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 ||||
남우주연상 | ||||
제 58회 (1986년) | → | 제 59회 (1987년) | → | 제 60회 (1988년) |
윌리엄 허트 (거미여인의 키스) | → | 폴 뉴먼 (컬러 오브 머니) | → | 마이클 더글러스 (월 스트리트) |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 |
이름 | 폴 뉴먼 PAUL NEWMAN |
분야 | 영화 |
입성날짜 | 1994년 2월 1일 |
위치 | 7050 Hollywood Blvd. |
베니스 영화제 참석 (1963) 당시의 폴 뉴먼.
리즈 시절인 스팅(1973)에서의 폴 뉴먼.
말년의 폴 뉴먼.
Paul Leonard Newman
폴 레너드 뉴먼
1925년 1월 26일 ~ 2008년 9월 26일
20세기 헐리우드가 배출한 역대 최고의 메소드 배우 중 한명
헐리우드 차도남, 쿨미남 배우의 원조KING OF COOL
1 배우
미국의 영화배우이자 사회사업가이며 카레이서. 오하이오의 캐년 대학을 졸업하고 예일대 드라마스쿨을 통해 연기자 수업을 쌓은 뒤 1955년 예수의 성배 이야기인 <은술잔>으로 영화계에 데뷔했다. 하지만 이 데뷔작은 대실패였다. 얼마나 영화가 엉망이었는지 나중에 그가 대배우로 성공한 뒤 TV 방영 계획이 잡히자 "제발 시청하지 말아달라"는 신문 전면광고를 냈다고 한다. 이게 오히려 역효과를 내서 예상외로 높은 시청률이 나왔다고 계획대로 그리고 뉴먼이 시대극 영화에 출연한 것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이 때 얼마나 심하게 데었는지, 이후 벤허를 제작할 당시 폴 뉴먼에게도 출연 제의가 들어왔지만 거절한 이유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로버트 와이즈 감독의 복싱 영화 <상처뿐인 영광>(1956)에서 가난한 무명 복서 그라지아노 역[1][2]으로 처음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영화의 원제이기도 한 "Somebody Up There Likes Me(하느님은 나를 좋아하신다)"라는 대사는 냉소와 유머가 뒤섞인 그의 캐릭터를 드러내는 유명한 대사.
이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공동 주연의 테네시 윌리엄스 원작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1958)로 할리우드 톱스타로 자리 잡는다. 또 <길고 긴 여름날 The Long, Hot Summer>(1958)로 칸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거머쥐며 할리우드의 정상급 배우로 성장했다.
말론 브란도, 제임스 딘과 함께 50년대 미국의 청년문화를 상징하는 배우. 부성애의 대명사 대부에 말론 브란도의 강한 야성성이나 모성애를 자극하는 제임스 딘의 위태로운 반항아의 이미지와는 다르게 도시인의 풍모가 강한 냉소적이고 이지적인 반항아의 이미지를 구축했다. 미국 쿨남,시크남의 원조.[3]말론 브란도가 야성적인 미남이었다면 그 대척점에 있는게 폴 뉴먼이었다. 출중한 연기력에 비해서는 상복이 상당히 없는 편이어서, 1958년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가 물을 먹은 것을 시작으로 무려 여섯 번이나 연달아 주연상 후보에 오르고도 탈락하는 쓴 맛을 보았다. 결국 62세가 된 1987년에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의 <컬러 오브 머니>로 주연상을 수상하기는 했으나 "이번에도 보나마나 안 줄텐데 뭘"이라는 생각으로 시상식에 불참하고 말았다. [4] 사실은 그냥 삐져서 안 나왔다는 설도. 사실 1961년 작 <허슬러>로 수상했어야 됐었다는 평가가 많았기에 그 속편인 <컬러 오브 머니>로 주연상을 받은 것도 아카데미의 뒤늦은 인정이라는 평이 있었다 [5]
하지만 영화 영광의 탈출에 나온 것 때문에 터키를 제외한 아랍권 및 이슬람권에선 평생입국금지를 당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주하려는 유대인들의 항쟁을 다룬 이야기라서 아랍-이슬람권 국가들에겐 매우 불편한 내용이었기 때문. 때문에 동남아 이슬람 나라 여행을 가보고 싶어하던 아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며 둘 다 가지 못했던 적도 있다. 그래서인지 둘이 터키 여행은 여러번 다녀왔지만 이스라엘 여행은 잘 가지 않았다고 한다.
유명한 스피드광으로 단순한 취미가 아닌 실제 프로 레이서로 활약했으며 1979년 24시간 살인적인 경주스케줄을 소화해 내는 프랑스 '르 망 레이스'에 참여해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무려 79세(!)까지 현역 레이서로 뛰었으며 1997년에는 72세의 나이로 플로리다 데이토나의 24시간 내구 레이스에서 3위에 오르면서 '자동차 경주 공식대회 최고령 수상자'로 기네스 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동세대 배우 가운데 스티브 매퀸과의 라이벌 의식으로도 유명하다. 자세한 내용은 영화 타워링 항목을 참고. 60년대의 양대 인기배우로 경쟁심을 불태웠지만 실제로 둘의 사이가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어서 뉴먼이 <내일을 향해 쏴라> 에 부치 캐시디 역으로 캐스팅되었을 때 매퀸에게 직접 찾아가 선댄스 키드 역을 제안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국 여러가지 사정으로 매퀸이 거절하면서 선댄스 역은 신인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에게 돌아갔지만.[6][7]
뉴먼은 그 자신과 닮은꼴로 회자되는 후세대 배우 매튜 매커너히가 가장 좋아하는 배우이기도 했다. 닮은 사람에게 끌린다
뉴먼은 말론 브란도와 더불어 할리우드에서 남자 배우 스타일을 결정하는 양대 산맥 중 하나이다. "너는 반항아인가? 신사인가?" [8]
외모도 외모지만 새파란 눈이 특히 유명했다. 양덕들이 말하길 "분명히 흑백영화에 출연했는데도 폴 뉴먼 눈만은 컬러인거 같더라"라고. 얼마나 유명하면 "Paul Newman's Eyes"라는 노래도 있다 (...)[9] 하지만 본인은 만나는 사람마다 허구헌날 "눈 좀 보여줘여"라고 부탁해대서 귀찮아했고 일부러 선글라스를 자주 끼고 다녔다고 한다.
젊은 시절
노년
2 자선활동과 정치 성향
할리우드에서는 보기 드문 상식인으로 무명시절 잠깐 결혼했다가 이혼한 적이 있으나 1958년 두 번째 부인인 조앤 우드워드와 결혼한 이래 사망할 때까지 50년 동안 한 번의 스캔들 없이 금슬 좋은 부부관계를 유지했다. 할리우드 식의 사치스런 생활을 혐오해서 유명해진 뒤에는 아예 코네티컷의 변두리 마을로 이사해서 평생을 살았으며, 비영리 식품회사 Newman's own을 설립해서 뉴먼 사망 이후에도 모든 수익을 아동 복지나 빈민 구제 등의 사회사업에 쓰고 있다. 이 회사는 창립 이후 현재까지 2억 달러 이상을 기부했다고 한다. 뉴먼은 "우리는 지금도 충분히 사치롭게 살고 있기에 우리처럼 부유층에 대한 감세는 범죄와 다름없다. 나는 운이 무척 좋았기 때문에 행운을 타고난 사람들은 그들보다 불운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정치적으로도 진보적인 성향으로 60년대에는 FBI의 사찰 대상에 오르기도 했으며. 50년동안 절대권력을 휘둘렀던 FBI 국장 존 에드거 후버가 가장 싫어하는 배우 중 하나였다고 한다. 실제로 워터게이트 스캔들 당시 상원 청문회에서 공개된 "닉슨의 주적정적 명단" (Nixon's Enemies List) 20명중 당당히 19위에 올랐다. 이 명단에는 노조 간부, 진보적 지식인, 좌파 언론인들이 올라있었고, 폴뉴먼은 나중에 이것이야 말로 자신이 이룬 최고의 업적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정계 진출설도 나돌았지만 그럴때마다 "나는 그만한 인내심도 없고 자격도 없다"라고 고사했다.
말년에도 팀 로빈스와 함께 할리우드에서 가장 왼쪽에 있는 배우라는 평가를 받았다. 유대인 혈통이긴 했으나 유태교를 믿지 않고 시오니즘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유대인 단체들의 기부 요구에 대하여 비아냥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이스라엘에서도 그리 좋아하지 않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많은 위대한 영화인들이 무대 위의 이미지와 사생활에서 보여준 인간적인 면모의 갭이 컸다는 점을 생각하면 영화 역사에서 보기 드문 진정한 나이스 가이. 그가 2008년 83세를 일기로 폐암으로 사망하자 그가 살던 웨스트포트 마을의 주민들은 배우가 아닌 '훌륭한 동네 이웃'으로서 그의 죽음을 슬퍼했으며 마을의 주요 건물이 모두 그를 추모하는 조기를 게양했다고 한다.
3 기타
허영만 화백의 만화 <타짜> 3부 초중반에 꽤 여러 번 언급된다. 좀 쓸데없는 방향으로(…). 물론 개그요소가 가미된 것. 실제 폴 뉴먼을 몰랐던 사람(외국영화에 무관심, 젊은 사람들 등)도 이 작품 덕분에 알게 된 경우가 꽤 많은 모양이다.
월트 디즈니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헤라클레스의 주인공인 헤라클레스는 젊은 시절의 폴 뉴먼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미국에 있는 몇몇 대학에서는 매년 4월 24일 이 폴 뉴먼의 이름을 딴 뉴먼 데이라고 해서 비공식적으로 학생들이 24시간동안 24캔의 맥주를 마시는 전통이 있다.
4 대표작
- 상처뿐인 영광 (1956)
-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 (1958)
- 길고 긴 여름날 (1958)
- 영광의 탈출 (1960)
- 허슬러 (1962)
- 허드 (1963)
- 쿨 핸드 루크 (1967)
- 내일을 향해 쏴라 (1969)
- 스팅 (1973)
- 타워링 (1974)
- 버팔로 빌과 인디언들 - 시팅 불의 역사수업 (1976)
- 폴 뉴먼의 심판 (1982)
- 컬러 오브 머니 (1986)
- 허드서커 대리인 (1994)
- 로드 투 퍼디션 (2002)
- ↑
무패기록의 전설적인 백인 복서 록키 마르시아노가 아니라같은 시기에 미들급에서 활동했던 강타자이다. 마르시아노와 그라지아노는 이름이 같고 강펀치를 지닌 이탈리아계 복서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거의 없다. - ↑ 원래 제임스 딘의 차기작이었다.
- ↑ 그의 계보를 잇는 배우로 흔히 리처드 기어, 매튜 매커너히 등이 언급된다.
- ↑ 이후에도 후보에 두번 더 올랐지만 추가 수상은 하지 못했다.
- ↑ 비슷한 예로 <디파티드>로 스코세이지가 꿈에 그리던 감독상을 받았던 것이 있다. 다시말해 진작에 받을걸 아카데미가 미안한 마음에 나중에라도 챙겨줬다는 평.
- ↑ 그 둘은 또 그 둘대로 친해서 나중에 '스팅'에도 함께 출연했고 레드포드가 뉴욕으로 처음 이사왔을때 보증인 노릇도 해줬다.
- ↑ 또다른 일화로는 만날때마다 레이싱 얘기만 해대는 폴 뉴먼
넌씨눈에 질린 레드포드가 교통사고로 반파된 포르쉐를 구해서 폴 뉴먼의 집으로 배송해버린 이야기가 있다. 폴 뉴먼은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 반파된 포르쉐를 압축해서는 레드포드 거실에 옮겨놨다고 한다돈지랄 돋네. - ↑ 이 둘을 잘 비교 설명해놓은 좋은 블로그 글이 있어 소개한다.링크
- ↑ https://www.youtube.com/watch?v=6yDVd5TsSu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