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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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홍명보호
(2013 ~ 2014)
슈틸리케호
(2014 ~ )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홍명보
(2013 ~ 2014)
울리 슈틸리케
(2014 ~ )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울리히 슈틸리케 (Ulrich Stielike)
생년월일1954년 11월 15일
국적독일
출신지바덴-뷔르템베르크 주 케치
포지션미드필더, 스위퍼
신체176cm
유스팀SpVgg 케치 (1962~1972)
소속팀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2~1977)
레알 마드리드 CF (1977~1985)
뇌샤텔 그자막스 (1985~1988)
지도자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1989~1991)
뇌샤텔 그자막스 감독 (1992~1994)
SV 발드호프 만하임 감독 (1994~1995)
UD 알메리아 감독 (1996)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1998~2000)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유스 감독 (2000~2006)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06~2008)
FC 시옹 감독 (2008)
알 아라비 감독 (2008~2010)
알 사일리야 감독 (2010~2012)
알 아라비 감독 (2013~2014)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4~ )
국가대표42경기 3골

1 개요

독일의 前 축구선수이자 現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본명은 울리히 슈틸리케(Ulrich Stielike)이지만, 줄여서 울리 슈틸리케(Uli Stielike)로 쓴다.

2016년 현재,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생활

1975년에는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1985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에서 UEFA컵을 들어올려 지금도 두 팀에서 전설로 불리며[1] 차범근과 함께 대한민국 축구 역사에 존재했던 전/현직 축구인 중에서도 그 누구보다 뛰어난 선수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2]

선수 시절 초창기에는 분데스리가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당시에는 부동의 명문 바이에른 뮌헨조차도 분데스리가에서는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를 넘어서지 못했다. 당시에는 주로 수비형 미드필더로 출전한 울리 슈틸리케는 수비의 베르티 포그츠, 공격의 유프 하인케스와 같은 걸출한 동료들과 함께 팀의 척추를 구성하며 분데스리가에서 3번이나 우승컵을 거머쥐었다.

또한, 울리 슈틸리케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도 역시 주전 수비수였다. 프란츠 베켄바워의 수비수로서의 빈 자리를 파울 브라이트너와 함께 채워냈다. 유로 1980 우승,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FIFA와 국제 축구 역사 통계 연맹이 20세기 최고의 명문으로 선정한 레알 마드리드에서 무려 8시즌 동안 미드필더와 수비수를 오가면서 4연속 라 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상을 받았고,[3] 3번의 프리메라리가 우승, 코파 델 레이 우승 2회, UEFA 컵 우승 1회에 기여한 레전드급 선수였다.

당시에는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에서 독일 출신 선수가 흔하지 않던 시절인 데다, 특유의 파이팅 넘치고 중후한 플레이 스타일이 돋보였고 레알 팬들에게 독일산 "판처"로 불리면서 널리 사랑받았고, 과거 프리메라리가에서 매 경기마다 외국인 선수는 2명 이하로 출전제한이 있던 시절에 무려 8년간 주전 멤버로 활약을 할 정도로 탄탄한 입지를 자랑했다.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에 애정이 있어서, 조금이라도 부진한 모습을 보이면 쓴소리를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4] 또한, 울리 슈틸리케는 차범근과 함께 현재까지 세계적으로도 단 9명밖에 없는 서로 다른 팀에서 UEFA 컵 2회 이상 우승을 경험한 전/현역 축구선수 중 한 명이다.

2.1 클럽

2.1.1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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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의 리즈 시절 잭 블랙 닮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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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축구황제 프란츠 베켄바워를 마크하면서 볼 다툼을 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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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UEFA컵에서 첫번째 우승을 한 뒤 동료들과 같이 우승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은 모습. 이것이 슈틸리케의 첫 번째 UEFA컵 우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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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의 최전성기를 이끌던 시절

뒷줄: 한스 유르겐 비트캄프, 디트마르 다네르, 유프 하인케스, 볼프강 크나이브, 울리 슈틸리케, 라이너 본호프

앞줄: 알란 시몬센, 헤르베르트 하이덴라이히, 크리스티안 쿨릭, 한스 클링크하머, 베르티 포크츠

SpVgg 케치 유스팀에서 활동한 뒤, 분데스리가의 명문구단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이적하여 팀의 중심이 된다.

당시 유럽에서 바이에른 뮌헨유러피언 컵 3연패를 하며 전 유럽의 패자로 군림하던 시기였지만, 상대적으로 리그 성적은 그리 신통치 못했는데 저 3시즌 간 10위-3위-7위를 전전하며 끽해야 중위권에 안착하는 정도에 그치는 변변찮은 모습을 보여주곤 했다. 바로 이 시기에 분데스리가 내에서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던 것이 바로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로, 1969/70, 70/71 두 시즌 귄터 네처와 베르티 포그츠를 중심으로 분데스리가를 연패했던 묀헨글라드바흐는 이후 74-75, 75-76, 76-77시즌을 3연패하고 그 마지막인 76-77시즌엔 유로피언 컵 결승전까지 진출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 귄터 네처는 이미 레알 마드리드에 이적한 이후였고, 당시 주축이 된 선수들은 독일의 올타임 베스트 라이트백인 베르디 포그츠, 지금은 감독으로 더 유명하지만 현역시절에도 대단한 공격수였던 유프 하인케스, 팀의 에이스이자 당시 활약으로 1977년도 발롱도르를 수상했던 덴마크 출신의 알란 시몬센 등이었고, 후방에는 울리 슈틸리케가 든든하게 받치고 있었다.

특히, 울리 슈틸리케는 여러모로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로 불리울 만큼 상당한 유사성을 보여주었다. 유소년 시절에 축구를 처음 접하면서 배웠던 포지션은 골키퍼였다가 선수 커리어를 미드필더로 시작했고, 센터백을 오가면서도 엄청난 활약을 보여주었다. 보통 국가대표에서는 센터백으로, 클럽에선 수비형 미드필더로 자주 출장했고 박스 투 박스 미드필더나 레지스타 포지션으로 뛰는 경기에선 엄청난 드리블을 선보이면서, 상대의 진형을 교란시키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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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틸리케가 동료들과 마이스터샬레를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왼쪽부터 울리 슈틸리케, 우도 라텍(감독), 유프 하인케스, 베르티 포크츠 이 사진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감독으로서도 승승장구했다는 점에서 전설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데, 아직 슈틸리케만 감독으로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 사진을 마지막으로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아직까지 우승을 못하고 있다...

2.1.2 레알 마드리드 C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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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리가 최고의 외국인 선수[5] 역대 최다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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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 클라시코 경기에서 베른트 슈스터를 마크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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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두 번째 UEFA컵의 우승컵을 들어올리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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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료들도 다들 레전드급 선수들이다.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비센테 델 보스케, 가르시아 레몬, 산틸랴나, 후아니토...[6]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친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게 된다. 레알 마드리드 CF 이적 계기가 특이한데, 당시 레알 마드리드 CF의 회장이 귄터 네처에 이어서 슈틸리케의 동료인 헤르베르트 빔머와 사인하려고 독일로 비행기를 타고 갔는데, 실제 경기에서 슈틸리케의 플레이를 보고 바로 마음을 바꿔서 계약을 제시했고 곧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위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비센테 델 보스케, 가르시아 레몬,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7] 등, 레알 마드리드 CF의 1980년대 레전드들과 함께 핵심멤버로 활약했다.

또한 8시즌 동안 총 306경기에 출장하며 당시 레알 마드리드 역대 외국인 최다 출전기록을 세웠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호베르투 카를로스, 마르셀루, 페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등이 그의 기록을 추월했거나 추월할 가능성이 높지만 여전히 상위권에 드는 기록이다. 지금도 레알 마드리드 CF역대 레전드 명단에 당당히 기재되어 있다.

레알 마드리드 CF에서도 마찬가지로 보통 중앙 미드필더로 출장했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마지막 무렵엔 독일 국가대표에서 뛰었던 것처럼 리베로로 주로 활약한다. 1950-1960년대 저승사자 군단 시절과 1990-2000년대 갈락티코 시기가 챔피언스 리그 우승 경력이나 축구팬들에게 주는 이름값이 높아서 보통 레알 올 타임 베스트를 선정할 때 이 두 시대에 몰리게 되는데, 이런 네임 밸류 문제만 아니라면 레알 마드리드 올 타임 베스트, 나아가 라리가 올 타임 베스트에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할만한 선수이다. 중앙 미드필더로서 호세 마르티네즈 산체스 '피리', 페르난도 레돈도, 사비 알론소 등과 경쟁이 가능할 정도다.

마냥 언론의 수사가 아닌 게, 라 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인 돈 발롱을 1978-1979시즌부터 1981-1982 시즌까지 무려 4연패를 달성한다. 돈 발롱 역대 연패 최다 기록은 물론이고 최다 수상 기록도 갖고 있다. 슈틸리케를 제외하면 4연패도 없고, 4번씩이나 받은 외국인 선수도 없고 루이스 피구조차도 3번에 그쳤을 정도다.[8]

괜히 토니 크로스레알 마드리드 CF로 이적하면서 슈틸리케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선수가 이리 잘하고 팀까지 레알 마드리드니까 우승 트로피 정도는 당연히 따라오는 부산물로 1977-1978, 1978-1979, 1979-1980 3시즌 연속으로 라리가 우승 타이틀을 석권한다. 1차례의 UEFA컵 우승과 2번의 코파 델 레이 우승을 따냈고, 1980-1981 시즌엔 유로피언 컵 결승까지 진출하는데, 이때는 아쉽게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2.2 독일 국가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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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가대표팀 시절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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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 왼쪽의 선수가 울리 슈틸리케다. 참고로, 바로 옆의 선수가 독일 최고의 레프트백으로 유명했던 파울 브라이트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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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국가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감독으로 유명했던 헬무트 쇤과 함께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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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 1980 우승 멤버 베스트 일레븐. 맨 왼쪽 상단이 울리 슈틸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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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에서. 왼쪽부터 루디 푈러[9], 울리 슈틸리케, 노버트 마이어[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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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 멤버 베스트 일레븐. 왼쪽 상단 두 번째가 울리 슈틸리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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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역 시절의 간단 요약 평가

"슈틸리케는 아주 강한 선수였다. 육체적으로 굉장히 강하고 전술적으로 근면했다. ‘박스 투 박스(box to box)’ 유형의 선수로 상대편 진영 깊숙이 들어갔고 수비들을 도와 공을 빼앗고 항상 동료를 돕고 희생하는 선수였다." - 어느 스페인 기자의 평가.

독일의 축구 황제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

프란츠 베켄바워의 후계자는 맞지만, 여러모로 데뷔와 함께 쉽게 국가대표팀의 주전을 꿰찬 것은 아닌데,[11] 다름 아닌 베켄바워와 포지션이 겹쳤기 때문이다. 슈틸리케는 유로 1976과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1976년까지는 대표팀 주장인 베켄바워의 입지가 워낙 공고했기 때문에 유망주를 갓 벗어난 슈틸리케가 쉽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심지어, 베켄바워는 1976년에도 노익장을 과시하면서 2번째 발롱도르를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에서는 엔트리 명단에도 들어가지 못했는데, 이때 베켄바워는 국가대표팀을 은퇴하여 월드컵에 참여하지 않았다. 때문에 슈틸리케가 1978년 월드컵 엔트리에 탈락한 것이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있다. 즉 실력이라기보다 다름 아닌 그의 클럽 커리어 때문인데, 지금은 꽤나 많이 약해졌지만 당시에 유럽축구 강국들의 국가대표팀에서 자국리그 출신이 아닌 선수들에게 국가대표팀의 자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 울리 슈틸리케는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최전성기를 보냈고, 그가 펄펄 날아다녀도 헬무트 쇤 감독은 그를 외면했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다른 나라 리그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경우가 지금보다 훨씬 드문 것이 사실이었고, 1970년대 각국 월드컵 대표팀 스쿼드를 보면 보통 자국 리그 선수들로만 구성된 경우가 대부분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당시에는 지금과 같은 A매치 데이 같은 제도도 없었기 때문에 다른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을 대표팀으로 차출하는 것이 여러모로 쉽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1978년 아르헨티나 월드컵 폐막 후 쇤 감독이 은퇴하고 유프 데어발 감독 체제가 되면서 울리 슈틸리케의 본격적인 국가대표팀 생활이 시작된다. 슈틸리케는 데어발 감독과 거의 국가대표 커리어를 함께 했다. 데어발 감독이 부임하면서 대표팀의 주전이 되었으며, 데어발 감독이 물러남과 거의 동시에 국가대표 주전 생활에 마침표를 찍었다.

그런데 데어발 체제 초장기에도 대표팀 주전은 아니었는데, 데어발 체제 초기 2년간 친선전에는 거의 출장한 적이 없다. 이것이 리그 일정상의 이유인지 감독의 전술적인 판단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슈틸리케는 유로 1980,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유로 1984에 주전으로 거의 전경기에 출장했다. 1984년 유로 4강 진출 실패로 데어발 감독이 사임하면서 슈틸리케의 대표팀 생활도 종지부를 찍는다. 유로 대회 직후인 9월 친선전 경기 출장을 끝으로 프란츠 베켄바워 감독 체제에서는 대표팀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이듬해에는 레알 마드리드 생활도 종지부를 찍는다.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때 울리 슈틸리케는 프랑스와의 4강전에서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 월드컵 역사상 유일하게 승부차기에서 실축했다. 그 이후 34년 간 전차군단은 승부차기에서 실축하지 않았다. 그런데 유로 2016의 8강 이탈리아전의 승부차기에서 무려 3 실축했다. 그런데 이탈리아가 더 많이 실축해서 독일은 3명이 날려먹고도 결국 승부차기 승(...) 슈틸리케가 승부차기에서 실축했을 때 마지막에 승부를 결정짓는 골을 넣은 선수가 2016 리우 올림픽 축구에서 대한민국과 만나는 독일 올림픽 대표팀 감독인 호르스트 흐루베슈다.[12]

당시 시대적으로 리베로 시스템은 독일축구를 넘어서 세계축구의 트렌드 중에 하나였고, 슈틸리케는 아르헨티나의 다니엘 파사레야, 이탈리아의 가에타노 시레아, 네덜란드의 뤼트 크롤, 칠레의 엘리아스 피게로아,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앨런 한센 등과 함께 당대의 특급 리베로였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대표 42경기에 그쳤다는 것은 확실히 선수의 이름에 비해 부족한 감이 있다. 사실 슈틸리케가 독일 국가대표팀에서 42경기에 출전한 것이 적은 기록은 아니다. 1970년대 서독 국가대표팀의 간판 수비수 중 한명이었던 브라이트너도 통산 48경기 출장했다는 사실 등을 보아도 그렇다. 당시 서독에는 재능있는 선수들이 워낙 많았기 때문에 경쟁이 치열했고, 몇년간 대표팀에서 몇년간 맹활약을 했더라도 약간 슬럼프에 빠지면 바로 다른 선수로 대체되는 경우가 허다했다. 때문에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초까지는 대표팀 스퀘드 변동이 잦은 편이었다.

어쨌든 칼 하인츠 루메니게, 베른트 슈스터(유로 1980만 출전), 파울 브라이트너(유로 1980만 불참), 만프레드 칼츠, 한스 페터 브리겔, 칼 하인츠 푀르스터, 하랄트 슈마허라는 라인업의 중앙에 자리 잡은 울리 슈틸리케는 독일 전차군단의 주역이 되면서 서독의 유로 1980 우승과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 준우승을 이끌었다. 다만, 이 때 당시 히혼의 수치의 주역 중 한 사람이었다는 건 그다지 안 자랑...

이후 베켄바워의 뒤를 이어 주전자리를 건네받으면서 슈틸리케가 맡고 있던 리베로 자리는 디트마어 야콥스,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마티아스 잠머, 로타어 마테우스[13], 옌스 노보트니가 되었어야 하지만 현실은 부상... 등으로 면면히 이어지게 된다.

우베 젤러, 프란츠 베켄바워, 게르트 뮐러, 베르티 포크츠, 파울 브라이트너, 칼 하인츠 루메니게, 로타어 마테우스, 안드레아스 브레메, 제프 마이어 등으로 이어지는 독일 역대 올타임 레전드들의 네임밸류가 워낙 개인 커리어든 클럽 커리어든 워낙 끝판왕급이라서 이들에 비해 잘 언급이 안 되는 울리 슈틸리케를 비롯해서 슈넬링거, 오버라트, 회네스, 칼츠, 리트바르스키, 슈마허, 콜러 등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이지만, 사실 이 선수들도 사실 어마어마한 클래스를 지닌 선수들이었다. 이 선수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아래로 평가받는 귄터 네쳐, 베른트 슈스터, 브리겔, 피셔, 유프 하인케스,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위르겐 클린스만, 묄러, 해슬러, 마티아스 잠머, 슈테판 에펜베르크 등이 얼마나 실력이 대단했는지 생각을 해본다면 그냥 독일에서 태어난 것이 비운이었다고 봐야할 듯하다.

2.3 탈영병 논란

슈틸리케는 당시 유럽의 축구 국가대표팀들이 가지고 있는 일종의 쇄국정책으로 인한 안타까운 희생양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슈틸리케는 "나는 독일 축구에 있어서 탈영병과 같은 존재다."라고 인터뷰를 했던 적이 있다. 축구선수로서 커리어로는 절대로 밀리지 않는 레전드급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국내 축구계에서는 야인에 가까운 차범근과 유사한 케이스로 비교되기도 한다. 슈틸리케 본인은 현재 스페인 마드리드에 거주 중이며 공식석상에서도 독일어보다는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일이 많다.

스페인 리그에서 뛰었기 때문에 독일에서 탈영병 취급 받았다는 슈틸리케의 주장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또 그리 공정한 발언도 아니다. 사실 이런 논란은 슈틸리케 이전 1970년대 귄터 네처 때도 있었고, 슈스터 등도 이런 경우에 해당한다. 사실 70~80년대는 독일 분데스리가가 전성기에 있던 시기였다. 당시 분데스리가는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 최고의 리그였고 반면 스페인리그는 60년대말부터 기나긴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70~80년대 유럽클럽 대항전에서도 레알 마드리드FC 바르셀로나보다 바이에른 뮌헨이나 함부르크 SV 같은 분데스리가의 팀들이 훨씬 더 좋은 성적을 거두었던 시기였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독일에 뛰어난 선수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선수라 하더라도 대표팀에 승선하기 위해서는 헬게이트급으로 치열한 경쟁을 거쳐야 했다. 70년대부터 80년대초에 스페인 리그에서 뛰었던 네처, 슈틸리케, 슈스터 등은 모두 대표팀에서 충분한 기회를 받았으며 전차군단의 일원으로 충분히 활약했다.

사실 스페인 리그에서 뛴다는 이유로 독일 대표팀에서 배제되었다는 썰로 서독 대표팀은 1974년에 한바탕 홍역을 치룬 바 있었다. 1974년 월드컵 대표팀에서 귄터 네처가 주전에서 배제되었을 때였다. 네처는 1972년 발롱도르 2위를 수상한 스타로 1974년 당시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고 있었다. 1974년 월드컵 예선에 서독이 라이벌 동독에 밀리는 경기를 하자 홈팀 관중들이 네처를 연호하며 헬무트 쇤 감독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당시에 네처가 레알 마드리드에서 뛰는 것이 밉보여서 대표팀에서 탈락했다는 썰이 파다했다. 그러나 사실 당시 네처는 폼이 상당히 저하되어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대표팀에서 제외된 것이었다. 네처 스스로도 이를 인정했다.

1980년대 바로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던 베른트 슈스터도 역시 프리메라리가에서 뛰었기 때문에 국가대표팀에서 소외되었다고 이야기하는 이들도 있는데, 슈스터도 대표팀에서 적지 않은 기회를 부여받았고, 80년 유로 등에서 주전으로 활약했다. 슈스터의 경우는 기본적으로 스스로 대표팀에서 주전을 차지할 만한 기량이 되지 못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당시 서독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뛰어난 미드필드진과 비교했을 때 슈스터가 이를 뚫고 완전히 주전을 차지할 만한 기량을 보이지 못한 게 사실이다.

로타어 마테우스는 70년대말부터 묀헨글라트바흐에서 활약하면서 분데스리가를 대표하는 선수로 떠올랐고, 바이에른 뮌헨이 라이벌팀 선수라는 리스크를 무릅쓰고 마테우스를 영입했을 정도였지만, 대표팀에서는 슈스터와 슈틸리케 때문에 84년까지 오랜 시간 동안 후보 선수로 지낼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당시 서독대표팀이 실제로 쇄국정책을 고수했다면 탈영병이었던 슈스터나 슈틸리케 대신 분데스리가 스타였으며 기량도 이들보다 못할게 없었던 마테우스를 주전으로 썼을 것이다.

198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독일 대표팀에도 해외에서는 뛰는 선수들이 꽤 많아졌다. 80년대 중반부터 독일 국대 간판급으로 활약했던 로타어 마테우스, 위르겐 클린스만, 루디 푈러, 안드레아스 브레메는 세리에A에서 활약하는 동안에도 대표팀에 발탁되는데 전혀 지장을 받지 않았다.

슈틸리케가 세계적인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독일 축구계에서는 배신자로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은퇴 이후에 독일의 축구계에서 주류로 머무르지 못하고 계속 야인으로 지내게 되었다고 이야기 하지만 이것도 사실과는 차이가 있다. 슈틸리케는 1998년부터 2000년까지 독일국가대표팀 수석코치를 지냈다. 이 자리는 차기 독일국가대표팀 감독 단독 후보를 의미하는 자리다. 수석코치를 거치는 동안 감독이 될만한 자질이 없다고 판단되어 낙마하는 경우도 있지만, 수석코치를 거치면서 큰 결격 사유 없이 능력을 인정받는다면 차기 국가대표 감독으로 바로 승진하게 된다. 역대 독일국가대표팀 감독 대부분이 수석코치직에 있다가 감독으로 승진했다.[14]

슈틸리케는 암흑기 시기인 1998년 독일국가대표팀 수석코치직에 선임되었다. 사실 슈틸리케는 수석코치가 아닌 국가대표 감독으로 가장 유력하게 고려되었다. 물론 이것은 슈틸리케와 절친한 사이였던 베르티 포크츠 독일국가대표팀 감독이 슈틸리케를 밀어줬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15] 결국 감독직은 에리히 리베크에게 돌아갔지만, 슈틸리케는 수석코치로 선임되면서 리베크 후임으로 다시 한번 국가대표팀 감독자리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슈틸리케는 독일국가대표팀 수석코치까지 올랐지만 대표팀 감독이 되지 못한 케이스가 되었는데, 이것이 앞서 말했던 배신자로서의 차별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차별이 있었다면 차기 국대감독 단독 후보인 수석코치 자리에 오르지도 못했을 것이다. 오히려 수석코치까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대감독이 되지 못했다는 사실은 어떤 문제점이나 결격 사유가 있었기 때문으로 해석될 수 있다. 실제 슈틸리케는 수석코치에 부임하고 나서, 감독 자리를 놓고 경쟁했던 리베크 감독의 3백 전술에 격렬히 반대하면서 갈등을 빚었고, 훈련 도중에 선수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사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망신을 사다가 결국 전격 경질되고 말았다.

3 감독 생활

3.1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부임 이전

1988년 선수로서 은퇴한 뒤, 1989년 스위스 축구 국가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되었다. 감독 데뷔전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1-0으로 이기는 쾌거를 이뤄냈다.# 또한, 이 경기에서 스테판 샤퓌자를 국가대표에 처음 발탁하기도 했다.[16] 감독으로서 슈틸리케의 첫 공식 무대는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유럽 예선에 참가한 것으로, 벨기에, 체코, 포르투갈, 룩셈부르크와 같은 조가 되어 룩셈부르크에게 이긴 것을 빼고는 3연패를 당하면서 전임 감독이 경질이 된 도중에 부임하여 남은 경기에서 1승 1무 2패로 지역예선에서 탈락한다.

포르투갈과의 홈경기에서 역전패를 당한 것과, 벨기에와의 홈경기에서 2-1로 이기고 있다가 자책골로 무승부를 기록한 것은 아쉬움을 남겼다.(사실 그 두 경기를 이겼어도 탈락했을 가능성이 높긴 했다.) 이어서 유로 1992 예선에 참가, 스코틀랜드, 루마니아, 불가리아, 산마리노와 같은 조가 되어 4승 2무 2패로 1위 스코틀랜드와 승점 단 1점 차이로 조2위를 기록해 예선에서 탈락한다.[17] 스코틀랜드와 루마니아 두 팀에게서 한 번만 이겼어도 본선 진출 가능성이 높았고, 스코틀랜드와의 홈경기에선 먼저 2골을 넣고도 동점을 허용해서 더욱 아쉬운 부분이었다. 당시만 해도 스코틀랜드는 월드컵에 5회 연속 진출한 강팀의 이미지였고 루마니아는 '발칸의 마라도나'라고 불리는 게오르게 하지가 있었다.

1991년 사임한 뒤[18] 은퇴했던 뇌샤텔 그자막스의 감독이 된 뒤, 유럽 여러 팀을 거치고 나서 1998년 모국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코치로 부임했으나[19] 에리히 리베크 감독의 3백 전술에 반대하고 선수들과는 훈련 방식의 문제 등 마찰을 빚으면서 유로 2000 본선 직전에 물러났다.

2000년부터는 독일의 U-19, U-20, U-21 국가대표팀 감독을 6년 동안 역임했는데 2003년 U-20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당시 박성화 감독이 이끌던 한국을 만나 0-2로 패했다. 이 때문에 일부 축구팬들이 박성화에게 발린 슈틸리케라며 깠지만, 축구 오래 본 올드 축구팬들은 당시에 독일 청대들이 선배들과 다른 패싱게임를 하는 것을 보고 심상치 않게 여겼다. 그리고 당시 독일 유망주들 중 프로 1군에 소속된 선수들 상당수는 구단의 차출거부로 빠진 상태였다. 원래 유럽 구단들은 U-20 월드컵 등 청소년 축구대회에 해당 연령에 포함되는 자기 팀 1군 선수들의 청소년 대표팀 차출에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다. 비약적으로 말해 1군 유망주들 다 빠지고 2군 유망주들만 모았는데도 선배들과 다른 심상치 않은 패싱게임을 보여줬다는 얘기가 된다. 프로 1군 유망주들까지 다 모였어도 박성화 감독이 독일 청대를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거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2003년 세계대회에 출전했던 한국 선수들 중에 팬들의 기대만큼 성장해서 대표팀의 주축이 된 선수는 아무도 없으며, 어떤 사람아예 한국 축구를 통째로 말아먹을 뻔 했다.[20] 한편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에서는 독일 축구 국가대표팀의 전력분석관으로 일하면서 독일의 준우승에 기여했다.

그 후 앙리 미셸 감독 하에 2006년 역사상 첫 월드컵 본선에 진출했던 코트디부아르 축구 국가대표팀의 후임 감독으로 선임되었는데, 4경기에서 13득점 무실점이라는 어마어마한 성적으로 코트디부아르를 2008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본선에 올려놓았다. 그러나 아들의 심각한 병세 문제로 인해 본선 전에 사임[21]하고, 설상가상으로 아들도 결국 세상을 떠나면서 상명지통[22]의 아픔을 겪게 된다. 이후 스위스FC 시옹에서 잠시 감독직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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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알 사일리야 SC 감독 시절.

2010년부터는 카타르 스타즈 리그알 사일리야 SC, 알 아라비 SC에서 감독 생활을 했다. 그래도 이 시절의 성적은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고, 그 때문에 슈틸리케 감독 선임 때 본프레레보다도 못한 커리어라면서 까이기도 했다. 슈틸리케와 카타르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김기희의 증언에 따르면 슈틸리케는 자신과 같은 용병 선수들에게만 지시를 내리고 카타르 선수들은 마음대로 하라며 방치했다고 한다. 카타르 선수들이 프로로서의 자세가 결여되어 있는 게 원인이었다고 하고, 성적이 조금만 나빠도 감독 모가지 치는 게 중동 축구의 관례였기 때문에 슈틸리케 본인도 그다지 의욕이 생기지 않았던 듯 하다.

2014년 9월 5일,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되었다. 계약기간은 2018 FIFA 월드컵 러시아까지. 핌 베어벡의 사임 이후 7년 만에 다시 등장한 외국인 감독이다.

3.2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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핌 베어벡 이후, 7년만에 새롭게 등장한 외국인 감독.

  • 1990년대 후반 ~ 2000년대 초반까지 독일 축구대표팀의 체질개선 과정에 관여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특히 유소년 육성에 기대를 거는 분석기사도 나왔다.

슈틸리케 감독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슈틸리케호 문서와 하위 문서를 참조하자.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슈틸리케호
2014년2015년2016년2017년2018년
2015년 AFC 아시안컵2015년 EAFF 동아시안컵

4 이야깃거리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의 흑역사 히혼의 수치의 멤버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의 결승전에서는 하프타임에 칼 하인츠 루메니게와 언쟁을 벌이기도 했다. 슈틸리케가 먼저 루메니게에게 "그따위로 건성으로 뛸 거면 나가라"며 화를 냈고, 안그래도 부상을 견디고 뛰던 루메니게는 빡돌 수밖에 없었고 주변 동료들에게 "누가 저놈 좀 패서 닥치게 해줘라"(...)라고 말했다.
  • 선수 시절에 무릎을 크게 다쳐서 걸음걸이가 다소 불편하다고 한다. 하지만, 대표팀의 훈련이 이루어지는 모든 곳에서 훈련용 도구들을 직접 설치하는 것은 물론이고 A매치를 보면 알겠지만 경기가 시작되면 종료될 때까지 벤치에 앉지도 않고 선수들에게 직접 지시를 하고 격려를 한다.
  • 한국 팬들이 생각하기에 다른 건 몰라도 옷만큼은 못 입는다는 평이 많다. 아무래도 나이가 좀 있고 풍채가 있다 보니 그런 듯하다. 즉, 패션센스보단 옷걸이가 원인인 셈이다. 오히려 독일 쪽에선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한 이후 패션센스가 좋아졌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독일 국가대표팀 수석코치 시절에 입은 2XL사이즈 체크무늬 수트가 워낙 충공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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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의 체크무늬 수트. 하필 넥타이도 체크무늬로 매고 와서 더 충격이다.

  • 부임 초기만 하더라도 화려한 선수 커리어에 비해 빈약한 감독 커리어 때문에 슈틸리케를 반기지 않는 축구 팬들이 많았지만 부임한지 4개월만에 2015 호주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거두고 그간 경험할 수 없었던 연승의 맛을 맛보게 해주었기에 현재는 평가가 좋은 편. 전임 감독이 너무 막장이러서 그런가? 거기다 흙속의 진주를 찾는다고 끊임없이 K리그 클래식이나 챌린지, 심지어 U리그도 보러 돌아다니는 바람에 축구팬들이 오히려 감독의 건강을 걱정하고 있다. 게다가 유소년 관련 행사는 가능한 한 많이 참석하는 등 한국인보다 한국 축구를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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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관리가 안된다. 음, 이게 한국의 보리차라는 음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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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월 22일 2015 FA컵 8강전 서울 대 포항전을 앞두고 한 팬미팅에서 맥주를 마시는 모습이다. 맥주의 본고장 독일 출신이라는 점과 사진에서 뭔가 분노가 느껴지는 듯한 강렬한 눈빛(...) 때문에 본격 물고문 짤 취급을 당하고 있다.#[23] 공교롭게도 슈틸리케는 두 달 전인 5월 18일에 독일대사관저에서 열린 독일 전직 대통령 호르스트 쾰러의 방한 기념식에서 흡족한 표정으로 선진 맥주를 마시며 관계자들과 담소한 적이 있다. 페이스북 포스팅의 댓글 참조.
  • 한국 음식은 굉장히 자주 즐겨 먹는 듯하다. 감독 커리어 동안 해외생활을 워낙 많이 해 봐서 각국의 식문화에 적응하는 데 무리가 없다고 한다. 아시안컵이 열리기 직전, 설날에는 선수들과 함께 떡국을 같이 먹었고, 심지어 한국 음식 중 외국인들에게는 난이도 최상에 드는 청국장도 뚝딱 해치운다고. 그런데 청국장이나 찌개 등을 먹을 때 양식의 수프를 먹듯이 먼저 다 먹어버리고 나서 밥과 반찬을 먹는다고 한다(...). 가장 좋아하는 한국 음식은 숯불구이라는데 한우가 워낙 맛있어서 즐겨 먹게 된다고 인터뷰를 했다.
  • 엄청난 주당이라고 한다. 맥주소주, 와인, 위스키를 가리지 않고, 회식 때는 소맥을 말아 먹는 것은 기본이고, 폭탄주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술자리에 동승했던 스태프들이 숙취 때문에 다음날까지 골골 거려도 정작 본인은 멀쩡하다고.(...) # 멍게 : 언제 같이 한잔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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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담으로, 선수 시절은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렸지만 감독이 된 이후부터는 26년간 단 한 번도 대회 우승을 이끌지 못했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부임 이후에도 2015년 AFC 아시안컵에서 준우승을 하게 되어 아쉬움을 남겼다. 그러나, 2015년 EAFF 동아시안컵에서 우승컵을 차지하면서 지도자 생활에서 첫 우승컵을 들게 되었다. 사실 카타르 알 사일리야를 이끌 때 11-12시즌에서 2부리그 우승을 이끈 적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타이틀이 걸린 대회에서의 우승은 이번이 처음이다.
  • 2015년 8월 27일, "초중고 선수들에게 들려주는 축구 이야기"가 화제가 되었다. 여러모로 한국 축구 유소년 선수들에게 공개적으로 질문을 받고 그에 따른 조언을 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역시 슈틸리케 감독이 실제로 독일 유소년 대표팀 감독을 맡은 적이 있어서 그런지, 한국의 유소년 축구에도 아주 관심이 많은 듯 하다.링크
  • 독일인이지만 오랫동안 스페인에 살고 있는 데다가 아르헨티나 출신[24]의 수석코치를 배려해서인지, 공식 석상에서는 독일어가 아닌 스페인어로 말하고 있다. 추석 인사
  • 2016년 1월, 모처럼 쉬라고 휴가를 보내 놨더니, 그 시간에 쉬지는 않고 카타르에서 열린 이라크와의 AFC 23세 이하 국가대표 챔피언십 경기에 직관을 하러 갔다. 관련 기사 참조 신태용호가 요르단전 부진으로 분위기가 급강하 하자, 선수단을 찾아가 격려하고 훈련을 지켜보기도 했다. 이 효과 덕분인지 신태용호는 홈팀 카타르를 꺾고 올림픽 본선 진출을 확정했다.
  • 2016년 겨울 이적시장에서 이정협의 거취에 대해 정몽규 부산 아이파크 구단주에게 이적을 강요[25]하는 월권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자세한 것은 이정협 문서 참조. 부산 팬들은 물론이고, 그동안 국대 감독으로서 슈틸리케의 행보에 우호적이던 팬들도 이 행위는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의견이 많다.
  • 레알 마드리드 CF에서 인정받는 레전드라서 그런지, 현재는 구단에게 비판이나 조언을 많이 하는 모습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지네딘 지단의 부임 이후 따끔한 조언을 하기도 했다.# 레전드가 레전드에게
  • 요한 크루이프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는 매우 슬퍼했다. 참고로 울리 슈틸리케는 1977년에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고, 요한 크루이프는 슈틸리케가 레알로 이적한 그 시즌까지만 바르셀로나에서 뛰었기 때문에 슈틸리케가 언급한 그 경기는 1977-78시즌의 1977년 12월 4일에 캄프 누 원정에서 3-2로 레알 마드리드가 이겼던 경기였을 가능성이 100%다. 요한 크루이프에 네스켄스까지 있던 팀을 상대로 1골 1도움. 가히 레알 마드리드 레전드의 위엄 당시, 울리 슈틸리케는 엘 클라시코에서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3골을 넣었고 골을 넣은 그 경기에서는 레알 마드리드가 전부 이겼다고 한다.
  • 자녀 하나가 폐질환으로 사망해서 참척의 고통을 안고 있다고 한다.
  • 독일 올림픽대표팀 감독인 호르스트 흐루베슈(Horst Hrubesch)와는 국대 선수 시절부터 독일 유소년 축구 지도자로 꽤 함께해 왔다고 한다.
  • 'Using players in wrong positions and using out of form players. Nothing too complex. 선수들을 잘못된 포지션에 위치시키고, 폼이 좋지 않은 선수들을 기용한다.' 한국의 슈틸리케 감독 선임 당시 카타르 축구팬의 트윗. 이 내용은 결국 2016년에 완벽하게 반복되면서 한국 국가대표팀을 예선 탈락의 위기로 떨어트렸다.

5 발언

나는 돈만 받고 떠나는 외국인 감독이 되기 싫다. 한국에 결실을 남기고 떠나고 싶다.

ㅡ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사인을 하고 난 뒤[26]

"한국 대표팀이 내 마지막 감독직이 될 것이다. 2018년 러시아 월드컵이 내 감독 경력의 멋진 엔딩이 되기를 기대한다."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취임 인터뷰에서.

"공격을 잘 하는 팀은 경기에서 이기지만, 수비를 잘 하는 팀은 우승을 차지합니다."

2015년 AFC 아시안컵 결승전을 앞두고.

꿈은 자유롭게 꿀 수 있지만 꿈이 우리를 결승전까지 데려다주지는 않습니다.

2015년 AFC 아시안컵 4강전 대한민국 VS 이라크를 앞두고 발표한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우리 선수들 자랑스러워해도 됩니다.

2015년 AFC 아시안컵 에서 준우승을 거두고 기자회견에서 직접 한국어[27]로 이야기 하면서.

"내가 하는 축구가 단순히 TV를 통해 중계되는 것이 아니라, 국민들을 감동시키길 원합니다."

2015년 AFC 아시안컵이 끝나고 난 뒤 첫 휴가를 떠나기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에서 축구가 일상과 가정, 더 나아가 사회에서 끊임없는 화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국민들이 모여서 맥주를 마시거나, 커피 한 잔을 하면서 정치나 경제, 업무가 아닌 축구를 이야기하는 풍토가 마련돼야 합니다.

AFC 아시안컵이 끝나고 난 뒤 첫 휴가를 떠나기 전, 한국 축구의 병폐를 꼬집는 인터뷰에서.

"잠시 후, 중·일전이 끝나면 우리가 우승을 할지, 준우승을 할지 결정된다. 그러나, 내게 결과는 중요하지 않다. 여러분들이 이번 대회를 위해서 온 힘을 다해준 점이고, 정말 잘했다는 것이다. 자랑스럽고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다."

동아시안컵 남북전 이후 선수들에게.

"어떠한 경우에도 선수들을 A급, B급, C급으로 나누지 않는다, 대표팀에 오면 동일하게 중요한 선수로 대접한다. 덕분에 선수들도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였다"

ㅡ 자메이카전 3-0 승리 후 인터뷰. F급 감독 부관참시[28][29]

“축구인으로 40년을 살아왔다. 아마 2연패만 해도 평가는 180도 달라질 것”

ㅡ 국내 축구팬들이 올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성적을 보면서 ‘갓(God)틸리케’라는 별명을 붙여줬다는 반응에 대해서. [30]

"당신은 100점 입니다."

ㅡ 한 해 동안 국가대표팀을 거쳐간 선수들에게 보낸 격려편지 中.

"한국 지도자들은 왜 선수들의 단점만 보는가? 한국 국대 선수의 단점이라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래서 카타르 선수였던 세바스티안 소리아를 그렇게 띄워줬나?

ㅡ신태용 국가대표팀 코치가 슈틸리케 감독과의 대화를 공개한 일화에서.

"대한민국이 자살율이 높은 국가라고 합니다. 특히 어린 나이에 자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해요. 시험을 잘못 봐서, 또 다른 어떤 부담 때문에 안타까운 선택을 합니다. 그러니 우리 스포츠인들이 모범을 보여줍시다. 우리는 항상 져도 이를 딛고 일어나 다음 경기를 준비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회에 이런 모습을 보여줘서 다른 친구들이 딛고 일어날 수 있게 모범을 보여줬으면 합니다."[31]

ㅡ경희대학교에서 열린 <태극마크, 그 이름을 빛내다> 라는 강연 中에서

"우리에게는 카타르 세바스티안 소리아와 같은 공격수가 없어 이런 결과가 나왔다" 우리에게는 펩 과르디올라 같은 감독이 없어 이런 결과가 나왔다

ㅡ러시아 월드컵 최종예선 이란전 졸전 끝에 1-0 패배 후의 인터뷰[32]

"난 이운재를 잘 모른다"

ㅡ골키퍼 코치를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축구협회가 이운재를 선임하자 그를 코치진에서 제외시키며

"나는 나가라고 하면 운이 없었다고 생각하면 그만"

ㅡ이란전 참패 후 귀국 인터뷰에서

  1. UEFA컵 우승을 각각 다른 팀에서 두 번 이상 달성한 선수는 전 세계에서 9명에 불과하다. 참고로 그 9명 중 한 명이 차범근이다.
  2. 역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과 대한민국의 모든 현역 선수들 다 합쳐서 레알 마드리드에서 현역을 뛴 적이 있는 사람은 슈틸리케가 처음이다. 이전에 레알 마드리드 감독 경력을 있는 사람은 거스 히딩크가 유일하다. 하지만 거스 히딩크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의 흑역사 취급을 받는 감독이라... 여담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말아먹은 거스 히딩크는 자존심 회복을 위해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맡았다. 결과는 알다시피 자존심 회복을 넘어서 아시아 축구 역사상 유례없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중이다.
  3. 최다 연속 수상 기록이며 동시에 이 4번이 최다 수상 기록이다. 2000년대 중반에 폐지된다.
  4. 인터뷰를 보면 대표팀 감독으로서의 점잖은 모습과는 다른 열혈 OB의 모습을 볼 수 있다.
  5. 돈 발롱(Don Balon) 어워드 링크
  6. 후아니토와는 사이가 별로 안 좋았다고 한다.
  7.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당시의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 2010년대에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으나, 홈에서 태국에게 1:5로 대패하는 등 성적 부진 등의 이유로 해임되었다.
  8. 리오넬 메시가 있긴 하지만, 스페인 이중국적자이기도 하고 2000년대 중반 돈 발롱이 폐지되면서 중간에 끊겨서... 아마 폐지가 없었다면 최다 수상 기록이건 연패 수상 기록이건 메날두가 다 차지했을 듯하다.
  9. 차범근과 설전을 벌였던 그 사람이 맞다.
  10. 노버트 마이어는 차두리가 뒤셀도르프에서 뛰던 시절의 감독이기도 했다.
  11. 슈틸리케의 국가대표 데뷔전은 1975년 9월 3일 오스트리아전이었다.
  12. 히혼의 수치 당시 득점자이다.
  13. 잠머보다 나이가 많지만 리베로 자리에 본격적으로 기용된 건 잠머가 부상으로 누웠던 98-2000이었다.
  14. 슈틸리케 이전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 중에 수석코치에서 감독으로 승진하지 않은 예는 수석코치가 될 수 없었던 초대 감독 오토 네어츠와 프란츠 베켄바워 뿐이다. 물론 슈틸리케가 수석코치로 부임한 직후 리베크, 푈러, 클린스만이 연이어 수석코치를 거치지 않고 감독이 되었는데, 당시 암흑기에 있던 대표팀에 쇄신을 가하려는 시도의 일부로 풀이된다. 결국 클린스만 부임 후 암흑기가 끝나면서 후임으로 수석코치 뢰브가 감독직을 승계하면서 다시 과거의 관행으로 돌아가게 된다.
  15. 포그츠가 슈틸리케를 챙기는 마음도 있긴 했겠지만 한편으로는 독일 축구가 포그츠 자신이 추구하던 보수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개혁과 변화가 필요함을 느끼고 외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슈틸리케를 추천했을 가능성이 있다.
  16. 샤퓌자는 차범근의 분데스리가 외국인 최다 골 기록을 처음으로 깬 선수다. 묘한 인연이라고 할 수 있겠다.
  17. 당시 유로는 8개 팀만 나갔기에 조 2위를 기록했음에도 탈락한 것이다. 심지어 이탈리아마저 탈락했을 정도였다.
  18. 후임이 로이 호지슨으로 이때부터 스테판 샤퓌자, 쿠빌라이 튀르킬마즈 등의 선수들의 기량이 올라가며 성적이 올라 1994년 28년 만에 월드컵 본선진출에 성공한다.
  19. 사실 당초에는 감독으로 내정된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감독 경력이 문제가 되었는지 돌연 수석코치로 임명되었다.
  20. 사실 해당 대회 한국 대표팀의 경기력도 시밤쾅이긴 매한가지였다. 독일에 2:0으로 이겼지만 연이어 2패. 특히 마지막 미국전에서 내리 2골을 먹자 괜히 골 더 먹혀 탈락하느니 안전하게 0:2로만 지자는 주의로 미국과 사이좋게 패싱게임(...)하며 경기를 끝내 축구팬들의 지탄 속에 조 3위로 가까스로 16강에 합류한다. 그리고 16강 일본전에서 선제골 넣고 후반 막바지 동점골 얻어먹더니 연장전에 역전 골든골을 허용하여 말 그대로 폭풍까임을 당했다.
  21. 당시 슈틸리케의 후임 감독은 바히드 할릴호지치
  22. 喪明之痛. 눈이 멀 정도로 슬프다는 뜻으로, 아들이 죽은 슬픔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23. 그런데 오히려 이 날 슈맥데이 참가자들의 후기에 따르면 의외로 잘 마셨다고 한다. 심지어는 축협 관계자가 건배사진부터 찍고 나서 드시면 안되겠냐고 몇 번 말렸을 정도... 게르만족에게 맥주 한 잔 따위는 그냥 맹물일 뿐
  24. 아르헨티나는 스페인어 사용 국가이다.
  25. 엄연히 따져서 강요라고 할 수는 없다.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파업하겠다' 혹은 '감독 때려친다'는 식으로 협박했으면 강요라고 할만하지만, 슈틸리케는 어디까지나 1부 리그에 남고자 하는 선수 입장을 대변해서 간접적인 수준으로 귀찮게 졸라댄 수준이다. 하지만 정몽규는 대한축구협회 회장으로 대표팀 또한 챙겨야 하는 위치. 때문에 슈틸리케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슈틸리케의 발언을 단순한 권유로 볼 수 없는 이유도 바로 이것 때문. 정몽규가 축협 회장과 부산 구단주 자리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으로 볼 수도 있다. 게다가 이정협도 언론에다 부산을 떠나 다른 팀으로 이적을 하겠다는 의사를 적극적으로 했었다.
  26. #
  27. 기사에 따르면 미리 준비해온 멘트였다고 한다. 우승했을 시와 준우승 했을 때의 멘트를 따로 준비해온 듯. (1분 20초부터 보기), (1분 15초부터 보기).
  28. 이 발언이 갖는 의미는 홍명보 문서 참조. 비단 홍명보 뿐만 아니라 이전의 조광래, 최강희 감독도 비주전을 비하하는 발언을 하곤 했다.
  29. 그런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최종 예선 이란전 패배 이후 후술할 소리아 발언을 계기로 이 발언도 한낱 립서비스였음이 드러났다.
  30. 각종 포털과 유머사이트에선 슈틸리케가 한국인의 냄비근성을 꿰뚫어 본 것이라며 왜곡해서 받아들인 사람들이 꽤 있었다. 베스트 댓글을 보자. 하지만 어두의 '축구인으로 40년을 살아왔다'는 부분을 통해 축구팬들이란 이길 땐 칭송하고 질 때는 욕한다는 것을 잘 안 다는 뜻으로 한 말로, 한국인만 콕 집어서 한 말이 전혀 아님을 알 수 있다.
  31. 사실 통계적으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인데, 청소년의 사망원인 1위가 자살인건 맞지만 단순히 '청소년 자살율'로 다른나라와 비교해보면 한국은 낮은 편이다. 청소년보다는 중장년층 자살율이 높아서 전체적인 자살율도 높아진 경우.
  32. 다음 날 바로 정정 인터뷰를 했으나, 이 발언으로 그동안 실드를 쳐줬던 네티즌들에게 비난을 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