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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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2월 28일 ~

제2기 전대협 의장이며, 3선 국회의원.

1967년 서울특별시에서 태어났다. 서울 양정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85년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입학하였다.

1988년 고려대학교 총학생회장과 제2기 전대협 의장을 하면서 학생운동을 이끌었다. 그의 제2기 전대협 의장 취임식 때에, 취임식 장소이던 연세대학교에 무려 2만 명의 인파가 몰렸을 정도로 운동권 내에서 그의 위세가 대단했다.

전대협 의장에 취임한 이후 수배와 투옥 등으로 어려운 시기를 보내야 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문부식씨 등과 함께 ‘한미문제연구소’를 설립하려 했다는 이유로 3년간 옥살이를 한 것이 대표적이다. 1992년에는 과일 노점상을 하기도 하였다. 1993년에야 겨우 대학졸업을 할 수 있었으며, 그때까지 힘든 시기를 함께 해준 여인과 1994년 혼인하였다.

그러다가 김대중 대통령에 의해 발탁되어 새천년민주당에 입당하였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16번으로 입후보하였는데, 당선에 실패하였다. 2000년 5월 17일 새천년 NHK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새천년민주당 내 어지간한 운동권 명사들이 다 모인 술자리에 끼지 않아 칭찬을 받았다. 당연히 끼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 어쨌든 이로써 김민석, 송영길, 우상호 등은 의문의 1패.

2003년 3월 6일자 김영진(1947)이 농림부(현 농림축산식품부)장관에 임명되어 의원직을 사퇴함에 따라 비례대표 의원직을 승계하여 처음으로 금배지를 달았다. 그러나 2003년 10월 26일자로 민주당을 탈당하고 열린우리당에 입당함으로써 비례대표 의원직을 상실하였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서울특별시 강북구 갑 선거구에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하여 한나라당 김원길 후보를 꺾고 당선하였다. 재래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특별법, 어린이 놀이시설 안전관리법, 중소기업 중소상인 적합업종 보호를 위한 특별법 등을 발의하여 제정하였다. 2005년에는 원내 대변인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강북갑에서 한나라당 정양석 후보에게 패하였다. 그 후 4년간 춥고 배고픈 원외위원장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강북갑에서 다시 당선되었다.

2013년 2월부터 2015년 2월까지 새정치민주연합 서울특별시당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는 서울에서 박원순 시장의 재선, 구청장 20명, 시의원 77명의 당선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2014년 7월 재보선 당시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가 서울 동작구 을 지역구에 기동민을 전략공천한 것과 관련하여, 허동준에게 기회를 달라고 새정치 의원들이 세 차례나 연판장을 돌리는 데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안철수가 측근 금태섭을 동작을에 전략공천하려 하자, 중앙대학교 흑석캠퍼스 총학생회장[1] 출신에다 전대협 대변인을 지낸 허동준이 16년간의 지역위원장 경력[2]을 내세우며 반발했고, 여기에 오영식을 비롯한 범친노 386이 금태섭 전략공천은 불가하다고 성명을 발표한 것이 첫번째이다. 결국 금태섭이 포기하고 물러났는데[3], 그 다음에 지도부가 이번에는 서울시 정무부시장 경력의 기동민 전략공천[4]을 시도하자, 오영식이 또 다시 흥분하여 기동민에게 20년 지기를 배신할 것이냐며 공천을 받지 말라 윽박지르고 연판장을 돌린 것이 두번째, 세번째이다. 그 결과 안철수-김한길 공동대표 체제는 크게 흔들렸고, 결국 재보선 참패뒤에 사퇴했다.[5]

2015년 2월부터는 새정치민주연합 최고위원을 역임하였으나, 11월 27일 사퇴하였다. 문재인 대표가 이른바 '문.안.박 공동지도부 구상'을 발표하면서 최고위와 사전협의를 거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컷오프 당하실려고 작정을 하셨네요.

2015년 12월 10일에는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이 선정하는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선정되었다.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에서 '갑의 횡포에 신음하는 을의 눈물을 닦아주는 국정감사'에 힘썼다는 평가를 받았다.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사전 여론조사를 통해 경쟁력이 없는 것으로 밝혀져 컷오프를 당했다. 당시 더불어민주당의 전략공천 결정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지만, 당의 방침을 수용하고 20대 총선에는 불출마를 하기로 했다. 지역구인 강북갑에는 천준호 전 박원순 서울시장 비서실장이 공천되었으나, 정양석 전 국회의원에게 패하여 결국 지역구를 넘겨주게 되었다.

정세균 의원이 국회의장이 되면서, 같은 정세균계였다가 출마하지 못하게 된 전병헌, 강기정 의원과 함께 국회 사무총장 후보 물망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정세균계가 아닌 우윤근 전 의원이 개헌론자의 대표격으로서 사무총장에 오르게 되었다.
  1. 중대 흑석캠퍼스는 서울 동작구 흑석동에 있다.
  2. 허동준은 열린우리당 창당때부터 대통합민주신당-통합민주당-민주통합당-새정치민주연합으로 계속 당명이 바뀌는 와중에도 꾸준히 동작지역위원장으로 지역조직을 관리해왔다. 그러나 매번 국회의원 선거때마다 이계안, 정동영 등 외부인사가 전략공천으로 내려오면서 정작 선거에는 출마조차 못해봤다. 재보선에 또다시 금태섭, 기동민 등 외부인사 전략공천설이 흘러나오자 그동안 참아왔던 울분이 폭발했고 여기에 동년배인 486세대들이 공감해서 집단행동으로 발전한 것이다.
  3. 안철수 공동대표가 다시 수원 전략공천을 제의했는데, 금태섭이 거절했고, 얼마안가 안철수 곁을 떠났다.
  4. 이것도 사실 황당한게 기동민은 광주 광산구 을에 공천을 신청한 상태였다. 당시 새정치연합 주변에선 부시장은 서울에서 하고 국회의원 출마는 광주에서 할려는 기동민도 이해하기 힘들고, 광주에 공천신청을 한 기동민을 다시 서울에 전략공천하려는 지도부도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야기들이 흘러나왔다.
  5. 이런 난장판 속에서 결국 공천장을 받아쥔 기동민도 정의당 후보로 출마한 노회찬에게 지지율이 밀리면서 선거운동 기간중에 사퇴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