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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 |
카를루스 마누엘 브리투 레알 케이루스 (Carlos Manuel Brito Leal Queiroz) | |
생년월일 | 1953년 3월 1일 |
국적 | 포르투갈 |
출신지 | 남풀라 |
포지션 | 골키퍼 |
키 | 180cm |
소속팀 | Ferroviário de Nampula (1968~1974) |
지도자 |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U-20 감독 (1989~1991)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1~1993) 스포르팅 CP 감독 (1994~1996) 뉴욕 레드불스 감독 (1996)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감독 (1996~1997) 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98~1999) 남아프리카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0~2002)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수석코치 (2002~2003) 레알 마드리드 CF 감독 (2003~2004)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FC 수석코치 (2004~2008)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8~2010)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1~2015.3., 2015.4.~) |
레알 마드리드 CF 역대 감독 | ||||
비센테 델 보스케 (1999~2003) | → | 카를로스 케이로스 (2003~2004) | → |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2004) |
목차
1 소개
퍼거슨의 수석코치
호날두의 은사
그러나 감독으로선 1류가 되지 못한 인물
카를로스 케이로스는 포르투갈 출신의 축구 감독이다. 그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아 제법 이름을 날렸고 스포르팅에서 호날두를 키운 덕택에 맨유와 연이 닿아 축구 역사에 길이남을 명장 알렉스 퍼거슨의 수석코치로서 활약했다. 한국인들에게는 흔히 베베를 추천한 인물(...)로 알려져 있어서 마냥 무능한 사람으로 낙인찍혀 있지만 본인이 이에 대해 부정했다는 사실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정작 그는 클럽 감독으로선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가는 곳마다 마찰을 빚는 모난 성격 탓에 변방을 전전해야 했다. 또한 이 사람은 이란 축구 대표팀 감독 시절 한국을 상대로 많은 언플을 날렸고 급기야 주먹감자 사건까지 일으키는 바람에 많은 한국인들에게 밉상으로 찍혔다. 아마도 수십년 간 한국인들에게 줄곧 까일 것으로 예상된다.(...)
2 선수 경력
선수 시절은 보잘 것 없었다. 그는 모잠비크의 아마추어 축구 클럽인 Ferroviário de Nampula에서 1968년부터 1974년까지 골키퍼로 뛰었다. 그는 골키퍼로서 별다른 재능을 보여주지 못했고 결국 프로 선수가 되지 못하고 일찌감치 선수 생활을 그만두고 감독으로서의 인생을 시작했다.
3 감독 경력
3.1 포르투갈 축구대표팀 감독 시절
1974년 4월 25일, 케이로스는 카네이션 혁명이 일어난 포르투갈로 이주했다. 그후 1년 뒤, 그가 태어난 지역인 모잠비크가 포르투갈로부터 독립했다. 졸지에 외지인 포르투갈에서 살게 된 케이로스는 위드서 대학에서 축구 관련 지식을 쌓았다. 1984년, 케이로스는 대학을 졸업한 후 Estoril-Praia팀의 코치로 일했다. 5년간 코치 생활을 하며 경력을 쌓은 케이로스는 1989년에 포르투갈 U-20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국제 유소년 축구 챔피언십에 참가했다. 이때 그는 1989년과 1991년에 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또한 케이로스는 유로피언 U-16 챔피언십에서도 1989년 우승을 차지했다. U-20 축구 대표팀에서 성과를 거둔 케이로스는 1991년 포르투갈 성인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28경기에서 10승 8무 5패를 기록하여 43.48%의 승률을 거두었다. 그후. 케이로스는 1994년에 포르투갈 축구 리그 팀인 스포르팅 CP에 감독으로 부임햇다.
3.2 스포르팅 CP 시절
1994년 6월 1일 스포르팅 감독으로 부임한 케이로스는 1994~1996년까지 2시즌 동안 68경기 45승 17무 6패를 기록, 66.18%의 높은 승률을 기록했다. 그는 1994-95 시즌에 포르투갈 컵(Taça de Portugal) 우승을 차지했고 뒤이어 포르투갈 슈퍼컵(Supertaça Cândido de Oliveira)도 우승했다. 이렇듯 잘나가던 그는 1996년에 뉴욕 레드불스의 제의에 응하여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1996년 6월 18일부터 그해 11월 19일까지 팀을 맡으며 24경기에서 12승 12패를 기록했다. 이 시기에 케이로스는 "Q-Report"라는 책을 출판했다. 이 책은 미국의 축구 선수들의 발전을 돕는 과정을 묘사했다. 그는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이 2010년 월드컵에서 강력한 팀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3.3 나고야 그램퍼스 에이트 시절
1996년 11월, 나고야 그램퍼스는 아르센 벵거가 아스날로 간 뒤 새 감독을 찾다가 포르투갈에서 나름 명성을 날리고 있던 케이로스를 신임감독으로 선임했다. 그는 나고야에서 1997년 5월까지 6경기 동안 2승 4패를 기록했다. 이후 그는 일본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감독직을 사임했다.
3.4 UAE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나고야 감독직을 사임한 뒤 1년간 휴식을 취하던 케이로스는 1998년 아랍에미레이트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는 1999년 1월까지 16경기에서 8승 2무 6패를 기록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현지 적응에 실패하여 도중에 그만뒀고 다시 휴식을 취하다가 2000년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감독으로 부임했다.
3.5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 국가대표팀 시절
2000년 10월 7일 남아프리카 국가 대표팀 감독이 된 케이로스는 24경기에서 10승 8무 6패를 기록했고 팀을 2002 한일 월드컵에 진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네이션스컵 8강에서 말리에 패배한 뒤 사퇴압력에 시달렸고 선수단 내부에서 벌어진 일이 언론에 유출되는 것을 불만스럽게 여긴 데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 축구협회가 월드컵 축구대표 선수구성을 두고 간섭을 벌이자 축구협회와 대판 싸운 끝에 월드컵이 한달 남은 시기인 2002년 5월 사임했다.
3.6 맨유 수석코치 1기
2002년 6월, 케이로스는 퍼거슨의 부름을 받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석코치로 부임했다. 포르투갈 국가대표팀과 스포르팅을 맡아서 루이스 피구 등 여러 스타 선수들을 발굴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 외에는 별다른 진가를 보이지 못했던 그였다. 퍼거슨이 그런 그를 수석코치로 덜컥 임명한 것에 많은 이들이 의아해했다. 특히 케이로스 이전에 맨유의 수석코치로서 일했던 스티브 맥클라렌은 맨유 코치로서 부임 첫해만에 퍼거슨을 도와 트레블을 달성해 냈으며 맨유를 떠난 이후에도 퍼거슨의 가장 완벽했던 오른팔로 화자될만큼 맨유팬들의 지지를 받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퀘이로스에 대한 의구심은 한층 더 커질 수 밖에 없었다.
퍼거슨이 케이로스를 선임한 것은 사실 포르투갈 선수들에 대한 그의 영향력에 주목했기 때문이었다. 케이로스는 일찍이 포르투갈에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일하면서 여러 스타 선수들을 발굴했고 그들을 잘 길러내어 포르투갈 선수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당시 유망주들이 즐비한 포르투갈 축구리그에 관심을 기울이던 퍼거슨은 이 점에 주목하고 케이로스를 선임한 것이다. 이후 케이로스는 2002-03 시즌 퍼거슨의 수석코치로 일하면서 퍼거슨에게 많은 도움이 되어줬다. 사실 퍼거슨은 여러 부문에서 탁월한 재능을 갖췄지만 위대한 전술가는 아니었고 세부 전술은 코치들에게 맡겨놓곤 했다. 케이로스는 축구 전술 관련 지식이 풍부하고 상대팀에 맞춰 전술을 짜는 데에서도 탁월한 모습을 보여 퍼거슨의 신임을 한몸에 받았다.
3.7 레알 마드리드 시절
그러던 2003년 여름, 케이로스는 느닷없이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이 선임과정은 많은 이들의 비판을 받게 된다. 전(前) 레알 감독인 델 보스케는 선수 시절 레알 마드리드의 레전드였고 감독으로서도 90년대 감독들이 짤릴 때마다 땜빵(...) 역할을 잘 수행했고 1999년부터 2003년까지 4년간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 2회, 라 리가 우승 2회,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우승 1회, UEFA 슈퍼컵 우승 1회, 인터콘티넨탈컵 1회 등 수많은 타이틀을 획득했다. 특히 챔피언스 리그에선 4번 진출해서 4번 모두 4강 안에 드는 저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또한 겸손, 근면하고 소박한 성품으로 언론으로부터 평판이 좋았고 당시 갈락티코 정책으로 팀에 유입된 무수한 스타 선수들을 잘 다스려 한 팀으로 융화시키는데에도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다. 그런 그가 느닷없이 경질되었으니 반발이 일어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었다.
플로렌티노 페레스 회장은 델 보스케를 경질한 이유에 대해 "델 보스케는 피로를 보이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지만, 그가 미래에 적절한 감독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델 보스케의 전술은 전통적인 것이며 우리는 더 전술을 중요시하는 인물을 찾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퍼거슨의 '두뇌'로서 탁월한 전술 감각을 선보이는 젊은 감독 케이로스야말로 팀의 미래를 맡길 수 있으며 팀의 전술을 개선시킬 인물이라고 장담했다. 레알 팬들은 델 보스케에 비해 영 미덥지 못한 경력을 지닌 케이로스를 못마땅하게 보면서도 한편으로는 퍼거슨이 높게 평가할 만큼 능력이 있는 인물이니 팀을 잘 이끌 것이라고 기대했다.[1]
그러나 케이로스는 레알의 흑역사를 창조하고 만다.
케이로스가 부임한 레알 마드리드는 당대 최고 스타들이 즐비했다. 지네딘 지단, 호나우두, 루이스 피구, 그리고 데이비드 베컴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은 영국, 프랑스, 브라질, 포르투갈 등 여러 국가들에서 최고의 선수로 각광받는 선수들이었다. 이 선수들을 잘만 활용한다면 라 리가는 물론이고 빅 이어도 손쉽게 얻을 수 있을 듯했다. 그러나 케이로스는 이들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전술을 개발하는데 실패헀다.
2003-04 시즌 중반엔 라 리가 선두를 찍고 스페인 컵과 챔피언스 리그를 순항할 때만 해도 모든 게 잘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 레알은 스타 선수들을 구하는 데 혈안이 되어 있어 정작 중요한 수비 쪽은 제대로 보강하지 않았고 유스들로 수비를 채우고 공격 쪽엔 스타 선수를 채운다는, 이른바 지단-파본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러다보니 화려한 공격에 비해 수비는 부실하기 짝이 없었고 급기야 뒷공간을 책임지는 믿음직한 수미 클로드 마켈렐레를 팔아버리고 공백을 메꾸지 않는 우를 범하는 바람에 전력의 균형이 무너지고 말았다.
결국 레알은 스페인 국왕컵에서 16강 진출에 그치는 실망스런 성적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챔스 8강에서 모나코에게 3골을 먹히며 탈락했고 리그에서도 마지막 5경기를 모두 패하는 충격적인 결과를 맞이하여 리그 4위에 그쳐 결국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시즌이 끝난 뒤 케이로스는 곧바로 경질되고 만다.
그의 레알에서의 실패 원인은 전력의 불균형이 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타 선수들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델 보스케 시절, 선수들은 그의 지시에 절대 복종했고 모두가 한 팀이 되어 팀워크가 잘 맞았다. 그러나 케이로스에겐 그런 리더십이 없었고 선수들은 선수 경력이 보잘 것 없는 그를 경원시했다. 베컴은 아예 그를 "이상한 감독"이라 칭하며 레알 마드리드에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때와는 달리 충분히 체력훈련을 받지 못했고, 소속팀 동료 선수들도 각자 개인훈련으로 체력을 단련했다며 케이로스 전 감독의 훈련 태만을 지적했다. 이에 포르투갈의 피구도 레알 마드리드의 체력훈련에 문제가 있었다며 베컴에게 힘을 실어줬다. 베컴 '부진 설명'..."아내가 아니라 이상한 감독 탓"
사실 그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때까지 그의 경력을 보면 눈에 띄는 성공을 거둔 것이라고는 포르투갈 국가대표팀과 스포르팅 CP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것 뿐이었고 그 외에는 퍼거슨의 수석코치로 한 시즌 동안 함께 한 것이 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했다. 누가 봐도 레알 마드리드같은 명문 중의 명문 클럽을 맡기엔 턱 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선수로서 레전드였던 것도 아니고 아마추어로서 골키퍼를 몇년 했던 게 전부였다. 게다가 전임 감독은 레알의 레전드였고 감독으로서도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레알 선수들에게 깊은 존경을 받았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의 공백을 훌륭한 경력을 쌓아온 굴지의 명장들이라고 해도 어려울 판에 케이로스 같은 인물이 어찌 메꿀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2003-04 시즌 레알 마드리드의 실패는 케이로스보다는 그를 선임하고 팀의 전력을 흐트러지게 만든 페레즈 회장의 책임이 크다고 할 수 있다.
3.8 맨유 수석코치 2기
2004년 7월 1일, 케이로스는 3년 게약을 체결하고 맨유의 수석코치로 복귀했다. 당시 맨유는 아스날보다 승점 15점이 뒤진 상태로 시즌이 마감된 충격으로 퍼거슨에 대한 회의론에 휩싸여 있었다. 퍼거슨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케이로스의 도움을 받기로 결심하고 마침 레알에서 경질된 그를 데려왔다.
하지만 케이로스는 2005년 11월 로이 킨이 맨유를 떠난 것에 연관되었다는 루머에 시달렸다. 로이 킨은 케이로스가 자신에게 너무 많은 책임을 안겼으며 그의 전술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킨은 급기야 MUTV과의 인터뷰에서 공개적으로 맨유 선수들을 비난한 것과 동시에 케이로스도 비난했다. 하지만 퍼거슨은 케이로스를 계속 신임했고 로이 킨은 맨유를 떠나 셀틱으로 이적했다.
2006년, 미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벤피카에서 그를 감독으로 선임한다는 루머가 퍼졌다. 그러나 그는 게속 맨유에 남았고 2007년 맨유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또한 케이로스는 퍼거슨 대신 BBC와의 인터뷰에 응했다. 퍼거슨은 BBC가 자신의 아들 대런 퍼거슨이 선수이적 부정사건에 연루되었다고 폭로한 것에 격노하여 BBC와의 인터뷰를 일절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2008년 3월 말, 벤피카가 또다시 케이로스를 감독으로 선임하려 한다는 루머가 돌았다. 당시 맨유는 리그 우승 레이스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우승까지 승점이 5점 남아 있었고 챔피언스 리그 우승도 가시권에 놓여 있었다. 케이로스는 벤피카 부임 루머에 대해 어떠한 공식 발언도 하지 않았다.
이때 퍼거슨은 케이로스에게 자신의 뒤를 이어 맨유 감독이 될 것을 종용했다. 뭐라고요? 퍼거슨, "내 후임자로 카를로스 케이로스 염두" 하지만 시즌이 끝난 뒤에도 케이로스가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다는 루머가 떠돌았다. 결국 2008년 7월 11일, 맨유는 케이로스와의 게약 해지에 동의했고 케이로스는 포르투갈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가 맨유에서 수석코치로 일하는 동안 가장 큰 공헌을 한 걸 꼽자면 단연 호날두를 갱생시킨(...) 것이리라. 호날두가 처음 맨유로 이적했을 때만 해도, 그는 혼자우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팀 플레이는 전혀 하지 않고 혼자서 개인기를 부리는 철없는 소년에 불과했다. 케이로스는 그런 그와 항상 함께 하면서 그가 팀에 적응하고 기량을 끌어올릴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줬고 호날두는 그의 도움 덕분에 맨유에 적응하고 몇년 후 세계 최고의 선수로 각광받을 수 있었다. 호날두는 자신을 도와준 케이로스를 스승님으로 여기고 존경을 표했고 케이로스 또한 "호날두를 키운 건 내 생애 최고의 성과"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사실 그가 포르투갈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할 수 있었던 것은 호날두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한편 케이로스가 베베를 적극 추천했고 퍼거슨이 이를 받아들여 베베가 맨유로 이적하는 데 기여했다는 이야기가 기정사실화되고 있지만, 본인은 이를 부정했다. 케이로스 "베베의 맨유 이적, 난 몰랐던 일" 근데 당시 각종 언론에서 베베를 추천했다고 했을 때는 아무 말 안하다가 5년 뒤에야 부인하는 걸 보면 모른 체하는 거 같은데?
3.9 포르투갈 축구대표팀 감독 2기
케이로스는 포르투갈 축구 대표팀에 부임한 후 몰타와의 A매치에서 4:0 승리를 거두며 순조로운 출발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4경기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지 못하면서 그에 대한 회의론이 거세지기 시작했다. 특히 홈에서 덴마크에게 3:2 패배를 당한 것은 치명타였다. 포르투갈은 이 패배로 2010 월드컵에 진출하지 못할 위기에 빠지고 만다.
다행히 포르투갈은 알바니아, 헝가리, 몰타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조별 예선에서 2위를 차지하며 UEFA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포르투갈의 상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포르투갈은 홈에서 1:0 승리를 거두고 원정에서도 1:0 승리를 거두며 가까스러 2010 남아공 월드컵에 진출할 수 있었다.
2010 월드컵에서, 포르투갈은 코트디부아르와의 1차전에서 0:0 무승부를 거두었고 북한을 상대로 7:0으로 압살하고 브라질과 0:0 무승부를 거두며 조별 리그를 무사히 통과하고 16강에 진출했다. 그러나 16강에서, 포르투갈은 스페인에게 1:0으로 패하고 말았다. 이로서 포르투갈은 4경기에서 3경기를 무득점으로 마감하는 불명예스런 기록을 세우고 말았다.(...) 북한: 왜 나만 마구 패는거야 ㅜㅜ
월드컵 기간 동안, 그의 전술에 대한 선수들의 반발이 심했다. 데쿠는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에서 케이로스 감독으로부터 평소 부여 받아온 중앙 미드필더가 아닌 측면에 치우친 움직임을 지시 받아서인지 효과적인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그는 코트디부아르와의 경기가 무승부로 끝난 뒤 기자회견을 통해 "내가 왜 교체 됐는 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 질문은 감독에게 물어봐야 할 것"이라며 62분 자신을 교체한 감독의 결정에 불만을 드러냈다. 그는 "게다가 나는 오른쪽 측면에서 움직이라는 주문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데쿠는 "오른쪽은 내가 선수 생활을 하며 단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자리다. 나는 측면 미드필더가 아니다"라고 밝힌 뒤, "이번 경기는 내가 포르투갈 대표팀 선수로서 치른 75번째 경기였다. 그러나 승리를 하지 못했기에 만족할 수 없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데쿠 "케이로스 감독의 전술, 이해 못해"
심지어 그와 절친한 관계였던 호날두까지 그를 비난하는 듯한 언행을 취했다. 그는 스페인과의 16강전에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하고 결국 경기에서 진 뒤 포르투갈의 탈락 원인을 묻는 취재진의 질문에 케이로스 감독에 대한 불만이 잔뜩 섞인 답변을 내놓았다. 그는 경기 후 포르투갈 TV 'RTP'를 통해 "나는 포르투갈의 탈락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당신들은 그 질문을 케이로스 감독에게 던져야 할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호날두 "탈락 이유? 감독이 대답해야" 이날 후반전에 교체된 우고 알메이다 역시 "나는 전혀 지치지 않았다. 더 뛰고 싶었지만 케이로스 감독이 교체를 명령했다"며 감독의 결정과 동의할 수 없다는 뜻을 나타냈다.
월드컵이 끝난 뒤, 케이로스는 도핑 검시관에게 폭언을 퍼부어 물의를 사고 말았다. 케이로스, 도핑 검사관에게 폭언으로 물의 당시 케이로스 감독은 선수들에 대한 검사가 너무 자주 이뤄지는 것에 대해 짜증을 내며 루이스 호르타 반도핑 위원회장에게 과도한 폭언을 내뱉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포르투갈 축구협회는 19일, 반도핑 위원회와 마찰을 빚은 케이로스 감독에 대해 30일 자격정지 징계를 내린다고 발표했다. 케이로스 감독은 또한 1000 유로(약 150만원)의 벌금도 내게 되었다. 결국 케이로스는 2010년 9월 9일 경질되고 만다.
3.10 이란 축구대표팀 감독 시절
2011년 4월 4일, 케이로스는 이란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2014 브라질 월드컵 준비에 착수했다. 케이로스는 몰디브를 4:0으로 격파하며 월드컵 예선을 순탄하게 시작했고 인도네시아, 카타르, 그리고 바레인을 연달아 격파하며 일찌감치 월드컵 최종 예선 진출을 확정했다. 월드컵 최종 예선에서, 이란은 대한민국, 카타르,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레바논과 같은 조에 속했다.
케이로스는 그의 스쿼드를 귀화 외국인 선수들로 채워 전력을 보강하고 우즈베키스탄을 1:0으로 제압하며 순탄한 출발을 보였다. 하지만 이후 카타르와 무승부, 레바논에게 패하면서 탈락 위기에 직면했다. 이후 이란은 홈에서 대한민국을 이겼지만 우즈베키스탄에게 1:0으로 패하며 아슬아슬한 상황에 놓였다. 케이로스는 전열을 재정비하고 도하에서 카타르를 1:0으로 제압했고 레바논을 홈에서 4:0으로 대파하며 원정에서의 패배를 복수했다. 그리고 마지막 경기는 대한민국과의 원정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케이로스는 1:0 승리를 거두며 승점 16점을 획득하며 조별 예선 1위를 기록하며 월드컵 진출을 확정지었다. 이때 그는 일명 주먹감자 사건을 저지르는데, 이건 하단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2014 브라질 월드컵에서, 이란은 아르헨티나, 나이지리아, 그리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 한 조에 속하게 되었다. 2014년 6월 16일 나이지리아와의 1차전에서, 이란은 철저한 수비로 일관하여 0:0 무승부를 거두었다. 축구 팬들은 월드컵 역사상 가장 재미없는 경기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2차전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선 철저한 수비로 일관하여 상대의 공격을 원천 봉쇄하면서 또다시 0:0으로 끝나는 듯 했다. 그러나 종료 몇 초전, 리오넬 메시의 극적인 결승골로, 이란은 1:0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이후 이란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3차전에서 3:1로 패하고 말았다. 이란의 ‘극단적 수비’ 전략은 실패했다
월드컵이 끝난 뒤, 케이로스는 이란 대표팀 감독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케이로스 이란 감독, 사의 표명… “이란은 항상 내 마음 속에 있을 것" 그런데 며칠 후 알리 카파시안 이란축구협회 회장은 "케이로스에게 재계약을 제안했다. 그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고 밝히며 재계약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2014년 7월 22일, 케이로스는 2018년 러시아 월드컵까지 이란 대표팀 감독을 맡기로 합의했다. 케이로스, 이란대표팀과 계약 연장 합의...2018 월드컵까지
이후 이란은 2015 아시안컵에 참여하여 바레인, 카타르, 그리고 아랍에미레이트와 한 조를 이루었다. 이란은 바레인을 2:0으로 격파하고 카타르를 1:0으로 격파했으며 UAE 또한 1:0으로 격파하며 3전 3승으로 조별 1위를 기록하며 8강에 진출했다. 8강전은 이란의 숙명의 라이벌 이라크와의 한판 승부였다. 이 경기에서 이란이 선제골을 넣으며 쉽게 가는가 했지만 전반 43분 이란 선수 팔라디가 퇴장을 당하면서 상황이 묘하게 흘려갔다. 결국 후반 11분 이라크는 동점골을 넣었고 승부를 연장전으로 몰고 갔다. 연장전은 그야말로 막장대첩이었다.
연장 전반 3분, 이라크의 마무드가 헤딩으로 역전골을 터트림.
연장 전반 13분, 이란의 푸랄리간지가 헤딩 동점골을 터트림.
연장 후반 8분, 푸랄리간지가 페널티킥을 내주고 이라크가 이를 성공시킴.
연장 후반 14분, 이란의 레자 구차네자드가 동점골을 터트림.
이건 뭐 니가 가라 4강이냐?
결국 3:3으로 연장전까지 종료, 승부차기에 돌입했다. 이란의 첫번째 키커 하지사피가 실축하며 분위기가 이라크로 넘어갔다. 그런데 이라크 첫번째 키커인 압둘라미르도 실축하고 말았고 이후 모든 키커들이 침착하게 성공한 가운데 이란의 8번째 키커인 아미르가 골대를 맞춰버렸고, 그 뒤 이라크가 골을 성공시켜 결국 이라크가 승부차기에서 7:6으로 승리했다.
아시안컵이 끝난 뒤, 케이로스는 돌연 사퇴를 선언했다. '사퇴' 케이로스, "이란 축구협, 나에게 모욕감을 줬다" 케이로스는 정상적인 지원을 받지 못해 대표팀을 꾸리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다가오는 스웨덴, 칠레와의 평가전에 사르다르 아즈문, 알리레자 자한바크슈를 선발하려다 무산되자 감독직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한다. 그는 "이란 축구협회 내부는 크게 두 개의 부류로 나뉘어있다"면서 "그 중 한 개의 파벌은 자신들에게 엄청난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와 선수들 그리고 코칭 스태프들을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로 대해 불쾌하게 만들었으며 심지어 모욕감을 줬다. 이런 부분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다"며 사퇴의 배경을 밝혔다.
... 그런데 불과 한 달 후, 케이로스는 이란 축구 대표팀 감독으로 복귀했다! 케이로스, 이란 축구대표팀 사령탑으로 '유턴' 케이로스 감독은 타스님과 한 인터뷰에서 "이란축구협회 및 이란 체육부 관계자들과 회의을 했다"며 "우리는 모두 이란 축구의 미래를 생각했다"고 복귀 이유를 밝혔다. 왔다리 갔다리 밀당甲 케이로스
2016년 10월 11일(한국시간) 이란 홈에서 열린 대한민국과의 월드컵 최종예선 4차전에서 이란이 공수 양면에서 한국을 압도하며 또 승리를 챙기는데 성공했다. 이 날 경기에서 이란은 침대축구를 사용하지 않았고 케이로스 감독도 별다른 구설수는 일으키지 않은채 한국팀의 전술을 완벽하게 연구하고 파악하는 모습을 보여준 반면 한국의 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경기전 비판 여론에 날선 반응을 보인데에 이어 경기 패배후 "카타르의 소리아같은 스트라이커가 없어서 졌다"는 책임전가식 변명을 늘어놓자 한국 축구팬들 사이에서 '케이로스가 확실히 전술적 역량은 뛰어나긴 하다', '인정할건 인정하자'는 식으로 긍정적인 재평가를 받았다.
3.10.1 주먹감자 사건
먹어랏! 나의 주먹을!
때는 2013년 6월 11일. 한국과 이란은 월드컵 최종예선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있었다. 당시 이란은 조 2위를 기록하고 있었고 한국은 조 1위를 기록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즈베키스탄이 마지막 경기에서 승리를 거두고 한국이 이란을 격파한다면, 이란은 조3위로 떨어져 월드컵 진출을 실패할 수 있었다.
경기 전부터 양팀 감독들의 신경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발단은 최강희 감독이 지난 우즈벡전 이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우즈벡보다 이란이 더 밉다. 이란을 이겨서 우즈벡과 함께 월드컵 갈 것'이다. 케이로스 감독한테 내년 월드컵은 포르투갈 집에서 TV로 편안하게 보기를 바란다." 등 자극적인 발언을 했다.
이란의 케이로스 감독도 한국축구를 비아냥거리며 맞받아쳤고, 양국 언론들까지 이를 부채질하며 점입가경에 들어섰다. 이 경기에서 한국은 15개의 슈팅을 날리며 공격을 퍼부었으나 득점에 실패했고 이란은 수비만 하면서 시간을 끌다가 막판에 단 한번의 역습으로 골을 넣으며 1:0 승리를 거두었다.
경기가 끝난 후 이란은 선수고 감독이고 할 것 없이 한국팀을 조롱했으며, 이에 한국대표팀과 가벼운 몸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케이로스는 최강희의 사진이 담긴 티셔츠를 입으며 조롱했고 일본측 네티즌들은 케이로즈를 칭송하며 한국을 조롱했다.
이후 케이로스는 FIFA로부터 벌금 처분을 받았는데, 한국에겐 아무런 처벌이 주어지지 않았다며 이란 축구협회가 항의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후 한국과 이란 간의 사이는 급속도로 냉각되었고 케이로즈는 한국 축구팬들의 밉상으로 찍혔다.
그 후 1년이 지난 2014년 11월, 케이로스는 한국과의 A매치 친선전을 앞두고 사과의 뜻을 밝혔다. ‘주먹감자 사과’ 케이로스 화해 손짓 의도는?
사실 케이로스의 최강희 감독을 향한 주먹감자를 비롯한 태도는 한국과의 라이벌 의식과 신경전 뿐만 아니라 한국, 나아가선 아시아 축구에 대해서 유럽의 1류 무대에서 어울렸던 자신의 오만에 가까운 우월감을 표출하는 것에 가깝다. 게다가 최강희 감독이 국제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감독이라면 이렇게까지 무례한 태도를 보이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최강희 감독이 K리그에선 명장으로 유명하지만[2] 불행히도 국제적인 인지도 자체는 케이로스에 비해서 낮아 도발을 해도 후환도 없다고 생각하고 만만하게 여겨 주먹감자를 내질렀을 수도 있다.(...) 선수 시절엔 유명했던 울리 슈틸리케 감독에 대해선 도발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은 것이 좋은 예. 레알 마드리드 레전드인 슈틸리케 정도의 인물을 상대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유럽 축구계에서 상식없고 무례한 사람이라는 낙인이 찍혀 큰 무대로의 복귀에 난항을 겪을 수 있다. 한국인 감독이라도 국제적인 인지도가 높은 차범근을 상대로 그런 짓을 했어도 유럽에서 말이 많았을 것이다. 비슷한 경우로 광저우 헝다 감독 시절 K리그 팀들을 상대할 때 무례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국가대표 훈련을 하던 슈틸리케와는 반갑게 이야기를 나눈 마르첼로 리피의 경우도 있다.
4 총평
케이로스는 상단의 '주먹감자' 사건 이후 한국인들에게 밉상으로 낙인찍혔고 많은 이들이 그의 과거 경력을 들어 3류 감독으로 비하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감정을 접어두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보자면 케이로스는 1류 감독은 분명 아니지만 그렇다고 3류 감독인 것은 또 아니다. 그는 스포르팅과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 시절 좋은 성과를 거두었고 퍼거슨의 수석코치로서 그에게 귀중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오죽했으면 퍼거슨이 그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이었겠는가? 그는 유소년 육성에 우수한 수완을 발휘했고 전술가로서의 역량도 뛰어났다. 그런 점에서 그는 확실히 대성할 자질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류 감독이 되지 못하고 변방을 떠도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가 실패한 원인은 '조언자'를 넘어 리더가 되기에는 부족했기 때문이다. 축구계의 명장들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팀을 이끌어가는 리더십이 대단히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선수들을 통제하고 그들이 자신의 지시에 순순히 따르게 만드는 능력이 없었다. 이 점은 레알 마드리드, 2010년 포르투갈 대표팀 등과 같은 사례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자존감이 강한 스타 선수들을 자신의 뜻에 맞게 행동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이 순순히 따르게 하려면 그들이 그런 마음이 들 수 있도록 확실한 무언가를 보여줘야 했다. 그러나 케이로스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뛰어난 코치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5 수상
5.1 클럽
포르투갈 리그컵 : 1994-95
포르투갈 슈퍼컵 : 1995.
5.2 국가대표팀
FIFA 국제 유소년 챔피언십 우승 : 1989년, 1991년
유로피언 16세 이하 챔피언십 우승 : 198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