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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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벤투스의 상징

이름지암피에로 보니페르티
(Giampiero Boniperti)
생년월일1928년 7월 4일
국적이탈리아
출신지바렝고
포지션센터 포워드, 아웃사이드 라이트
신체조건175cm / 76kg
등번호9, 19[1]
소속팀유벤투스 FC(1946-1961)
국가대표38경기 / 8골(1947-1960)

1 생애

1.1 클럽

보니페르티는 피에몬트 주의 바렝고에서 태어났다. 10대 시절에는 모모에서 보냈는데, 그 무렵 유벤투스에서 입질이 오자 바로 토리노로 이사하는 결단을 보였다고. 보니페르티는 토리노로 이사한지 얼마 되지 않은 1946년에 유벤투스와 첫 계약을 맺었는데 들어오자마자 파릇파릇한 싹을 보였다. 유소년 경기에서 혼자 7골을 넣는 등 가능성을 보여주었고, 이것을 본 유벤투스는 18살이 막 지난 그를 1군으로 승격시켰다. 그렇게 출전하게 된 첫 시즌에서 보니페르티는 센터 포워드로 AC 밀란과의 경기를 시작으로 6경기에 출전하였고 두 번째 출전인 제노아 CFC를 상대로 넣은 골을 시작으로 5골을 득점하는 활약을 보였다. 그리고 그 당시에 보니페르티는 마리사란 별명으로 불렸는데 그는 이 별명을 매우 좋아했다고 한다.

당시 세리에 A의 판도를 보면 같은 도시의 라이벌 팀인 토리노 FC가 한참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반면 유벤투스는 1930년대 초반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선배들[2]이 은퇴한 이후로는 크게 빛을 못 보던 팀이었다.[3] 즉, 대략 3위권 정도는 찍어주지만 승점이 크게 벌어져서 우승전력이라고 칭하지는 못하는 정도였다.

다음 시즌인 1947-48시즌에는 실비오 피올라가 노쇠화를 보이며 팀을 떠나[4] 공격력이 약해질 것이라는 전망을 비웃기라도 하듯 27골을 넣어 세리에 A 득점왕에 오르는 기쁨을 맛보았다.[5] 이를 바탕으로 국가대표팀에도 선발되었다. 하지만 토리노와의 승점차이는 지난해에 비해 오히려 더 벌어졌고 팀은 이번에도 준우승에 머물렀다.

끝날 줄 몰랐던 토리노의 전성기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인해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고, 그 자리는 춘추전국시대가 되었다.[6] 첫 왕좌는 유벤투스가 차지하였는데 1949-50 시즌에 AC 밀란을 승점 5점차로 따돌리고 15년 만에 다시 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보니페르티의 기량은 더욱 물이 올랐고, 득점왕에는 오르지 못했지만[7] 다시 20골을 돌파하였다.

1951-52년에 소속팀 유벤투스가 9번째 세리에 A 우승을 차지하고 보니페르티도 통산 100골을 돌파하는 등, 당시의 이탈리아의 자국 공격수 중에서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최고의 공격수가 소속된 팀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게 팀의 성적은 중위권에서 놀고 있었다. 밀란이 우승을 거의 가져가는 상황에 우승횟수도 턱 밑까지 추격을 허용하고 보니페르티의 득점력도 떨어져가자 유벤투스는 웨일스에서 존 찰스, 아르헨티나에서 오마르 시보리를 데려왔다. 이렇게 기존의 보니페르티와 함께 트리오 마지코(마법 트리오)가 결성되었다.

유벤투스는 찰스와 시보리. 빅 앤 스몰 투톱의 가세로 시즌 팀 득점을 20골 넘게 늘렸고, 보니페르티도 아웃사이드 라이트로 완전히 포지션을 옮기며[8] 직접적인 득점보다는 찬스 메이킹에 주력했다. 그렇게 1957-58 시즌에 다시 우승을 차지하며 처음으로 세리에 A 10회 우승의 금자탑을 쌓게 되었다.

그리고 선수 생활의 막바지인 1959-60년 시즌에는 팀 역사상 최초로 더블을 이룩하기도 하였다. 33살이 되던 1960-61년 시즌. 보니페르티는 유벤투스에 12번째 세리에 A 우승을 선사했지만 자신의 이름이 이전처럼 자동으로 올라가지 못할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된다. 그는 그렇게 깔끔하게 자신의 기량이 쇠했음을 인정하고 은퇴한다. 마지막까지 멋진 남자..오오..

1.2 국가대표

유벤투스에서의 활약과는 다르게 보니페르티의 국가대표 커리어는 명성에 비해 단촐하기 짝이 없다. 통산 38경기 출전 8골. 월드컵에는 2번 출전하였지만 1950년 월드컵1954년 월드컵에서 모두 수페르가의 비극으로 인한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예선에서 광탈하였다.

1.3 이후

축구 선수로서 은퇴한 이후에는 아넬리 가의 신임을 얻어 구단 프런트를 거쳐 회장까지 역임했다. 회장 임기 이후에는 유벤투스의 명예 회장 직위도 수여받았으며, FIFA 100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정치가로서 활동하기도 했는데 1994년부터 1999년까지 우파 연합의 포르자 이탈리아(힘내라 이탈리아)당 소속으로 EU 의회 의원도 지낸 적이 있다!

2 플레이 스타일&평가

유벤투스의 레전드 선수. 알레산드로 델 피에로가 경신하기 전까지 유벤투스 클럽 최다 경기 출장인 444경기, 최다 골인 178골을 기록한 선수이자, 유벤투스에게 첫 별을 달아준 전성기의 주역이었다.

공격수로서 기술과 몸싸움, 그리고 스트라이커 출신이라 양발 사용에 능했다. 그리고 팀의 주장으로서 투지와 헌신이 있던 선수였다.

보니페르티는 루즈볼을 다시 찾기를 요구했고, 항상 그가 좋아하는 방식으로 득점했다. 나는 그의 오랜 친구였고 그것을 진심으로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내 생각에는 단지 게임을 끝내는 것이 다였기 때문이다.
- 잔니 브레라

3 어록

유벤투스는 단순한 팀이 아닌 마음입니다. 내 마음이에요.
(La Juve non è soltanto la squadra del mio cuore. È il mio cuore)
이기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단지 숫자일 뿐이다.[9]
(Vincere non e’ importante. E’ l’unica cosa che conta)

4 뒷 이야기

  • 1954-55시즌, 보니페르티는 SS 라치오와의 시합에서 팀이 끌려가고 팀 동료 굴리엘모 오페초가 퇴장을 당해 어려운 시합을 치르고 있었다. 보니페르티는 경기 중 스코어까지 벌어지자 지그바르트 뢰프그렌에게 거친 파울을 범했고 보니페르티와 파울을 당한 뢰프그렌 그리고 라치오의 렌조 사씨는 주먹다짐을 벌였다. 이 사건의 결과는 당연히 퇴장이었고, 2월 13일의 사건이라 칭해진다.
  • 보니페르티의 커리어 마지막 경기는 인테르나치오날레와의 더비 매치데르비 디탈리아였다. 여기에서 유벤투스는 인테르를 9대 1로 학살하는데 역대 데르비 디탈리아의 경기중 가장 큰 점수차가 난 경기이다. 인테르의 출전 선수 중 이 날 데뷔를 한 18살짜리 어린 축구 선수가 있었다. 소년 선수의 데뷔전은 이렇게 처참하게 끝났는데 이 소년 선수는 바로 후에 인테르의 60년대 전성기를 이끈 산드로 마촐라였다.
  • 손자인 필리포 보니페르티가 축구 선수로 활동하는 중이다. 하지만 재능은 할아버지에 영 미치지 못하는지 2010년 유벤투스에 입단은 했다.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전에 시모네 페페의 교체로 뛰었고 이 경기를 끝으로 유벤투스에서는 임대를 보냈다. 한동안 임대 뺑뺑이를 돌다가 유벤투스에서는 싹이 안보였는지 필리포를 파르마 FC로 이적시켰다. 그런데 파르마 FC에서도 역시 임대 뺑뺑이 신세다. 91년생이라 이제는 유망주 쉴드도 못 친다. 지못미..

5 수상

5.1 클럽[10]

5.2 개인

  • 세리에 A 득점왕 1회: 1947-1948
  • FIFA 100
  • 이탈리아 축구 명예의 전당 헌액: 2012
  • Grand'Ufficiale dell'Ordine al merito della Repubblica Italiana[11]: 1991
  1. 1954년 월드컵
  2. 움베르토 칼리가리스, 비르지니오 로세타, 라이문도 오르시, 루이스 몬티, 잠피에로 콤비
  3. 특히 토리노의 전설적인 주장 발렌티노 마촐라의 영입 경쟁에서 패배한 것이 뼈아팠다
  4. 피올라는 노바라 칼치오로 이적했는데, 피올라가 은퇴한 이후에는 아예 세리에 A에서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 안습...
  5. 발렌티노 마촐라를 2골 차로 제치고 득점왕에 올랐는데, 마촐라는 전년도 득점왕이기도 했다. 또한 보니페르티의 이 기록은 주세페 메아차에 이은 세리에 A 최연소 득점왕 2위 기록이다
  6. AC 밀란에는 그레 트리오, 인테르나치오날레에는 레나트 스코일룬, 피오렌티나에는 베르나르디니 등 에이스급이 즐비했다
  7. 이 시즌의 득점왕은 군나르 노르달이 차지했다
  8. 선수 생활 초기에는 스트라이커로 주로 활약하다 50년대에 들어와서는 아웃사이드 라이트에서의 활약 비중을 점차 늘려갔다. 그러다 찰스와 시보리의 가세 이후에는 완전히 아웃사이드 라이트에서 활약하게 된다
  9. 이 문장은 이탈리아에서 상당히 유명해 유벤투스의 12-13시즌 유니폼에 새겨지기도 했다
  10. 보니페르티는 유벤투스 원클럽맨이므로 클럽 기입은 생략한다
  11. 이탈리아 공화국 3등급 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