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니 로프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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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네임케네스 "케니" 로프턴 (Kenneth "Kenny" Lofton)
생년월일1967년 5월 31일
국적미국
출생지인디애나 주 이스트 시카고[1]
포지션외야수
투타좌투좌타
프로입단1988년 드래프트 17라운드 휴스턴 애스트로스 입단
선수 경력휴스턴 애스트로스(1991)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92~1996)
애틀란타 브레이브스(199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98~2001)
시카고 화이트삭스(2002)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2002)
피츠버그 파이러츠(2003)
시카고 컵스(2003)
뉴욕 양키스(2004)
필라델피아 필리스(2005)
로스앤젤레스 다저스(2006)
텍사스 레인저스(2007)
클리블랜드 인디언스(2007)

1 개요

리키 핸더슨의 뒤를 이어 90년대 메이저리그를 풍미한 대도. 통산 도루 622개로 메이저리그 역대 도루 최다 5위에 랭크되어 있으며, 올스타에도 6회, 골든글러브 수상자로 4회 선정될 만큼의 스타였다. 다만 한 가지 아쉽다면 상단의 무지막지하게 긴 선수 경력 항목에서도 보이듯이 엄청난 저니맨이었다는 것. 그래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가장 오래 뛰었던만큼 대다수 야구팬들은 인디언스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받아 들인다.[2][3]

2 커리어

2.1 아마추어 시절

케니 로프턴의 어린 시절은 매우 불우했다. 고등학생 미혼모의 아들[4]로 태어났으며, 어머니조차도 로프턴을 나몰라라 해서 미망인이었던 할머니와 함께 유년시절을 보내야만 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와 농구를 병행하였는데, 대다수 흑인들처럼 로프턴 역시 농구에 더욱 열광하였고 실제로 애리조나 대학교에도 농구 장학금을 받고 진학한다. 대학교에 진학해서도 야구보다는 농구에 더 관심을 기울였고, 심지어 1988년 NCAA에서는 팀을 전국 4강(!)으로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한다.

2.2 프로 시절

그렇지만 대학교 시절 보여준 퍼포먼스와는 별개로 로프턴은 NBA 스카우터들에게 별로 선호받지 않았고[5] 오히려 포인트가드로 로프턴이 보여준 순발력과 스피드에 주목한 휴스턴 애스트로스가 그를 드래프트에서 지명하면서 로프턴의 야구 경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하지만 대학교 내내 하라는 야구는 손을 놓고[6] 농구만 했으니, 당연히 실력이 늘어났을 리가 없고 첫 마이너리그 시즌에 타율 .214라는 처참한 성적을 기록한다.[7] 하지만 이후 차차 야구에 적응해 나가면서 성적이 급등해나갔고, 마침내 1991년 9월 확장로스터를 통하여 로프턴은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게 된다. 하지만 스티브 핀리크레이그 비지오라는 테이블 세터진을 보유한 애스트로스에게 로프턴은 말 그대로 잉여 자원일 뿐이었고 1991 시즌의 종료와 동시에 로프턴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 트레이드 된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된 1992 시즌, 애스트로스를 비웃기라도 하듯이 로프턴은 제대로 잠재력을 폭발시킨다. 타율 0.282에 5홈런 48타점 66도루를 기록했던 것. 로프턴의 타고난 주루 능력에 힘껏 고무된 클리블랜드 프런트는 1992 시즌 종료 후 4년간 총액 630만 달러라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거액의 계약을 그에게 선사한다. 1993 시즌에도 타율 0.329, 70도루를 기록하면서 자신의 능력이 플루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 데 이어, 1994 시즌에는 0.349의 타율로 아메리칸 리그 타격왕을 차지한다. 1995 시즌 역시 3할대의 타율과 54도루를 기록하면서 팀을 WS로 이끌지만 전성기의 그렉 매덕스톰 글래빈이 이끄는 애틀란타 브레이브스에게 패하면서 준우승에 머무르게 된다. 그리고 커리어 내내 콩재배를 시작한다.

1992년부터 1996년까지 케니 로프턴은 연평균 타율 .316, 8홈런, 52타점 65도루라는 가히 크고 아름다운 스탯을 찍으면서 리그를 대표하는 테이블세터로 자리매김하였으며, 클리블랜드 팬들에게 로프턴은 짐 토미 만큼은 아니지만 팀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1996 시즌 종료 후 클리블랜드는 마퀴스 그리솜데이비드 저스티스를 받는 조건으로 로프턴을 애틀란타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 한다. '트레이드는 야구에서 늘 일어나는 것'이라며 애써 덤덤한 반응을 보였던 로프턴이었지만 나름 충격적인 트레이드였는지 1997 시즌 커리어 최악의 주루 플레이(47번 도루 시도 가운데 27번 성공)를 선보인다.[8] 그리고 클리블랜드도 이 해 월드시리즈에서 역대급 대 역전패를 당하면서 다시 콩재배

1997 시즌 종료 이후 로프턴은 FA 자격을 획득했고, 무수한 팀들의 구애 가운데 사랑하는 친정팀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로의 복귀를 선언한다. 3년간 총액 2400만불의 계약. 하지만 30줄에 접어든 로프턴의 성적은 해가 갈수록 하향세를 그렸고 2001시즌에는 타율 .261, 16도루를 기록하면서 메이저리그 풀타임 출전 이후 최악의 성적을 기록하게 된다. 2001 시즌 종료 후 클리블랜드를 떠나면서 로프턴의 본격적인 저니먼 행보가 시작된다. 미국 어디까지 가봤니? 2002 시즌 시카고 화이트삭스와 계약을 맺고 백업 외야수로 활동하던 중,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트레이드됐고 샌프와 함께 드디어 생애 첫 월드시리즈 반지를 차지해보나 했는데... 아시발꿈 또 한번 콩라인에 그치고 만다.. 시즌 종료후 피츠버그 파이러츠와 계약을 맺었지만 전년도 샌프란시스코에서 한솥밥을 먹었던 빵감독의 구애로 다시 시카고 컵스로 트레이드. 그리고 이번에도 대역전극의 희생양이 된다 2002년 월드 시리즈, 2003년 NLCS 대역전극의 제물이 됐던 것이 몹시도 억울했던 건지 2004년에는 악의 제국으로의 이적을 감행하는데... 마치 운명의 장난에라도 걸린 듯이 다시 한번 대역전극의 희생양으로 전락하고 만다(...) 응 안돼 우승반지 줄 생각 없어 어서 돌아가

2005년과 2006년에는 회춘해서 필라델피아 필리스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각각 2년 연속 3할 타율을 기록했으며[9] 2007년에도 텍사스 레인저스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은 듯한 활약을 선보여주던 중, 친정팀 클리블랜드로 다시 한 번 트레이드 된다. 불혹에 이른 2007 시즌, 로프턴은 타율 0.296, 7홈런, 38타점, 23도루로 녹슬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지만 시즌 종료 후 다시 FA가 된 그를 필요로 하는 메이저리그 구단은 존재하지 않았고 결국 로프턴은 이 해를 끝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커리어 통산 기록은 타-출-장 .299 - .377 - .423에 2428안타 130홈런 622도루, 781타점.

2.3 은퇴 이후

최근에는 골프 삼매경에 빠진듯(...)하며, 2010년에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구단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2013년부터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 후보 명단에도 이름을 올렸는데, 커리어에서 딱히 임팩트있던 시즌도 90년대 중반 인디언스에서 보낸 5~6 시즌이 전부였던데다가, 저니맨이라는 이미지, 살짝살짝 모자른 누적 기록 때문에 '명전 입성은 힘들 것'이라는 예상을 누구나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몇년쯤은 버틸 줄 알았는데 첫 해 딱 18표로 3.2%의 득표를 받고 그대로 신속하게 후보 자격을 상실[10]했다(...) 2011 시즌에는 인디언스의 주루 코치로 잠깐 활동하기도 했으며 잠깐잠깐(주로 플레이오프 기간에) FOX 사에서 해설을 맡기도 한다.

3 여담

  • 13번 팀을 옮겼는데 그 중 11번의 경우 플레이오프를 경험한다. 심지어 경험하지 못한 2번도 시즌 중간에 트레이드되어서 경험하지 못한 것. 어찌보자면 진정한 의미의 가을야구 청부사. 근데 우승 청부는 못함
  • 세이버 매트리션의 대부 빌 제임스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역대 최고로 번트를 잘 대는 타자라고 한다.
  • 상술한 저니맨 이미지 때문에 한 때는 택배회사 DHL의 광고 모델로 활동하기도 했다.
  •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현역 시절 에드가 마르티네즈와 더불어 가장 상대하기 까다로웠던 타자로 꼽은 적도 있다.
  • 본인의 주장에 따르면 결벽증 환자라고 한다.
  • 2016년 월드 시리즈 1차전에서 시구를 맡았다. 클리블랜드 인디언스가 월드 시리즈에 진출해 홈 어드벤티지를 얻었기 때문이다.
  1. 시카고랑은 엄연히 다른 도시이다. 위키피디아 항목 상단에도 시카고랑 헷갈리지 말라고 당부해놓고 있다(...)
  2. 그리고 은퇴 이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다.
  3. 애초에 인디언스 커리어를 빼면 다른 팀에서는 1년 이상을 뛴 적도 없을 뿐더러, 이적 이후 다시 돌아온 적도 없다. 저니맨도 보통 철두철미한 저니맨이 아니다(...)
  4. 아버지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조차 하기를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서 가족으로 인정조차 안하는 인터뷰를 남긴적도 있다.
  5.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180에 불과한 작은 키가 결정적이지 않았을까라고 생각된다. 정확한 이유를 아는 사람이 수정바람.
  6. 대학교 커리어 내내 들어선 타석 수가 5타석이라고 한다(...)
  7. 그래도 스피드는 어디 안가서 도루는 꼴랑 48경기 뛰고는 무려 26개를 기록했다.
  8. 다만 나머지 타격, 수비 능력은 클리블랜드에서 보여준 그 모습 그대로였다.
  9. 이 때도 우승반지 획득에는 당연히 실패했다. 2005 필리스는 2게임 차이로 와일드카드 획득에 실패했으며 2006 다저스는 NLDS에서 메츠에게 3-0 떡실신을 당한다.
  10. 후보 자격을 유지하려면 5%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