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노스 11세

(콘스탄티누스 11세에서 넘어옴)
로마 제국의 역대 황제
요안니스 8세콘스탄티노스 11세로마 제국 멸망
팔레올로고스 왕조팔레올로고스 왕조오스만 제국

그리스어[1] : 콘스탄티노스 11세 드라가시스 팔레올로고스(Ο Κωνσταντίνος ΙΑ’ ο Δραγάσης ο Παλαιολόγος)
라틴어 : 콘스탄티누스 11세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구스(Constantinus XI Dragases Palaeologus)
(1405년 2월 8일 ~ 1453년 5월 29일)

constantinexi.jpg

1 개요

인간이 목숨을 걸 만한 명분에는 네 가지가 있다. 가족, 신앙, 조국, 주권이 그것이다.

이것들을 위해서라면 누구나 죽을 각오를 해야 한다. 물론 황제인 나 자신도 신앙, 황도, 백성을 위해 기꺼이 한 목숨 바칠 것이다.
그대들은 위대하고 고결한 백성들이며, 고대 그리스와 로마 영웅들의 후손이다.
나는 그대들이 수도를 방어하기 위해 조상들에 못지않은 용기를 보여 줄 것이며,
예언자예수 그리스도의 자리에 앉히려는 이교도 술탄의 음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하리라 믿는다.
- 콘스탄티노플 함락 전날 밤인 5월 28일, 콘스탄티누스 11세가 그리스인 지휘관에게 고했던 연설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

2200년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시대를 잘못 만나 망했어요 테크를 탄 비운의 황제.

2 생애

2.1 즉위 이전의 삶

팔레올로고스 가문 출신. 별칭은 '드라가시스 (Δραγάσης)'로 어머니가 세르비아의 드라가슈(Dragaš) 가문 출신이라 붙은 별칭이다. 팔레올로고스라는 성보다도 어머니의 성을 더 좋아했다고 한다.

마누일 2세의 8번째 자식으로 태어나 1443년에 모레아 공국의 군주가 되었다. 모레아 공작 시절에 그리스 남부의 경쟁세력을 모두 격파하고 1443년 전 지역을 세력권에 넣었다. 그러나 이를 경계한 무라트 2세의 대군에 의해 영토를 모조리 토해내야 했으며, 헥사밀리온이 함락되고 모레아까지 황폐화되었다. 1448년에는 맏형인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8세가 후사 없이 사망했고, 동생인 데메트리오스와 제위 계승 분쟁이 있었으나 무라트의 지지를 받아 제위에 올랐다. 거기에 대관식조차 콘스탄티노플이 아니라 모레아 공국령 미스트라에서 치렀는데, 이전까지 콘스탄티노플이 아닌 지방 도시에서 즉위식을 올린 황제는 몇 명 있었으나[2] 콘스탄티노스가 예외적이었던 것은 그들은 모두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한번 즉위식을 거행했던 반면 콘스탄티노스는 그런 게 없었다는 것.[3]

2.2 즉위

그가 제위에 올랐을 때, 이미 동로마 제국은 완전히 몰락하여 펠로폰네소스 반도 일부(모레아 공국)[4]를 제외하면 그 영토가 수도 콘스탄티노플과 그 주변에만 겨우 남아있는 도시국가로 전락한 상태였다. 게다가 그 주변의 영토는 죄다 이슬람교 국가인 오스만 제국에게 완전히 장악당했기 때문에 제국이 부흥할 가망이라곤 전혀 없었다. 즉 시대를 완전히 잘못 타고난 것이었다.

콘스탄티노스 11세는 동로마의 황제 자리가 매우 위험하고 이름 밖에 안 남은 것을 인지하고 있었으나, 즉위한 이후로는 최선을 다해 통치하였다. 훌륭한 인품과 교양을 지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은 인물이었으며, 존망의 기로에 선 제국을 구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외교를 펼쳤다. 동방 정교회를 로마 가톨릭과 일치시키면서까지[5] 서유럽에 지원 요청을 했고[6] 당시 교황이었던 니콜라오 5세는 그 제의를 받아들였으나 교황령에서 보낸 지원군은 고작 궁수 200명 뿐이었다.

사실 이 당시 교황령의 군사력도 동로마 제국만큼 약하다 보니 제대로 된 지원을 해 줄 여력이 없었으며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카스티야 연합 왕국아라곤 연합 왕국은 각각 백년전쟁재정복 운동의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또한 신성 로마 제국은 제후들 간의 다툼이 잦은 상태였고, 폴란드 왕국과 헝가리 왕국은 1444년에 바르나 전투에서 패배했기 때문에 교황령 외에 동로마 제국의 지원 요청을 받고 구원군을 보낸 곳은 제노바 공화국베네치아 공화국 뿐이었다. 결국 오스만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동로마 제국이 동원한 병력은 동로마인, 서방 구원군, 용병을 모두 합쳐 약 8,000명으로 오스만에 비해 매우 열세였다.

2.3 콘스탄티노플 함락

constantinople.jpg

오스만의 새 술탄 메흐메트 2세가 즉위하자 그에게 자신이 그의 경쟁자 오르한을 데리고 있다고 자극하면서 이를 활용해보려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자충수가 되었다. 메흐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초반의 자세를 번복하고 최후의 공세를 준비한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에게는 로마 제국 황제 칭호와 콘스탄티노플 외의 모든 지역을 포기하고 오스만의 제후로 들어갈 테니 국체만은 보존시켜 달라고 부탁했지만[7] 메흐메트 2세는 그의 제국을 위한 새로운 수도로 콘스탄티노플을 점찍어두었기에 이러한 요청 역시 묵살되었다.[8]

결국 10배가 넘는 대군을 동원한 오스만 투르크의 공격에 온힘을 다해 두달 간이나 처절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었다.[9] 자세한 내용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 참조.

그리고 이로써 2200년을 이어온 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2.4 죽음

byzantines7+-+%CE%91%CE%BD%CF%84%CE%AF%CE%B3%CF%81%CE%B1%CF%86%CE%BF.jpg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자,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생각이 없었던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성은 함락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살아있구나!"

라는 유언을 남기고, 끝까지 자신을 따르던 근위대와 함께 무너지는 성벽을 수의 삼아 밀려오는 튀르크군에게 돌격하여 싸우다가 전사했다고 전해진다. 전해지는 말로는 마지막으로 적군에게 돌격하면서 자신의 몸에 달고 있던 황제로서의 상징물을 죄다 떼어냈기 때문에, 황제의 시체를 찾을 때 표식이 될 수 있는 물건이 양말 뿐이었다고 한다. '내 시체를 받아줄 그리스도인은 없는 것이냐!'라는 유언을 남겼다고도 한다.

한편 콘스탄티노스가 전사했다는 이야기가 가장 널리 알려져 있지만, 오스만 제국 측 사료나 후대에 서유럽 역사가들이 쓴 사료를 보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는 순간 목을 맸다거나 겁을 먹고 도망치려다가 끔살당했다거나 하는 등의 내용도 보인다. 이에 영국의 도널드 니콜(Donald Nicol, 1923~2003)은 대체 어느 것이 진상인지 알아내려 했으나 도저히 분간해낼 수 없었고, 다만 동로마 역사가들은 그가 영웅적인 최후를 맞이했다고 묘사하는 반면 오스만 투르크측과 서유럽의 사료에는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는[10] 것만 확인했다고 한다.

콘스탄티노스의 생전 기록들을 보면 도시의 함락에 겁을 먹고 도망치려 했다는 서유럽측의 사료는 큰 신빙성은 없다. 모레아 공국의 군주였던 때에도 끝까지 튀르크군과 싸웠고, 황제가 되어서도 수도로 육박하는 메흐메트의 튀르크 대군을 상대로, 항복이 아닌 저항을 택할 정도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로마 제국은 창시자와 이름이 같은 황제의 치하에서 멸망한다"는 예언이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이 소문은 들어맞고 말았다. 흥미롭게도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도 로마를 세운 로물루스와 첫 번째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11]

그리고 콘스탄티노스의 동생인 디미트리오스와 토마스가 통치하던 모레아 공국 역시 1460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였으며, 마지막으로 남았던 동로마계 국가인 트레비존드 제국[12]도 이듬해인 1461년에 멸망당했다.

3 사후

콘스탄티노스의 유해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13] 이후 튀르크의 지배를 받게 된 그리스에서는 콘스탄티노스 11세는 죽지 않고 대리석상으로 변해 잠들어 있으며, 튀르크의 지배가 무너지고 그리스가 해방될 날 다시 부활하여 앞장서게 될 것이라는 전설이 생겨났다.

그리고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패전한 오스만 제국에게 그리스가 이스탄불의 영유권을 요구하면서 마치 이 전설이 실현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20세기 최강 먼치킨이 등장하셔서 세브르 조약이고 술탄이고 연합국이고 그리스고 모조리 뒤집어 엎어버리는 바람에 "대그리스주의? 망했어요"가 되어 버렸다.

4 평가

4.1 기독교에서의 평가

그리스 정교회와 동방 가톨릭 교회 가운데 일부에서 순교성인으로 공경하고 있으며,[14] 아테네의 미트로폴레오스 대성당 앞 광장에서 칼을 치켜들고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만나볼 수 있다.

rkconstantinestatue.jpg

4.2 터키에서의 평가

Fetih-1453-fetih-1453-29911900-720-480.jpg

터키에서 그를 대한 시각은 콘스탄티노플 정복전을 영화화한 2012년작 터키 영화 '페티 1453(Fetih 1453)'을 보면 알수 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인 메흐메트 2세는 300레오니다스처럼 묘사한 것은 그렇다 쳐도 콘스탄티노스 11세를 하렘에서 여색과 환락에 빠져든 탐욕스런 폭군으로 왜곡하여 묘사하고 있다. 황제가 된 후 결혼도 못하고 즉위식조차 못 올렸을 정도[15]로 국가를 위해 노심초사한 황제인데 말이다. 하지만 그덕에 오스만 군을 상대로 고자세로 일관할 수 있는 여유를 갖추게 되기도 했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메흐메트 2세가 성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한 동로마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모습은 최악의 역사왜곡으로 비난받았다.[16] 우습게도 300도 미국에서 흥행 성공하듯이 이 영화도 터키에서 2012년 흥행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이 영화가 콘스탄티노플 함락을 터키 시점으로 했기 때문에 터키에서 좋아할 만하다. 그리스 시점으로도 하나 만들어라

5 기타

조아라와 타입문넷에 연재되는 소설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주인공이 이 인물로 환생한다.

  1. 고전 그리스어로는 콘스탄티노스 드라가세스 팔라이올로고스가 되지만, 이건 당시 기준으로도 거의 1000년전 발음(...)
  2. 라틴 제국을 멸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복한 미카일 8세는 니카이아에서 즉위했고, 1341년부터 1347년까지의 내전 중에 즉위한 요안니스 6세는 아드리아노플에서 즉위했다.
  3. 이는 동서 교회의 통합 문제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스는 로마 교황의 군사적 지원을 얻고자 동서 교회의 통합을 꾀했고 당시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도 그에 동조적이었으나, 그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성직자들도 많았던 것. 즉 한참 뒤에 반발이 줄어들거나 교회 일치는 없던 일로 한다는 어명이라도 떨어졌더라면 하기아 소피아 성당에서의 대관식도 가능했을 테지만, 콘스탄티노스 11세에게는 그럴 시간이 주어지지 않았다.
  4. 동로마 제국 산하의 지방 정권으로 콘스탄티노스가 황제로 즉위한 후 황제의 동생인 데메트리오스와 안드레아스가 공국 영토를 반씩 분할해 다스렸다.
  5. 이 결정에 대해 정교회 신자+동서 교회 통합 반대파 동로마인들은 불만을 가졌는데, 동로마의 재상이었던 루카스 노타라스는 "콘스탄티노플이 추기경의 터번이 되는 것을 보느니 술탄의 터번을 보겠다"는 말을 남겼다. 노타라스는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동안 황제를 보좌했다가 동로마 패망 직후에 메흐메트 2세에 의해 처형되었다.
  6. 다만 이건 미카일 8세 때부터 지속적으로 나왔다가 결렬되고 다시 이야기가 나오기를 반복해 온 것이므로, 콘스탄티노스 11세를 '오오 종교를 뛰어넘은 결단 오오' 하고 평가해서는 곤란하다. 한편 재미있는 사실은, 동로마 제국은 물론 니케아 제국의 공격을 받던 라틴 제국도 교황한테 형님 도와주세요 하고 달려갔었다는 것.
  7. 막대한 공물을 바쳤는데도 오히려 거절당하며 사신이 추방되었다. 참고로 제후로 들어가겠다는 제안은 이때가 최초가 아니라, 요안니스 5세 치세인 1371년에 처음으로 나왔던 것.
  8. 또한 콘스탄티노플은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교역도시라 오스만 제국으로선 포기할 수 없는 도시였다. 게다가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켜 화근의 씨를 완벽하게 없애겠다는 목적도 있었다.
  9. 애초부터 게임이 안되는 싸움이었다. 동로마군은 용병을 포함하여 닥치는대로 긁어모은 병력이 고작 8천 명인데 비해 오스만군은 무려 10만 명이나 동원한 것이다. 게다가 다른 유럽 국가들은 지원 요청을 받았지만 지원군을 보내기가 어려웠거나 일부는 아예 무시하기도... 다만 숫자만 보면 싸워보지 않아도 승부가 뻔한 것 같지만, 일부 학자들은 그렇게까지 절망적인 싸움은 아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외부에서 지원군이 올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는 했지만, 공방전 초기 콘스탄티노플 수비군의 사기는 결코 낮지 않았다.
  10. 이는 종교 문제 등으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의 관계가 오랫동안 좋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동로마를 까는 김에 황제까지 까자!' 라는 심보였다는 것.
  11. 서로마 제국 최후의 황제는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작은 아우구스투스)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또 동로마 제국을 멸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삼은 인물은 메메드 2세인데, 오스만의 마지막 황제는 메메드 6세.
  12. 팔레올로고스 가문보다 앞서 동로마 제국을 다스렸던 콤니노스 가문이 황가였다.
  13. 튀르크인들은 황제로 추정되는 인물의 시체를 찾아 그 목을 베어 매달았지만, 그 시체가 확실히 황제가 맞는지에 대한 그리스인이나 유럽인들의 기록이 없다.
  14. 성인으로 공식적으로 시성된 것은 아니다. 이들 교회에서 성인으로 여기는 경우는 대개 충분히 살 수 있었는데도 종교적인 신념을 이유로 죽음의 길을 택한 것이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전사한 경우가 아니기 때문.
  15. 평생 결혼도 못해본 것으로 오해하기 쉽지만, 1448년에 제위에 오르기 이전, 즉 모레아 공작이었던 시절에 두 번 결혼했다. 하지만 두번째 아내도 1442년에 죽었고, 제위에 오른 뒤에는 세번째 결혼식을 올리지 못했다.
  16. 실제로는 성 소피아 성당으로 대피한 동로마 백성들이 오스만군에게 학살은 많이 당하지 않았다 해도 여성들은 약탈당하며 강간까지 당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때 사기 충전을 위하여 저길 함락시키면 병사들에게 사흘동안 마음껏 약탈을 하던지 뭘 하던지 보상으로 허락했기에 이게 왜곡일 수 밖에 없다. 그나마 이 성당이 마음에 든 메흐메트 2세는 성당을 불태우려거나 우상이라며 닥치는 대로 성화를 칼질하고 훼손하는 병사들을 꾸짖으며 막긴 했다. 대신 회반죽으로 덮어버리고 이슬람 문양을 그렸다. 그래도 다행인게(?) 덕분에 회칠만 제거하면 오래된 성화가 복원이 가능했다. 그러나 이슬람 문양도 이젠 수백여년 역사를 가진 문화 유물이라 반대가 많았고 이젠 회칠 제거도 이뤄지지 않는다. 우습게도 회칠한 걸 보고 이슬람이 악랄하다 이렇게 뭐라고 하는데, 1204년 기독교 십자군이 여기 성화를 불태우고 이교도 것이라고 끌로 벅벅 긁어 지운 건 아몰랑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