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리 페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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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게리 페이튼 (Gary Dwayne Payton)
생년월일1968년 6월 23일
193cm (6 ft 4 in)
체중82kg (180 lb)
국적미국
출신지캘리포니아오클랜드
출신학교오리건 주립대학교
포지션포인트가드
드래프트1990년 1라운드 2순위
시애틀 슈퍼소닉스 지명
소속팀시애틀 슈퍼소닉스(1990~2003)
밀워키 벅스(2003)
LA 레이커스(2003~2004)
보스턴 셀틱스(2004~2005)
마이애미 히트(2005~2007)
등번호20번
수상내역NBA champion 1회 (2006)
NBA All-Star 9회 (1994-1998, 2000-2003)
All-NBA First Team 2회 (1998, 2000)
All-NBA Second Team 5회 (1995-1997, 1999, 2002)
All-NBA Third Team 2회 (1994, 2001)
NBA Defensive Player of the Year (1996)
NBA All-Defensive First Team 9회 (1994-2002)
NBA All-Rookie Second Team (1991)
NBA steals leader (1996)
1996년 NBA 올해의 수비수 상
디켐베 무톰보게리 페이튼디켐베 무톰보
1996년 NBA 올해의 스틸왕
스카티 피펜게리 페이튼무키 블래이록

1 개요

역대 최고 수비를 잘하는 가드
최고의 트래쉬 토커 중에서도 탑을 차지하는 선수

NBA 선수. 포지션은 포인트가드. 17시즌 동안 NBA에서 뛰었으며 그 중 13시즌을 시애틀 슈퍼소닉스 소속으로 활동한 소닉스의 프랜차이즈 스타. 득점력도 뛰어났지만 특히 포인트가드로서 역대 최고의 수비수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닉네임인 "The Glove"는 그의 탁월한 수비력을 상징한다.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한 유일한 포인트가드.

2 커리어

2.1 NBA 이전 커리어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출신으로, 같은 동네에 제이슨 키드와 브라이언 쇼가 살았다고 한다. 동네에 포인트가드 수맥이 흐르나 길거리 농구를 하면서 서로 알던 사이였다고. 오레곤 주립 대학 시절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 표지를 장식할 정도로 대학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았으며, 1990년 데릭 콜먼에 이어 1라운드 2픽으로 시애틀 슈퍼소닉스에 지명된다. 1990년은 유난히 스타급 선수들이 빈곤했던 해로[1] 게리 페이튼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선수가 나오지 않았다.

2.2 시애틀 슈퍼소닉스 시절

96 파이널에서 마사장님과.

페이튼은 루키 시즌부터 주전 포인트가드로 출장한다. 첫 3년은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으나, 리그에 적응하며 서서히 스텝업을 하더니 4년차부터 올스타급 가드로 올라서고, 5년차부터는 20+득점 8+어시스트를 기본으로 하는 톱가드로 발돋움한다. 올스타 9회, All-NBA팀 9회(퍼스트 팀 2회), 9년 연속 디펜시브 퍼스트 팀 선정은 공/수/어시스트의 밸런스가 완벽하게 갖춰진 그의 전성기를 반영하는 이력.

그보다 한해 일찍 팀에 들어온 파워포워드 숀 켐프와의 듀오는 "소닉 붐"으로 불리는 리그 최고의 원투 펀치 중 하나로 꼽혔으며, 소닉스가 90년대 서부 지구 최고의 강팀 중 하나로 군림한 원동력이 되었다. 다만 플레이오프는 꾸준히 진출한 반면 플레이오프 성적이 아주 좋은 편은 아니었다. 파이널에는 1회, 컨퍼런스 파이널에는 1회 밖에 진출하지 못했으며 1993년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찰스 바클리피닉스 선즈에게 3-4로 패배했고, 1996년 파이널에서는 마이클 조던의 72승 10패 시카고 불스에게 2-4로 패배하며 준우승에 그쳤다.

2.3 시애틀 슈퍼소닉스 이후

페이튼은 2003년 시즌 중에 레이 알렌 등 5명의 플레이어와 묶인 트레이드로 밀워키 벅스로 이적한다. 벅스에서 잔여 28경기를 치른 후 FA로 풀린 페이튼은 이미 35세로 커리어 막바지에 도달해 있었다. 우승을 위해 LA 레이커스로 가기로 결정한 페이튼은 같은 꿈을 품고 온 칼 말론과 함께 반지원정대로 불리는 03-04 레이커스 라인업을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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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게리 페이튼 - 코비 브라이언트 - 칼 말론 - 샤킬 오닐의 무시무시한 네임 밸류를 자랑하던 이 라인업은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즈에게 1-4로 털리며 한 시즌만에 해체되고 만다. 그리고 이 시절은 2012-13 시즌 스티브 내쉬 - 코비 브라이언트 - 메타 월드 피스 - 파우 가솔 - 드와이트 하워드 라인업으로 더 처절하게 재현된다.그래도 전자는 파이널에 올라가기라도 했지, 후자는... 페이튼은 기량 하락과 트라이앵글 오펜스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이 맞물려 플레이오프에서 8.0득점 5.4어시스트 FG 36.6%라는 안습한 성적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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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레이커스는 페이튼을 보스턴 셀틱스로 트레이드시켜 버리는데, 보스턴에서 1년간 선발 출장하다가 2006년 마이애미 히트와 1년 계약을 맺고 제이슨 윌리엄스의 백업으로 뛰게 된다. 그런데 이 해 드웨인 웨이드의 대폭발로 파이널에서 댈러스 매버릭스를 꺾고 우승을 하고 만다! 16년만에 NBA 우승을 차지한 페이튼은 스탯상으로는 뛰어나지 못했지만 3차전과 5차전에서 게임 위닝 샷을 넣으며 관록을 입증한다. 우승 후 마이애미에서 1년을 더 뛴 페이튼은 39세의 나이로 은퇴한다.

3 플레이 스타일

뛰어난 공격력과 최고의 수비력, 좋은 어시스트와 리바운드 능력이 조화된 올어라운드형 포인트가드. 역대 최고의 포인트가드 중 하나로 꼽히기도 한다.

포인트가드치고 큰 신장에 빠르고, 말라보이지만 힘이 좋아서 돌파 및 포스트업 플레이에 능했다.[2] 1999-2000 시즌 평균 24.2득점을 비롯, 무려 7시즌 동안 20+ 이상의 평균 득점을 기록한 한편 동시에 8~9 어시스트를 찍었는데 이는 공격형 포인트가드로서 최상급의 스탯. 그런데 수비력은 훨씬 더 좋았다(…). 가드 포지션에서 빅맨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올해의 수비수 상을 따낸 몇 안되는 선수 중 하나이며 페이튼 이후 14-15시즌 현재까지 가드 포지션의 수상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악착같은 대인 수비는 그에게 "마치 글러브로 공을 감싸듯 상대를 잡아버린다"는 의미로 "The Glove"라는 별명을 부여했으며[3] 대인 수비 못지 않게 팀 수비에도 뛰어났고 손이 크고 빨라서 스틸에도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1996년 시즌에는 평균 2.9 스틸을 기록, 스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리바운드를 페이튼보다 많이 잡은 포인트가드는 오스카 로버트슨, 매직 존슨, 제이슨 키드 정도 밖에 없다.

마이클 조던을 가장 잘막았던 선수로 유명하며, 1996년 파이널에서 시애틀이 처음 3차전에서 내리 털리자 페이튼이 나섰고, 페이튼은 이후 조던을 23점/26점/22점으로 묶었다. 특히 6경기에서 조던은 5-19의 필드골과 22점을 기록했으며, 이는 조던의 파이널 커리어 로우. 1996 파이널에서 조던은 평균 27.3점으로 확실히 조던치고는 낮은 득점을 기록했다. 96년 파이널을 제외하면 조던의 파이널 평균득점은 30점을 상회한다.[4][5] 내구력도 무지 좋은 선수라 큰 부상에 시달린 적이 없고, 17년 동안 단 25게임을 결장했다.

단점도 있었는데, 일단 가드치고 슈팅이 별로 좋은 선수가 아니었다. 자유투가 70%대였고 점퍼는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수준이었으며 3점슛은 좀 안좋은 편. 또한 분명히 모든 방면에서 탁월하고 장기간 기복없이 정상급의 실력을 보여주긴 했지만 MVP급이라든가 리그를 지배했다고 할만큼 압도적인 임팩트를 보여준 것은 또 아니었다.

4 트래쉬 토크

한 가닥한다는 선수들이 잘한다는 트래시 토커 중에서도 거의 탑을 차지 하는 선수.
테크니컬 파울 역대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벌금을 2만달러씩 물기도 했다.
최고의 트래쉬 토커는 누구인가? 라는 설문조사에 조던, 버드와 원탑을 다툴정도. 대부분 1위를 차지하고는 한다.

하루는 그의 그칠 줄 모르는 입에 질렸던 존 스탁턴이 "자네 입엔 모터가 달렸나 그만좀 하지?" 라고 일침을 놨는데, 이에 페이튼은 "영감님이 내 젊은 혀가 부럽나보군."(…) 이라 화답했다. 오죽했으면 한 말빨 하는 마이클 조던마저 "페이튼의 아가리에 농구공을 쳐넣고 싶었다." 라고 회고했을 정도. 그와 동시대에 활동했던 찰스 바클리 역시 가장 트래쉬 토크를 잘하는 사람 네사람을 꼽았는데 래리 버드, 마이클 조던, 레지 밀러 등과 함께 뽑혔다.

한 입담하는 샤킬 오닐도 최고의 트래쉬 토커로 개리 페이튼을 뽑으면서 말하기를 "그 양반의 트래쉬 토킹은 최고 수준이었어요. 그냥 아무도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죠. 근데 더 미친 사실은 그 양반은 코드 밖에서나 안에서나 그랬다는 점입니다." 라고 하면서 페이튼을 흉내내는데 꽤 볼만하다.

본인도 이에 대해서 알고 있으며 명예의 전당 입상 연설에서도 이 점에 관해서 언급한 점이있다. 자신을 역대 최고의 트래쉬 토커로 언급하면서 말하기를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려는 의도였다기 보다는 내 자신에게 동기를 부여하기 위했다" 라고 하면서 악의적은 아니었다고 언급하였다.

2004년에 방한하여 행사를 갖기도 했는데, 동행했던 농구 잡지 루키 기자의 후일담에 따르면 인터뷰 끝나고 탁구를 몇 게임 쳤는데 거기서도 쉴새없이 나불댔다고 하니 상대와 종목을 가리지 않는 진정한 트래쉬 토커라고 할 수 있겠다.

이렇게 항목이 분리된거만 해도 그의 트래쉬 토킹이 얼마나 유명한지 잘 알려준다.

5 기타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레전드였기에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후신인 오클라호마시티 썬더의 영구결번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은 슈퍼소닉스의 프랜차이즈 플레이어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하기사 OKC가 형식상 슈퍼소닉스의 후신이긴 하지만 연고이전을 하면서 슈퍼소닉스 프랜차이즈 권리 일체를 포기한 상황이라[6] 사실상 남남에 가까운 상황이긴 하다. 만약 시애틀에 슈퍼소닉스의 프랜차이즈를 제대로 잇는 구단이 창단된다면, 그 팀에서 시애틀 슈퍼소닉스의 20번으로 영구결번이 될 확률이 높다.

2004년과 은퇴 후인 2012년에 한국에 방문하기도 했다.
  1. 1라운드는 데니스 스캇, 켄달 길, 타이론 힐, 엘든 캠벨, 2라운드는 토니 쿠코치, 세드릭 세발로스, 안토니오 데이비스 정도가 있다. 이 중 올스타가 된 선수는 안토니오 데이비스, 그것도 단 한번이다.
  2. 특히 하체가 매우 강했다고 한다. 그의 대인 수비 원동력도 바로 여기에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마이클 조던과의 매치업을 보면 포스트업의 귀재였던 조던과의 몸싸움에서도 전혀 밀리지 않는다. 역시 남자는 하체. 호리호리하지만 역대급 수비능력을 보유한 케빈 가넷과 비슷한 케이스.
  3. 1993년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유래
  4. 물론 우리의 마사장님께서는 "나를 막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 라고 하면서 자신의 부진이 페이튼 때문이 아니라고는 하였지만 경기 내내 조던은 페이튼을 상당히 귀찮아 했던 것이 역력히 드러났다. 운동실력도 운동실력이지만 말빨로도 밀리지 않는 페이튼은 말빨로 하면 페이튼이 우위다 조던에게 상당히 귀찮고 짜증나는 상태였음을 부인할수는 없다.
  5.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페이튼의 수비가 조던 봉쇄의 핵이었지만 이때 소닉스는 조던 봉쇄에 팀 전체가 달려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7WpkXlrJxtw 이 영상을 보면 조던이 공을 잡기 전에는 페이튼이나 허시 호킨스가 집요할 정도로 피지컬하게 디나이 수비를 하고 (90년대엔 여러 차례 룰 개정 전이라 현재보다 거친 수비가 가능했다. 물론 이도 80년대에 비하면 약해진 거지만), 조던이 공을 잡는 즉시 최소 한두명이 추가로 달라붙고는 그가 어디를 가든 간에 소닉스 팀 전체가 반응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리그에서 손꼽힐 정도로 단단하고 유기적이기로 유명한 소닉스의 수비는 당시 약간의 등부상을 안고 있던 조던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또한 96년 파이널을 보면 시즌 평균보다 4점 가까이 더 넣은 숀 켐프를 제외하면 양팀 통틀어 평균보다 높은 성적을 기록한 주축 선수가 없다시피한데, 그만큼 불스-소닉스의 강력한 팀수비가 부각되는 시리즈였다.
  6. 슈퍼소닉스의 프랜차이즈 권리는 시애틀 시가 소유하고 있다. 2013년에 시애틀 연고의 사업가들이 컨소시엄을 형성하여 새크라멘토 킹스를 매입하여 슈퍼소닉스를 부활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구단주 회의에서 부결되어 무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