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이 콥

(타이 캅에서 넘어옴)
디트로이트 타이거스의 영구결번
- 2 5 6
타이 콥찰리 게링거행크 그린버그알 칼라인
11 16 23 42
스파키 앤더슨할 뉴하우저윌리 호튼재키 로빈슨
※ 모든 MLB 팀이 유니폼 번호을 쓰기 시작한 건 타이 콥이 은퇴한 뒤인 1937년부터다. 대신 코메리카 파크 왼쪽 담장에 그의 이름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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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타이 콥 (Tyrus Raymond "Ty" Cobb)
생년월일1886년 12월 18일~1961년 7월 17일
국적미국
출신지조지아주, 내로우
포지션중견수
투타우투좌타
프로입단1905년 8월
소속팀디트로이트 타이거즈(1905~1926)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1927~1928)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자
타이 콥
헌액 연도1936년 - 최초의 5인
헌액 방식기자단(BBWAA) 투표
투표 결과98.23% (1회)
1911년 메이저리그 아메리칸리그 MVP
타이 콥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트리스 스피커
(보스턴 레드삭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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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야구의 시작에 타이 콥이 있었다.
베이브 루스 이전 시대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막강한 야구방망이와 빠른 발로 20세기초 메이저리그를 정복했던 데드볼 시대의 진정한 황제. 그러나 폭군이었다는 얘기도...

미국 메이저리그의 데드볼 시대[1]를 대표하는 독보적인 슈퍼 레전드이자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최초로 헌액된 5명 가운데 한명[2]이다. 한 문장으로 설명하자면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역사상 가장 거칠었던(nasty) 선수라 할 수 있겠다.

2 그가 남긴 기록들

은퇴당시 타이 콥이 갖고 있던 메이저리그 1위 기록은 무려 90개. 이후 메이저리그 명예의 전당이 생기자 당연히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처음으로 입성하여 최초의 5인중 한명이 된다. 그것도 5명 중 확고한 1등으로.. 더불어 이 시기쯤에 현대 야구 선수들은 기본기가 부족하다면서 불평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3] 비교 대상이 자기 자신이어서야 누군들 괜찮을까...

통산타율 .367[4] 통산안타 4191개[5]의 대타자. 더불어 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한 8관왕을 한 타자로 1909년 8관왕[6]을 기록했는데 내용이 다음과 같다.

타율 0.377타점 107 타점출루율 0.431득점 116득점장타율 0.571도루 76도루안타 216안타홈런 9개[7]

타격왕은 통산 12번으로 역시 메이저리그 전체 1위. 게다가 1910년의 타이틀이 70년 뒤에 냅 라조이에게 돌아갔는데 타이 콥 입장에서 그거 안뺏겼으면 통산 12회에 9년연속 타격왕을 차지했을 것이다[8]. 하지만 공식적인 타격왕은 타이콥으로 12번의 타격왕이 맞는 기록.

MVP라는 걸 정하는 제도가 없던 메이저리그가 1911년 처음으로 MVP의 개념에 맞는 시상을 하기로 정하자마자[9] 처음으로 받은 사람이 바로 타이 콥이다. 그가 데뷔(1905년)한지 한참 지나서 생겼다 해도 메이저리그 역사에 손꼽히는 최고 레전드라는 타이 콥이 그 이후 수상을 못해 총 한번 밖에 못 받았다는게 납득이 안 갈 수도 있겠으나, MVP제도는 1911년 생긴 이후 1914년까지만[10] 있다가, 1차 세계대전 발발로 세계적인 분위기에 맞춰 미국내 경제적 분위기 역시 어수선해지자, 스폰서의 홍보 효과가 없다고 판단하여 4년만인 1915년부터 다시 없애 버렸던 제도이다. 1차 대전이 끝나고 세계 정세가 어느 정도 정리된 1922년에 아메리칸 리그에서 다시 생겼다.(내셔널 리그는 1924년에 다시 생겼다.) 당시는 이미 타이 콥은 베테랑을 넘어 감독 겸 선수였다. 근데 타이 콥보다 한 살 어린 2년 후배 월터 존슨은 그 이후 심지어 38살에도 MVP받았다. 사실상 타이 콥 전성기에 꾸준히 MVP제도가 있었다면 그보다는 훨씬 많이 수상했을 것으로 예상된다. 콥 형님, 형님이랑 같은 시기 활동한 저는 두번 받았다니까요
타이 콥 : 입 닥쳐 넌 플레잉 매니저가 아니었잖아? 니가 감독 겸 선수 해봤어?

심지어 상술된 8관왕 성적은 그의 타율 커리어 하이가 아니다. 남들은 평생 한번도 못해보기 십상인 4할 타율을 그는 3번이나 기록했다.[11] 트리플 크라운도 해본 디트로이트 타이거즈 역사상 독보적인 최고의 레전드이며 데뷔시즌인 1905년(당시 만 18세 시즌)을 제외하면 단 한번도 .316 이하로 타율이 떨어지지 않은 대타자이다. 무려 23년 연속 3할로,[12] 이 또한 메이저리그 역대1위.앞으로 이걸 세상 누가 할 수 있겠는가

19세이던 두번째 시즌과 은퇴시즌을 제외하고 20년 연속 .334이상의 타율을 기록했다. 발도 빨라서 통산 도루 3위인 897개통산 도루 성공률도 80%. 은퇴시즌의 타율도 .323으로 웬만한 타자의 커리어 하이 수준. 그렇다고 선구안이 나쁜가 하면 그것도 아니라서 데드볼 시기에 뛰었음에도 통산 출루율이 0.433에 24시즌 동안 뛰면서 한시즌에 삼진을 50개 이상 당한게 1907년밖에 없다. 그외 시즌 삼진은 전부다 50개 미만으로 통산 BB/K가 1.8이 넘는다.

거기다가 중견수로 수비도 준수해서 24시즌 뛰면서 기록한 어시스트가 392개로 통산 2위의 기록. 그가 은퇴하고 나서야 태어났던 한참 후배인 윌리 메이스가 나오기 전까지의 메이저리그 중견수 중에 수비 + 타격 커리어로 그에게 비교될만한 선수는 없었다. 19세기말부터 데드볼시대를 거쳐 라이브볼시대 초기까지 봐도 중견수로써 꽤 했다고 볼 수 있다.[13] 지금도 그의 타격 커리어와 비교되는 몇몇 타격 본좌들, 즉 베이브 루스, 윌리 메이스, 테드 윌리엄스, 행크 아론 등과 비교할 때 수비 본좌이기도 한 윌리 메이스를 제외하면 수비로 타이 콥에 비교할만한 선수는 사실 없다.[14]

통산 117개의 홈런밖에 기록하지 못한 콥이였지만 데드볼 시대였던 당시 기준에서는 결코 심하게 적거나 한 수준이 아니다. 메이저리그 역대 통산 3루타 1위 샘 크로포드는 1907년에 홈런 7개로 홈런왕이 되었으며, 타이 콥과 같은 데드볼 시대에 뛰었고 4년 연속 홈런왕[15]을 하여 진짜 별명이 '홈런'이었고 그 업적을 인정받아 베테랑 위원회 투표로 명예의 전당에 갔던 존 프랭클린 베이커[16]는 통산 96홈런 밖에 치지 못했다.[17] 타이 콥은 오히려 홈런을 많이 친 편이며 상술했다시피 홈런 9개로 홈런왕을 한 시즌 외에도 홈런 상위권에 있었다. 선수 말년에 라이브볼 시대가 오게 되었는데, 당시 투수에서 풀타임 야수로 전향한지 얼마 안 되어 혜성처럼 빛나던 베이브 루스와 홈런능력을 비교하며 놀리던 기자에게 자신이 더 위라는 걸 보여주겠다며 바로 다음날 홈런을 쳐 버린 일화도 있을 정도의 선수로, 타이 콥의 전성기가 데드볼이 아닌 라이브볼 시대였다고 해도 그가 별거 아닌 선수가 되었을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더 설명할 필요없이 그는 선수생활 말년이자 라이브볼 시대였던 1920년대 중후반, 즉 1924년~1928년까지 30대 후반~40대 초반의 나이로 타율 3할4푼을 넘게 치고 은퇴했다. 심지어 플레잉 매니저(선수 겸 감독)까지 하면서 말이다![18]


'마지막 4할 타자'라는 말만 듣고 9번이나 장타율 1위를 차지하고, 4차례의 홈런왕에 빛나는 테드 윌리엄스를 교타자로 치부하는 것이 제대로 된 평가[19]가 아니듯, 콥을 그저 데드볼시대에 한정된 똑딱이 타자라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콥의 통산 ops는 .945에 달하며, 11번이 넘는 타격1위를 차지하는 동안 8번의 장타율 1위와 10번의 OPS 1위를 차지하였다. [20] 단순히 홈런이 적은 대신 타율이 높았던 토니 그윈같은 유형의 선수가 아니라, 그라운드 전 지역으로 공을 날려대면서 베이스를 휘젖고 다니는, 고전적인 형태의 야구의 황제라 불릴만했다. [21] 그의 통산 최다안타기록은 1985년에 되서야 피트 로즈에 의해 경신되었으며, 최다 득점 기록은 21세기에 리키 헨더슨이 2245득점으로 넘어설 때까지 75년이 넘도록 유지되었다.

또한 콥은 24년간 선수생활을 하면서 8번의 장타율 1위를 기록하였는데 역대 4위의 수치에 해당한다. 892개의 도루로 메이저리그 통산 도루 4위를 기록할 만큼 빠른 발과 주루감각이 그의 장타 기록에 큰 몫을 하게 한 것이다. 타이 콥은 통산 3루타가 297개로 메이저리그 올타임 2위고, 2루타는 723개로 올타임 4위다. 거기다가 도루자는 178개에 불과하여 통산 도루 성공률이 무려 83.3%나 된다.

다만, 포스트시즌 성적은 페넌트레이스 성적에 비해 안 좋은데 디트로이트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1907~1909년 3년 동안의 포스트시즌 타율은 0.262밖에 안 된다. 참고로 1907~1909년동안 정규 시즌 타율은 0.350-0.324-0.377순. 아무리 날라다니는 괴물이었어도 나이가 어렸던 것 때문인지 정규시즌 성적을 생각하면 굉장히 저조한 성적. 소속 팀들도 우승 등정에 매번 실패해서 정작 우승 반지는 껴보질 못했다. 본인도 뭔가 조짐을 느꼈는지, 후에 다른 팀의 팔 길쭉한 순둥이 신인을 보고는 프런트를 찾아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저 녀석 데려와야 된다"고 강변했으나 씹힌 적이 있다. (차라리 댁이 새너터스로 이적하지 그랬어...)[22]

3 더티 플레이어

2004년 ESPN이 선정한 스포츠 역사상 가장 더티한 플레이어 1위[23]

정말 엄청난 성적과 더불어 유명한 것은 그의 성격으로 좋게 말하면 승부근성이 너무 지나치다 싶을정도로 강하고 나쁘게 말하자면 더티 플레이어라는 평을 받은 선수로, 핏 퍼스트(feet-first) 슬라이딩은 내야수들의 악몽이었다.

사실 무릎을 노린다거나 일부러 주루 경로(basepath)에서 벗어나 내야수를 노리고 슬라이딩 한다는 평이 있지만 이는 과장된 내용이다. 물론 콥이 성인군자는 아닌만큼 사심이 들어간 거친 슬라이딩이 전혀 없었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콥은 자신의 경로를 철저히 지켰고, 높은 슬라이딩도 공을 떨어뜨릴 목적으로 글러브를 노렸다. 사실 현장의 선수들에게 있어선 두려운 주자일 뿐이었지만 이게 매스컴과 팬들에게 비춰지면서 더티 플레이어란 이미지가 어느순간 생겨버렸다고. 콥 본인은 선수들이 자신을 두려워하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여기서 나아가 매경기 스파이크를 날카롭게 갈고 나온다는 식으로[24] 더티 플레이어 이미지가 점점 굳어져가자 은근히 스트레스를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시 아메리칸 리그 국장 벤 존슨에게 보낸 타이 콥의 편지를 살펴보면, 뭉툭한 스파이크를 도입하고 매 경기 스파이크가 지나치게 날카롭진 않은지 심판들에게 검사하게 하자는 제안을 한 내용이 있다.

동료였던 샘 크로포드[25] "콥은 누구에게도 일부러 스파이크질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했다. 내야수가 무신경하게 주자의 베이스패스에 들어서있다면 그건 내야수의 책임이라는 정론이었다. 그 시절의 내야수들도 이런 취지의 말을 했다. 1루수 조지 번스는 "대중들은 그가 스파이크로 남을 찍기 위해 돌진하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주자가 베이스를 터치하기 위한 길목을 막아서고 있다면 스파이크에 찍히더라도 반론하기 어렵다."고 말했으며, 컵스의 유격수 조 팅커는 1910년 이런 말을 했다. "왜 월드 시리즈에서 기회가 있었음에도 그가 나에게 스파이크를 들이밀지 않았냐는 질문을 자꾸 하는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난 주자의 권리(baserunner's right)를 숙지하고 있었고, 그래서 내 위치를 지켰다.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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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호팍?
슬라이딩인지 옆차기인지 모를 동작...스크류 스핀 슬라이딩?[26]

콥의 이런 면모는 그의 몸을 사리지 않는 허슬 플레이로부터 나왔다고 볼 수 있다. 콥은 결코 몸을 사리는 법이 없는 겁없는 선수였는데,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를 그의 무모한 플레이를 두고 제정신이 아닌 수준이라고 했을 정도.

"이 자국들은 엘리베이터나 난간을 타면서 생긴 게 아닙니다." 콥은 1958년 뉴욕 타임즈와의 인터뷰에서, 다리에 생긴 흉터들을 보이면서 씨익 웃으며 말했다. "주루선상의 공포라고 불리기도 합니다만, 사실 상대 선수들이 그냥 무서워하기만 했던 건 아니었죠."
"콥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습니다." 타이거즈의 유격수였던 찰리 오리어리(Charley O’Leary)가 말했다. "야수들이 팔꿈치, 무릎, 스파이크로 찍더라도 우는 소리, 어필 한 번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스파이크에 찍혀 다쳐도 웬만해선 경기에서 빠져 쉰다거나 하지 않고, 이닝이 끝나면 곧장 클럽하우스로 뛰어들어와 스스로 치료했고, 또 다음 이닝이 시작되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필드로 뛰어나가곤 했습니다."[27]

또, 1912년에는 뉴욕 하이랜더스와의 뉴욕 원정 시리즈에서 시리즈 내내 자기를 야유하는[28] 관중을 자기 분이 풀릴때까지 두들겨 패서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은 적이 있다.[29] 러커(Lucker)란 이름의 관중이었는데 경기 초반부터 콥에게 집요하게 욕설을 퍼부었다. 때문에 콥은 당시 하이랜더스의 구단주 프랭크 패럴에게 관중 퇴장을 요청하려고 상대 덕아웃을 방문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패럴은 없었고, 그대로 경기를 진행하다 동료에게 무슨 말을 듣더니 갑자기 관중석으로 난입했다고. 사실 관중 난입은 요즘에야 보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엔 잊을많하면 한 번씩 일어나는 일이긴 했다. 콥의 케이스가 큰 파장이 됐던 건 접촉 이전 누구에게도 제지되지 않은 일방적인 폭행이었고, 더군다나 폭행을 당한 팬이 산업재해로 양손을 잃은 장애인이었기 때문이다.[30]

이후 디트로이트 구단이 아 우리 그럼 야구 못해 배째!!라는식으로 드러누워서 실제로 이후 경기를 동네에서 야구할 줄 아는 사람들로 꾸려서 했는데 경기 결과가 24:2라는 처참한 수준으로 나오자 리그가 망가질 것 같아 겁먹은 총재가 항복하고 10경기로 감형시켜주기도 했다. 역시 세상에 배째라는데는 장사없다 참고로 이때 디트로이트의 선발투수 앨런 트래버스는 그냥 동네 신학생이었다. 그는 9이닝을 전부 완투하며 역대 투수 최다실점이라는 기록을 작성했는데, 이 경기는 그의 처음이자 마지막 메이저리그 경기가 된다. 그리고 포수는 48살 먹은 타이거즈 팀 코치에, 감독까지 대타로 출동하는 최악의 막장경기였다.그래도 2점을 냈다.[31]

4 비극적인 가정사

타이 콥의 성격이 그렇게 사나웠던 건 천성이 그랬다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지만 성년이 되기 전 겪은 비극적 가정사와 그 직후 이어진 고참들의 괴롭힘 탓이라고 볼 수도 있다. 타이 콥의 아버지 윌리엄 허셜 콥(1863~1905)은 많은 매체들에서 다뤄진 모습과 달리 전형적인 레드넥과 거리가 먼 신사였다. 당시로선 매우 드물던 인종 차별을 비판하는 백인 가정에서 자랐고,[32] 그 영향을 받아 윌리엄 역시 남부 지역 주의회 상원, 교육자로 활동하며 인종 차별을 비판하던 깨어있는 인물이었다. 어머니 아만다 칫우드 콥(1871~1936)은 유복한 가정(upper-middle-class)[33]에서 자란 아가씨였다고 한다. 세간에는 윌리엄과 결혼할 당시 아만다의 나이가 12세로 알려진 바 있는데 이는 일부 스포츠 작가들의 첨부한 자극적인 소설에 불과하고, 결혼 허가서를 볼 경우, 둘의 결혼 시기는 1886년 2월로, 그 당시 아만다의 나이는 15세(한국 나이 16세)였다. 물론 지금 기준으론 어린 나이지만 당시 미국에서 15세에 시집가는 건 그렇게 심각한 나이도 아니었다.[34] 윌리엄 역시 당시 20대 초중반(한국나이 24세)의 젊은 청년이었고. 사실, 둘에 관계에 대해 현재까지 전해지는 사실 대부분은 사실이라고 부르기엔 근거가 빈약하다. 이후 설명할 어떤 사건 직후, 말 붙이기 좋아하는 언론들이 추측한 루머에 불과하다.

그 사건이란, 타이 콥의 프로 데뷔(1905년 8월 30일 데뷔경기)전인 1905년 8월 8일 저녁, 아만다가 쏜 총에 윌리엄이 쓰러져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아만다는 출장간 남편이 이렇게 일찍 돌아올리가 없었고, 집에 들어온 남자를 당연히 불법침입자라 여겨 자기보호(정당방위)를 위해 총으로 쏴 죽였다고 주장했다.[35] 이후 최종적으로 그녀는 무죄를 선고받았다. 확실한 사실은 여기까지지만, 마을의 유명인이라고 볼 수 있는 부부였고, 부인 아만다의 미모의 출중했기에 이후 언론과 호사가들에 의해 이런저런 이야기가 따라붙었다. 아내의 부정한 행각을 눈치 챈 타이 콥의 아버지가 외도의 현장을 급습하기 위해서 출장을 간 척 한 뒤 한밤중에 침실 창문으로 기어오르다가 아내가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는 식의 내용이 매우 그럴 듯해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36] 또 아버지와의 유대가 깊던 타이 콥은 이 사건 때문에 평생 아만다를 증오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37] 1936년 아만다 사후, 타이 콥은 그녀를 아버지의 무덤 옆에 안치했다. 어찌됐든 이제 막 소년 티를 벗으려고 하는 민감한 시기에 그런 일을 겪은데다, 이후 바로 메이저리그로 진출해 고참들에게 찍혀 괴롭힘을 받기까지 했다. 어찌보면 비뚤어지는 게 자연스럽게 여겨질 상황.

5 은퇴 이후 개인사

하지만 성질머리와 별개로 야구 외적인 능력은 매우 출중해서 은퇴 이후 시작한 사업이 대성공해서 돈은 무지무지하게 벌고 안락한 말년을 즐겼다. 언제나 타격 최상위권에서 내려오지 않던 슈퍼스타 타이 콥은 당연하게도 메이저리그 전체 연봉 1위의 선수였지만, 당시는 지금처럼 메이저리그 최고 선수라고 해서 야구로 번 돈으로 평생을 아무것도 안해도 부자로 살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는데,[38] 그는 선수생활 동안 번돈으로 사업과 투자에서 좋은 성과를 올려 갑부가 된 것이다. 게다가 타이 콥이 젊을 때 사놓은 회사의 주식이 그 코카 콜라와 디트로이트의 제너럴 모터스. 가난하게 살래야 가난하게 살 수 없을 정도.가난은 커녕 보통 부자도 아닌 준재벌급 갑부였다.

이렇듯 사업가로 변신한 콥은 아들들에게는 매우 엄격한 아버지였다고 한다. 아들이이 셋이였는데 모두 자신처럼 훌륭한 운동(야구)선수가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큰아들 타이 콥 주니어는 프린스턴 대학에 가서 야구가 아니라 테니스를 해서 아버지를 실망시켰다. 거기에다가 대학 성적마저 영 신통치 않자 타이 콥이 불같이 화를 내고 직접 프린스턴까지 쳐들어가서 손수 큰 아들을 매질하셨다고. 아저씨 성격 끝내주네 그리고 큰 아들을 다시 예일 대학으로 보냈는데, 학교 테니스 클럽 캡틴도 하고 성적도 좀 나아지나 했으나, 술 먹고 깽판을 부리는 바람에 법정 소송까지 끌려갔고 비록 소송비용은 대줬으나 그렇게 큰 아들과 인연을 완전히 끊었다고 한다.[39] 더군다나 타이 콥 주니어의 아들 허셜 콥은 저 개차반 아버지에 의해 심한 가정폭력을 받았다. 허셜의 말에 따르면 어린 나이였음에도 '내가 다음날 살아있을 수 있을까?' 의문을 품었던 때들이 많았다고. 이런 손자의 보호막이 되어주었던 게 바로 할아버지 타이 콥이었다.[40] 또 기대가 높아서 엄격하게 대했던 아들들에 비해서, 딸들은 비교적 오냐오냐 했다고 한다. 비록 이혼을 한번 했지만 어찌됐든 자식들에겐 좋은 아버지였던 듯 하다.

앞서 말한대로 사업가로서 역량도 뛰어나서 은퇴 후 츄잉껌과 가터벨트 등 여성용 속옷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고 그 돈을 주식과 부동산에 투자해 재벌급으로 큰 부자가 되었고 가족과 유럽여행도 하고 사냥, 골프, 폴로, 낚시등을 즐겼으며 주식과 채권 거래로도 돈을 벌었다. 선수 생활 당시에 관계를 맺었던 코카콜라사의 주요 주주이기도 했으며 남긴 재산도 엄청나서 무려 1178만 달러를 남겼는데 현재 값어치론 거의 1억 달러에 달한다.그리고 이런 성공에 힘입어 고향의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학비 지원을 펼치거나 병원을 지어 기증하는 등 사회 기여도 많이 했다.

이후 1남[41] 2녀와 며느리, 두 사위, 손자, 손녀 앞에서 숨을 거뒀다.

6 베이브 루스와의 관계

베이브 루스와 함께.

타이 콥은 야구를 전쟁과 같은 것으로 봤고 승리에 대한 갈망, 자기 능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선수였다. 특히 이후 등장한 베이브 루스란 존재는 그의 야구 철학을 정면에서 부딪쳐오는 유형의 선수였다. 콥은 루스 식의 '한방 야구'보다 안타를 치고나가 빠른 발과 뛰어난 판단력으로 베이스패스를 지배하는 야구야말로 진정한 야구라고 생각했다.[42] 하지만 대중들은 루스의 시원한 홈런포에 열광했고, 그런 대중들의 반응에 콥은 굉장히 분노했다고 한다. 그래서 툭하면 루스를 '반검둥이'[43]라고 놀렸고, 루스의 플레이를 별 거 아니라는 투로 깎아내리기도 했다.[44] 하지만 둘은 은퇴 이후엔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콥은 데뷔 초기부터 연이 있던 스포츠 작가 그랜틀랜드 라이스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야구를 하면서 본 최고의 타자가 누구냐는 질문에 주저없이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꺼냈다. 루스의 힘과 선구안의 조합은 누구도 가지지 못했다고. 대타자가 대타자를 알아보는 눈은 속일 수 없나보다.

여담으로 루스의 등장과 더불어 '라이브볼 시대'가 열리면서 시원한 홈런을 때리는 강타자들이 각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콥은 30대 중반을 넘긴 노장이였고(단순히 노장으로 끝이 아니라 감독 겸 선수였다) 타격폼을 수정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그러던 어느날 경기에 앞서 한 기자가 콥에게 루스에 대한 칭찬을 하자 열이 받은 콥은 그날 경기에서 홈런을 3개 때렸고 그 다음날 경기에서 다시 2개의 공을 담장 너머로 날려버렸다. 아재 성깔있네.

7 승부 조작 혐의

1926년 트리스 스피커[45]와 함께 승부조작 혐의에 연루된 적이 있는데, 당시 혐의를 제보한 사람은 콥이 선수 겸 감독을 맡고 있던 타이거스에서 투수로 활동한 적 있는 더치 레오나드(Dutch Leonard)란 사람이었다. 다소 꺼림칙한 요소는 이 레오나드가 감독이었던 콥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어찌됐든 콥과 스피커의 청문회가 열렸는데 웃긴 건 이 레오나드가 당시 신변에 위협을 느낀다는 이유를 대며 증언 자체를 거부했고, 당연히 유일한 제보자가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으니 둘은 무혐의를 판정받았다. 콥은 이후 팀에 복귀하고 이후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로 이적해 2년을 더 뛰다가 은퇴했다.

8 야구계 최악의 인종차별주의자?

타이 콥에 대한 가장 큰 오해 중 하나다. 이에 대한 비판 대부분이 후대의 작가들이 자극적으로 재창조한 내용에 기반해 있다. 콥이 인종차별주의자였다는 비판 대부분이, 조지아 출신의 다혈질이란 이미지와 몇몇 사건을 각색해 연결지은 것에 불과하다. 생애 동안 크고 작은 폭행에 연루된 싸움꾼이었는데 백인과 싸웠음에도 후대의 작가들이 확인도 하지 않고 멋대로 상대방을 흑인으로 단정짓곤 했다. 대표적인 예가 클리블랜드 호텔에서의 사건, 당시 연루된 콥 포함 3인은 전부 백인이었다.

또한 콥은 니그로 리그에서 활동하던 선수들과도 친분이 있었는데, 바비 로빈슨(Bobby Robinson)은 "콥이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 어떤 편견도 보지 못했다."고 말한 바 있으며, 대부분의 선수들에게 천시받던 흑인 볼보이를 감싸준 일화도 있다. 콥의 고용인이었던 흑인 알렉스 리버스(Alex Rivers)는 이후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콥의 이름을 따 짓기도 했다. 애초에 상기했듯이 타이콥은 인종차별에 비판적인 가정에서 부모와 좋은 유대를 가지며 자란 사람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콥이 인종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남긴 말은 흑인 선수 로이 캄파넬라[46] 윌리 메이스에 대한 찬사[47], 그리고 이런 말이 전부다.

"(흑인이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는 질문에 답하며) 확실히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들이 존중받지 못할 행동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들을 배척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어떤 백인도 유색 인종보다 비신사적으로 행동해도 될 권리는 없다는 걸 말씀드립니다. 덧붙여 내 생각에 이것은 야구에 한정되는 말이 아니라 전 사회 계층에도 적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Certainly it is okay for them to play. I see no reason in the world why we shouldn't compete with colored athletes as long as they conduct themselves with politeness and gentility. Let me say also that no white man has the right to be less of a gentleman than a colored man, in my book that goes not only for baseball but in all walks of life."

그가 1962년에 사망했을땐 흑인 언론에서 그가 인종적 평등에 대해 호의적으로 말했다는 걸[48] 칭찬하는 부고가 실렸다.

9 트리비아

1946년. 예순 살이었던 콥은 양키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올드스타들의 자선경기에 초청받아 타석에 들어섰는데, 당시 양키스의 주전 포수였던 베니 벤고에게[49] "이봐 젊은이. 내가 힘이 없어 방망이를 놓칠지도 모르니 뒤로 물러나 앉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게 포수가 뒤로 멀찍이 물러자가 콥은 번트를 대고 총알같이 1루로 뛰어나갔다.[50][51]

은퇴 이후 30년이 지난 1958년에 한 기자와 한 인터뷰도 있었는데, 이 기자는 "당신이 요즘 시대에 활동했다면 어땠을까요?" 하고 묻자 콥은 "3할 1푼은 쳤겠지." 라고 답했다. 당연히 이 기자는 콥의 전성기 시절을 떠올리면서 매우 놀란 표정과 함께 정말이냐고 물었으며 콥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나이 72살에 3할 1푼이면 됐지, 더 바랄게 있겠나?" 라고 패기에 넘친 답을 말했다. 즉, 지금 나이 먹고도 현 시대에 활동한다면 3할 1푼은 친다는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인 셈.

메이저리그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타자이니 만큼 그의 일대기는 영화로도 제작되었는데 콥 역할을 맡은 토미 리 존스의 연기가 압권이다. 물론 앨 스텀프(Al Stump)란 작가가 쓴 전기의 탈을 쓴 픽션이 기반인만큼 허구가 대부분이다.

아역배우 타이 심프킨스의 이름이 타이 콥에서 따온 것이다.
  1. 그야말로 데드볼 시대는 '타이 콥의 시대'였다. 지금도 데드볼 시대와 라이브볼 시대의 변화 기준은 타이 콥과 베이브 루스 두 선수의 전성기로 보려고 한다. '데드볼 시대가 언제였냐'는 질문에 대답할만한 가장 적절한 대답은 '타이 콥이 데뷔하고 나서 한창 날리던 그 시절'이라 생각해도 좋다고 할 정도이다. 물론 동시대의 또 다른 레전드이자 후세에 역사상 최고의 투수라 칭해진 선수 '월터 존슨'이 있지만 성격이 순한 편이어서 최고의 실력에 비해 인기가 조금 부족하여 당시의 인기 자체는 타이 콥과 꽤 차이가 많이 났던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
  2. 그 중에서도 타이 콥의 득표율이 1위였다. '야구의 신' 베이브 루스가 2위였고.. 심지어 수십년간 수많은 헌액자들이 나온 21세기에도 타이 콥은 역대 득표율 5위를 유지하고 있다. 심지어 이 투표는 타이 콥은 은퇴한지 10년이 가까워질 무렵이었고 베이브루스는 은퇴한지 2년 밖에 안 되었을 때 이뤄졌던 투표였다. 지금은 베이브 루스를 야구 역사상 최고로 인정하지만 명예의 전당 투표를 했던 시기, 즉 라이브볼 시대가 어느 정도 자리잡은 당시까지도 수많은 미국의 야구인들에게 야구의 황제는 아직 '타이 콥'이었다. 아니 인기와 별개로 2차대전 이전까지 70년 미국 프로야구사에서 넘버원으로 평가되던 선수는 항상 타이 콥이었다. 베이브 루스는 이후 근현대 야구 혁신과 세이버매트릭스 등의 스탯연구 발전으로 재평가를 받아 타이 콥을 완전히 제치고 넘버원이 된 것. 참고로 또 다른 데드볼 시대 레전드 월터 존슨은 최초의 5인 중에서는 5위를 기록하고 말았다.
  3. 70대 시절의 타이 콥에게 한 기자가 "(전성기적 기준으로) 지금 리그에서 뛰신다면 어느 정도 치실 것 같나요?" 라는 질문에, "한 3할 1푼 정도?" 라 답했고, 기자는 의아해하며 "4할도 3번이나 치신 분이 3할 1푼이라니요?!" 라고 되묻자 "이 친구야, 내 나이 70에 그 정도면 됐지 뭘 바래?"(즉, 지금 쳐도 3할은 친다는 뜻...)라고 대꾸한 바 있다.
  4. 메이저리그 기준타수(=5천타수)를 만족한 타자들 중 메이저리그 전체 1위. 2위인 로저스 혼스비의 타율 0.358과 9리 이상 차이가 난다. 거의 1푼 수�준인데, 더 놀라운 건 3위부터는 모두 3할4푼대라는 것이다. 그야말로 메이저리그 역사에서 독보적인 타격왕이라 할 수 있는 수준이다.
  5. 메이저리그 전체 2위. 1위는 도박왕.
  6. 이때 타이 콥은 고작 한국나이 22살이었다. 풀타임 3년차에 데뷔 5년차였다. 다른 메이저리그 레전드 중에 이 나이에 메이저리그에 데뷔하거나 더 늦게 데뷔한 경우도 많다. 그 어린 나이에 리그를 정복했으니
  7. 시대가 라이브볼 시대가 아니라 데드볼 시대라는걸 감안해야 한다. 그때 당시 공과 지금 야구에서 쓰이는 공은 다르다!!
  8. 사실 이 기록에는 2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 냅 라조이는 마지막 더블헤더에서 8타수 8안타를 쳤는데 그 중에서 6개는 번트안타였다.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 감독이 타이 콥을 정말로 싫어해서 신인 3루수를 기용하고 그에게 깊은 수비를 지시했기 때문. 둘, 타이 콥은 당시 타격왕 타이틀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마지막 경기에 나오지 않았지만 어쨌든 .385 대 .384로 타격왕을 수상했는데, 1981년에 당시 기록원들이 3타수 2안타 경기를 두 번 셌던 것이 발견되어 그의 시즌 타율은 .383이었던 것으로 정정되었다. 통산 타율도 .367에서 .366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MLB.com에서는 다른 모든 야구 스탯 사이트들과는 달리 1910년 타율 .385와 통산 타율 .367을 모두 인정하고 있다.
  9. Chalmers라는 자동차 회사(사장 이름이 Hugh Chalmers)에서 지원하는 상이 그전까지 있었다. 그러나 MVP개념이 아니라 리그별 타율 1위에게 상을 주는 제도였었다. 즉 그냥 타격왕(부상으로 자동차를 주었다고 한다.)상뿐이었는데, 상술된 1910년의 타이 콥냅 라조이와의 타격왕 논쟁 발생 후, 이것이 꽤 부정적인 갈등으로 이어져(당시 그냥 두 사람 모두에게 상품을 줬다고 한다.), 상의 가치와 Chalmers사의 홍보 효과가 퇴색될 것이 우려되자 팀 기여도가 가장 높은 선수에게 주는 상으로 바꾸게 되었고 이것이 메이저리그 MVP의 전신이다. 당시 이름은 Chalmers Award. 이후 1920년대에 부활했을때 상 이름은 MVP가 아니었다. 의미말고 진짜 MVP라는 이름의 상은 1930년대부터 생긴다.
  10. 아메리칸 리그 1912년 수상자 트리스 스피커, 1913년 수상자 월터 존슨, 1914년 수상자 에디 콜린스.
  11. 더 무서운 건 3번의 4할 타율 시즌 중 1시즌은 타율 2위였다는 것이다. 1위는 조지 시슬러의 .420
  12. 다만 이 중 5시즌은 현재 프로야구 기준 규정타석 미달이다. 하지만 이것은 현대야구 기준(3.1타석 비율)으로 본 것일 뿐 당시의 기준은 달랐고 이에 따라 메이저리그 사무국에서는 1906년과 1926년, 1928년 3시즌 기록을 제외한 20시즌의 기록을 규정타석 3할로 인정하고 있다. 즉 원칙적으로는 1907~1925년까지 19년 연속 3할이다. 나머지 두 시즌은 1914년과 1918년 시즌으로 이때 그의 기록이 그때 기준으로는 아니지만 현재기준으로 볼때 규정타석 미달이다.
  13. 사실 타이 콥이 타격에 비해 수비는 에러가 조금 있던 편이라, 당시 수비 자체로는 더 뛰어났던 트리스 스피커가 있어서 스피커를 최고의 중견수로 쳤었다. 사실 스피커도 타격까지 뛰어났던 선수고.
  14. 원래 외야 수비는 중견수를 가장 수비 잘하는 선수로 배치한다.
  15. 1911년부터 1914년까지 홈런왕을 했다.
  16. 사이 영(본명은 덴튼 영)이나 베이브 루스(본명은 조지 허먼 루스)처럼 과거 선수들을 본명 말고 별명으로 기록하는 메이저리그 홈페이지에는 실제로 그의 이름이 '홈런 베이커'(Home Run Baker)로 기록되어 있다. 본명은 따로 표기하고 있다.
  17. 이와 흐름을 같이 하여 투수쪽에서는 메이저리그 통산 방어율 1위 에드 월쉬가 완봉승을 11회나 하고 완투를 44경기나 한 시즌도 있었다. 그 정도로 투수의 시대였다.
  18. 1921년부터 1926년까지 디트로이트 타이거즈의 감독 겸 선수였다. 한국으로 치면 백인천 감독이 1982년에 했던 것과 같은 방식이다.백인천은 1년이지만 타이콥은 6년을 했다.
  19. 정확히 말하면 테드 윌리엄스는 장타, 교타, 선구안 모든 것이 완벽했던 완성형 타자다. 타율 4할을 기록하던 시즌에 출루율이 5할 5푼, 장타율이 7할 3푼이나 되었던 고타율과 OPS를 겸비한 퍼펙트 히터였고 지금까지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메이저리그 역대 통산 출루율 1위다.
  20. 라이브볼 시대가 열리고도 서른 중반의 나이로 세차례 ops 1을 달성하였다.
  21. 콥이 전성기를 보낼 때 다른 타자들의 평균 타율은 2할 4,5푼을 맴돌았다.
  22. 실제로 그가 상대전적이 약했다고 할 만한 투수는 월터 존슨 뿐이었다고 봐도 될 정도다.
  23. 2위는 칼 말론.
  24. 콥은 평생 그런 시늉조차 해본 적이 없다.
  25. 상술된대로 역대 3루타 1위이며, 명예의 전당에 간 선수이다. 콥과 동료긴 했지만 사실 까칠했던 콥과의 개인적 관계는 썩 좋지 못했다. 대부분의 팀동료가 그랬긴 했지만.
  26. 위의 매우 유명한 사진 속 포수 폴 크리첼(Paul Krichell)은 1950년대, 선수로서가 아니라 양키스 스카우트로서 루 게릭을 발굴한 것으로 유명했던 시기에 이 사진에 대한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사진이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킬만하게 찍혔다고 말했다. 그때 성질이 뻗쳐서 콥과 싸웠고 그로 인해 둘 다 심판에게 벌금을 선고받았는데, 어찌됐든 사실은 콥은 무릎을 노리고 들어온 게 아니라 글러브를 쳐 공을 떨어뜨리려고 했다고. 또 이런 말을 했다. "제 잘못이 없다고 보진 못하겠네요. 그건 제 실수였습니다.("it was really my fault.") 주루 경로 옆이 아니라 길목에서 버티고 있었거든요."
  27. 그러나 사실 메이저리그 최고의 스타였던 타이 콥이 규정타석을 못 채우거나 주전선수 치고 타석이 적었던 시즌이 적잖게 있던 건(데뷔초부터 스타였던 타이 콥은 24시즌 커리어 중 전경기 출장 시즌이 3시즌 밖에 없다), 첫째로는 (싸움질 같은) 사고를 쳐서 출장을 쉬거나 한 적이 있기 때문이고, 두번째로는 경기 중에 저 짓하다가 다쳐서 쉬던 경기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좀 다쳐도 웬만하면 경기를 나갔던 근성 넘치는 일류 선수였음에도, 몇경기라도 쉬지 않을 수 없을만큼 다쳐서 타석수가 부족한 시즌이 있었다는 걸 보면 이 미친 짓거리를 얼마나 심하게 많이 했는지 알 수 있다. 사고나 불필요한 부상으로 출전을 못하고 날린 경기가 커리어 전체에서 최소 수십경기에서 100경기에 육박한다. 그가 조금만 그런 행동을 줄였어도 후세의 피트 로즈가 그의 최다안타 기록을 못 깼을 것이다.
  28. 무슨 욕에 뚜껑이 열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콥의 인터뷰에 따르면 어머니의 부도덕함과 피부색에 대한 욕설을 들은 것으로 보인다.
  29. 사실 현대법이 적용될 상황이었으면 당장 감옥에 갈 일이다. 비장애인도 아니고 장애인을 무차별 폭행하여 얼굴뼈가 잘못될 정도로 만들었기 때문에 단순히 폭행죄와 상해죄만이 아니라 살인미수 혐의로도 피소되어 합의도 못하고 감옥에 갔을 가능성이 높다.
  30. 한참 두들겨 패고 있을때 옆의 관중이 "그만해요. 저 사람은 팔이 없는 사람이라고요."라고 하니, "두 발이 없대도 신경 안 써!"라는 콥의 발언이 자주 인용된곤 한다.
  31. 당시 감독이었던 사람은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이자 세계 프로야구 통산 최다 몸에 맞는 공 기록을 보유한 걸로도 유명한, 유격수 출신 감독인 휴이 제닝스(287개) 였는데, 그는 사실상 1903년에 은퇴한 후 코치 생활을 하다가 타이 콥이 3년차 신인이던 1907년부터 디트로이트의 감독을 하던 사람이었다. 사실상 타이 콥의 메이저리그 인생을 함께한 인물이며 (나중에 껄끄러워졌지만)소중한 은사. 타이콥을 처음으로 풀타임 주전으로 기용한 것도 휴이 제닝스였다. 잘하니까 이용한 걸로 볼 수도 있지만 감독이 된 이후에도 팀 선수가 부족한 상황이 오면 몇년에 한번씩 경기에 출전하곤 했는데 타이 콥이 깽판쳐서? 감독생활 중 총 5경기에(10타석) 대타나 대수비로 출전했고, 그래서 사실상은 그냥 감독이지만, 원칙적으로는 플레잉 매니저(감독 겸 선수)였으며 나이 50에도 선수생활을 한 사람이 된다. 심지어 감독이 되었던 1907년에는 40이 다 된 나이에 유격수나 2루수 대수비도 했었는데 선수생활을 쉬던 사람인 관계로 역시나 실책을 저질렀다. 그래도 1918년에는 50살의 나이로 1루수 대수비로 출장해 실책없이 2아웃을 잡아냈다. 그가 1920년 감독을 그만두고, 1921년부터 팀 감독을 했던 게 타이 콥이기도 하다.(콥은 진짜 감독 겸 선수였다.) 타이 콥에게는 은사이자 선후배 감독이라는 특이한 관계.
  32. 윌리엄의 할아버지, 즉 콥의 증조부 대에서는 이로 인해 살던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33. 지금은 계급 차별 반대 여론 문제로 단어 사용이 줄었지만, 영미 문화권에서는 자본주의가 강하게 자리잡기 시작한 19세기부터 경제 및 정치, 문화적으로 상류층을 upper class, 중산층을 middle class, 저소득(하류)층을 lower class라고 오랜기간 불러왔다. 언론에서 사용한 호칭이 upper-middle class라면 upper toward middle일지 middle toward upper일지는 모르지만 정치적 권력 같은 것만 약했을 뿐, 경제적으로는 굉장히 부유하게 잘 사는 가정이었다고 쉽게 간주할 수 있다.
  34. 당시 조선시대였던 우리 조상들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서양도 동양도 당시 평균적으로 그거보다 1~2살쯤 더 먹어서 가는게 가장 일반적이었지만.. 아무튼 이상할 건 없다. 지금 사회문화적 나이로 환산하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20살에 결혼한 정도랑 동급이다.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만 봐도 13~14살 딸을 결혼시키려는 부모도 있었지 않는가.
  35. 지금도 미국의 일부 주에서는 자기 집에 무단침입한 사람 혹은 그렇게 간주될 사람(예를 들어 가족이더라도 이 경우처럼 문이 아니라 창문으로 집에 있는 사람 몰래 들어 와서 집에 있는 사람이 분간할 수 없는 경우)을 쏴 죽이는 것은 한국과 달리 순수 정당방위로 인정되어 무죄가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때는 100년 전이라 치안이 지금보다도 안 좋았던 시절이므로 더더욱 그랬다고 한다.
  36. 물론 진실은 저 너머에
  37. 물론 타이 콥이 그 후 모친인 그녀를 한번도 직접 안 만났다고 했던 건 사실이다. 사건 이후 그녀가 다른 사람과 재혼을 했는데 그렇게 새로운 가정을 차렸기 때문일 수도 있고, 순수한 증오였을 수도 있기에 둘 중 어느 쪽인지 알 수 없지만.. 이유가 둘다라면?
  38. 물론 타이 콥이 적극적인 협상을 통해 야구선수가 돈을 이전보다 더 많이 받는 시대를 열기 시작한 건 맞지만 당시 미국 경제상황과 비교할 때 평생 먹고살 떼돈까지는 아니었다. 19세기 때 선수들 수입은 막장급이었고, 20세기 초에도 타이콥 수준까지는 못 되지만 후보선수급은 아닌 선수들도 대기업 회사원보다 못 벌었다.지금은 메이저리그 선수이기만 하면 쩌리도 1년에 5억이 기본이다 야구로 최고가 되면 평생 먹고살 수준의 돈을 벌게 된 건 데드볼 시대 타격 본좌 타이 콥의 본좌라인을 잇는 라이브볼 시대 본좌 베이브 루스 이후 부터라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39. 그리고 그 이후에 큰 아들 타이 콥 주니어는 나중에 정신을 차렸는지 의대에 붙어서 의사가 됐으나 아버지 타이 콥은 죽을 때까지 아들을 보지 않았다.
  40. 손자가 쓴 "Heart of a Tiger: Growing Up with My Grandfather, Ty Cobb"이란 회고록 2014년에 출판된 바 있다.
  41. 아들이 셋이였는데 그 중 둘은 아버지 타이 콥보다 먼저 사망
  42. 사실 야구가 처음 정립될 당시를 기준으로 본다면 틀린 말도 아니다. 그 시점엔 펜스를 넘어가는 홈런은 그야말로 예외적 상황에 불과했으니. 실제 당시 미국 야구인들과 야구팬들도 슈퍼스타 홈런왕 베이브 루스에게 환호하면서도, 최고의 야구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는 평균적으로 타이콥의 그것과 아직 비슷했다. 야구에 대한 사상혁신은 2차대전 이후 40여년간 데드볼 시대를 넘는 라이브볼 시대 역사가 쌓이고 새로운 스타들이 나오면서 조금씩 끊임없이 변화하며 일어났던 것이다.
  43. 타이 콥이 특별히 인종차별주의자라서 그랬다기보단 당시 미국 사회에선(특히 마초적 성향이 더 강한 메이저리그 내에선) 일상적인 욕이었다. 언론 매체에서조차 흑인 멸칭을 자연스레 쓰던 시절이었다.
  44. 생각보다 예민한 성격을 지녔던 루스는 그때마다 큰 상처를 받았다고 한다. 물론 루스 역시 자기가 단타를 노린다면 6할은 칠 수 있을 거라는 둥 설전을 펼쳤다.
  45. 상술된대로 타이 콥이 아메리칸 리그 MVP가 된 다음해에 MVP가 된 선수이며, 여러 통산 누적 기록 분야에서 상위권을 차지하는 선수라, 엄청난 메이저리그 커리어를 가진 레전드이다.
  46. "역대 최고의 포수 중 하나"
  47. "내가 돈을 내고 볼 가치가 있는 유일한(!) 선수"
  48. "Ty Cobb Backed Negroes." Los Angeles Sentinel, August 3, 1961, B11.
  49. 당시 살인자 타선으로 유명한 양키스의 주전 포수로, 1923년, 1927년, 1928년에 우승반지 획득
  50. 그는 현역선수 시절에도 기습번트를 잘 대는 편이었다. 사실 그의 타격방식은 빠른 스피드를 활용하는 탁월하고 다양한 배드볼 히팅에 가깝다고 분석된다. 그가 선구안 위주로 승부하던 선수는 아닌게 4천안타를 넘게 치면서도 볼넷은 1249개 밖에 안 되었고, 타율 4할을 기록하던 시즌에도 출루율 5할을 기록한 적은 없다. 삼진이 357개밖에 안 되는 걸로 기록되어 있어 선구안이 좋다고 오해할 수도 있으나, 배드볼 히터였던 것도 있고 메이저리그는 1913년부터 삼진이라는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1905~1912년까지 그가 당한 삼진은 남아있는 기록으로 정황상 삼진으로 확정되는 것 외에(당시는 현대로 치면 낫아웃 출루에 해당되는 상황들이 많았다) 기록되어 있지 않아 빼서 저렇게 적게 나온 것이다.
  51. 1912년까지는 '삼진'이라는 규정없이 세번째 스트라이크가 들어가면 타자가 1루로 바로 달리고, 포수가 1루에 공을 던져서 아웃시키는 게 규정이었다. 사실 우리가 스트라이크아웃 낫아웃이라고 알고 있는 것도 정식명칭이 아니고, 정식명칭은 'uncaught third strike'인데, 원래 포수가 세번째 스트라이크를 빠뜨리면 타자주자가 자연스럽게 1루로 살아갔기 때문이다. 규정에서 세 번째 스트라이크를 포수가 포구하면 바로 아웃되는 삼진규정을 추가하여 만들면서, 이미 있던 저 포구 실패 상황은 없어지지 않도록 따로 처리하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