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나다 요시노리

카나다 요시노리에 대해서 다룬 영상

1 소개

金田伊功[1]
1952년 2월5일 ~2009년 7월 21일

일본의 애니메이터. 기존의 일본 아니메의 표현기법을 벗어난 신선한 충격을 준 작화로, 일본에서는 아니메계의 혁명아, 아니메의 마술사라는 별명으로 불린다.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는 카나다 요시노리 이전과 카나다 요시노리 이후로 나뉘어진다고 할 정도이다.

40년간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토모나가 카즈히데는 말하길, 그는 직인(장인) + 크리에이터. "요구 된 그림 콘티를 제대로 재현하는 것이 기존의 애니메이터의 일이었지만, 그는 요구된 것을 재구성해서 보는 이들에게 임팩트를 주는 궁리를 했다."

2 약력

일본방송에서 제작한 카나다 요시노리 일대기

1969년 극장용 아니메 영화 하늘을 나는 유령선에서 미야자키 하야오가 그린 작화에 충격을 받고, 애니메이션 업계로 들어서는 계기가 된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노트에서는 당시 좋아했던 어택 넘버 원의 여주인공의 일러스트가 다수 그려져 있고, 이때부터 뛰어난 그림 실력을 엿볼 수 있다.

애니메이터 통신교육을 받은 후, 1970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토에이에 계약사원으로 입사한다. 70년대 중반부터는 프리랜서 원화맨으로 활동하면서 개성있는 표현으로 아니메 팬들에게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겟타로보 시리즈나 대공마룡 가이킹, 무적초인 점보트3, 무적강인 다이탄3 등의 로봇 애니메이션으로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한 이후 은하철도 999 우주전함 야마토 환마대전 극장판 같은 극장용 애니메이션에서 메카작화와 특수효과 장면등에서 활약했다.

한편 오프닝 전담으로 만들어낸 오프닝도 여럿 있으며, 그런 오프닝들은 카나다 요시노리다움이 한껏 묻어난다. 당시의 애니메이션 전문잡지에서는 카나다 요시노리를 자주 다루웠고, 애니메이터로써는 이례의 팬클럽까지 결성되는 스타 애니메이터였다. 하지만, 원안과 각본, 디자인, 실질적으로 감독직까지 맡은 OVA용 작품 BIRTH (1984년작)는 실패하고, 애니메이터로는 일급이지만 연출가로써의 재능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때부터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에 참여하여 많은 명장면들을 만들어냈다. 작품 내용상 비행 장면을 넣은 건 미야자키 하야오였지만 그 비행장면들을 감탄 나오게 그려낸 건 카나다 요시노리였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작품은 1997년의 모노노케 히메까지 원화맨으로 참여했다. 이 무렵 타카하타 이사오로부터 원화 카시라(頭)라는 이전까지는 없었던 직책명을 부여받고, 이 후 '카시라'라는 닉네임으로 불리운다.

사실 미야자키 하야오와는 정식으로 지브리 작품에 손을 대기 전부터 인연이 있었다. 카나다가 토에이 제작의 1982년작 FUTURE WAR 198X年의 메카 디자인 겸 메카 작화감독의 의뢰를 받았는데, 느닷없이 지금까지 일절 면식도 없었던 미야자키 하야오한테 "좀 제대로 된 일을 맡아라"[2]고 충고 전화가 온 것. 덕분에 카나다는 당시 작품에 참여하긴 했지만, 스탭롤에는 자신의 이름을 집어넣지 않았다.

90년대에는 TVA 제작 현장에도 복귀했지만, 현장의 환경은 바뀌져 있어서, 비디오 판매를 전제로 해서 그림은 통일감과 리얼함을 중시해서 카나다처럼 개성있고 자유로운 착상의 원화는 수정당하기 일쑤였다. 지브리 작품 이후로는 3D라는 CG에 매력을 느껴, CG에서의 새로운 표현영역에 도전한다. 파이날 판타지 극장판으로 스퀘어와 인연이 닿은 이후 애니메이션 쪽을 떠나 스퀘어에닉스의 게임 쪽에서 활동했다.

그러다 2009년 7월 21일, 57세의 아직 이른 나이에 그 전날까지 일을 했는데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타계. 같은 해 8월 20일, '카나다 요시노리를 송별하는 모임'에는 애니메이션업계 관계자 800명과 일반인 팬 300여명이 참석했다. 안노 히데아키,린타로가 조사(弔辞)를 낭독했다. 그의 죽음을 기리며 이마이시 히로유키, 아메미야 아키라, 요시나리 요우 3명의 애니메이터들이 추도 동인지를 내기도 했다. 제목은 카나다 요시노리여 영원히

3 작풍

로봇아니메 등에서는 완급을 이어가며 춤추듯이 움직이는 아크로배틱한 표현이나, '카나다 파스(perspective,원근법)'라고 불리우는 가까운 물체는 대담하게 크게 그려 원근감을 강조하는 구도로 화면 밖으로 튀어나올 듯한 박력감을 주는 묘사와 실사영화의 카메라 렌즈에서만 일어나는 역광(逆光)을 집어넣어 화려함을 주는 표현, 광각렌즈와 어안렌즈로 찍은 듯한 표현, 빛[3]과 연기, 폭발에서의 새로운 표현기법을 개척, 배경과 인물이 같이 질주하는 표현을 통한 강렬한 속도감,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의 제한된 동화 매수 안에서 만들어내는 절묘한 움직임 등등, 남들이 하지 못하는 걸 해낸 애니메이터이자 남들이 하는 건 더 잘 해낸 애니메이터. 일본 아니메의 표현기법의 영역을 넓힌 그야말로 천재요 본좌. 특히 그의 독특한 섬광 표현은 '카나다 섬광'(金田光り)이라고 불리우며, 이타노 서커스급의 용어로 쓰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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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작. 사이보그 009 OP & ED. 원화.

카나다 요시노리의 작화의 특색을 잘 보여주는 은하선풍 브라이거(銀河旋風ブライガー) 오프닝 (카나다 요시노리 원화)(1981년작)

카나다 요시노리 스타일의 작화를 모아놓은 영상.

카나다 요시노리가 그린 게임 오프닝. 카나다 요시노리답게 일단 달리고 본다.

4 평가

카나다 요시노리가 그려낸 애니메이션에 충격을 받은 애니메이터들은 그가 그려낸 장면들을 분석 연구했고, (카나다 요시노리가 참여한 신작이 공개되면, 다음날에는 모든 애니메이터가 그것을 흉내내서 따라하고 있다는 우스개소리가 있을 정도였다.) 그것을 통해 전체적인 일본 애니메이션의 작화 스타일이 변화하고 한 단계 위로 올라가게 되었다. 카나다 요시노리가 등장한 이후 특히 메카닉이나 액션을 그리는 애니메이터들 중에서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카나다 요시노리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도 할 수 있다.

전형적인 카나다 류파인 마사유키 [4]의 그림 콘티(공동)과 원화의 1985년작 미일합작 TVA "Thundercats" opening.

2000년대에 카나다 요시노리의 스타일을 가장 충실히 계승한 감독/애니메이터로는 이마이시 히로유키가 있다.

5 기타

스즈키 토시오의 회상에 의하면 [5], 카나다 요시노리를 미야자키 하야오에게 소개하고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작진에 합류시킨 것은 스즈키 토시오였다. [6] 이미 그 시절 젊은 애니메이터의 선망의 대상인 스타 애니메이터였고, 여하튼 액션과 폭발 씬이 굉장하고, (미야자키 하야오는 흉내내지 못하는) 로봇이 걸어가는 것만으로도 무게감을 느끼게 하는 연출로 유명했다. 그래서 카나다 요시노리가 그린 원화는 미야자키 하야오도 고칠 엄두를 못내고 그냥 통과시켰다고[7], 다만 인물의 얼굴을 그리는 것은 서툴러서 나우시카의 얼굴 부분만은 미야자키 하야오가 다시 그렸다고 한다. 심지어는 모노노케 히메에서는 그림 콘티에도 없는 장면을 원화로 그렸는데 미야자키 하야오도 인정하고 그대로 영화 장면이 된 에피소드도 있다. 카나다는 나중에 "미야자키 감독이 요구하는 레벨이 높아서 고생했다. 하지만 완성된 필름을 보면 납득이 되니까."라고 지브리 작품에 참가한 이유를 밝혔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원화 체크에 대해서 엄청 엄격해서 마음에 안드는 원화는 "이건 안돼!"라고 쏘아붙이고는 그 이유도 설명 안해주는 스타일이었는데[8] , 카나다 요시노리가 이건 이래서 안 좋다고 설명해주고 다독이며 애니메이터들을 이끌어가는 형님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미야자키 하야오도 카나다 요시노리는 높이 평가하고 '카시라'라고 불렀다.[9]

6 작품 목록

  1. 伊功는 한자의 음독으로 읽어서 주로 친한 사람들한테는 '이코우'라고도 불리운다. 본인도 사인을 할 때 IKO라고 쓰기도 했다.
  2. 냉전중이었던 당시의 시대상을 배경으로 제3차 세계대전을 그려낸 작품이었는데, 제작준비 단계에서 플롯이 유출되면서 애니메이터 노동조합이 제작을 거부하거나 학부형들이 제작을 반대하는 등 사회적인 문제로 발전하였다. 이유는 전쟁에 대한 묘사가 지나치게 리얼하단 이유로 이것이 자칫 '전쟁이란 것이 멋있고 재미있는 것으로 보일 가능성이 있다'라는 것. 전쟁영화가 난무하는 요즘 기준으로 보자면 내용 자체는 딱히 뭐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일본이 세계최고의 반전국가였다는 것이 문제였다(…). 완성된 작품은 수정된 각본이었고, 처음 예정된 각본은 우익의 주장을 담고 있었다. 이무렵 한 애니메이션 잡지에서 야스히코 요시카즈가 이에 관련된 글을 기고한 적도 있었다.
  3. 이전까지의 애니메이션에서는 레이저 광선을 쏘면 그냥 선으로 찍 그어놓고 빛줄기 하나로 끝내던 것을 마치 번개가 치는 것처럼 요동치는 움직임으로 그려서 다이나믹하게 표현
  4. 가이낙스에서도 활동하고, 나중에는 스튜디오 카라의 상담이사.
  5. 출전 :鈴木敏夫のジブリ汗まみれ第98回目『伝説のアニメーターの死を悼む』 http://www.youtube.com/watch?v=vUcWvoWXXtc
  6. 스즈키는 아니메쥬 편집자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함께 술 마시며 어울렸던 사이이기도 했고, 평소에 존경하던 타카하타 이사오의 집 근처에 살고 있었던 인연도 있어서 스즈키가 타카하타와 함께 그의 집을 찾아 가서 부탁할 때 거절할 수가 없었다.
  7.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제작 시기 심각한 인력부족과 제작기간이 촉박해서 미야자키 하야오도 일일히 원화를 다 다시 그리지는 못해서, 원화가의 버릇이 남아있는 경우가 있었다. 특히 카나다가 그린 원화 파트는 카나다 특유의 버릇을 볼 수 있다
  8. 모노노케 히메 메이킹 영상을 보면 이 무렵에는 미야자키도 성격이 느긋해졌는지 까마득한 후배 원화맨들에게 친절하게 이건 이렇게 하는 것이 좋다고 설명해주는 모습이 보인다. 카메라 앞이라서 그 날만 그런 척을 하는 것인지는 불명하지만
  9. 야쿠자 세계에서 '오야붕' 밑의 2인자를 '카시라'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