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麟榮
1868년 9월 23일 ~ 1909년 9월 20일
조선, 구한말의 독립운동가이다. 1868년 경기도 여주목에서 태어났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 민씨가 시해되고 이어서 단발령이 내려지자, 류인석, 이강년 등의 의거에 호응하여 원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5년 을사조약을 계기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가 병석에 누워 있어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1907년 고종이 강제 퇴위되고 정미 7조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이를 계기로 의병 활동을 재개, 13도 창의군에 몸담았다. 그러나 서울진공작전을 앞두고 아버지가 별세하자 "잃어버린 나라는 3년 뒤에도 찾을 수 있지만 부친의 3년상은 미룰 수 없다"며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3년 뒤 되찾을수조차 없게 된다 그렇게 고향에서 은둔하다가 1909년 6월 7일, 일본 헌병에게 잡혀 경성감옥에서 순국하였다.
총사령관을 그만 둔 이유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이유인지라, 많은 사람들은 그가 무책임하게 의병을 그만둔 것에 대해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부정적 반응들 어찌되었든 일제에 의해 순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간에 그만 둔 영향때문인지는 몰라도 13도 창의군을 마지막까지 이끌었던 허위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받은 것과 달리 한 단계 낮은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다만 조선 후기 경직성이 극에 달한 성리학을 숭배했던 당시 시대상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