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퍼니 하더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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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4년을 보낸 올랜도 매직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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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닉스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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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귀여운 얼굴도 세월앞에서는 장사가 없나보다. 그래도 여전히 멋있다.

이름Anfernee Deon Hardaway
생년월일1971년 7월 18일생
신장201cm[1]
체중88kg
포지션슈팅가드[2]
드래프트1993년 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
출신대학멤피스 대학교[3]
소속팀올랜도 매직(1993~1999)
피닉스 선즈(1999~2004)
뉴욕 닉스(2004~2006)
마이애미 히트(2007)
등번호1번, 7번
수상내역NBA All-Star 4회 (1995-1998)
All-NBA First Team 2회 (1995-1996)
All-NBA Third Team 1회 (1997)
NBA All-Rookie First Team (1994)
NBA Rookie Challenge MVP (1994)
Great Midwest Conference Player of the Year 2회 (1992-1993)
NCAA All-American First Team (1993)
Ballin[4] is What I was born to do.

농구를 하는 것은 내가 태어난 이유다.
ㅡ 그의 시그니처 모델에 새겨져 있는 말.

1 개요

NBA 농구선수. 한때 그랜트 힐과 더불어 NBA의 차세대 아이콘으로 큰 인기를 누렸던 선수였다. 그러나 각종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쓸쓸히 퇴장한 비운의 선수. 지금도 올드팬들은 그의 이름을 거론할 때마다 안구가 촉촉하게 젖어든다. 별명은 Penny. 슬램덩크정우성의 모델로도 유명하다.

2 성장기

하더웨이는 테네시 주 멤피스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부터 워낙 귀여웠던 모양인지 페니의 할머니 루이스 여사는 손자를 Pretty Baby 라고 부르며 매우 예뻐했다. 그런데 루이스 여사는 남부 출신이었는지 저 프리티 발음에 남부 억양이 들어가 있어서 이게 사람들에게는 Penny라는 단어로 와전되어 어쩌다가 별명이 저렇게 굳어졌다.

할머니의 사랑은 받았지만, 페니는 부모에게서 버림받았다. 아버지는 가출했고,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새살림을 차렸다. 결국 루이스 여사는 어린 페니를 먹여살리기 위해서 온갖 일을 다했다. 그런데 페니가 어느 정도 자랐을때 페니의 어머니가 페니를 데려가겠다고 했다. 루이스 여사는 이에 대해 "모유 한 번 먹여준 적도 없으면서 뻔뻔하게 어딜 기어들어와?" 라며 내쫓아버렸다. 페니는 이때 세상에서 버림받았다는 느낌이 들었을 정도였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할머니의 사랑과 헌신 덕분에 극복할 수 있었다고. 페니 역시 할머니를 매우 사랑했기 때문에 절대 나쁜길로 빠지지 않았다. 페니가 어렸을때 살던 곳은 엄청난 우범지대였다. 하지만 페니는 나쁜 길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저 농구와 미식축구를 하면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페니가 할머니의 말을 얼마나 잘 들었는지 대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페니는 어릴적 미식축구를 엄청나게 좋아했다. 친구들과 미식축구를 하다가 크게 다치고 돌아와 할머니를 놀라게 한 적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페니가 미식축구 선수가 되겠다고 하자 루이스 여사는 다음과 같은 말로 손자를 설득했다.

"저런 덩치들에게 깔리면 넌 죽고 말거야. 차라리 농구를 하렴. 농구도 미식축구 못지 않게 정말 재미있단다."

할머니를 너무 사랑했던 페니는 할머니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다. 결국 미식축구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접었다. 그래도 미식축구를 좋아하는 건 성인이 되어서도 변하지 않았다.[5]

3 고등학교/대학교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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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피스에 위치한 트레드웰 고등학교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이때 평균 36.6점, 10.1 리바운드, 6.2 어시스트, 3.9 스틸, 2.8 블록슛 이라는 가히 사기적인 기록을 찍어내며[6] 전미에 손꼽히는 고교선수로 각광받게 된다. 많은 대학들이 페니에게 러브콜을 보냈다. 페니와 할머니 루이스는 고향팀인 멤피스 대학교에 가기를 원했고, 멤피스 대학 역시 페니를 강력하게 원했다.[7]

하지만 이 때 페니는 공부를 거의 안해서(...) 학교성적이 대학에 갈만한 수준이 되지 못했다. SAT점수도 멤피스 대학교가 원하는 기준에 미달이었다. 이러다 보니 주니어 칼리지에서도 몇 군데 왔다갔었다고. 하지만 루이스 여사는 완강히 멤피스 대학교를 고집했다. 결국 최후의 수단으로 학과장의 추천입학이 남았다. 다행히 학과장은 페니의 입학을 허락해주었다. 물론 이게 불공평하다고 엄청난 항의를 받아야 했다.

그 후 페니는 공부의 중요성을 깨닫고 공부에도 열성적으로 임했다. 하지만 1학년때 페니는 거의 농구를 하지 못했는데, 어떤 미친 괴한이 페니의 다리에 총을 발사했기 때문이었다. 2학년때는 부상을 딛고 맹활약을 펼치면서, 드림팀1의 연습상대인 USA Basketball Developmental Team 에 선발되었다. 이때 선발된 멤버들은 크리스 웨버, 바비 헐리, 자말 매쉬번, 앨런 휴스턴, 로드니 로저스, 에릭 몬스트로, 그랜트 힐 등 전미 최고의 대학선수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연습경기에서 드림팀을 이겼다. 물론 다음 연습경기에서 무자비하게 깨졌지만.(...)[8]

3학년 때 평균 22.8점, 8.5 리바운드, 6.4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그리고 네이스미스상과 존 우든 어워드의 강력한 후보로 올랐다. 그리고 그는 NBA로 가기로 결심한다. 이는 프로에서 자신의 기량을 보여주고 싶었고, 할머니를 더 고생시키고 싶지 않다는 이유였다.

1993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지명되었다. 하지만 1순위로 올랜도 매직에 지명된 크리스 웨버와 트레이드되어 페니는 올랜도 매직의 유니폼을 입게된다.

4 NBA커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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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시즌에는 팀에 주전 포인트가드스캇 스카일스[9]가 있었던 관계로 슈팅가드로 시작했다. 그러다가 후에 팀은 페니의 패싱능력과 창의적 플레이를 높게 사게 되고 스카일스를 밀어내고 페니를 주전 포인트가드로 기용한다. 샤킬 오닐과 콤비를 이루면서 2년차 시즌에 NBA 파이널을 경험. 상대는 6번시드로 간신히 파이널에 올라온 휴스턴 로켓츠. 당시 많은 전문가들은 젊은 패기의 올랜도가 우세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올랜도는 하킴 올라주원의 맹활약에 4전 전패로 처발리고 말았다. 페니는 파이널동안 맹활약했지만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

95-96시즌에는 샤킬 오닐이 개막전부터 결장했다. 샤크가 복귀한 12월 15일까지 팀의 에이스 역할을 맡았다. 페니는 팀을 초반 17승 5패로 이끌었다. 페니의 신들린 활약 덕에 올랜도는 샤크의 공백을 느끼지 않을 수 있었다. 올랜도 매직은 이때 프랜차이즈 최다승인 60승을 기록하면서 플레이오프에 안착했다. 1라운드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를 3전전승, 애틀란타 호크스를 4승1패로 가볍게 이기고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까지 올랐다. 하지만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에서 자신들이 굴욕을 안겨줬던 시카고 불스[10]에게 4전전패로 개박살나며 허무하게 탈락했다.

96년 샤킬 오닐LA 레이커스로 이적하면서 페니는 자연스럽게 팀의 리더가 되었다. 애틀란타 올림픽에서 드림팀3의 멤버로 뽑혔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페니는 결승전에서 유고슬라비아를 상대로 17득점을 올렸다.

비록 부상으로 59경기만 뛰었지만 평균 20.5점, 4.5 리바운드, 5.6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당시 올랜도는 성적이 그리 좋지는 못했다. 플레이오프에는 올랐지만 성적은 45승 37패로 작년에 비해 곤두박질 쳤고, 시즌 중간에 감독이었던 브라이언 힐이 경질되기도 했다. 마이애미 히트와의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2패로 끌려가던 올랜도는 페니가 3, 4차전에 연속으로 40득점을 기록하는 미친 활약상으로 시리즈를 타이까지 끌고 갔다. 당시 마이애미 히트 감독이었던 팻 라일리는 페니의 활약에 대해 "모자라도 벗어서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라고 하며 극찬했다.

하지만 97-98 시즌 왼쪽 무릎부상을 당해 19경기 정도만 출장하는 데 그쳤다. 이 때 부터 슬슬 부상의 악령이 씌기 시작한 듯. 98-99 시즌에는 단축시즌이긴 하지만 전경기를 출전했다. 그러나 확실히 이전의 폭발력은 많이 사라졌다. 결국 올랜도 매직은 페니를 포기하기로 결정하고 그를 피닉스 선즈로 트레이드 시켰다. 비록 이전의 폭발력은 사라졌지만 팬들은 당시 피닉스 선즈의 포인트가드였던 제이슨 키드와의 백코트를 이루는 것에 기대를 드러내며 백코트2000이라 부르기도. 그러나 이미 페니는 예전의 페니가 아니었다. 나중에는 주전자리를 조 존슨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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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2004 시즌 트레이드 데드라인에 페니는 스테판 마베리와 함께 뉴욕 닉스으로 트레이드 되었다. 하지만 대접은 피닉스 때보다도 더 나빴다. 2004년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준수한 활약을 하긴 했지만 2004-2005 시즌 그의 위치는 벤치 멤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더군다나 당시 팀의 단장이었던 아이재아 토마스는 페니를 거의 전력 외 취급하고 그의 락커룸도 없애버려 그를 분노하게 했다. 2005-2006 시즌에 뉴욕 닉스에서 스티브 프랜시스를 영입하기 위한 카드로 페니는 당시 뉴욕 닉스의 유망주였던 트레버 아리자와 함께 친정팀인 올랜도 매직으로 돌아갔다.

페니는 이때 과거에 자신이 달았던 1번 유니폼을 달 생각에 기뻐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올랜도 구단은 그런 페니의 기대를 철저히 저버리고 1번 유니폼을 트레버 아리자에게 줘버렸고, 페니는 방출시켰다. 차세대 리그의 아이콘이었던 페니 하더웨이는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속에 사라져갔다. 2007년 올스타전때 타미카 캐칭과 함께 쓸쓸하게 올스타전 경기를 관람하는 모습에 많은 팬들이 눈시울을 붉혔다. 그렇게 사람들에게 잊혀져 가던 페니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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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마이애미 히트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많은 팬들을 놀라게 했다. 비록 비보장 계약이긴 했지만 팬들은 그가 다시 코트에서 뛸수 있게 되었단 사실에 기뻐했다. 페니 본인도 복귀를 위해 훈련을 해왔다고. 덩크슛을 성공시킬 수 있을정도로 몸상태를 회복했다고. 시범경기에서 준수한 모습을 보여주며 기대감은 더욱 높아졌다. 하지만 팬들의 기대는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페니는 불과 16경기만에 다시 방출되었고, 사실상의 완전은퇴를 하게 되었다.

현재는 은퇴선수 자격으로 NBA에서 주관하는 여러 가지 행사와 월드이벤트에 간간히 모습을 비추며 팬들과 소통하고 있다.

5 이야기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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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라는 단서가 별 의미가 없긴 하지만 여전히 올드팬들 중에서는 "만약에 페니가 무릎부상없이 커리어를 보냈다면 어땠을까?" 라고 늘 상상하며 안타까워한다. 아마도 NBA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제 와서는 별 의미는 없는 넋두리일지도.

플레이스타일은 가히 만능. 득점뿐만 아니라 다재다능함까지 갖추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플레이뿐만 아니라 동료들까지 살려주는 플레이의 창의성이 뛰어나 전문가들도 극찬을 아끼지 않았을 정도였다. 포인트가드답게 경기운영능력과 볼 핸들링 능력은 탑 클래스 수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 팀을 생각하는 이타적인 마인드는 보너스. 전술한대로, 이 선수가 슬램덩크의 정우성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하는데, 실제 플레이는 가장 윤대협에 가깝다. 윤대협만큼의 피지컬에 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롱런할 수는 없었지만.[11]

사실 슈퍼스타치고 스탯이 평범한 편이라 스탯만 보고 평가하는 이들에게 과소평가받기도 한다. 스탯상 최전성기였던 95-96시즌의 스탯은 21.7점 7.1어시스트 4.3리바운드로 올스타급 스탯이긴 하나, 30점을 밥먹듯 찍던 마이클 조던이나 한때 13~14개에 달하는 괴물같은 어시스트를 찍던 존 스탁턴에는 한참 못 미치고, SG 콩라인이었지만 한 때 27점까지 찍던 클라이드 드렉슬러와 비교해도 초라해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전형적으로 스탯만 보고 평가하는 오류인데, 당시 페니의 득점력은 스카티 피펜이나 마이클 조던이 이끄는 불스도 위협적으로 느낄 정도였으마 실제로 매직과 불스가 플레이오프에서 붙었을 때도 팀은 털렸지만 조던과 피펜을 상대로 시즌평균보다 높은 25.5점을 기록했다. 위에 언급된 대로 다음 시즌 막강한 수비를 자랑하는 히트를 상대로 연속 40점을 올렸는데, '"팻 라일리의 팀을 상대로 연속 40점을 올리는"' 업적은, 라일리의 팀을 매년 털었던 마이클 조던[12]도 달성한 적이 없었다.

왜 이렇게 스탯이 초라하냐면, 1. 전성기 당시 페니의 경기당 기록을 보면 대량득점을 할 때도 있지만 득점이 유독 적을 때는 어시스트 수치가 높은데, 득점이나 어시스트 중 하나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워낙 다재다능해 많은 분야에 공헌했다는 점. 2. 한창 기량이 올라올 때 경기당 평득이 30에 가까운 샤킬 오닐과 뛰었다는 점. 3. 오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자리잡을 때쯤 부상에 발목잡혔다는 점, 등을 들 수 있다.

사실 이 부분들은 객관적인 수치로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동시대를 경험하지 않은 팬들이 이해하기 힘들고, "그래봤자 평득 21이 커리어하이인 선수 아니냐, 추억보정으로 과대평가된 것"이라고 하기 쉽다. 그러나 페니는 저 초라한 스탯을 기록하고도 95-96시즌 MVP투표 3위에 올랐다. 그가 제친 대상 중에는 27-11에 가까운 스탯을 기록한 하킴 올라주원과 팀동료인 샤킬 오닐도 있었다. 게다가 최전성기였던 게리 페이튼, 전성기에 비해 한참 꺾였지만 그래도 위력적이었던 존 스탁턴을 제치고 무려 퍼스트팀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스탯이 어쨌든 간에 당대 전문가들은 그를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는 증거다.


앤퍼니 하더웨이의 역대 top10 플레이

다만 공격에 비해 수비는 그리 높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구멍수준까지는 아니지만 탑 클래스 선수로써는 좀 평범한 수비력을 지녔다. 하지만 그가 커리어 내내 포인트가드 포지션이었고 자신보다 작고 빠른 선수들을 막아야했다는 것도 고려해야 한다. 이 때문에 매번 무릎을 굽히고 자세를 낮춰야 했기 때문에 무릎이 성할리 없었겠지만.

두번 언급하면 피곤하지만 당시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특히 그가 NBA에 데뷔하던 시기가 마이클 조던의 첫번째 은퇴 이후 첫 시즌이었기 때문에 뛰어난 기량과 높은 상품성을 갖춘 페니는 차세대 리그를 선도할 아이콘으로 부족함이 없었다. 나이키는 조던을 대체할 아이콘으로 페니를 전폭적으로 밀었다. 에어 조던시리즈처럼 당시 그의 시그니쳐 농구화인 에어 페니를 내놓았고, 에어 페니의 파란색/흰색 조합은 당시 간지 유니폼 중 하나였던 올랜도 매직 유니폼과 궁합도 잘 맞아서 큰 인기를 얻었다. 당시 나이키는 그를 위해 페니의 전용로고까지 만들어주었다. 에어 페니 시리즈는 최근까지 새로운 모델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과거 큰 히트를 친 에어 페니2, 펌포짓등의 모델들은 지속적으로 레트로 모델이 나오고 있고, 출시될 때마다 큰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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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 페니 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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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키 에어페니 시리즈

그가 얼마나 인기가 있었냐면 한번은 페니가 눈 위쪽에 상처가 나서 밴드를 붙였는데 이게 패션 아이템으로 유행하는 현상까지 있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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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런식으로.

샤킬 오닐과 함께 닉 놀테 주연의 블루 칩스(국내 출시명은 샤킬 오닐의 NBA챔프)라는 영화에 출연했다. 단역은 아니고 조연. 극중 닉 놀테가 감독으로 있는 대학농구팀의 주축 농구선수 3인방중 한 명을 맡았다. 아직 청소년티가 많이 가시지 않은 페니의 모습을 감상할수 있다.

심지어 나이키에서는 1995년에 페니의 인형 버전인 '릴 페니(Lil Penny)'를 등장시킨 광고를 선보이기도 하였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국내에서는 앤서니 하서웨이(Anthony Hathaway)라는 잘못된 이름으로 소개하는 정보도 많았다. 유명 배우인 앤 해서웨이(Anne Hathaway)[13]와 앤서니 홉킨스(Anthony Hopkins) 때문에 잘못 알고 있었던 것으로도 생각되지만, 일단 본명인 앤퍼니 하더웨이보단 별명인 페니로 더 알려진게 가장 큰 이유.

지금은 암투병중인 친구를 대신하여 중학교 농구팀 감독을 맡고 있다.[14]
  1. 실제 맨발 키는 6 ft 6 in = 198.12cm
  2. 페니 하면 매직의 뒤를 잇는 장신 포인트가드의 대명사 같이 인식되지만 막상 1번으로 뛴건 커리어 초창기 3~4년에 불과하다. 문제는 페니의 커리어 초기 4년이 너무나 강렬하다는거...
  3. 재학 당시(1991~1993)에는 교명이 멤피스 주립대학교였다.
  4. 농구를 하는 것을 나타내는 속어(A slang term for playing basketball).
  5. 사실 미국의 소위 말하는 4대스포츠 중에서 부상이 가장 잦은 스포츠는 미식축구, 그 다음이 농구다. 페니가 성인이 되서도 호리호리한 체격을 가졌다는 점, 부상이 엄청나게 잦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미식축구를 했으면 부상으로 인해 선수생활이 NBA에서보다 더 짧아졌을 가능성도 높다.
  6. 여담이지만 미국에서는 진짜 프로진출을 진지하게 노리는 운동부들과 동아리 정도로만 운동을 하는 학생선수들이 혼재되어 있기 때문에 NBA급 선수들은 다른 선수들과 수준 차이가 엄청 나서 고등학교 때 진짜 말도 안되는 스탯을 찍는 경우가 많다. 한 마디로 양학. 고졸로 nba에 직행한 코비 브라이언트, 케빈 가넷은 각각 30.8점 12리바운드 6.5어시스트 4스틸 3.8블럭, 25.2점 17.9리바운드 6.7어시스트 6.5블럭을 기록했으며 마이클 조던은 4학년 때 29.2점 11.6리바운드 10.1어시스트로 트리플 더블을 찍었는데도 원하던 대학인 노스캐롤라이나 스테이트에 진학하지 못했다.
  7. 당시 페니를 스카웃 하려고 했던 농구팀 관계자의 말에 따르면 페니는 너무 착해서 주변사람들의 말에 휘둘리지 않을까 걱정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루이스 여사가 "당신, 누구 말을 믿는 거야? 나야? 아니면 기자들이야?" 라는 말을 듣고 페니를 데려올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다고.
  8. 당시의 선수들이 훗날의 토크쇼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경기에서 드림팀 선수들은 나름 핸디캡을 적용한다고 초반에 일부러 쉬엄쉬엄 뛰다가 어느정도 점수 차이가 벌어지면 그때 제대로 뛰어서 따라잡을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연습 경기라 풀타임이 아니어서 점수 차이가 벌어지고 드림팀이 이제 막 제대로 해보려고 했는데 경기가 끝나버렸다고(__)
  9. 통산 11점 6.5어시스트를 기록한 평범 그 자체였던 포인트가드였으며 오히려 이후 감독으로 더 성공한 케이스. 그러나 90-91 시즌에는 NBA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세웠는데, 한 경기에서 무려 30어시스트를 기록한 것. 역대 최고의 어시스트 기계였던 존 스탁턴조차 한 경기 최대 기록은 28개에 불과(?)하다. 참고로 이때 스카일스는 17.2점 8.4어시스트를 생애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아이러니한 건 스카일스와 페니의 전성기 실력이나 위상은 비교도 안됐음에도 (스카일스는 올스타에도 한번 뽑혀 본적이 없지만 페니는 한 때 강력한 MVP후보였다) 페니가 말년에 워낙 많이 깎아먹어서인지 페니의 통산 스탯은 15.2점 5어시스트로 스카일스와 별로 차이도 안 난다.
  10. 참고로 불스는 이시즌 NBA 역대 최다승인 72승 시즌
  11. 윤대협은 테크닉과 플레이스타일이 워낙 독보적이라 주목하지 않았을 뿐이지 당시 기준 센터도 가능한 190cm의 장신에 몸싸움능력을 갖춘 포워드의 몸뚱이였다.
  12. 여담이지만 조던은 라일리의 팀을 상대로 플레이오프에서 단 한번도 시리즈를 내준 적이 없다. 레이커스를 지휘하던 시절은 플옵에서 만난 적이 없고 92년에 라일리가 닉스로 옮겼을때 처음 만났는데 7차전 만에 승리, 이듬해는 닉스가 불스보다 성적이 더 좋았음에도 6차전 만에 꺾었으며, 라일리가 96시즌부터 팀을 옮기고 2년 연속 만났는데도 각각 세 경기, 다섯 경기만에 승리했다.
  13. 하지만 이 배우의 데뷔는 99년에 방영된 미드다...
  14.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