정세를 전해줬으나 섬나라라는 지리적 이점으로 인해 유사 이래 한번도 외침을 당한 적이 없다는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데다 교토의 덴노를 힘으로 누르고 있는 가마쿠라 막부에선 들은 척도 하지 않았고 사신을 5개월 동안이나 다자이후에 머물게 하며 박대했다.[5]

사신은 고려로 귀환했고 고려에선 다시 이를 몽골에 보고했는데 쿠빌라이는 보고 내용을 불신하며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다. 하지만 사신 일행은 쓰시마 섬까지만 갔다가 그 곳에서 섬사람 두 명만 잡아서 돌아왔다. 빈손으로 가면 질책을 받을까봐 두려워한듯. 쿠빌라이는 섬사람 두 명을 잡아온 것에 대해 크게 기뻐했고 사신들을 치하한 뒤 섬사람 두 명은 다시 돌려보냈다.

섬사람 두 명을 돌려보낸 고려는 다시 다자이후에 국서를 전달했으나 이번에도 일본은 무시로 일관했다(이후로 1268년,1269년에도 지속적으로 일본을 초유했으나 일본은 거듭 이를 무시했다).

1268년에 쿠빌라이는 남송을 공격할 거라고 선언하며 고려에 병선의 건조와 군량 비축을 명했다.[6]

1270년에 쿠빌라이는 고려에 둔전경략사를 설치했다. 물론 목적은 일본 침공이었다. 이 둔전 정책은 고려 백성들에게 막대한 고통을 안겨주었고 이듬 해 원종은 쿠빌라이에게 글을 올려 가을까지 군량과 말먹이는 힘이 닿는데까지 조달할 것이니 백성들이 굶어죽지 않도록 해줄 것을 호소했다. 안습

1271년 쿠빌라이는 다시 일본에 사신을 보냈는데 이번 사신인 조양필은 그동안 무시로 일관했던 가마쿠라 막부의 대외창구인 다자이후에 가서 교토의 덴노와 직접 교섭을 하겠다고 요구했다. 당시 가마쿠라 막부의 최고 권력자는 불과 18세에 불과한 호조 도키무네였는데 호조는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서일본의 슈고(지방군벌)와 지토(슈고보다 하위 계급)들에게 수비를 강화하라고 명했다. 결국 쿠빌라이는 말로는 도저히 일본을 굴복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각 고려에 병선 건조와 징병을 명했다.

1272년, 일본 원정에 방해가 되던 삼별초를 토벌했다.

1273년, 마지막 초유사가 귀환했고 쿠빌라이는 삼별초 토벌을 마치고 돌아온 장수들을 모아 일본 원정을 결의했다.

1274년 홍다구(洪茶丘)[7]의 악랄한 독촉으로 불과 4개월만에 전함 900척이 건조됐다.[8]

지휘관은 측은 몽골인 흔도, 귀화한 고려인 홍다구, 송나라 유복형이었고 고려측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몽골군이 2만 5천, 고려군은 전투병 8천에 뱃사공, 바닷길 안내자, 수부 6천 7백으로 총 1만 4천7백이었다(그런데 뱃사공이 전체규모의 절반도 안되는데 어떻게 일본까지 간건지가 의문이다. 판옥선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격군이 제일 많아야한다 판옥선은 연안전투함이자, 평저선이다. 격군이 많았던 이유는 돛을 이용하는 이동보다, 전장에서의 기동성을 위주로 제작했기 때문. 반면에 일본원정용 함선이라면 원양이동에 목적을 두고 만들었기 때문에 수부가 적게 필요한것이다.).

1274년 음력 10월 5일 여몽연합군은 출항 이틀째인 쓰시마 섬 남단의 사스우라에 상륙해 2시간만에 막부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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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10월 14일, 이키 섬에 몽골군이 상륙했고 이 소식은 즉각 이키 섬의 슈고 대리인 타이라노 카게타카(平 景隆)에게 전해졌다.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가신 100명을 이끌고 출전했고 연합군과 조우해 싸웠으나 병력, 무기, 전투 방식의 열세로 인해 참패했다(아래 무력차 항목 참조). 타이라노 카게타카는 이키 섬의 본거지인 히츠메 성으로 달아나 농성을 시작했지만 병력의 차이가 너무 커 결국 성이 함락됐고 그는 다자이후에 전령을 보내 위급함을 알린 뒤 목을 매고 자결했다.

음력 10월 17일, 여몽연합군은 다카시마의 아오우와 후네가라쓰에 상륙했다. 막부 무사들도 급히 다카시마에 상륙해 산성을 구축하고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전황은 모든 것이 일본에 불리했다. 일본 무사들의 개인 전법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집단 전법, 몽골군이 쓰는 철포(鐵砲)의 위력에 막부군은 압도당했다. 이어 여몽연합군은 겐카이나다(玄海灘, 현해탄)를 지나 하카타 만으로 향했다.

음력 10월 19일, 여몽연합군의 일부 병력이 하카타 만 서부 해안에 상륙해 교두보를 확보했고 다음날 모모치바라, 이키노하마, 하코자키 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대규모 상륙작전이 개시되었다.

다자이후의 총사령관 쇼니 쓰네스케는 이미 쓰시마 섬과 이키 섬에서 전한 급보를 듣고 가마쿠라 막부와 교토에 급사를 전했고 규슈 내의 슈고, 지토 및 고케닌들에게 총동원령을 내렸다.

하카타 지구에는 총사령관의 동생 쇼니 가케스케가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주력군을 이끌고 있었는데 병력은 대략 1만 7천명 이상이었다.

음력 10월 20일 김방경이 지휘하는 고려군은 삼랑포(現 사와라)를 거쳐 내륙으로 진격하며 닥치는대로 적군을 쓰러뜨렸다. 몽골군 지휘관 흔도조차 감탄할 정도였던 고려군은 선봉에서 크게 활약했고 몽골군 주력부대 또한 막부군을 패퇴시킴으로써 막부군의 하카타 만 해안방위선 30km가 전부 붕괴되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코자키 지구에선 제법 막부군이 선전을 했다. 전선 사령관 쇼니 가케스케는 맹렬히 연합군에 항전했는데 화살을 쏴 몽골군 장수를 낙마시키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이때 화살에 맞은 이는 몽골군 부원수 유복형이었다.

패배한 막부군은 다자이후의 서쪽 관문 미즈 성에 집결했고 연합군의 공격에 대비했는데 어쩐 일인지 연합군은 추격을 해오지 않았다.

음력 10월 20일 연합군은 함대로 귀환해 차후 전투 계획을 논의했다.[10] 그런데....

음력 10월 20일과 21일 사이 새벽, 하카타 만에 대폭풍이 몰아쳤고 이는 연합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900척의 전함중 몽골군함 200척이 하룻밤 사이 침몰했다. 전투의 지속여부는 의미없었고 남은 선택지는 오직 철수뿐이었다.

참고로 Discovery 채널에서 이와 관련된 다큐멘터리가 나온 적이 있는데, 태풍으로 큰 피해를 입은 이유는 너무 빨리 배를 건조하는 데 발생한 내구도 부실공사 문제와, 배가 부족한 나머지 항해에 부적합한 강가용 배를 징발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나온다.[11]

태풍 덕이었지만 어찌됐든 일본은 승리했다. 일본은 이 태풍을 神風(신푸, 신의 바람)[12]이라 부르면서 기렸다.

그리고 약 660년 후, 이 태풍의 이름은 일본군자살폭탄 공격을 작전이라 포장할 때 쓰여졌다. 조국을 지켜준 태풍을 팔아먹는 위엄

3 제2차 원정

1차 원정군 사령관 흔도는 태풍 때문에 병력을 잃고 퇴각한 사정은 숨기고 일본을 패퇴시킨 전적만 부풀려 보고한다. 이에 쿠빌라이 칸은 일본이 충분히 쫄았을 것으로 착각하고 원나라에 굴복하고 입조할 것을 권하는 사신단을 보냈다.

1차 원정이 끝난 이듬해인 1275년, 예부시랑(외무차관급) 두세충과 병부시랑(국방차관급) 하문저 등 원나라 사신단 30여명이 쿠빌라이의 국서를 가지고 일본을 방문하자, 호조 도키무네는 가마쿠라에서 이들을 접견한 후 고려인 수행원 4명을 제외하고는 모조리 참수해버렸다(…). 5년 후 원나라 사신들이 다시 방문하자 이번엔 가마쿠라에 들이지도 않고 바로 다자이후에서 베어버렸다.칭기즈칸 시절 호라즘 왕국이 몽골 사신단을 몰살했다가 어떻게 당했는지 알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행동

이러한 가마쿠라 막부의 도발에 열이 뻗칠 대로 뻗친 쿠빌라이 칸은 2차 원정을 결심했고 고려에 다시 원정 준비를 명했다. 충렬왕은 김방경을 사신으로 삼아 쿠빌라이 칸에게 '고려의 형편이 너무 어려워 전함의 건조 및 병량 비축은 무리'라고 호소했으나 쿠빌라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2차 원정은 1차 원정으로부터 7년 후였는데 당시 쿠빌라이 칸이 남송 원정에 골몰한데다 아리크부카와의 후계 다툼 및 카이두의 반란 등 내부 문제로 골치를 썩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276년이 되어서야 바얀이 지휘한 몽골군이 남송의 수도 임안(항저우)을 공격해 점령했다.

같은 해 가마쿠라 막부 측은 연합군의 원정에 대한 응징으로 고려에 반격을 가할 계획을 세웠다. 전함 건조와 병력 징발을 명했으며 비용의 부과 및 징수는 쇼니 쓰네스케에게 일임했는데 이를 이국출격(異國出擊) 계획이라 했다. 원정군의 본영은 하카타에 설치되었으며 총사령관은 쇼니 쓰네스케가 임명되었다. 출격에 필요한 선박과 무사들은 규슈 내에서 조달했지만 부족하면 시코쿠주고쿠에서도 보충하기로 했다. 계획은 거창했지만 끝내 실행되지는 못했다.[13]

한편 충렬왕은 쿠빌라이의 2차 일본 원정을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자 갑자기 적극적으로 참전 의사를 밝히기 시작했다. 자살폭탄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몽고의 침략과 동시에 50년 전부터 출몰해 약탈을 해대기 시작한 왜구가 지긋지긋한데다가, 원나라와의 관계를 가까이 하여 지분떡고물을 얻고 원나라의 앞잡이 홍다구가 고려에서 패악질을 벌일 틈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1279년 원나라가 고려에 전함 건조를 명하자 고려는 사신을 파견해 환영의 뜻을 밝혀 호의를 사는 동시에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홍다구 보내지 말아주세요'라고 징징을 시전했다. 다행히 이 징징이 먹혀 원나라는 홍다구를 곧 본국으로 소환했다.

1280년, 2차 원정군이 편성되었는데 동로군과 강남군으로 나뉘어서 편성했다. 동로군은 몽골군과 고려군으로 구성되었는데 몽골군 지휘관은 흔도와 홍다구였고 고려군 지휘관은 김방경이었다. 병사 수는 몽골군 1만 명, 고려군 전투병 2만 명, 뱃사공·수부 1만 7천 명, 함선 9백 척, 군량 12만 3000석이었다. 강남군은 주로 옛 남송군이었는데 병사 수는 10만에 지휘관은 범문호였다.[14]

실제로 고려군이나 몽골군이나 1차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았고, 고려군이 특히 소극적이었는데도 원은 그렇게 심각하게 문제 삼지 않은 걸로 보건대 쿠빌라이의 본의는 일본 정벌보다는 그냥 두들겨패서 후방에서 엉뚱한 짓을 못하게 막는 것+왜구 소탕이 목적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존재한다. 물론 이게 맞아도 결국은 실패한 게 맞다. 가마쿠라 막부가 무너지는 것이 일본 자체의 역량에 미치는 영향은 미미했던 데다가 왜구는 오히려 더 활개를 쳤기 때문이다.

1281년 음력 5월 26일, 이키 섬에 상륙한 동로군은 저항하는 막부군을 전멸시키고 섬을 점령했다. 이때 막부군의 지휘관은 7년 전 열두 살의 나이로 전쟁을 경험한 쇼니 쓰케도키로 쇼니 쓰네스케의 아들이었다. 그는 중과부적임을 알면서도 끝까지 싸우다 장렬히 전사했다.[15]

10일 간 휴식을 취한 동로군은 음력 6월 6일 하카타 만으로 진격했다. 하지만 이 때 동로군은 장벽에 부딪혔으니 1276년에 막부의 지시로 하카타 만 연안 20㎞에 축조된 높이 2m 전후의 방루가 그것이었다. 하카타 만 해안에 즉각 상륙하는 것이 무리라고 판단한 동로군은 수비가 엷다고 판단되는 시카노 섬에 상륙했다. 같은 날, 오토모 요리야쓰가 이끄는 막부군이 시카노 섬에 상륙한 동로군에 먼저 선공을 가했다. 시카노 섬 쟁탈전은 음력 6월 8일까지 지속되었는데 고려군과 몽골군의 동로군은 생각 외로 고전을 반복했다.

1차 원정 때에 비해 일본의 방비가 상당해 제법 고전하긴 했으나 전체적으로 봐선 그리 동로군에 불리한 게 아니었다. 단지 강남군과 연합하여 하카타를 재공략하려던 게 불발로 끝났을 뿐이었다(강남군은 사전에 약속한 장소인 이키 섬이 아니라 히라도 섬에, 그것도 보름이나 늦게 도착했다).

음력 7월 27일, 다카시마 근해에 모인 연합군은 다시 하카타 만 공격을 준비했다. 막부군은 이 소식을 듣고 반격을 준비했으나 4천여 척의 대함대의 위용에 눌려 전면전을 벌일 엄두를 내지도 못하고 소선으로 기습전을 벌였다. 그러나 음력 7월 30일, 다카시마 근해에 강풍이 불어닥치기 시작했고 연합군 병사들은 흔들리는 배 안에서 뱃멀미로 이미 곤죽이 되었다.[16] 연합군 함대는 서로 충돌하거나 바위에 부딪혀 대부분 침몰했다. 살아남아 다카시마에 상륙한 연합군은 막부군에 곧 포위되었고 전원 몰살당했다. [17] 제2차 원정에 참여한 고려인 26,989명 중 19,397명이 생환했으나 몽골과 남송에서 참전한 원의 군사는 극소수만이 돌아왔다.

4 양 세력의 무력차

원정은 실패했으나, 여몽연합군의 전반적인 전력은 일본을 압도하고도 남았다.

당시 막부군은 모든 면에서 여몽연합군에 열세였다. 다만 전투 방식은 물론이거니와 무기 또한 사거리 2백미터에 달하는 단궁을 주무기로 삼은 몽골군에 비해 막부군은 백병전을 중시했기 때문에 무거운 갑옷과 일본도로 중무장했고 따라서 원거리에서 연합군이 봉쇄하면 막부군은 손 쓸 틈도 없이 패할 수밖에 없었다는 통념이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헤이안 시대부터 여몽 침공전까지 일본의 주된 전투무장은 활이었고 원거리 전투만으로도 끝나는 전투가 대다수였으며, 기병도 기마궁술 위주의 전투를 하였으므로 백병전에 집착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뿐만 아니라 갑옷조차도 백병전에 적합하지 않았다. 일본 역사상 칼이 주무기가 된 시기는 정작 전쟁이 거의 없던 에도시대다(...). 그래도 아직 전국시대 이전이라 전투력도 딸렸고 화약무기도 없어서 전력이 열세에 있었던 것은 맞다.

전투 방식 역시 후진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서의 전투 방식은 부하에게 우는 살(명적)을 쏘아 개전 신호로 삼은 뒤 종과 징을 요란하게 치며 자신의 가계, 이름, 전적들을 자랑스레 읊은 뒤 싸우는 거였다. 쉬운말로 기사도, 아니 무사도를 준수하는 일기토 시전. 물론 여몽연합군에겐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몽골군 역시 명적을 사용했는데 이는 진격을 알리거나 대량으로 사용해 적의 사기를 꺾거나 전투중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지휘관끼리 연락을 취하는 매우 실용적인 것이었다. 결국 일본군이 명적을 쐈다는 것은 장수가 앞서서 가계를 읊는 것이었지만, 몽골군은 이걸 진격 시도로 받아들였을 것이며, 만구다이가 돌격해 측면을 돌파 중이었을 것이다. 망했어요

심지어 원나라 군대는 일본군에 대한 파훼법까지 쓸 정도로 철저히 전술을 준비했는데, 기병 중심인 일본군에게 극상성인 병력 구성인 도검병(말 다리를 쳐서 기병을 무력화)+화포(직접적인 피해 이외에 폭발음으로 말을 놀라게 해서 기동력을 상실)로 밀어붙였다. 게다가 전장이 넓은 평야지대가 아니라 좁아터진 해안가라 도검병이 기병에게 접근하기도 적절하거니와 화포의 활용도가 높았고, 덕분에 여몽연합군은 막부군을 압도적으로 유린했다. 해군이야 뭐 고려가 거들어주면 되는 것이고 일본은 거꾸로 바다 건너 이렇게 대규모 원정을 할 능력이 없었다. 태풍만 아니었다면 정말 역사가 뒤바뀌었을수도 있었을 것이다.

봉화 및 역마체제도 낙후되어 1차 원정 당시 일본군의 패전 소식이 막부에 전해진 것은 전투 8일 뒤인 10월 28일이었고 막부가 다시 명을 내린 시기는 11월 1일이었다. 교토에는 더욱 늦어 11월 2일에야 소식이 전해졌다. 태풍으로 상황 종료된지 일주일도 넘어서 소식이 전해졌다는 이야기다.(...)

또한 원정 당시 몽골과 고려 연합군에 대한 공포심은 극에 달해 일본인들은 무쿠리(몽고)와 고쿠리(고려)라는 두 마리 또는 무쿠리 고쿠리라는 한 마리의 도깨비로 부르며 어린아이가 울 때 "'무쿠리와 고쿠리가 잡으러 온다."'라고 하면 울음을 뚝 그친다라는 전설이 내려올 정도였다.[18] 당시 일본에서 여몽연합군의 침공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다만 2차 원정 때는 일본이 그렇게 호락호락 당하지만은 않았다. 이는 1275년 이국경고번역을 실시하면서 각지의 병사와 물자를 징발할 준비를 어느 정도는 갖추고 있었던 것과 고려 쪽에 첩자를 계속 보내 침공군의 규모를 파악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2차 원정 당시 큐슈의 방어군은 1차 원정 때보다 2배 정도를 동원했으며 이요의 수군과 중앙에서 아다치 모리무네의 1만 가량의 증원군까지 파병되어 4만 이상의 숫자가 모여 있었다. 그래서 여몽연합군은 쉽사리 상륙하지 못했으며 이는 결국 태풍이 불어올 때까지 일본이 버틸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5 원정의 여파

두 번에 걸친 원정이 모두 실패하자 쿠빌라이 칸은 일본 원정을 중단했다.[19][20] 사실 고려도 그렇지만 일본도 애시당초 완전 정복을 한 뒤 철저하게 복속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포기한 측면도 있다. 즉 어설프게 복속시키는 게 목적이면서 전쟁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서 수지가 맞지 않아 포기한 것이다.

즉 일본 입장에서는 이후 몽골의 침공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원정이 일본에 끼친 영향은 그런 점을 감안해도 대단했는데, 이후 신토불교에 대한 믿음이 더욱 공고해진 일본은 자국이 '신의 나라'라고 자처하게 되었으며 연합군을 물리친 태풍을 신풍(神風)이라 불렀다. 이는 훗날 태평양 전쟁 때의 그 카미카제의 어원이 된다. 이에 대해서는 카미카제 항목 참조. 이게 약 7백년 뒤 그런 참혹한 것을 야기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태풍 덕에 두번이나 원정군을 물리치긴 했으나 일본 측의 피해도 적지 않은 편이어서 막부는 내부적으로 심각한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바로 무사들에게 논공행상으로 내려줄 토지가 없다는 것이었다. 이기긴 이겼으되 영토를 얻은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영토를 얻으려면 원나라를 공격하던가 해야 하는데, 홈그라운드에서 방어한 일본 무사들이 바다를 건너 원나라를 공격해 이길 리 만무했다. 결국 자비를 들여 여몽연합군과 싸웠던 무사, 즉 고케닌들은 보상으로 아무 것도 받지 못해 갈수록 궁핍해졌고 이에 자동적으로 고케닌들에게서 쫓겨난 비(非)고케닌 무사들 및 총령(가문의 상속자)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지 못한 서자들이 악당을 조직해 슈고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이것은 곧 가마쿠라 막부에 대한 위협이 되었다.

막부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을 무렵, 교토 조정에선 덴노의 후계 문제를 두고 내분이 벌어졌고 내전은 고다이고 덴노의 승리로 끝났다. 하지만 고다이고 덴노가 막부 토벌을 계획하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막부는 고다이고 덴노를 외딴 곳으로 귀양을 보내버렸다. 하지만 호조 정권의 장기독재에 반감을 품은 무사들, 특히 닛타 씨와 아시카가 씨가 호죠 타도를 노리고 있었다.

1333년 마침내 전국에서 호조 정권 타도의 깃발이 올랐다. 같은 해 5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를 함락시켰고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를 공략했으며 호조 씨 일족은 마지막 싯켄 사다도키를 비롯해 전원 자결함으로서 가마쿠라 막부는 여몽연합군을 막아낸지 반세기도 채 못되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또한 이 시기의 일본에서는 몽골의 침략을 예상하고 경고한 승려가 나타났으니, 그가 바로 일련종을 만든 니치렌이다.

2001년 일본에서는 당시의 막부 집권자였던 호조 도키무네를 주인공으로 한 사극이 방영된 적이 있어서 이 원정에 대해서도 다룬 적이 있는데 여기서 고려의 김방경과 홍다구도 등장한 적이 있다.[21] 하지만 한국 배우가 아닌 중국 배우를 김방경으로 출연시켰다. 홍다구야 중국 배우가 출연해도 그렇다 쳐도 불만이 남을 수도 있는 부분. 그렇다고는 해도 사실 한국 사극에서도 일본인이나 중국인도 한국 배우가 출연하는 것에 비하면 제법 신경 썼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1950년대 일본에서 이 원정을 흥미로운 시각에서 바라본 소설이 발표되었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22]가 지은 《풍도(風濤)》. 한국에도 번역본이 나왔는데 원제를 그대로 쓴 것과 적당히 의역해 검푸른 해협이라고 제목을 붙인 두 종류의 번역본이 있다. 재미있는 건 "일본"이 주인공이 아닌 충렬왕과 김방경이 주인공으로 일본 원정에 따른 고려 백성들의 고난과 투쟁기를 그리고 있다. 한국인의 민족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에 국내의 소설이나 김방경 위인전이 대부분 이 소설을 따오는데, 사실 몽골의 지배 하의 고려를 미 군정 하의 일본에 빗대어 냉전시기 군사기지화 한 일본의 상황을 비판하는 작품이다.(...)

이노우에 야스시의 이 소설이 의외의 역할을 한 것이 있다면 일본 사람들이 갖고 있던 은근한 묵은 감정을 어느 정도 해소해 주었다는 것. 매일신문에 따르면 그 이전까지 일본인들은 "고려인 너네들도 여몽연합군으로 일본에 쳐들어왔지 않느냐"[23]고 가슴 속에 맺힌 걸 갖고 있었는데, 이노우에 야스시가 《풍도》를 쓰면서, 또 저자 본인이 생전 “고려도 역시 몽골에 정벌당해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을 뿐”이라고 주장하면서 일본의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표했고, 한일 간 이해의 폭이 다소나마 넓어졌다는 평.[24] 하지만 오늘날에도 여전히 일본의 극우들이 신라구와 함께 "한국인들도 일본을 침공해서 약탈과 강간, 학살, 방화를 저질렀다!"는 식의 물타기용 떡밥으로 잘 써먹는다. 물론 침략을 당한 일본에게는 고려도 원과 똑같은 침략자로 보였음직하고, 우는 아이들을 그치게 할 때 '무쿠리 고쿠리'[25]라는 말로 겁을 줬을 정도로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무서운 경험이었던 것 같다.[26] 하지만 그때 고려가 원을 도와 일본을 침략한 것이 임진왜란이나 식민지배의 잘못을 정당화하지는 못하는 건 당연하다. 이렇게 말하는 일본인이 있으면 상대해주지 말자. 다만, 한-일 역사가 언제나 일본의 일방적 침략의 연속이라는 한국인들의 일반적 통념과는 거리가 좀 있는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대략 700년이 넘어서 그때 당시의 원정 때 사용된 배로 추정되는 목선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있다.
기사

NHK 대하드라마 <호조 도키무네>(2001년)에서 묘사된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 38화 中
초반에 나오는 한국어가 인상적이다. 저게 무어-야? 카루메기겠지! 전쟁 문화의 차이가 돋보이는 부분. 처음 날리는 화살은 '카부라야' 혹은 효시, 명적 화살이라고도 하는 휘파람 같은 소리가 나는 화살인데 일본에서는 당시 이것으로 개전의 신호를 알렸다. 하지만 고려나 몽골인들은 그런 격식을 갖춘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에 비웃음의 대상이 되고 만다 여몽연합군이 트레뷰셋을 사용해 던지는 폭탄은 진천뢰로 추정한다. 이미 금나라 때 개발되었으며 조선의 비격진천뢰와는 달리 수류탄에 가까웠다. 주로 손으로 투척하지만 각종 투척기를 사용해서 날려보내기도 했다.

고증에서 문제가 있는데 몽고습래회사를 보면 명백히 차이가 나는 고려군을 몽골군과 똑같이 만들었다(...).복사 붙여넣기

1958년 영화인 <니치렌과 몽고대습래(日蓮と蒙古大襲来)>

일본사의 음모론자들은 이 사건이 반가마쿠라 막부 성향의 다이묘들이 사주한 것이라 주장한다. 즉, 반가마쿠라 성향의 다이묘 가운데 한반도 도래인의 후손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고려와 손잡고 가마쿠라 막부 좀 밟아주세요 해서 원정이 시작되었다는 것. 하지만 고려가 굳이 이득도 없는 일본 원정을 단지 저런 이유만으로 강행하려고 했는지는 의문이다. 무엇보다도 그 반가마쿠라 성향의 다이묘들은 저 원정 당시에 왜 배후에서 군사행동을 안 했던 걸까?[27] 그런걸 생각하면 터무니 없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6 몽고습래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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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원정 때를 묘사한 <몽고습래회사>의 한 그림. 사진 왼쪽의 병사들이 고려군이라는 설이 있다. 그림에서는 잘렸지만 앞에서 싸우는 병사들 뒤쪽에 화살을 맞고 도망가는 병사들이 있는데 그 병사들의 복식이 몽골군 복식에 더 가깝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오른쪽의 기마무사가 몽고습래회사를 그리게 했다고 알려진 다케자키 스에나가(竹崎季長). 원래 이 그림은 여몽연합군의 화살과 포탄을 뚫고 돌격하는 스에나가를 묘사한 것이라고 한다. 그림에서는 말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고 있어서 전사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는 이 전쟁에서 죽지는 않았고, 꽤 장수했는지 1324년까지 생존한 게 확인되지만 정확한 몰년은 전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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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전체 그림이다. 화살 맞고 도망가는 병사가 보인다. 이 병사들의 복식이 몽골 병사에 가깝다는 이유로 선두에 서서 싸우는 병사들을 고려군으로 보는 설이 있는 것. 도망가는 병사들이 쓰고 있는 투구를 보면 투구 옆의 드림이 목의 앞부분까지 모두 감싸는 형태로 여며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분명한 몽골의 형식이다. 굳이 다른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보아 활을 쏘고 있는 이들이 몽골군이 아닐 가능성은 충분하다. 더구나 이 그림이 1274년 1차 원정때의 사실을 그린 그림임을 감안해 보면 저 몽골군과 이질적인 복장을 하고 있는 군대가 남중국 병사들도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몽골군은 항복한 나라의 군대를 선봉고기방패에 세우는 전술을 일반적으로 사용하였는데 이 그림에서도 저 병사들이 선봉에 서 있다. 더구나 몽골군이 도망가는 상황에서 저들이 버티고 있는 것도, 당시 원정 기록을 살펴보면 몽골군이 후퇴하는 상황에서 고려군이 막부군의 습격을 격퇴한 사실이 여러 번 보이므로 근거가 될 만하다.[28][29]

7 만약에: 일본 원정이 성공했다면?

이렇게 일본 침공은 결국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하지만 문서에서 언급되었듯이 성공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던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일본의 경우 원 입장에서는 고려처럼 정복할 수 있었던 상대였을 수도 있다. 고려는 수십년에 걸쳐 무신 정권이 붕괴되기 전까지 최탄[30], 홍복원 등 일부 매국노를 제외하면 중앙집권국가로서 몽골과 대적해서 싸웠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무신정권으로 민심을 잃고 몽골에게 붙은 고려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고려가 민심이 떨어지자 더 싸우지 못하고 항복한 것이다. 일본은 가마쿠라 막부가 엄연히 봉건 영주들의 수장일 뿐 그 이상은 아니었고 따라서 원정이 장기화될 경우 분열될 공산이 컸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 일본은 전국시대를 거치기 전이라 화약무기도 없었고 당연히 전쟁 경험이나 전투력도 딸렸다. 게다가 고려와 마찬가지로 원이 직접 통치를 안 하고 힘을 실어줘 사실상의 지배를 할 수 있도록 써먹을 만한 또 다른 명목상의 군주가 있었으니, 바로 덴노였다. 당시 일본의 덴노는 실권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로[31] 권력 회복을 위해 1220년의 덴지의 난[32]을 비롯해 수 차례 친위 쿠데타를 시도도 했고, 막부 정권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던 상황이었는데 원이 일본을 아예 멸망시킨다면 모르지만 그렇지 않고 고려처럼 적당히 존중해 줄 것을 약속한다면 태도를 바꿀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 원정이 성공했다면 원은 기존의 가마쿠라 막부를 붕괴시키는 대신 덴노를 일단 복권시켜 주고 그 다음 반가마쿠라-친원 성향의 관료들이 정권을 보좌하는 형태로 갔을 확률이 높다. 물론 직접 지배도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이것이 쉽지 않다는 건 이미 고려에서 배운 바, 원은 직접 지배보다는 핵심계층인 상급 무사 집단만 정리하고 나머지는 내버려 두는 간접 통치를 선호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 경우 일본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원 간섭기를 겪게 될 것이다. 다만 옆나라 고려조차 원이 휘청거릴 때 쌍성총관부와 요동을 치면서 원과 척을 지려했다는 것을 감안하면 바다 건너에 있고 무신 집권자들만 쳐버리고 복속시킬 수 있었던 고려와는 달리 토착 무사세력이 뿌리가 강해서 통제가 더 어려운 일본은 원이 휘청거리기만 하면 고려보다 더 빨리 바로 이탈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역시 원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했던 고려와의 관계를 재정립했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문화적으로는 두정갑이나 육식 등 몽골 문화가 일본 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불교의 영향력도 그만큼 줄어들었을 것이며, 직접적인 외세의 영향력 앞에서 그 반작용으로 전통 종교인 신토가 중시되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은 덴노의 통제 하에서 새로운 중앙 집권 체제로 전환되어 또 다른 역사의 흐름을 타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에 따라 15세기 이후 일본의 역사 자체도 크게 달라졌을 공산이 크고 덴노의 만세일계도 지속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33] 이 경우 워낙 변수가 많아지게 되기 때문에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확실한 것은 일본인들이 항공기를 이용한 자살 공격을 카미카제라고 부를 일은 없었을 것이란 점(…).

반일감정이 심한 사람들 중에는 일본 원정이 실패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솔직히 고려의 입장에서는 정복해도 좋을 것이 없다. 설사 고려군이 주축이 되어 일본을 정복했다고 쳐도 원의 속국이 되지 고려의 속국이 될 리는 없다. 원 본토와 일본과의 거리가 먼 관계로 조공을 운송하는 업무의 대부분은 고려에 맡겼을 수 있고 중간 과정에서 약간의 이득을 챙길 수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뱃길로 수송해야만 하는 관계로 손실분이 더 컸을 수도 있다. 당연히 원은 그 손실분의 보충은 고려에 맡겼을 것이다. 또한 전쟁에 동원됐던 고려군의 상당수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 본토에 계속 주둔하여 피를 흘려야 했을 것이 당연하다. 이게 공민왕대까지 지속됐다고 치면 원명교체기에도 가용 병력이 부족해서 원에 저항하지 못했을 가능성도 있다.[34]

8 번외:몽골의 아이누 침공

몽골 제국은 아이누 족이 살던 사할린 섬을 타타르 해협을 건너 1264, 1284, 1285, 1286년에 침공하기도 했다. 원사 세조본기에 따르면 1만의 병력을 투입했다고 하는데, 몽골군은 겨우 2만 병력으로도 러시아 공국 연합군 8만을 탈탈 털어버릴 만큼 당대 기준으로 정예병이었기 때문에 아이누인들에게는 가히 외계인의 침공이나 마찬가지의 날벼락이었다. 몽골군은 사할린에 거점을 확보하고 둔전을 일궜지만, 아이누들의 저항이 의외로 강력했고 하필 1287년 몽골 본국에서 난이 일어나기도 해서 사할린 지배가 그리 오래가진 못했고 조공체제를 유지했다. 비슷한 시기에 있었던 상기한 일본 큐슈 침공과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하기 쉽지만, 원명대의 지도를 보면 사할린과 홋카이도, 일본이 쭉 이어져 있다는 사실은 몽골은 몰랐을 가능성이 높다.[35] 그걸 만약 알았다면 여기서 도호쿠 방면으로 남진하면 태풍도 없고 몽골 본토에서도 더 가까운 침공루트인데다 겨울에는 타타르 해협이 얼어붙어서 걸어서 건널 수도 있기 때문에 이쪽 루트로 침공을 고려해볼 수도 있었겠지만, 험난한 기후로 그러지 않았다.

  1. 1, 2차 전쟁 모두 태풍 때문에 실패했다. 모든 일본인: 만세! 신의 바람이야! 태풍이 뭐가 좋다고
  2. 남송의 재상이자 간신인 가사도의 사위
  3. 경남 함안 출신으로 일본과의 교류가 잦았던 합포 및 금주(김해)와 가까워 일본의 사정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4. 거제 반씨의 시조
  5. 하지만 겉으로는 무시로 일관한 가마쿠라 막부도 내심으로는 대단한 충격을 받았고 제관 등을 신궁과 산릉에 보내 국난을 고했으며 여러 신사와 사찰에서는 신불(神佛)의 자비를 빌었다. 물론 무사들에게도 수비를 강화하라는 명을 내렸다.
  6. 쿠빌라이가 이때까지는 남송을 먼저 칠지, 일본을 먼저 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듯하다.
  7. 그의 가문은 일찌기 조부 홍대순(洪大純) 시절에 몽골에 투항해 부역하였으며, 부친 홍복원(洪福源)도 여몽전쟁 시절에 몽골군 앞잡이로 활약해 매국노 짓을 했으며, 홍다구는 어린 시절부터 원나라에서 벼슬을 했기에 고려인이라기 보기는 어렵다. 다만 홍다구의 동생 홍군상(洪君祥)은 일본 정벌 당시 고려의 사정을 원 조정에 전달하여 그 부담을 경감시켜주게 해 고려에서 그를 삼한벽상공신 삼중대광 익성후로 봉하였다.
  8. 900척 전부가 전투함은 아니었다. 300척은 전선, 300척은 상륙을 위한 소형선, 300척은 물을 나르기 위한 급수선이었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인부들이 겪은 참상은 끔찍했다. 하루종일 물 속에 있다보니 그들의 다리가 썩어 구더기가 들끓기도 했다.
  9. 1차 원정에서 김방경이 말하길, "비록 몽골군이 전투에 익숙하다고는 하나 어찌 고려군보다 더 낫겠느냐"라고 했다고 한다.
  10. 대승을 거두긴 했으나 퇴각한 막부군이 전열을 가다듬어 야습을 할까봐 두려워한 듯하다. 원정군이었던 여몽연합군에 비해 막부군은 지속적인 병력 충원 및 군량 충당이 수월했으며 일본 무사들은 생각보다 더 용맹한데다 몽골의 강요로 출전한 고려군은 건성으로 전투에 임했다. 거기다 쇼니 가케스케의 화살에 맞은 유복형은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11. 1274년 홍다구의 악랄한 독촉으로 4개월만에 전함 900척을 만들었기 때문에 망조됨.
  12. 원래는 음독인 신푸로 읽었다. 훈독인 카미카제로 읽기 시작한 건 태평양전쟁
  13. 이국인 고려의 상황이 막부 측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데다 당시 일본의 국력으로 해외로 출정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특히 당대 고려에 주둔한 여몽 군대는 생각보다 막강했다.
  14. 숫자로 보면 강남군이 훨씬 많지만 실상 전함에는 무기보다는 괭이·삽 등의 농기구와 씨앗 등을 잔뜩 실은데다 병사 대다수는 남송군 중에서도 가장 약해빠진 집단이었다. 주력은 당연히 동로군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설엔 성공하면 좋고, 실패하면 반란 위험도 줄이고 입도 덜고 하는 심정으로 원정을 보냈다는 말도 있다. 결국 10만의 잉여 병사들은 현해탄의 고기밥이 되었으니(...) 야! 신난다~
  15. 현재 이키 섬의 신사에서 제신(祭神)으로 받들어지고 있다.
  16. 사실 앞의 원정과 달리 2달 동안 강풍을 못 만난게 이상한 것이었다(…).
  17. 몽골인·고려인은 모조리 참수되었고 남송인은 노예가 되었다. 억울하게 여기 와서 죽거나 노예가 된 고려인과 남송인들에게 애도를(...)
  18. 여담으로 이 무쿠리 고쿠리는 산 사람을 잡으면 생가죽을 벗겨 내버린다는 전설이 있다.
  19. 이후에 쿠빌라이는 몇 번 더 일본 원정 계획을 세우긴 했으나 그때마다 반란에 직면하는 바람에 계획의 추진에는 실패했고 결국 1294년 80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죽음과 동시에 일본 원정은 완전히 중단되었다.
  20. 사실 쿠빌라이칸이 일본보다 더 치려는 상대가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이었다. 베트남은 원격한 거리와 열대 밀림지대, 그리고 쩐흥다오의 지휘 아래에서 육로로 이루어진 몽골군의 진격을 막아내는 위업을 이룩했다. 이외에도 몽골을 격퇴한 건 자바, 이집트, 인도를 꼽을 수 있다. 원의 3차 베트남 침공은 대(對)일본 원정을 중단시키고 침공한 상황에서 1287년에 이루어졌고, 쿠빌라이 칸은 4차 베트남 침공을 준비하던 와중에 죽었다.
  21. 여기서는 흥미롭게도 1차 원정 때 몽골군의 철수 이유를 태풍 때문이 아니라 일본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나타낸다. 한마디로 1차 원정이 몽골의 무력 시위였다는 해석한다.
  22. 참고로 일본 문학계의 주류 의견은 근래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에 겐자부로보다는 이노우에 야스시가 더 낫다고 보았다.
  23. 한국인들이 임진왜란이나 일본 식민지 시절에 이를 갈지만 그보다 앞서 너희 한국도 몽골의 앞잡이로 일본에 쳐들어와 수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피장파장 아니냐는 논리. 당연하지만 고려가 일본 원정을 달갑게 주도한 것도 결코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임진왜란이나 일본 식민지배가 결코 정당화될 수는 없다.
  24. 출처: 매일신문 사설 "일본 각료들의 자질을 우려한다"
  25. 몽골인과 고려인을 뜻하는 말이다.
  26. 더욱이 징비록에서 승려 겐소가 조선 사신에게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주면 전쟁이 나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사신이 무시를 하자 "고려 때 원과 함께 우리를 쳤는데 이제 그 원수를 갚는 건 당연하지 않소?"라고 할 정도로 뿌리깊게 박힌 모양이다.
  27. 굳이 따져보자면 김자점이 청의 침공을 유도해 혼란을 일으킨 뒤에 모반을 일으키려고 했던 것과 비슷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그렇다면 저런 혼란한 시점에 가마쿠라 막부를 급습하려고 하는게 정상이다.
  28. kamakuraperiod1185ad133.jpg
    그런데 영국 오스프리(Osprey) 출판사에서 나온 역사서 삽화에서는 항목 본문에서 몽골군으로 지목했던 병사들을 고려군(Korean auxiliaries, 고려 외인 부대)으로 보고, 위 그림과 같이 고려군 복색을 저것에 맞추어 그린 적이 있다(...). 뭥미? 아무래도 억지로 끌여온 군대가 적극적으로 싸웠을리가 없었다고 생각하고 도망가는 군인들을 고려군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29. 참고로 토탈워 시리즈 첫작품 쇼군: 토탈 워의 확장팩인 몽골 인베이전에서도 이들은 고려군으로 나온다.
  30. 고려의 서북 지역을 몽골에 갖다바친 매국노. 원은 그 자리에 동녕부를 세웠다.
  31. 당장 고다이고 덴노만 해도 자기 세력이 거의 없어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에게 도움을 청하고 나서야 껍데기만 남은 호조 섭정 세력을 박살냈을 정도다. 당연히 그 이전까지는 유배를 반복했고 가담자들은 줄줄이 목이 잘렸다.(...)
  32. 쇼군 미나모토 사네토모의 암살 직후 혼란을 틈타 여러 귀족과 반미나모토파 무사들을 모아 덴노가 벌인 정권 탈환 시도. 결국 실패하긴 했다.
  33. 덴노가 현재까지 이어져 온 것은 가진 게 없어서 역설적으로 쫓아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에도 막부의 사례에서 보듯이 오히려 힘 없는 덴노를 압박하여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는데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았다.
  34. 단 역으로 보면 일본에 주둔하면서 왜구의 영향력이 고려에 미치는 것을 차단할 수도 있겠지만 몽골이 쇠퇴하여 일본에 대한 영향력이 사라진다면 바다 건너 병력을 유지하기 힘든 고려군은 바로 귀환했을 것이다. 당장 고려 그리고 조선이 왜구에 시달린 가장 큰 이유는 왜구의 기지가 일본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대마도 정벌 당시에도 일본의 영토로 분류되었던 이키섬 등이 왜구의 근거지라는 건 조선도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영토라는 이유로 공격하지 않았다.
  35. 원나라 지도를 참고했을 가능성이 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만 봐도 연해주일본 열도는 실제로는 좁은 해협을 사이에 두고 이어져있지만 지도에는 완전히 다른 위치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