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앙

1 曹昻

(?~197)

후한 말의 군벌인 조조의 장남으로 는 자수(子脩).

측실 유씨 소생으로 청하공주와 동복남매이다.

1.1 생애

유씨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조조의 정실이었던 정씨가 대신 거두어 키운다. 후술하겠지만 친자식이 아님에도 모자 지간의 사이는 굉장히 돈독했다. 아무튼 서장자에서 적장자가 되어 일찌감치 후계자로 낙점이 되었다.

조조는 자신의 세력권 바로 아래 지역인 완에 장제의 조카 장수가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사실에 불안감을 느껴, 대군을 이끌고 장수를 압박하여 결국 장수의 항복을 받아낸 후 그의 근거지인 완성에 무혈입성한다. 하지만 호색한인 조조가 장수의 삼촌 장제의 부인을 데려와 품고 지내자 한을 품은 장수는 모사 가후의 책략을 받아들여 군기가 해이해진 조조군을 기습한다.

불의의 기습으로 조조는 오른팔에 화살을 맞고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는데 조앙이 아버지에게 말을 넘겨주고 자신은 뒤에 남았다가 목숨을 잃었다. 세어에 의하면 이미 부상을 입고 말을 탈 수 없게된 상황에서 말을 바쳐 아버지를 살렸다고 한다. 이때 조조를 곁에서 호위하던 전위와 조조의 조카 조안민도 함께 목숨을 잃었다.

1.2 사후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조앙과 조안민의 죽음보다 전위의 죽음을 더 애통해하는 모습을 보여 아들보다 훌륭한 장군의 죽음을 더 애석해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실제로는 평생에 씻지 못할 회한으로 남았다.

조앙을 키운 정씨 부인은 아들을 죽여놓고 어떻게 아무렇지도 않을 수 있냐며 통곡하다 친정으로 돌아가 버렸다. 지금으로 따지면 이혼 단계까지 가버린 것이다. 군주의 위치에 있던 조조가 장수의 삼촌의 아내인 추씨와 하룻밤을 보내는 행태도 충분히 노여울 만한 일인데, 장수가 일으킨 반란 때문에 각별히 아끼는 맏아들마저 죽었으니 정씨 부인의 분노는 말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조조는 직접 정씨의 친정을 찾아가 돌아오라고 울며불며 사정을 했지만 그녀는 끝까지 마음을 돌리지 않았다. 그래서 아내는 아직 젊으니 재혼해서 잘 살길 빈다고 장인에게 전하고 돌아갔지만 조조가 무서워서 아무도 정씨와 결혼하려 들지 않았다.

위서에 의하면 몸져 누운채 임종을 기다리던 조조는 다른 일은 마음에 걸릴 것이 없지만 정씨의 일만은 후회된다며 죽어서 조앙을 볼 면목이 없다고 "만약에 사람이 죽어서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내 아들 조앙이 '내 어머니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해야할지 모르겠다"며 한탄했다고 한다. 조조: 저승에 같이 있잖니

장수전에 주석으로 딸린 《위략》의 기록에 따르면, 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한 후 조비는 잔치를 열 때마다 장수를 초대해 "내 형을 죽여놓고 무슨 면목으로 나를 쳐다보는가?"하며 추궁했다. 이런 일이 수차례 반복되자 견디지 못한 장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장수전 본전에는 단순히 오환을 정벌하러 가다가 사망했다고 나오며 자살에 대한 언급은 없다. 자살이 아니더라도 심적으로 피폐해진 상황에서 원정에 나섰다 병을 얻어 사망했을 수도 있다.

장수의 아들 장천은 후일 위풍의 반란에 연루되어 조비에게 처형당했는데 위풍의 난은 기록이 워낙 부족해서 장천이 정말 반란에 가담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그래서 상기한 위략의 기록과 연결지어 장수로는 부족해 그 아들까지 죽인 게 아닌가 하고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람도 있다.

위 건국 후 조앙은 풍도왕(豊悼王)으로 추존되었으나, 뒷날 풍민왕(豊愍王)으로 시호가 변경되었다. 그래서 진수정사 삼국지에서 조앙의 열전 제목은 <풍민왕앙전>이다. 悼(슬퍼할, 애도할 도)[1] 나 愍(딱할 민) 모두 애도와 동정의 의미를 내포한 시호다.

1.3 평가

국내에 삼국지가 연의 중심으로만 알려질 당시만 하더라도 전위에 가려져서 아버지를 위해 목숨을 버렸음에도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캐릭터 정도였다. 허나 이후 국내의 삼국지의 팬이 많아지고 인터넷 커뮤니티 등이 활발해지면서 여러 관련 자료를 접할 수 있게 되고, 인물에 대한 분석, 토론이 활기를 띄면서 재평가받고 있다.

특히 조비의 성격 크리가 부각되면서 만약 인간미가 넘치고 효심이 깊은 조앙이 살아남아서 뒤를 이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이야기가 심심찮게 나오곤 한다. 조비, 조식, 조창, 조충의 재주를 볼 때 조앙도 문무에 걸쳐 뛰어난 인재였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제위 오르기 3년 전(217년)에야 장자라는 명분으로 후계자로 낙점받은 탓에 권위가 부족해 호족들에게 많은 양보를 해야했던 조비와 달리 조조가 일개 지방군벌일 때 낙점된 후계자라 살았다면 20년 넘게 후계자로 있으며 수업을 받고 공적을 쌓았을테니 권위와 기반이 무척 튼튼했을 것이다. 조비가 형제들을 박대하고 나아가 황족들을 옳아맸던 것은 (결과적으로 호족으로부터 황실을 보위할 방어막을 얕게 만든 것은) 개인의 인격 이전에 조비의 권위가 부족한데 말미암아 일어난 일이었는데 조앙이 조조의 뒤를 이었다면 최소한 그럴 필요성은 없어진다.

조비 본인도 만약 조앙이 살아있었다면 당연히 (지금 자기가 앉아있는) 황제의 자리에 앉았을 것이라고 쿨하게 인정했다. 사실 조앙이 살아있었다면 나이 차도 차이려니와 정씨가 그대로 정실부인 자리에 남아 있었을테니 조비 이하 변씨 자식들은 서자로 떨어지므로 정통성에서 도저히 상대가 안된다.[2]

1.4 미디어 믹스

삼국지 12,13

코에이의 삼국지 시리즈 능력치는 통솔력, 매력만 70대 중반인 B급 무장. 동생들과 비교하면 안습하지만 기록의 반영으로 의리는 동생들에 비해서 상당히 높다. 다만 조조로 플레이할 경우에는 어차피 자식으로 배반할 일이 없고 타 세력으로 플레이 할때는 등용도 잘 안되고 능력치가 평범해 굳이 쓸 이유도 없는지라 의리치 높은게 달리 도움이 되진 않는다.

삼국지 9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2/무력 60/지력 65/정치력 73. 분전, 기사, 배반, 고무를 가지고 있다.

삼국지 10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74/무력 62/지력 68/정치력 74/매력 77로 조조군 소속인지라 조금 미묘. 치안 셔틀로는 쓸 만하다.
하지만 이벤트신에서 "후계자는 또 만들면 되지만 조맹덕은 천하의 단 한 분뿐이십니다"라는 간지폭풍의 명대사를 날렸다

삼국지 11의 특기는 혈로이다.

삼국지 12의 일러스트는 위기에 처한 조조에게 말을 바치는 장면. 전법은 기병계가 많은 소속답게 기군병격.

삼국지 조조전에서는 장수토벌전에서만 등장. 조조에게 도망가라고 말한 후 바로 호거아에게 죽어서 에디터 없이는 능력치와 열전을 확인할 수 없다.

창천항로에서는 정말 멋지게 나온다. 최고의 명장면이라면 조조에게 자기 말을 주고 등에 화살을 맞자 마지막 힘을 쥐어 짜서 "조앙 자수가 아버지 조조 맹덕에게 지시한다! 내 말을 타고 빨리 적진을 빠져나가라!"라고 외치는 장면. 조조가 눈물을 흘리게 하는 몇 안 되는 캐릭터 중 하나. 여담이지만 아버지 조조나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눈 아래의 무늬?흉터가 없다. 조조, 조비, 조창, 조식, 금향공주(하안의 부인), 조절, 조예는 이 특징이 있고 조앙, 조헌, 조화등은 없다. 원작 17권에 등장한 어린 자식들중에서도 있는 아이가 있고 없는 아이가 있는데 도대체 기준이 어떻게 된거지 이거(...) 참고로 조조의 친부인 조숭도 없었다.

화봉요원에서는 첫 등장때부터 훈련을 지휘하는 모습[3]을 보여주며, 조조의 후계자로서 하후돈을 비롯한 장수들에게 인정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나, 조조가 누군가에게 낚여 장수군 한복판에 포위되었을때 말을 타고 나타나 '제 말을 타고 빨리 벗어나십시오!'를 외친다. 그러나 조안민이 나오지 않는 대신 그처럼 허무하게 목에 화살을 맞고 사망한다. 전위의 죽음을 더 슬퍼했다는 그간의 삼국지 매체들의 서술과는 달리, 조조가 '나를 이어야 할 후계자가 이렇게 죽으면 어떡하냐!'고 절규하는 부분이 애처롭다.

2 趙昂

(? ~ 219?)

삼국시대 위나라의 장수로 자는 위략에는 위장(偉章), 열녀전에는 위장(偉璋)이라 되어있다.[4]

왕이의 남편, 조월조영의 아버지.

옹주 천수군 사람으로 양부가 어렸을 때 양부, 윤봉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고 하며, 강도령을 지내고 마초가 농상의 군현들을 공격하면서 농상의 군현들 대부분의 호응을 받다가 기성을 함락하여 위강을 살해하자 양부가 마초를 무찌르려고 하자 강은, 윤봉, 요경, 이준, 왕령 등과 모의해 마초를 토벌할 약속을 했다고 한다.

적자 조월(趙月)이 인질로 마초에게 끌려갔기 때문에 아들의 안부가 걱정되어 머뭇거렸지만 아내인 왕이가 재촉하자 계책을 실행해 마초를 쫓아냈다가 30일간 기성에서 왕이와 함께 마초의 공격을 수비했다. 물론 조월은 마초가 패배하고 달아날 때 화풀이로 참살되었다. 이 공적으로 익주자사가 되었다.

이후의 행적은 알려진 게 없다. 다만 훗날 한중 전투에서 유비의 공격을 받아 익주자사인 조옹(趙顒)이 죽었다. 그런데 조앙이 익주자사가 된 사실과 시경에서 옹(顒)과 앙(昻)은 서로 통하는 글자[5]로 나왔기 때문에 유비가 죽인 조옹은 조앙과 동일인물로 보이는데 이것이 사실일 경우 조앙은 219년에 죽었다는 얘기가 된다.

삼국지연의에서 거의 행적은 동일하지만 강서 수하의 교위로 마초에 의해 아내 왕이를 제외한 가족이 모두 마초에게 몰살당했다고 나온다.

2.1 미디어 믹스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삼국지 3에서 등장하는데 지력이나 정치가 딸리지만 무력, 육전, 해전이 70대, 매력은 80대로 무장으로서는 준수한 수준이다.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는 4탄 맹장전 기성전투에서 마초를 욕하는 클론 무장으로 등장한다. 그런데 이때는 왕이가 없었고 정작 왕이가 추가된 이후 작품에는 기성전투 자체가 나오지 않고 있다.

3 趙鞅

춘추시대 나라의 대부. 조간자 문서 참조.
  1. 한국사에서 이 시호를 받은 가장 유명한 예가 사도세자. 사도세자의 '도'가 바로 이 글자다.
  2. 물론 조앙도 정씨 소생은 아니지만 그녀가 왕후가 되었다면 분명 조앙을 후계자로 꼽았을 것이다.
  3. 장수 토벌은 명목상이었고 조조군의 대규모 훈련으로 각색된다.
  4. 조조의 아들 조앙의 이름과 동일한 한자를 쓰기 때문에 피휘한 것으로 추정된다.
  5. 엄숙할 옹(顒)자와 밝을 앙(昻)자는 둘 다 크다, 높다라는 뜻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