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주

郭永周
(1925 ~ 1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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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의 하야 이후에도 계속해서 경호하던 모습사형 집행 직전의 그의 최후의 모습

1 소개

대한민국의 악덕 부패경찰. 지금의 대통령경호실장격인 경무대경찰서장이었으며 이승만의 신임을 등에 업고 막강한 권력을 남용하였다. 최종 계급은 경무관이었다.

2 생애

경기도 이천 출신으로 이정재와는 고향선후배였다. 일제 강점기의 행적은 알수 없으나 해방 후 경찰로 있던 이정재[1]의 도움으로 수도경찰학교에 입학했다.

이승만이 대통령 당시 이승만의 눈에 띄어 이승만의 경호일을 보게되었다. 뽑힌 일화가 있는데 당시 곽영주는 수도경찰학교를 졸업하고 경찰서 보초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이승만이 경찰서 방문 시 문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곽영주를 인상깊게 보았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기준으로 엄청난 덩치와[2]우렁찬 목소리, 서구적인 마스크가 썩 이승만에 맘에 들었던지 경무대 경호원으로 특채되었고 그뒤에도 이승만에게 총애를 받고 1956년에 곽영주를 지금의 대통령 경호실장인 경무대 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경사에서 경무관으로 올랐으니 무려 5계급 특진이다. 결국, 곽영주의 승진은 인사원칙을 깡그리 무시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공무원들이 이승만에게 무조건 아부하면서 충성해야만 출세를 한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심어주게 되었다.

이후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날뛰기 시작했다. 이정재에 대한 은혜를 갚는답시고 그가 무슨 짓거리를 하고 다니든 절대 체포하지 못하게 했으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줬다. 그 결과 이정재를 경찰에 신고한 사람이 잡혀가는 황당한 경우마저 있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개 경호실장이 정치에 엄청나게 참견을 해대는 심각한 수준의 월권 행위를 저지른 셈으로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에 전부 참견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쥐락펴락하려고 했다. 이 때, 곽영주가 얼마나 까불고 다녔는지 부부통령(副副統領)이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뒷날의 경호실장 차지철도 충실히 계승한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민간인을 사살한 적이 없는 차지철[3]과 달리 곽영주는 민간인을 사살하는 것을 서슴치 않았다. 곽영주가 자신의 손으로 사살한 민간인만 수백 명 이상이었다.

곽영주는 군 장교의 진급심사에 참견했는데 그 장교의 소양보다는 당사자나 가족의 사상 관계를 캐묻는 경우가 많았다. 이런 식으로 태클 걸렸던 사람이 김익렬과 박정희. 김익렬은 4.3 사건 당시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일시 휴전을 한 탓에 공개장소에서 면박당해서 끌려나갔다. 결국 김익렬은 50년대 내내 찬밥이었다.

박정희는 과거 남로당에 가입한 경력이 있으니 문제가 될 수 밖에 없었다. 박정희는 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이나 백선엽이 찾아와서 심사위원들을 일일이 설득시키고 기어이 진급시켜줬다. 그런데 곽영주는 박정희의 남로당 경력을 드러내도 먹히지 않자 어떻게 알아냈는지 박정희의 이혼 경력을 들고 와 박정희의 여자 관계가 굉장히 문란하다는 모함을 했다. 하지만 씨도 안 먹혔다.

박정희는 한국전쟁 중에 당시 부인이었던 김호남과 이혼했는데 어른들이 억지로 결혼시킨 거라 원래부터 사이는 좋지 않았다고 한다. 김호남은 이혼 충격 때문에 한때 친정에서 손을 써서 절에 들어가 요양을 하기도 했다. 김호남의 딸 박재옥에 의하면 김형욱의 자서전에도 언급되는 '박정희가 어느 스님이랑 그렇고 그런 관계에서 딸을 낳았는데 박정희와 얼굴이 똑같다'는 소문은 사실 이 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곽영주가 박정희를 어떤 식으로 모함했나 하면 앞에서 언급한 내용 중에 "김호남이 충격 때문에 한때 친정에서 손을 써서 절에 들어가 요양을 했다." 는 것을 비구니를 강간해서 박정희와 똑같이 생긴 딸을 낳았다는 식으로 모함했다.[4]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곽영주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민들을 무력진압했다. 서대문 앞 총격사건이나 이기붕 자택(현재의 4.19 도서관 터) 발포 사건은 그의 직접 명령에 의한 것. 이후 이승만이 하야하자 곽영주는 자신의 기반을 잃었고 그대로 체포되어 장면 정권하에서 벌어진 재판에서 단기형을 받았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혁명재판이 벌어지자 그는 다시 체포되었다.

같은 혐의로 같이 체포된 홍진기[5]와 유충렬이 사형 선고 후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것과 달리 곽영주는 그대로 사형이 선고되었다. 결국 곽영주는 정치깡패 이정재, 영화깡패 임화수, 이승만 정권 당시 내무부장관이었던 최인규, 정치깡패 신정식과 나란히 1961년 교수형을 당했다.

곽영주가 박정희의 원한을 사서 사형을 당했다는 소문도 있으나 사실 이걸 빼더라도 사형당해도 모자랄 만한 사고들을 쳤다. 4공화국 당시 정치 보복이나 소위 반혁명 재판[6] 때와 달리 혁명재판 혐의자나 군부내 5.16 반대자들[7]에게도 의외로 관대한 모습을 보여준 박정희였지만 곽영주의 죄는 한도를 넘은 셈.

평가는 당연히 권력 남용으로 인한 부정적 평가가 절대적이다. 하지만 1979년 10.26 사건때 화장실로 도망갔던 차지철과 달리 끝까지 이승만에 대한 충성심은 있었던 모양이다. 4.19 이후 구속기사

여담으로 4.19 이후 그의 장남(곽승근)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1995년에 월간조선 10월호에서 최인규, 임화수, 이정재, 조용수, 최백근, 신정식, 한필국과 함께 1961년에 교수형을 당했을 때의 사진이 모두 공개되었다.

3 미디어

3.1 제2공화국

이동신이 연기했다. 첫 등장시부터 이승만에게 궁중어투를 사용해 해설자에게 제대로 까였다.

함께 경무대에서 이승만을 보좌하는 비서관 박찬일과 경쟁과 암투를 벌이는 사이로 묘사된다. 4.19 혁명이 발발한 이후 계엄사령관이 된 송요찬을 포섭하려 시도하지만 실패하고 친하게 지내던 정치깡패 임화수, 유지광이 계엄군에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송요찬에게 고대생 습격 사건은 시위 때문에 피해본 노점상들이 빡쳐서 벌인 일일뿐이라는 식으로 뻘소리를 해대면서 이들의 체포를 막으려 하지만 제대로 까임만 당한다.

결국 이승만이 하야하자 마구 발광하면서 분노를 터뜨리고 허정 과도정부가 수립된 이후 경무대 발포 사건 책임자로 구속당한다.

3.2 무풍지대

이운우[8]가 연기했다.

3.3 야인시대

곽영주(야인시대) 항목으로.
  1. 고향인 이천에서 씨름 선수로 활동하다 강제징용때 경성으로 상경하여 김두한의 반도의용정신대에서 서기 일을 보다가 경찰 특채가 되어 해방후에 다시 경찰에 복직해서 활동하고 있었다.
  2. 1950년대에 곽영주의 신장은 무려 180cm가 넘었다. 전성기의 김두한이 키 182cm에 몸무게 92kg이었다고 한다.
  3. 사실 차지철도 박정희의 앞에서 시위하는 민간인을 학살해버리자는 투의 이야기를 하기는 했다. 자세한건 본인 문서를 참고하자.
  4. 박정희는 김호남과 이혼한 이후에도 한 때 사귀던 여자와 같이 살면서 자신이 박재옥을 키우려고 했고 대통령 때 정식으로 딸이라 인정했다. 장성일 때 자신의 부관이자 후일 칠레 대사를 역임한 한병기와 결혼시켰다.
  5. 조봉암을 사형시킨 법무장관이자 중앙일보의 창업주.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 홍석조 BGF리테일 회장,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의 아버지이다. 이병철과는 사돈이자 이건희의 장인이다.
  6. 5.16 이후에 박의장 암살음모, 반혁명 음모, 이주당 사건등으로 박정희 군정을 몰락시키려던 사건들. 다만 이 사건은 채명신이 한탄했듯이 모두 김종필의 머리에서 나온 조작 사건이 분명하다. 원충연 같은 경우는 이런 혐의로 박정희 사망때까지 감옥살이를 한다.
  7. 강원도 쪽에서 무력 진압을 천명한 이한림은 후일 박정희 정권 때 교통부 장관을 역임하고 강영훈도 나름대로 중용되어 제6공화국 때에는 국무총리가 된다. 화병으로 사망한 정강은 예외.
  8. 제3공화국에서는 권일과 홍종철 1인 2역을, 코리아게이트에서는 허문도를 연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