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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역사 | |||||
고대 시대 | 중세 시대 | 근현대 시대 |
1 고대사
근대 이전에는 유목민족이 다들 그렇듯이 명확하게 혈통을 구분하기 어려우며, 이런저런 민족이 뒤섞여 있었다. 몽골 고원을 중심으로 흉노, 선비, 돌궐, 거란족 등 무수한 유목민족이 명멸하였으며 그나마 명확하게 기원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은 당대 이후 등장한 '몽올실위'라는 부족명 정도. 역사의 전환점이 없었다면 몽골은 지금의 몽골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고,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아예 없었을지도 모른다.
2 몽골 제국
하지만 칭기즈 칸이 등장하면서 몽골의 역사, 아니 세계의 역사를 뒤바꿔 놓는다. 13세기 몽골은 온 아시아를 뒤엎고 일부 유럽까지도 영향을 미치는 등 당시 제일 잘나가는 이른바 리즈 시절을 맞이하게 된다. 이 당시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몽골 제국 항목을 참조하기 바란다. 단순히 군사적인 업적뿐만 아니라, 몽골이라는 민족과 국가의 정체성이 본격적으로 구체화된 것이 바로 몽골제국 이 시기였으며 아래에 서술하겠지만 지금의 몽골인 또한 이 시기에 대한 각별한 존경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폭발적인 활력이 쿠빌라이 칸 시대 이후 무리하게 소진되면서 몽골은 쇠퇴하기 시작했다. 분할되어 나간 칸국은 점차 현지인의 반발로 그 입지가 축소되어 가거나 현지화되어 사실상 몽골사로 다루기 어려워졌으며, 원나라는 1368년 만리장성 밖으로 쫓겨나 북원으로 잔존하였다. 이후 영락제가 북방을 토벌하면서 유목민족의 입김은 다시 한 번 약해졌다.
3 북원 멸망 이후
그러나 15세기 후반부터 명나라의 입김이 약해지면서 몽골 지역은 다시 부흥하기 시작하였다. 오이라트 중심으로 서몽골이 통일되면서 에센 칸에 의해 토목의 변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후 오이라트는 분열되어 서쪽으로 후퇴하지만 이번엔 동몽골 쪽에서 정통 보르지긴 혈통의 다얀 칸이 다시 한 번 몽골 세력을 규합해 명을 압박하였고, 16세기 중반 다얀의 손자 알탄 칸은 명나라의 수도인 베이징을 포위하기도 했다. 이것이 경술의 변으로 몽골은 다시금 일시적으로 허베이 성을 회복했다. 그리고 오이라트는 준가르로 이어지는데,
하지만 내몽골은 1635년 후금의 태종에게 정복당하고, 대칸의 지위도 그에게 넘어간다. 이후 후금은 청나라로 변모하였고 나라가 망할 때까지 몽골의 대칸을 겸했다. 만주족과 혼인 동맹으로 종족이 일체화된것이다. 이후 청은 숙적인 외몽골의 준가르도 멸망시켜 외몽골도 손에 넣는다. 청나라는 자신들의 선조였던 금나라가 몽골에게 망한 것을 상기하여, 몽골이 흥할까봐 두려워했다. 그래서 몽골의 힘을 약화시키려고 했으며, 그리하여 먼저 자신들에게 충성을 맹세한 내몽골은 혼인 동맹 및 팔기군 합류로 일체화시키는 한편 외몽골은 반 독립지역으로 따로 놀게 놔두되 행사에 돈이 많이 들고 비폭력적인 티베트 불교를 몽골인에 장려하였다. 이 시기 청나라는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와 같은 정치적 지도자로 젭춘담바 쿠툭투(Жавзандамба хутагт)를 선택했으며, 달라이 라마와 마찬가지로 환생하는 존재로 믿어진 젭춘담바 쿠툭투는 8대에 걸쳐 몽골을 통치했다. 훗날 담딘 수흐바타르 시대에 몽골을 지배하고 있던 복드 칸이 바로 8대 젭춘담바이다. [1] 몽골인의 첫째 아들은 라마승으로 출가해야 했으며, 라마승이 행사하는 초야권 때문에 외몽골에 매독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그래서 한때 몽골 하면 매독의 나라로 알려지기도 했다.[2]
이후 러시아가 남하해 오면서 잦은 전투가 벌어졌으나 옹정제 시기 캬흐타 조약으로 외몽골과 부랴티아를 가르는 이 지역의 국경선이 정해졌으며, 이는 현대 몽골과 러시아의 국경으로 이어졌다. 신해혁명 이후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자치권을 얻었지만, 러시아가 다시 한번 남하정책을 펴자 중국이 자치권을 철회하는 등 이권 싸움에 휘말려 고생했다. 그러다 1921년, 10월 혁명 직후 거듭된 적백내전 기간과 중국의 혼란 속에서 양측의 침략을 받으며 어렵게 살다가 독립하게 되었다. 외몽골은 1911년 독립 후 다시 러시아 백군에게 점령당해 이번에는 러시아 식민지로 전락했으나, 모스크바를 방문한 공산주의자 출신 독립영웅 담딘 수흐바타르가 소련군을 이끌고 되돌아와 후레(현 울란바토르)에서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의 백군 불교도 기사단을 격파하고 백군 식민정부와 꼭두각시 복드 칸국 양자를 모두 끝장내고 세계 2번째, 아시아 첫 번째 공산 국가로 독립시켰다. 물론 본질은 소련이 군대까지 주둔시키고 문자도 키릴 문자로 갈아 탄 소련의 위성국. 그리고 전란을 모두 비켜 간 내몽골은 신해혁명 직후 계속 중화민국과 호흡을 같이 해 현재 내몽골자치구가 되었다.
4 외몽골 독립과 공산주의 시절
독립 당시, 외몽골 지역은 극동 러시아의 백군 세력인 만주-부랴트 기사단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는데, 그 지휘관인 운게른 슈테른베르크 소장이 진성 미치광이였다. 자신이 부처님의 화신이라고 생각하고 백성들을 죽여서 더 나은 삶으로 환생시켜 주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어?! 생각한 운게른은 정말 사소한 일로도 몽골 주민들을 학살했는데 심지어는 날마다 제비뽑기를 해서 걸린 마을이나 버스 정류장, 소위 오늘의 환생 정류장을 선정해서 어린아이까지 죽여 사람 씨를 말릴 정도였다.궁예 또는 피콜로 대마왕이 생각난다.
그런 와중에 마침내 모스크바의 볼셰비키가 극동 방면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고, 운게른의 악정을 견디다 못한 시민들 역시 담딘 수흐바타르라는 젊은 청년을 지휘관으로 독립군을 결성하여 봉기하기에 이르렀다. 수흐바타르는 소련군을 대동하고 귀국 후 운게른의 기사단을 박살냈다. 몽골의 현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그 수흐바타르를 기념하여 이름 붙인 도시다. 그리고 1924년 공산당이 집권하여 소련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담딘 수호바트르가 일찍 사망하는 바람에 소련은 허를러깅 처이발상을 몽골의 지도자로 낙점했다. 그러나 허를러깅 처이발상은 이른바 몽골의 스탈린이라 불릴만큼 악명높은 학살을 벌여댔고 이로 인해 몽골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다. 그래도 처이발상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몽골 영토를 침범하기도 했으나 이외에는 큰 사건 없이 1990년대 냉전이 끝날 때까지 공산진영의 위성국으로 남았다. 이 시기에 몽골은 일단 독립을 유지했지만 국부 칭기즈 칸에 대한 찬사가 전면 금지되고 성씨 사용도 금지, 몽골 전통의 근간인 유목마저 금지되는 등 많은 간섭을 받았다. 이전까지 국교와 마찬가지였던 티베트 불교 역시 간단 사원을 포함한 극히 일부 사원만이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으로 살아남고 나머지 수많은 승려와 사원들은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한편 소련의 자치공화국이었던 부랴티아와 중국의 일부로 호흡을 같이 한 내몽골은 비교적 조용했다가 1931년 만주 사변 이후 일본군이 난데없이 침략, 내몽골 동부 흥안성을 먹고는 만주국, 내몽골의 나머지 지역에 몽강국이라는 괴뢰 국가들을 세웠다. 이 두 괴뢰 국가들은 소련군이 대흥안령 산맥을 넘는 만주 작전으로 축출되었다. 이 당시 관동군과 꼭두각시 만주군 그리고 몽골기병대로 조직된 몽강국 군대는 소련군의 기병 및 기갑, 기계화보병에 귓밥도 안 되고 발렸고 아이신기오로 푸이와 몽강국 왕이었던 덕왕(데므치치그돈로브) 두 사람은 소련 공수부대에 포로로 잡혀 전범 재판을 받는 신세로 전락했다. 소련은 아예 내몽고를 몽골에 병합시키려하였고 더욱이 스탈린은 외몽골마저 몽골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소련에 합병시키려 하였으나 미국의 반대로 철회하였고 이후 마오쩌둥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이 세워진 후 외몽골은 소련에 의해 독립되었고, 내몽골은 1947년 5월 1일 중국 공산당의 행정개혁으로 내몽골자치구가 설치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루 처이발상이 사망하자 욤자깅 체뎅발이 독재자가 돠어 30년이 넘게 몽골을 통치했다. 몽골은 소련의 16번째 공화국으로 불려질만큼 친소 공산주의 국가가 된다.
5 민주화 이후
1990년 몽골 민주화시위 당시 사진
아시아의 공산 국가들의 체제 전환 중 가장 모범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페레스트로이카를 본받아 80년대 후반부터 개혁, 개방 정책을 실시했고 소련의 붕괴와 발맞춰 민주주의를 도입하고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 하면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체제 전환에 성공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자원을 개발하는 중이다. 몽골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이나 한국에 거주하는 몽골인들은 국내언론이 몽골의 발전상을 객관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있다고 불만을 표시하기도 한다.
그도 그런 것이 텔레비전에서 몽골 이야기가 나오면 열에 아홉은 초원에서 양 치고 염소 젖 짜먹고 게르에서 거주하는 장면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아무리 발달한 나라라도 시골은 있다. 외국에 우리나라 다큐멘터리 내보내면서 밭 갈고 소 몰고 돼지 키우는 장면만 줄창 틀어준다고 생각해보자, 모르는 사람은 한국이 아직도 농사만으로 밥 먹고 사는 나라인 줄 알 것이다. 몽골도 마찬가지다. 거기도 도시가 있고, 상대적으로 '촌'이 있을 뿐이다.[3]- ↑ 1대 젭춘담바는 칭기즈칸의 직계후손인 자나바자르이다. 14살에 2년간 티베트로 불교유학을 가서(1649년) 달라이라마로부터 ‘젭춘담바 쿠툭투(Jebtsundamba Khutuktu)’라는 최고 권위의 이름을 하사받고 돌아와서는 카라코룸의 에르덴조 사원에 머물면서 몽골의 법왕으로 통치했는데, 그가 죽고나서 환생자로 인정받은 역대 젭춘담바 쿠툭투들은 복드 칸을 포함해서 아이러니하게도 모두 티베트인들이다.
- ↑ 덕분에 근현대 시기 몽골에서 의료활동을 한 이태준 선생이 가장 활약한 분야라고 한다.
- ↑ 한국의 남매 가수인 악동뮤지션의 사례에서 이러한 편견을 단적으로 엿볼 수 있다. 악동뮤지션은 부모님이 선교사라 어렸을 때부터 몽골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처음에 몽골에 간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소위 몽골의 스테레오 타입, 즉 게르와 초원, 양과 함께하는 생활(...)을 상상했으나 현실은 아파트에서 생활하게 되었다고 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