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계 올림픽 3000m 계주 금메달 | |||||||||||
중국 (2010 벤쿠버) | → | 대한민국 (2014 소치) | → | 미정 (2018 평창) |
세계선수권 종합 우승자 | |||||||||||
박승희 (2010) | → | 조해리 (2011) | → | 리지안루 (2012) |
이름 | 조해리 (趙海利, Cho Ha-ri) |
출생 | 1986년 7월 29일, 서울특별시 |
국적 | 대한민국 |
신체 | 168cm, 54kg |
직업 | 전 쇼트트랙 선수 (국가대표 : 2002-2004, 2007-2008, 2009-2014, 총 8시즌[1]) 현 쇼트트랙 해설위원 |
학력 | 서울 신용산초등학교 - 목일중학교 - 세화여자고등학교 고려대학교 체육교육학 학사 |
소속 | 고양시청 (2009-2016) |
별명 | 핼[2], 공실이[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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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끊임없던 불운과 시련을 노력과 끈기로 이겨낸 선수
1 소개
2011 ISU 쇼트트랙 세계선수권 챔피언 2014 소치 동계올림픽 여자 쇼트트랙 3000m 계주 금메달리스트 2002년부터 2014년까지 8시즌 동안 국가대표를 지낸 선수 |
주요 커리어만 살펴보면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1회 우승, 동계올림픽 계주 금메달 1개로 쇼트트랙 레전드들이 즐비한 한국에서 특별히 뛰어난 선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해리가 높게 평가받고 존경받는 이유는 대부분 포기하고 좌절했을 불운과 부상을 겪으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여 목표를 이뤄냈다는 점이다. 10대 후반 누구보다 주목받는 유망주였으나 부상으로 전성기 나이[4]를 날리고 남들이 은퇴하는 25살에 올림픽에 첫 출전하고 26세에 동계 아시안게임 개인전 금메달과 한국선수 최고령 세계선수권 우승[5], 29세에 2번째 올림픽 출전해 최고령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라는 대기록을 이뤄 냈다.
인코스와 아웃코스 추월 모두 뛰어났으며 머리싸움도 능해 부상만 없었으면 한국 여자 쇼트트랙 에이스 계보를 이을 재목으로 평가받던 선수였다. 10대 시절에는 큰 신장[6]과 체력을 활용한 스케이팅이었으나 부상이후 20대 중후반에는 스케이팅 기술과 노련미를 살린 경기운영이 주특기였다. 20대 후반에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상위권을 기록할 정도로 철저한 자기관리를 하였고, 무려 8시즌 동안 국가대표을 하며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이후 가장 많이 국가대표에 선발된 선수가 되었다.
2 선수경력
2.1 1993~2002: 촉망받던 유망주 시절
늦둥이 외동딸로 태어나 어린시절부터 다양한 예체능을 배웠는데 8살 때 취미로 스케이트를 배웠다고 한다. 천부적인 재능을 보이자 초등학교 2학년 때 선수 권유를 받고 목동빙상장에서 본격적인 훈련을 받게 된다. 초등학교 5학년 때 평생의 은사 모지수[7] 코치를 만나며 2014년 현재까지 17년째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목일중학교 2학년 때 주니어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2002 주니어 세계선수권에서 개인종합 3위를 한다. 이후 동갑내기 라이벌 고기현[8], 한살 어린 변천사와 같이 국내무대를 평정했다. 이 당시 배태랑 선수였던 안상미[9] SBS 쇼트트랙 해설위원은 "당시 고기현, 변천사, 조해리가 내 자리를 위협하는 무서운 후배들이었다."고 회고했다.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에서 김윤미가 무려 만 13세 3개월에 출전해 쇼트트랙 여자계주 금메달을 따낸 이후 ISU는 나이제한 규정을 신설하여 시즌시작일(7월 1일)을 기준으로 만 15세 이상 선수들에게만 출전자격을 제한하였다. 조해리의 생일은 1986년 7월 29일로 겨우 28일 차이로 자격조건이 되지않아 국가대표 선발전에도 출전하지 못하고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에서 동갑내기 고기현이 금메달을 따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2.2 2002~2009: 끊임없던 부상과 불운
나이제한 규정을 충족시킨 2002/2003 시즌에 만 15세의 나이로 국가대표에 선발되었고 월드컵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였으며 세계선수권 개인전에도 출전한다. 그러나 세계선수권에서 양양(A)의 7연패를 막기위해 당시 한국대표팀의 에이스이자 한체대 파벌의 최은경을 위해 팀플레이에 희생당했다는 의견도 존재했다.[10] 2003/2004 시즌에도 국가대표에 선발이 되었으나 이때부터 선수생활 내내 그녀를 괴롭힌 부상의 악령에 시달리게 된다. 부상으로 1-2차 월드컵에 결장하고 이후에도 부상으로 이전과 같은 폼을 찾지 못하였고 결국 2004/2005 시즌 국가대표에 탈락하게된다.
그러나 부상 회복에 전념하고 2005/2006 국가대표 1차 선발전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이며 진선유에 이어 2위를 했고, 누구나 조해리가 2006 토리노 동계올림픽에 가게될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이당시 극심했던 파벌싸움과 관련되어 여러가지 사건이 일어났는데 빙상연맹의 중추를 잡고있던 한체대파에서 2005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한체대파인 최은경과 강윤미가 2-3위를 하자 "전시즌 세계선수권 1-3위까지 1차 선발전을 면제한다."고 규정을 바꿔버린다. [11] 선발전 직전 바꿔버린 규정에 반발하여 비한체대파인 진선유는 스스로 면제권을 포기하고 1차 선발전에 출전하였다.
1차 선발전에서 예비 8명에 뽑힌 이후 조해리는 여름에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였는데, 2차 선발전을 앞두고 훈련 도중 발등에 금이 가는 큰 부상을 입으면서 퇴촌한다. 그런데 조해리는 몇년후 인터뷰에서 "당시 파벌싸움이 너무 심했고, 퇴촌하는데도 어렵게 나와서 매우 힘들었다."고 말하였다. 한체대파가 여자부를 장악했던 시절 비한체대파인 조해리와 진선유가 불이익을 받았을 거라는 것은 정론. 이후 자살 사이트에 가입했을 정도로 우울증을 앓았다고 하며 선수생활을 포기하려고 생각했으나, 모지수 코치의 보살핌으로 다음 올림픽에 다시 도전하게 된다.
부상 후유증으로 2006/2007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탈락하고 1년 뒤 2007/2008 시즌 선발전에서 6위를 하며 월드컵 멤버로 세번째 태극마크를 달게된다. 1-2차 월드컵에 참가하며 좋은모습을 보였지만 다시 큰 부상을 입으며 국가대표를 반납하고 퇴촌을 한다. 2008/2009은 또다시 재활을 하며 한시즌을 보낸다. 두번의 큰 부상을 입으며 몸이 거의 일반인 수준으로 돌아갔다고 하며 스케이트를 타는것 자체가 힘들었다고 한다.
2.3 2009~2010: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국가대표를 뽑는 2009/2010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1000m과 1500m을 모두 우승하며 국가대표 선발전 1위로 생애 첫 올림픽 출전을 확정지었다. 1위가 확정된후 통곡을 하면서 인터뷰를 했는데 그동안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선발전 1위라는 부담감이 심했는지 생각만큼 월드컵에서 활약은 하지 못했고, 언론에서는 역대 최약체 국가대표팀이라는 기사를 쏟아내었고 쇼트트랙 팬들은 부상이었던 진선유와 정은주를 찾았다. 특히 5연패를 노리는 3000m 계주에서 단 한번도 중국을 이기지 못해 기대보다 우려가 더 컸다.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첫경기 500m 준준결승에서 탈락하였으나 500m는 주종목도 아니고 원래 한국 여자선수들이 취약했던 종목이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두번째인 1500m에서 무난히 결승에 진출했고 결승전에 한국선수들이 3명이었기에 메달획득이 유력해보였지만 결과는 5위. 후배인 이은별과 박승희가 은메달과 동메달을 획득했지만 조해리는 이를 바라보기만 해야했다. 남은 경기는 3000m 여자계주와 1000m.
당시 중국의 왕멍과 저우양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점으로 실질적으로 개인전에서 한국대표팀이 금메달을 노리기는 것은 어려웠다. 그러나 계주는 팀워크가 중요하기에 금메달의 가능성이 있고 5연패의 기록도 있어 당시 여자선수들은 주말외박도 반납하고 자청해서 훈련을 하였다. 조해리는 팀의 에이스가 맡는 2번 주자로 출전해 월드컵에서 한번도 이기지 못했던 중국을 이기고 세계신기록을 세우며 1위로 결승선을 통과했다. 환호하며 결승선을 통과한 조해리는 땀과 눈물을 같이 흘린 동료들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그동안 겪은 시련들이 보상받는듯 했으나, 그녀의 인생 역경은 아직도 끝이 아니었으니...
[12]
금메달을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레이스 후반 김민정이 중국선수를 방해했다는 어이없는 판정으로 실격을 당하고 금메달을 빼앗기고 만다. 실제로는 뒤에 있던 중국선수와 앞서가던 김민정의 스케이트날과의 접촉이었고 이런 사소한 접촉은 쇼트트랙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실격처리가 된다고 해도 뒤에 있던 선수의 반칙로 선언이 되는데 주심이었던 제임스 휴이시의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제임스 휴이시는 김동성과 아폴로 안톤 오노의 헐리웃 액션 사건때의 심판으로 이런 어이없는 판정은 중국선수들조차 한국 대표팀이 왜 실격당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고 인터뷰할 정도였다.
선수들의 4년간의 노력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환희의 눈물에서 절망의 눈물을 쏟았다. 새벽까지 숙소에서 손잡고 울았다고 하며 조해리는 4년 뒤 "(밴쿠버 올림픽때) 땀과 눈물이 배신할 수 있다는걸 알았다."라고 인터뷰했다. 계주실격의 여파인지 1000m 준결승에서 탈락하였고 그녀의 첫 올림픽은 허무하게 끝이 났다.
2.4 2010~2013: 뒤늦게 찾아온 전성기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 직후 열린 2010 소피아 세계선수권에서 1500m와 3000m 슈퍼파이널에서 은메달, 1000m에서 동메달을 따며 개인종합 3위를 하며 생애 첫 세계선수권 포디움에 오른다. 2010년 당시 조해리의 나이는 한국나이 25살로 이미 쇼트트랙 선수로는 노장이었고 더이상의 올림픽은 힘들다고 생각되었지만 2014 소치 동계올림픽 금메달을 목표로 또다시 도전하기로 결심한다.
타임레이스로 바뀐 2010/2011 국가대표 선발전을 통과해 2003년 이후 7년 만에 2시즌 연속 국가대표에 선발되고, 2010/2011 시즌 조해리는 26살에 전성기 맞이한다.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 게임에 출전하여 1500m 금메달과 1000m, 3000m 계주 은메달을 획득하고 월드컵에서도 한국팀의 에이스로 활약을 한다. 영국에서 열린 2011 셰필드 세계선수권에서 1000m와 3000m 슈퍼파이널 금메달, 1500m 동메달을 따며 생애 첫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우승을 한다. 이는 한국선수 역대 최고령 우승 기록으로 조해리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을 보여준다.
2011/2012 시즌은 한국 여자 대표팀의 역대 최악의 시즌으로 박승희가 부상으로 대표팀에서 하차하고 오직 조해리 혼자서 고군분투하였다. 홀로 결승에 올라가 한국선수들의 도움없이 외국선수들의 견제속에서 메달을 땄고, 한국대표팀은 월드컵 시즌에서 금메달 2개밖에 얻지 못했는데 모두 조해리가 딴 메달이었다. 2012 상하이 세계선수권에서 1000m 금메달을 땄으나 개인종합 포디움에는 들지 못했다. 이 시즌은 조해리가 "정말 힘들고 포기하고 싶었던 시즌"이라고 말할 정도였는데 이런 시즌을 맏언니이자 에이스로 이끌어 나갔다는 것으로 그녀의 대단함을 느끼게 한다.
2012/2013 시즌도 선발전 3위로 4시즌 연속이자 통산 7번째로 국가대표에 선발된다. 1-4차 월드컵에서 무난한 활약을 보여줬으나 소속팀의 요청으로 퇴촌하여 국내 대회에 출전한다.
2.5 2013~2014: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대표팀에서 하차하여 국가대표 1차 선발전 타임레이스에 출전했고 무난히 2차 선발전에 진출했다. 2013/2014 국가대표 선발전은 박승희-심석희가 개인전을 사실상 예약해놓은 상황이었고, 남은 개인전 1자리와 계주멤버 2자리를 놓고 다른 선수들이 경쟁하는 구도였다. 조해린의 시간이 지나도 쇠퇴하지 않는 기량과 노련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남은 개인전 1자리를 그녀가 차지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김아랑이 깜짝 등장하여 선발전 4위로 계주에만 출전하게 되었다.
월드컵 시즌에는 주로 계주만 출전하였고 3번/4번[13] 주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했다. 경기 외적으로도 맏언니로서 대표팀의 어린 선수들을 보듬어주며 팀분위기를 이끌었다.[14] 2013/2014 시즌 여자 국가대표팀은 역대로 봐도 유래 없을만큼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랑했고, 이런 팀분위기는 역대 최강의 드림팀이라는 성적으로 나타났다.
[15]
원래 조해리는 개인전에 출전할 수 없었지만 500m 결승전에서 박승희가 엘리스 크리스트와 충돌하여 넘어지면서 오른쪽 무릎근육이 파열되었고, 박승희는 다음날 열리는 1500m 경기 출전권을 조해리에게 양보하다. 조해리는 갑작스럽게 1500m에 출전하였으나 준준결승(예선)을 가볍게 통과하였다. 이때 보여준 경기력이 매우 좋아 개인전 메달이 가능할 수 있겠다고 예상하였으나, 준결승에서 김아랑이 선두를 차지하자 조해리는 그 뒤에서 다른 선수들이 끼어들지 못하도록 디펜스 위주의 경기를 펼쳤고 레이스 중반 코너링에서 아웃코스로 치고 나가려는 미국의 에밀리 스콧을 팔로 밀어내 실격 판정을 받았다. 이 파울 장면이 다소 노골적인 의도로 비춰질 소지가 있었기에, 국내 팬들 중에서는 "이러면 중국 선수들과 다를 게 뭐냐"고 조해리의 반칙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일부 있었다.
그리고 대망의 여자 3000m 계주. 밴쿠버의 어이없는 실격 판정을 설욕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결승전에서 3번째 주자로 나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으며 드디어 꿈에 그리던 올림픽 금메달을 따게된다. 2002년 국가대표로 데뷔한 이래 12년만에 올림픽 메달을 손에 넣은 것이다. 올림픽만 되면 야속할 정도로 그녀를 외면했던 행운의 여신은 비로소 12년만의 올림픽 금메달을 허락했다. 덤으로 4년 전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대표팀을 울리고 정상에 섰던 중국 국가대표팀은 이번에는 반대로 그들이 실격당해 포디움에도 오르지 못하는 굴욕을 겪었으니 4년 전의 복수에 완벽히 성공한 셈. 또한 조해리는 만 27세 7개월로 최고령 쇼트트랙 금메달리스트라는 기록고 세웠고, 그녀의 긴 역경을 알고있는 동료선수들, 쇼트트랙 관계자들과 팬들 모두 진심으로 그녀를 축하했다.
올림픽이 끝난 후 2014 몬트리올 쇼트트랙 세계선수권에 계주멤버로 참가했고 3000m 계주 결승전에서 심석희의 반칙으로 실격을 당했고, 이 경기를 마지막으로 국가대표팀 은퇴를 선언하였다. 사실 몇년전부터 본인이 소치올림픽이 마지막이라 될거라고 말해왔고, 29살의 나이로 국가대표로 선발되고 올림픽에 출전한 것은 국내 쇼트트랙에서 불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졌기에 팬들은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하고있었다. 국가대표 은퇴를 했기에 2014/2015 시즌 국가대표 선발전에는 불참하였고, 2015/2016 시즌 국내대회를 마지막으로 현역은퇴를 한다고 밝혔다.
2.6 은퇴, 새로운 출발
2014/15시즌 4차 월드컵 때부터 SBS에서 쇼트트랙 해설위원으로 변신했다. 해변조 오랜 기간 해설을 맡아 오던 안상미 해설위원이 출산일이 얼마 남지 않아 물러나게 되면서 그녀의 후임으로 들어오게 된 것. 방송 경험이 전혀 없이 데뷔한 해설 자리임에도 비교적 무난하고 막힘 없는 해설을 보여주어 평가가 괜찮다. 2015 세계선수권까지 해설을 맡을 예정. 만약 해설이 괜찮다면 후에 타 방송사 해설위원으로의 길이 열릴 수 도있다.조해리 팬들은 그냥 신납니다.
2016년 4월 3일 국가대표 2차 선발전 마지막날 은퇴식을 가지며 현역 은퇴를 하였다.
3 기타
이상화와 절친한 사이다. 2002년 태릉선수촌에서 막내로 만나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올림픽때 경기가 있는날 이상화가 같이 아침밥을 먹으며 긴장을 풀어달라고 조해리에게 부탁을 했고, 조해리는 경기전날 금메달 기운을 받기위해 이상호의 금메달을 빌렸다고 한다. 2014 소치 동계올림픽 3000m 여자계주 결승전날 이미 경기가 끝난 이상화는 박승주[16]와 함께 응원을 온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부상을 유독 많이 입은 선수다.기사 쇼트트랙 선수 중에서 부상을 입지 않은 선수가 없겠냐마는 조해리는 정말 당해보지 않은 부상이 없을 지경. 앞 선수가 날을 들어버리는 바람에 앞니가 나가거나, 양 다리 정강이뼈가 다 부러지기도 하고, 스케이트날에 허벅지가 찢어지는 등 다른 선수들이 선수생활에 한 번 당할까 말까 한 수준의 대형 부상을 몇번이나 당했다. 늦둥이 외동딸이 선수생활 내내 별의별 부상을 당했으니 부모님의 속이 말이 아니었다고 한다. 한 번은 조해리가 공중 목욕탕에 갔는데 그녀의 몸을 본 어떤 할머니께서 "저렇게 예쁜 아이가 무엇을 하길래 온 몸이 상처투성이냐" 라고 탄식했다고... 게다가 이러한 부상은 항상 결정적인 순간에 찾아와 그녀를 괴롭혔다. 소치 올림픽에 참가했을 당시에도 당장 수술이 필요했을 정도로 몸상태는 극히 좋지 않았는데 마지막 올림픽이므로 묵묵히 참고 경기에 나섰을 뿐. 또 심각한 습관성 어깨 탈골이 항상 그녀를 괴롭히는데, 본인은 이제 해탈을 했는지 "문고리 돌릴때마다 어깨가 빠져서 귀찮다."고 농담을 한다.(...)
4 주요 수상내역
동계올림픽 | ||
110px | ||
금 | 2014 소치 동계올림픽 | 3000m 계주 |
세계선수권 | ||
동 | 2003 바르샤바 | 3000m 계주 |
금 | 2004 고텐버그 | 3000m 계주 |
동 | 2010 소피아 | 1500m |
은 | 2010 소피아 | 1500m |
은 | 2010 소피아 | 3000m |
동 | 2010 소피아 | 개인종합 |
금 | 2010 소피아 | 3000m 계주 |
동 | 2011 셰필드 | 1500m |
금 | 2011 셰필드 | 1000m |
금 | 2011 셰필드 | 3000m |
금 | 2011 셰필드 | 개인종합 |
금 | 2012 상하이 | 1000m |
동 | 2012 상하이 | 3000m 계주 |
동계 아시안 게임 | ||
은 |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게임 | 1500m |
동 |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게임 | 1500m |
금 | 2003 아오모리 동계 아시안게임 | 3000m 계주 |
금 |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 | 1500m |
은 |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 | 1000m |
은 | 2011 아스타나-알마티 동계 아시안게임 | 3000m 계주 |
팀 세계선수권 | ||
금 | 2003 소피아 | |
금 | 2004 상트 페테르부르크 | |
금 | 2010 보르미오 | |
금 | 2011 바르샤바 | |
동계유니버시아드 | ||
은 | 2005 인스브루크 | 1500m |
동 | 2005 인스브루크 | 1000m |
동 | 2005 인스브루크 | 3000m |
금 | 2005 인스브루크 | 3000m 계주 |
은 | 2007 토리노 | 1500m |
은 | 2007 토리노 | 1000m |
주니어 세계선수권 | ||
은 | 2002 춘천 | 1500m |
금 | 2002 춘천 | 1000m |
동 | 2002 춘천 | 1000m SF |
동 | 2002 춘천 | 개인종합 |
금 | 2002 춘천 | 2000m 계주 |
- ↑ 나이제한과 선발전 제도가 확립된 2002 솔트레이크시티 동계올림픽 이후 대한민국 여자 쇼트트랙 역대 최다 기록.
- ↑ 해리의 줄임말. 팬들은 핼여신, 선수들은 핼언니나 핼누나 등으로 부른다.
- ↑ 둘리의 여자친구 공실이와 닮았다고 이정수가 붙였다고 한다.
- ↑ 한국 쇼트트랙 여자선수들이 전성기 나이는 보통 10대 후반이다. 최근에는 선수 생명이 조금 길어졌으나 조해리 세대는 20대 초반에 은퇴하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 ↑ 여자선수로는 단독 기록이고, 남자선수 이준호, 김기훈와 공동 기록.
- ↑ 최근 쇼트트랙 여자선수들은 장신화가 되어 168cm가 특별히 큰 키가 아니지만,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매우 장신에 속했다.
- ↑ 1994 릴레함메르 동계올림픽 남자계주 5000m 금메달리스트
- ↑ 솔트레이크에서 1500m 금메달, 1000m 은메달을 땄으며 2002 세계선수권 개인종합 2위를 한 선수이다. 조해리와는 세화여고 동기동창이며 일찍 목표를 이룬 탓인지 2002년 이후 자기관리에 실패하며 20대 초반에 일찍 은퇴를 하였다.
- ↑ 1998 나가노 동계올림픽 3000m 여자계주 금메달리스트
- ↑ 모지수 코치는 단국대학교 출신으로 에이스(김기훈) 밀어주기에 희생 당했던 비한체대파 1세대 선수였고, 제자인 조해리 역시 비한체대인 고려대학교에 진학했다.
- ↑ 당시 선발전 방식은 4월에 1차 선발전에서 8명을 선발하여 태릉선수촌에서 훈련하고 9월에 2차 선발전을 열어 최종 5명을 뽑는 것이었다.
- ↑ 실격판정 후 여자대표팀의 모습. 왼쪽에서부터 김민정, 박승희, 이은별, 조해리.
- ↑ 1번 박승희-2번 심석희는 고정이고 김아랑이 출전하면 3번 주자를, 공상정이 출전하면 4번 주자를 맡았다.
- ↑ 2013/2014 소치 여자 국가대표팀의 포지션은 자상한 맏언니, 활발한 둘째, 아직은 어린 막내들이었다.
- ↑ 1500m 출전의 계기가 된 박승희의 500m 결승전 경기. 경기직후 조해리가 박승희를 다독거려주는 모습.
- ↑ 스피드 스케이팅(500m/1000m) 국가대표 선수로 이상화와 룸메이트이자 박승희의 언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