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부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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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대통령 선거
1956년 5월 15일1960년 3월 15일1960년 8월 12일
제3대 대통령 선거3.15 부정선거제4대 대통령 선거
이 난동에는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혐의도 있어서 지금 조사 중인데, 난동은 결국 공산당에 대해서 좋은 기회를 주게 할 뿐이니 모든 사람들은 이에 대해서 극히 조심해야 될 것이며, 또 지방경찰은 각각 그 지방의 정돈을 지켜서 혼잡이 없게 만들어야 될 것이다.

1960년 4월 13일자 이승만 대통령 긴급담화 발표.#

1 개요

대한민국 헌정 역사 이래 최악의 부정선거이자, 무효가 된 유일한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그리고 자유당 정권이었던 제1공화국 최대의 병크이자, 부정부패로 가쁜 숨을 내쉬던 자유당 정권에 최후의 비수를 꽂아버린 부정선거 사건이다.

2 상세

1956년 대선에서 이승만은 라이벌인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가 병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 아래에서 장관직을 역임했던 진보당 조봉암에게 30% 가량의 득표율을 내주는 충격적인 결과를 받았다. 당시 이승만 500만 표, 조봉암 250만 표에 투표 당시 사망 상태인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가 185만 표나 나오는 놀라운 결과였다.[1]

국부로서 존경받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던 그가 상심한 것은 당연한 일. 이승만에게 아부하기 바쁘던 자유당 정권은 대선이 끝나자마자 다음 대선을 걱정해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들은 뚜렷한 대안 세 가지를 통해 불리해진 전황을 뒤집어보고자 하였다.

  • 첫째, 평화통일을 부르짖던 조봉암을 사형시키고 진보당을 박살냈다.
  • 둘째, 자유당 정권의 처사에 대해 왈가왈부하던 언론(특히 경향신문)에 재갈을 물리는 신 국가보안법을 발동시켰다.
  • 셋째, 민주당이 아직 대통령 후보조차 정하지 못하고 내부 갈등으로 갈팡질팡하던 1959년 3월부터 이미 새로 내무부장관이 된 최인규의 지도 하에 부정선거 계획을 수립했다.

그렇게 준비를 열심히 했는데, 정작 1960년 대선 직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갑작스럽게 죽는다. 이로써 사실상 대통령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는데, 문제는 부통령이었다. 저번 대선에서 자유당이 내세웠던 이기붕이 보기 좋게 민주당의 장면에게 박살이 났기 때문. 부통령이 뭐 대단한 권세를 가진 것도 아니고 대통령 부재 시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 정도밖에 안 되지만 이승만의 나이가 지금 봐도 장수이고 당시로서는 엄청나게 장수한 85세의 고령인데다가 몸도 매우 안 좋았으므로 이승만 사후를 대비 할 필요가 있었는데, 지난 대선에서 이기붕이 장면한테 탈탈 털린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애써 준비한 부정선거 계획이 그대로 진행될 수 있었다.[2]

1년여를 기다려 마침내(?) 시작된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선거. 최인규를 비롯한 자유당과 그 떨거지들은 꾸준히 준비해 온 자신들의 역량을 유감없이 과시하였는데, 그 수법들이 참으로 가관이었다. 일정 비율의 표를 사전 투표해서[3] 투표함에 채워넣는 방식은 기본이고, 3인조/7인조 투표라고 해서 세 사람이나 일곱 사람씩 짝을 지어서 투표소에 들어간 뒤 서로 확인을 받게 한 뒤 투표하게 하거나 죽은 사람을 버젓이 선거인 명부에 올려서 자유당 표에 추가했다. 심지어 투표소 시계를 몇십 분 빨리 가게 조작해놓고 시간이 다 됐다며 민주당의 선거관리인을 쫓아낸 뒤[4] 이기붕 표로 가득 찬 투표함으로 바꿔치기도 했다. 또한 개표할 때도 다른 후보에 찍은 표 뭉치 위아래에만 이기붕의 표를 씌운 후 모두 이기붕의 표라 집계하거나 아예 검표하지도 않고 몽땅 이기붕의 표로 집계하는 등 막장의 극한으로 치달았다.

3 결과

아래의 결과는 대한민국 국회의 의결에 의하여 무효 처리되었다.

대한민국 제4대 정·부통령 선거
구분기호후보명정당득표수득표율순위
대통령선거1[5]조병옥민주당유세기간 중 사망
2이승만자유당9,633,376표89%[6]1위 (당선)
부통령선거1이기붕자유당8,337,059표79.19%1위 (당선)
2김준연통일당249,095표2.36%3위
3임영신대한여자국민당97,533표0.92%4위
4장면민주당1,843,758표17.51%2위

당연히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헌데 선거조작을 너무 열성적으로 한 나머지 이승만과 이기붕의 표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당황한 자유당이 이승만 80%, 이기붕 70%로 적당히 줄여서 발표했다.[7] 얼마나 어이가 없었는지 선거 당일부터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으며 뒤이어 투표권을 우롱당한 국민들이 줄줄히 들고 일어나면서 4.19 혁명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2010년부터 국가 기념일로 지정되었으며 마산(현 창원시)에서는 3.15 의거 관련 행사도 열렸다. 현재도 마산 시가지를 통과하는 대로를 '3.15대로'로 명명하여 기리고 있다.

4 누구의 책임인가?

이를 전적으로 이기붕과 최인규를 비롯한 자유당의 문제로 돌리는 시각도 존재한다. '이승만 입장에선 경쟁자가 급사해서 단독 출마로 당선이 확정 된 상황일 뿐더러 임기 중에 사망하면 대통령이고 정치생명이고 다 끝인데 뭐하러 부정선거를 주도하겠는가?'라는 얘기.

하지만 당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던 이승만이었으므로 그 몰래 이기붕이 독자적으로 무슨 일을 꾸미는 것은 이승만을 무시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고, 신문, 방송 등에서 부정선거의 가능성, 민주당의 비난 성명 등으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는데 이승만만 몰랐을 리가 없다.

반론도 존재하는데, 이미 고령이었던 이승만의 정신이 오락가락하던 터라[8] 일처리라든가 정국의 장악력이 예전만 못했고, 나중에 하와이에 가서 박정희의 5.16 군사정변 소식을 듣고 "그래, 박정희. 그 사람이 잘하고 있다더냐?"라고 묻자 측근들이 "뭐, 그럭저럭 한답니다."라고 대답을 했는데 '한답니다'란 애매모호한 말을 믿을 수 없다. 내가 4.19 혁명 때 '그렇다고 합니다'란 말만 믿다가 이렇게 되었다."라는 말을 했다고 그의 양아들이 증언한 바 있다. 이승만 무책임론은 엄청나게 뻥튀기된 면은 있어도 아주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9]

이미 손쓸 수 없을 정도로 정국이 불안정해지고, 이기붕이 하야를 고려한다고 공식 발표하는 등의 궁지에 몰리자 결국 이승만은 "그렇게 망측스러운 불의를 보고서도 일어나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나 다름이 없지. 불의를 보면은 일어나야 해."라는 말을 남기고 대통령직에서 하야한다. 기사. 그리고 이튿날 4월 26일에 방송을 통해 대통령 사임 선언을 한다. 하지만, 다음날 4월 27일 이승만은 대통령직 사임한 뒤 국회에 사임서를 제출해야 하는데, 갑자기 막무가내로 거부했다. 이미 방송으로 다 나갔는데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비서들의 잇따른 사임서 사인 요구에 버텼다.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노(老) 독재자의 최후의 몸부림이었다. 측근 허정도 설득할려고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김정렬이 나서서 또 촉구했지만, 이승만의 대답은 역시 사임하면 온 국가가 혼란에 빠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허정이 질서를 확고히 유지할 수 있다고 역설하자 그때서야 어쩔 수 없었던지 사임서에 사인을 해 국회에 제출할 수 있게 되면서 공식적으로 사임하게 된 것이다.[10]

이승만에게 우호적인 뉴라이트 계열이나 조갑제조차도 이승만의 실수라고 마지못해 인정하고 있지만, 이승만이 직접 한 게 아니며 저것도 밑사람을 위해서 책임을 더 덮은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하지만, 뉴라이트 계열에서 주장하는 것과 달리, 실제 이승만도 이 부정선거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이승만은 2월 13일, 정부통령 선거 직전 긴급담화를 발표했는데, 1956년 선거에서처럼 대통령과 부통령 당선자가 서로 다른 당에서 나오면,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더라도 응종치 않겠다고 말한 것이다# 이는 자유당 간부들을 비롯해 내각(특히 최인규 내무부 장관)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기붕을 당선시켜야 한다는 지시'로 들릴 수 있었다. 뒷날 최인규는 나중에 법정에서 '2.13 담화'가 자신에게 큰 압박을 가해왔음을 고백했다.[11]

뭐, 윤치영[12], 허정[13] 등 여러 측근들은 이승만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라고 주장하기는 했다.

5 이야깃거리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회원구 구암동에 국립 3.15 민주묘지가 있는데, 이 사건 및 4.19 혁명 관련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자들을 기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4.19 희생자들을 기리지만 3.15가 발단이 되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안타깝게도 50여 년이 지난 2012년에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났는데, 수법이 이 사건과 판박이었다. 교내 학보사의 고발로 시작된 이 사건은 후에 교내외로 비난이 쏟아졌는데, 관련자들은 출학되거나 1년간 의무봉사 조치가 내려졌다.

가끔 보훈단체 같은 곳에서 발행하는 달력에 "3.15 의거 기념일"라고 적혀 있는 경우가 있는데, 무슨 부정선거를 기념하려고 이렇게 적혀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날 벌어진 마산 의거를 뜻하는 것이다. 마산 의거에 대한 자세한 것은 4.19 혁명 항목을 참조하자.

6 관련 항목

  1. 이런 결과는 신익희 사망 이후 보수야당 민주당이 혁신계(진보) 세력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에 진보당 조봉암에 대한 지지를 단호하게 거부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래 조봉암은 이승만이 독재로 치닫자 민주당의 전신인 호헌동지회에 참여하려 했으나, 그때도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2. 막상 이승만은 1965년까지 잘먹고 잘살다가 죽었다...
  3. 당시 한국의 문맹률이 높았기 때문에 이게 가능했다. 교육열의 영향으로 문맹률이 현저히 낮아지고는 있었으나, 그건 한창 교육을 받는 젊은층 얘기지 노년층에서 문맹률은 여전히 해결이 안 되고 있었다. 이들의 선거를 도와준다는 명목으로 방법을 가르쳐주면서 여당 의원을 찍으면 된다는 식으로 가르쳐주어 여당 의원에게 몰표를 준 것이다.
  4. 이것은 조봉암이승만이었던 1956년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5. 당시 선거기호는 특별한 부여순위가 있던게 아니라 무조건 추첨이었기 때문에 같은 당 후보인 이승만-이기붕, 조병옥-장면의 기호가 제각각이다.
  6. 현재 기준으로 하면 100%지만, 당시엔 무효표를 포함해서 득표율을 계산했기 때문에 100%가 아니다.
  7. 어떤 곳은 유권자 수 보다 득표수가 많은 웃기지도 않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어느 후보의 표였을지는 뻔하다.
  8. 육군사관학교에 가서 여기가 어디냐고 묻길래 정일권이 육사라고 대답했더니 다시 육사가 뭐하는 데냐고 반문할 정도였다.
  9. 정신이 오락가락했다는것은 어느 정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이 대통령의 권력욕은 끝이 없어 '독재자'라는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전단(傳斷)하려고 했지만, 노인의 나이는 속일 수 없어 1958년경부터는 멍하니 허공을 쳐다볼 때가 많았다고 알려져 있다. 또 선거와 같은 예민한 권력 문제를 제외하고는 이기붕과 박찬일 비서와 곽영주 경무관이 중요 업무를 대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워낙 나이가 많았으므로 언제 사거할지도 알 수 없었던 상황. 이승만은 3.15 마산 항쟁 후 자신이 어려운 상황에 빠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여러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역정을 자주냈고 신경질적으로 밑의 사람에게 부정선거 책임을 돌리려고 했다고 한다.(출처 - 사실의 전부를 기록한다 - 허정 편', 희망출판사, 1966, p207)
  10. 출처- 김정렬, '김정열회고록', 을유문화사, 1993년, p268~269
  11. 출처 - 학민사편집부 편, '혁명재판', 학민사, p39
  12. 윤치영은 일제말에 변절한 친일파였으며,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이승만의 독촉 등 극우 반공주의 세력에 달라붙어 활동한 기회주의자로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후 반민특위 활동 방해하고 때려부수는데 일조하였으며 반민주주의적이고 독재정권에 적극 협조한 앞잡이였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 4.19혁명에 관련해서 '4.19 사태'라고 폄하했으며, '김창룡이 있었으면 4.19 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다'는 망언을 내뱉었다.
  13. 이승만의 최측근에 있던 인물로 4.19 혁명 당시 부정선거 책임자 처벌에 매우 소극적으로 다뤘으며 축소, 은폐에 일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