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타리파

Cathars, Cathari, Catharism
Albigenses, Albigensians

1 개요

그리스도교이단 가운데 하나. 어원은 '청정한 것'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타로스καθαρὀς = katharos'에서 유래하였다. 남부 프랑스의 알비를 중심으로 퍼졌다고 하여 '알비파'라는 별명도 있다. 다만 실제 중심지는 알비보다는 툴루즈였다고 한다. 그 외에 '바타리니 파', '랑그독 파' 등이라고도 불린다. 이들이 모두 동일한 그룹인지, 혹은 다른 그룹인지는 아직 불확실한 부분이 많다. 불가리 파(불가리아 파)라는 별명도 있었다.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에 걸쳐서 널리 퍼졌으나, 가톨릭에서 이단으로 단죄되고 집중 공격을 받아서 멸망하였다. 카타리파에 대한 공격은 십자군 전쟁과 같이 여겨졌으며, 이를 '알비주의 십자군'이라고 부른다.

2 역사

2.1 발생

처음 기록이 나타난 것은 1181년 쾰른이다. 이 무렵 독일에서 카타로스가 나타났다는 기록이 있다.

카타리 파의 사상은 동유럽에서 프랑스 남부에 소개된 것으로 추측된다. 불가리아와 동유럽에 퍼져 있던 보고밀파와 관련이 깊다는 추측이 있다.

남프랑스에서 1012년에서 1020년에 걸쳐서 카타리 파가 증가했다는 기록이 있다. 1022년에 카타리파 신도의 첫번재 처형이 이루어졌다. 카타리파는 공식적으로 이단으로 선언되었지만, 기세는 죽지 않고 점점 전파가 이루어졌다. 1100년대부터 성직자, 설교자들이 카타리파의 세력이 커진 지역으로 들어가서 가톨릭에 복귀시키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그러나, 카타리 파는 당시 프랑스 왕권에서 독립된 세력이었던 툴루즈 백작 등 남프랑스 지역 귀족 제후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쉽게 소멸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재개종 시도는 성공 사례가 적었다.

제3차 라테란 공의회(1179년)에서 카타리 파 금지가 정식으로 결정되었다. 교황은 처음에는 특사를 프랑스 남부에 파견하여 카타리 파 신도들을 가톨릭교회로 복귀하도록 호소하였다. 하지만 남 프랑스의 영주들은 프랑스 왕권이 미치지 않는 범위에 있었고, 교황청의 영향력이 미치는 것도 싫어한 지역 주교들도 교황 사절의 개입을 거부하였다.

카타리 파 문제는 점차 정치문제로 비화되기 시작했다.

2.2 알비 십자군

1209년, 카타리 파 및 카타리 파를 비호하는 영주들을 모두 공격하기 위하여 십자군이 편성되었다. 이것이 알비 십자군이다. 이 십자군의 결성된 배경에는 프랑스 왕 필리프 2세는 프랑스 남부를 완전히 프랑스 왕권 아래에 두고 싶어하였으며, 이러한 프랑스 왕의 의도와 카티라 파(알비파)의 확대에 고민하던 교황청의 의도가 일치하였기 때문이다.

알비 십자군은 비교적 순조롭게 성과를 거뒀다. 남 프랑스의 영지와 도시는 차례차례 점령되었고, 카타리 파는 각지에서 학살, 처형되었다. 일시적으로 툴루즈 백작 레몽 6세가 세력을 회복하기도 했으나, 레몽 6세는 아들 레몽 7세와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이후 점령군의 폭정 때문에 민심이 악화되자 다시 영국에서 돌아와 툴루즈를 회복하고 세력을 확대하기도 했지만 레몽 6세가 죽은 뒤 레몽 7세 시기에 완전히 패배하였다.

1228년, 툴루즈가 완전히 함락되고 레몽 7세는 프랑스 왕 루이 9세에게 항복하여 십자군 전쟁은 종결되었다. 툴루즈 백작령이 항복하면서 카타리 파를 비호하는 세속 영주들은 완전히 사라졌고, 1229년부터 카타리 파에 대하여 종교재판이 실시되었다. 붙잡힌 카타리 파 지도자들은 종교재판에서 처형을 선고받고 영주에게 인도되어 처형되었다.

마지막 남은 카티라 파의 거점은 산악 지역에 있는 Montségur의 산성 요새였다. 카타리 파는 이 곳을 근거지로 하여 마지막 저항을 계속했다. 1244년 3월 16일, 십자군은 바스크 산악지대 출신의 병사들을 고용하여 요새를 함락시켰고, 농성하고 있던 200명 이상의 카타리 파 신도들은 화형에 처해졌다.

1321년에 마지막 완덕자(Perfecti), 기욤 베리파스토가 잡혀서 처형되었다. 1330년 이후 이단심문소의 자료에서 카타리 파의 이름은 사라졌다.

3 조직

카타리파의 조직은 알기 어렵지만, 크게 완덕자(perfecti)와 일반 신도(credentes)로 나누어진다. 완덕자는 소수이며, 카타리 파의 교리를 완전히 실행하여, 엄격한 금욕 생활을 하고 노동을 하지 않으며 세속과 단절된 생활[1]을 보냈다. 이들이 지극히 금욕적이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로 보였기 때문에 당시 가톨릭의 부패에 염증이 난 민중들에게 설득력 있게 받아들여졌다. 완덕자는 지도자로서 신도들을 이끌었으며, 남성도, 여성도 될 수 있었다.

4 사상

현재 카타리 파의 사상은 알기 어렵다. 카타리 파는 소멸했고, 그들 자신이 남긴 자료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카티라 파의 사상은 주로 반박자들의 문서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전체적으로 세상을 악으로 보는 영지주의적인 색체가 강했으며, 카타리 파는 이를 보고밀파에서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카타리 파는 세상을 악한 존재가 창조했다고 생각하였는데, 고대 영지주의와 다른 점은 세상을 창조한 악한 존재를 곧 사탄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또한, 카타리 파는 환생을 믿었다.

영지주의에서 믿듯이, 물질 세계에 갇힌 영혼은 세상을 벗어나서 영적 세계인 천국에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더러운 세상과의 관계를 완전히 끊고 금욕 생활을 보내는 것이다. 이 완전한 금욕생활을 보내는 신도가 완덕자(Perfecti)이다.

예배 의식으로 엔두라(endura)가 있었으며, 죽음 직전에 안락식(Consolamentum)이라는 의식을 하였다. 그 이외의 가톨릭에서 하는 7성사는 일절 거부하였다.

카타리 파는 결혼을 인정하지 않고, 생식을 목적으로 하는 성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자손을 번식하는 것은 '육체의 노예'를 만들어내는 행위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가톨릭 측에서는 이들이 '생식에 연결되지 않는 성행위'는 장려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채식주의를 하였다. 고기는 생식활동의 결과이므로 먹지 않았고, 생식활동의 결과물인 다른 음식(달걀, 치즈, 버터) 역시 금지하였다. 단, 야채과일 이외에도 생선을 비롯한 해산물은 뭐든지 먹어도 좋았다. 이는 당시 사람들이 해산물은 생식활동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바다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카타리파에서는 '맹세'를 금지하였다. 이 때문에 봉건 질서를 파괴한다고 여겨져서 세속 봉건 영주들에게도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일체의 상업적 행위도 금지하였다.

5 미디어

현대에는 긍정적으로 묘사되는 미디어가 많은 편이다.

  • 다빈치 코드
  • 성혈과 성배
  •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는 가톨릭의 이단으로 등장한다. 별개의 교황을 가지는 프라티첼리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는 다른 가톨릭 이단들과 달리 카타리파는 교황이 없지만 관용 기술 레벨과 무관하게 남녀평등 상속제를 실시할 수 있고 여성도 사제, 자문위원, 군사지휘관이 될 수 있어서 능력치 좋은 여성들을 적극적으로 써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사실상 게임 내에서 가장 개성적인 이단이기에 이단 플레이를 하는 유저들이 가장 선호하는 이단이다. 그러나 EU4에 컨버트해서 등장시키는 경우 참된 신앙 관용도 +2, 안정도 비용 -10%라는 심심한 특성을 가지는 복붙 종교가 된다. 구버전 번역명은 원뜻을 직역한 순결파.
  1. 성직자와 평신도가 각각 '선택된 자'와 '듣는 자'로 구분되었던 마니교와 유사한 요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