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승업

1 조선말기의 화가인 오원 장승업

1843년 ~ 1897년

호는 오원(吾園)이다. 오원이라는 호의 유래 중 하나는, 추사 김정희가 지어주었다는 설과 단원 김홍도와 혜원 신윤복 처럼 절세화가의 호에서 착안해 '나도 원園이다.' 라는 의미에서 나 오吾 자에 원園을 붙혔다는 설이 있다.[1]

사람에 따라 안견, 김홍도 등과 함께 조선의 3대 화가로 인식되기도 한다. 하지만, 고미술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천차만별인테, 왜냐하면 김홍도를 제외한 나머지 두 자리에 꼽는 인물은 연구자마다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두 자리에 자리할 인물로는 신윤복이나 김득신, 심사정, 정선, 이암 등의 화가들이 거론된다. 혹은 3대 화가라는 명칭자체가 잘못된 것이라며 차라리 조선의 유명한 화가들로 통칭하자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장승업의 그림은 단순한 필치로 그려졌지만, 필력에 속도감이 있고 대담하다는 평이 있다. 그는 중국 청나라 말의 필체를 그림에 도입하여 한국식 회화의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그림의 소재들은 진경산수를 선보인 정선이나 풍속화를 그린 김홍도, 신윤복 등과는 달리 전통 도석인물화를 고집하여 고루하다는 평가다. 때문에 정선이나 김홍도의 뒤를 이었다면 시대상을 반영한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을 것이라며 아쉬워하는 고미술 사학자들이 많다.[2] [3]

1.1 생애

장승업은 어려서 부모를 여의어 고아가 되었다. 그는 어렸을 시절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웠다. 그가 할 줄 알았던 것은 그림을 그리는 것 뿐이었고 또한 재능도 있었으므로, 그림으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술과 여자를 좋아해서 술자리에서 여인이 술을 따라주면 즉석에서 답례로 그림을 그려줬다고 한다. 그림으로 부와 명성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하지 않고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민영환이 고종에게 추천하여 화원으로서 궁궐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곧 궁궐이라는 틀에 박힌 곳에 머무르며 그림을 그리며 사는 삶을 그는 도저히 견딜 수 없어했다. 민영환이 이를 보다못해 "당최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며 그에게 묻자 장승업은 "을 마음껏 마시고 싶다."고 답변하였다. 이를 보고받은 고종은 특별히 명을 내려 오원에게 어느 정도의 술을 허락했지만, 장승업은 성에 차지 않았다. 때문에 그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되었는데, 바로 궁궐을 탈출하는 것이었다. 이는 분명한 항명죄에 해당하는 중죄였으므로, 이를 알게된 고종이 노발대발하여 결국 장승업은 군졸들에게 붙잡혀 몽둥이 찜질을 당한 뒤 조정으로 끌려왔다고 한다. 항간에는 주막에서 술에 대취해서 얻어맞아도 맞는지도 모른채 자고 있었다는 말까지 있었다고 한다.

하마터면 그는 항명죄로 인하여 참수될 뻔 했지만, 민영환이 고종을 필사적으로 설득하여 겨우 죽음을 모면했다.물론 천거한 민영환도 책임이 거론되었기에 그렇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승업은 그 사건 후에도 술을 찾아 몇번이나 궁궐을 탈출하려다가 걸려서 호되게 혼쭐이 났다. 그러나 그는 끝내 술을 포기못했는데, 결국 고종의 어진을 그리지 못한채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났다. 그를 아는 이들은 그가 술을 찾아 신선이 되었으리라며 명복을 빌었다고 한다. 하지만, 오원은 만 54살까지 살았으며, 술에 빠져 살았던 취화선이기에 전반적인 그의 생애에서 그의 건강에 대하여 생각하자면, 그의 죽음이 요절이라고 여길 수는 없을 듯 하다. 알콜중독이 아닐지

1.2 매체 등장 사례

80년대 KBS-1 특별 드라마 '사로잡힌 영혼' 에서는 그의 역할을 김성겸이 연기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들을 돌보던 장승업이 갇혀 사는 게 얼마나 지겨운지 모른다며 말들을 무단으로 풀어주는 묘사로써 그의 자유분방함을 더욱 강조했다. 더불어, 이 드라마에서도 작품의 후반부에 고종의 어진을 그리다가 술이 그리운 오원이 끝내 그림을 완성하지 못한채 궁궐을 탈출하는 과정이 잘 그려졌다. 이 작품은 나중에 극본을 각색하여 같은 이름의 연극으로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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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업을 주제로 한 영화 '취화선'에서 그는 대단한 기인으로 그려진다. 최민식씨가 오원을 연기하셨다. 참고로 취화선의 각본가가 도올 김용옥이다. 역시 비범하다... 유명한 장면으로는 고추장이 맵다면서 장독을 모두 깨버리고 지붕위에 올라가서 용마루에 걸터 앉은채 하늘을 향해 크게 웃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영화 포스터에 담긴 장면이기도 하며, 또한 옛날 디씨에서인터넷 신조어 아햏햏이 유행했던 때에 널리 알려져 '세상이 뭐라하든 나는 나! 아햏햏이오' 라는 문장으로 패러디 되었다. 이후 여기에서 "승업햏자"라는 이름이 파생되었다. 하지만, 아햏햏의 유행이 오래전에 끝났으므로, 오늘날의 디씨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최훈삼국전투기에서 곽가의 패러디 대상이 된다.

tvN의 '어쩌다 어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최진기 강사에 의해 소개된 바 있다. 그런데 현대 화가인 이양원(1944~)의 그림 군마도를 버젓이 장승업의 그림으로 설명하였다(…). 장승업의 군마도가 있긴 한데, 최진기가 소개한 그림과는 다른 그림이다. 관련 글 아마도 한국어 위키백과의 잘못된 정보[4]에 기반하여 강의를 준비했던 듯.[5]

문명 6에서 위대한 예술가(Great Artist)로 등장한다.

2 오대십국시대의 후당의 신하

조선의 장승업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였다. 그는 이존욱의 모신이었다.

이극용이 홧병으로 죽고 나이어린 이존욱이 세력을 잇게 되자 이극녕의 양아들들은 이존욱을 무시하였다. 그들은 이극녕의 편을 들어 이극녕이 집권하기를 기도했지만, 장승업은 이존욱을 설득하여 이존욱이 이극용의 뒤를 이어 집권하게 하였다. 이를 저지하고자 이극녕의 추종세력이 계속해서 모의를 꾸몄는데, 장승업은 이극녕일파를 처단하도록 조언하였다. 이로써 그는 이존욱의 입지를 다지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다.

이후 그는 이존욱을 도와 내정과 군략 양면에서 활약하였다. 훗날, 그는 이존욱이 황제의 자리에 등극하는 것을 반대했지만, 이존욱이 그의 의견을 듣지않았고, 이로인해 분기탱천한 그는 결국 홧병으로 인하여 죽었다.

장승업이 죽자 이존욱은 그를 대체할 인재를 구하지 못했고, 더욱이 그는 놀기 좋아하였으므로 후당의 정사를 어지럽혔다.
  1. 씨네21에 만화를 연재하는 작가 정훈이께서 그린 취화선에서는 닷냥이라는 호를 가진 화가로 패러디되었다. 작중의 캐릭터 닷냥은 스스로 장승업과 라이벌이라고 주장한다.
  2. 이말은 즉슨, 우리 강산을 그린 그림이 없다는 뜻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정선 이후 한가닥 한다는 화가들은 죄다 금강산을 그려 남겼는데, 장승업은 금강산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명승지와 관련된 그림은 한점도 없다.
  3. 애초에 구구절절 시나 읊고, 책을 가까이 하는 고고한 양반 신분 따위가 아니였다. 때문에, 자신이 그리는 중국고사인물과 명승지를 칭찬해 마지 않는 양반계층에 대해 역으로 풍자, 빈정거림으로 중국도상만 그린다거나, 자신 역시, 조선내 자신신분의 한계로 인해 하는 마음으로 개인적 판타지 충족을 위해 중국적 도상을 주로 그려냈다는 설이있다.
  4. 2014년 2월 18일 버전 문서. 현재는 수정되었다.
  5. 한국어 위키백과에서는 이 그림이 장승업의 그림이라면서 그 출처를 개인 홈페이지인(…) 여기로 해 두었는데, 짐작건대 작품 구석의 '양원'이라는 낙관을 장승업의 호인 '오원'으로 오식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