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장기려(張起呂) |
출생 | 1911년 8월 14일, 평안북도 용천군 |
사망 | 1995년 12월 25일, 서울특별시 |
본관 | 안동 장씨 |
가족 | 배우자, 슬하 3남 3녀 |
직업 | 외과 의사 |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신 사랑이 넘치신 위대한 대의원
대한민국에 돈이없어 치료를 못받는 가난한 국민들을 위해 보험제도를 최초로 도입한 의사
바보의사, 한국의 슈바이처라고도 불리운다. 한마디로 대인배.
1 개요
평안북도 용천군 태생. 야인시대 의사양반 역의 모델이 되었던 백인제 박사의 수제자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의전 외과 조수로 입문하고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 외과 과장자리를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고, 아마도 백인제는 자신이 퇴임한 후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을 장기려가 이끌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이나, 장기려는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세브란스 외과 이용설의 추천으로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부임한다. 그 이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차남 장가용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난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다. [1]
혹부리수령을 수술해준 인연 덕에 장기려는 북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모범근로자로 선정되어서 포상도 자주 받았고 여러차례 상도 받았다. 김일성이 맹장염으로 앓아누은 적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장기려부터 찾았지만 그와 연락이 안돼서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는데 북에서는 장기려가 수술했다더라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장기려의 명성은 높았고 북에서의 지위도 높았다. 심지어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교회에도 가고 예배를 할 특권도 주어졌다. 그가 월남한 후에도 북에서는 그가 월남한 것이 아니라 납남된 것이라고 주장하였고 그 덕분인지 이북에 남은 아내와 딸과 아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북에 남은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 공부하여 의사가 되었다.
평양 철수로 월남한 직후에 북에서 우대받은 일로 인해 자주 방첩대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다. 다행히 한 미국인 선교사가 신분을 보증해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평전에서는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온전하게 있었을까?'라는 표현으로 서술되어있다. 같이 월남한 아들에게서 본 손자는 목수[2]를 원했는데, 중앙대 의대에 들어가서, 의사가 되었다.
춘원 이광수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만나고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말이 있는데 장기려 본인은 부정했다. 사실 안빈이 과학에 미쳐, 인도주의적 이미지가 없는 광기 가진 인물로 그린 티가 있는 것과 이광수가 보이는 비극적 죽음을 선택한 여성을 비하한 예를 생각한다면, 자기가 모델이란 점에 굉장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후에 한국 최초 부검의가 되는 문국진이 제자인데, 부검을 1950년대만 해도 두번 죽인다는 인식이 깊게 깔려, 반대를 외쳤던 일화가 있다는 점에서 추측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눈총과 고된 업무로 지친 제자 문국진이 부검의를 관두려고 할때 불같이 혼을 내 정신을 차리게 한것도 장기려이다.
일제강점기때부터 외과의사로 살아왔고, 그의 아래에서 일한 제자들은 모두 다 외과 전문의이긴 하나, 해방이후 국가가 주관하는 첫 외과전문의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가 되려고 공부한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대한외과학회 회장까지 한 적도 있다.
부산에서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진료하였다. 이외에도 부산에 설립한 의료시설이 많다. 부산지역 대학병원 외과의 뿌리는 장기려로 시작되거나 직간접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심지어 모 대학병원에는 장기려 박사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1995년 12월 25일 성탄절에 지병인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별세하였다.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매우 청빈한 삶을 살았다. 어느정도였냐 하면, 죽을 때까지 자기 재산은 하나도 없었다고[3]. 죽을 때까지 본인의 개인 사택 없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옥탑방에서 기거했다.
2 업적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청십자 의료보험이라는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을 창설,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나은 의료혜택을 입도록 한 주인공 되겠다. 청십자 의료보험[4] 은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토대가 되었다.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한 의료환경변화의 여파를 생각한다면, 그가 한국 의료계에 끼친 영향은 독보적이다.
그는 의료보험을 도입한 의료행정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외과의사였는데, 국내에서 대량 간절제를 최초로 시도 성공하기도 하였다.
3 트리비아
정부에서 의료수가를 책정할때 장기려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참고했는데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일종의 봉사단체의 성격으로 의료수가 중 인건비 부분이 빠진 상태였고 이것은 현재 의료수가가 낮아지게 된 요인이라는 설이 있다. 한국의 의료수가는 미국을 제외한 동남아 국가보다도 낮은 상태로 대부분 의료기관이 보험수가 이외의 방법으로 수입을 올려 유지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선의로 인건비를 뺐지만 이는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저수가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니 마냥 좋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 당연히 장기려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그 것을 악용한 정부당국이 나쁜 것이지... 종교인으로서 봉사활동이 아닌 세속국가로서의 의무를 저버린 독재정권다운 속내일 것이다. 이를 알만한 의료인출신 방송인 한명이 이를 무시한 발언을 하다가 심각한 후폭풍을 당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다시 돌아와서 실제 한국의 경우 장비를 사용하는 의료비용이 의료인이 직접 참가해서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의료비용보다 높다. 실제 맹장염 수술수가는 26만원(2015년기준)인데 비해 MRI 는 40-100만원에 달한다.기사보기
4 일화
- 눈물과 정이 매우 많은 성격이였다고 한다. 지나가는 거지에게 적선을 한다는 것을 한 달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털어 주는 바람에 경찰서에 끌려가 이 거지에게 수표를 도난당한 것이 아니냐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고, 치료비가 없었던 환자에게 자신의 급여를 가불시켜 지불해주기도 했고, 병원측의 반대로 치료비 대납이 원활하지 않자 뒷문으로 도망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든지, 죽을때까지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부인을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살았다든지하는 이야기가 있고, 원리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일화에 대해 무수히 많은 일화가 있으나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긴 어려우니, 평전 '장기려, 그 사람'을 참고하기 바란다.
-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정부가 제안한 특별 상봉을 거절한 것. 누가 보아도 그만한 특혜를 받고도 남을 자격이 있는 그였으나, 수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다른 이산가족들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며 결국 거절하였다. 당시 북에서는 남한이 장기려를 납치해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장기려가 북에 가지 않으면 세계 여론이 북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정부는 거의 반강제로 장기려를 북에 보내려 했으나 이에 분노한 장기려가 "오냐, 그럼 가주겠는데 대신에 북에 가면 안 돌아올거다."라고 엄포를 놓자 경악하여 보내지 않았다. [5]
- 현봉학 박사가 제자였다는 것. 이 분이 이산가족 관련 움직임을 보인 것이 집안도 그렇지만, 스승인 장기려 박사도 특혜가 아닌 포괄적인 만남을 원한다는 것에서 동기였다는 발언이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이 좋은 소리를 못 듣는 이유와 김무성대표가 불똥 튄 것을 생각하면, 이래저래 씁쓸한 일. 그리고, 세월호참사가 오대양과도 연관이 있자, 여기를 부검을 실시한 문국진 박사도 제자이었기에 해상에 관련된 유명한 사건들에 연관된 제자들을 둔 셈이 되었다.
-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에게서 수술을 받고 싶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진료를 하셨다고 한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왕진하며 다니시곤 했는데 죽기 며칠 전 평소보다 일찍 사람들을 찾아가 치료하며 "올해는 못 올 것 같아 일찍 왔네"라고 했다고.
- 장면 총리 여동생이 되는 수녀원장과의 한국전쟁 전 이북에서 인연과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회장 여동생이 되는 유순한과의 인연도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다른 줄기라는 의견도 있다.
- 어느날 장기려 박사가 해외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사치라곤 모르던 박사가 해외 여행을 가고 싶어하길래 사람들이 대체 어디를 얼마나 가고 싶으면 저러시나 싶어서 어디를 가고 싶으시냐고 물었는데 장기려 박사는 동베를린에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국가이자 적성국인 동독엔 왜 가고 싶냐고 묻자 장기려 박사는 내 아들 학용이가 거기 있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실제로 북에서 의사가 된 장기려 박사의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도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동베를린에 열린 사회주의권의 의학학술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소식을 장기려 박사가 들은 것이다. 당장 가더라도 아들을 만나긴 불가능했겠지만 아들이 밟았던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 평양에서 남쪽으로 피난 올 때 원래는 버스를 타고 혼자 먼저 가고 이후에 부모님과 부인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따라오기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남 장가용이 아버지의 짐을 들어주기 위해 얼떨결에 동승하게 되었고, 그것이 가족과의 이별이 되었다고 한다. [6]
- 끝내 상봉은 못했지만 같이 월남한 차남 장가용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북의 아내에게 보냈는데 아내는 사진을 보더니 장기려 박사의 사진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면서 "이게 가용이구나, 아버지와 꼭 닮았어."라고 했는데 사진을 가져온 사람이 "그 분이 장기려 박사님이고 옆의 젊은이가 가용입니다."라고 말해주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평양에서 살며 고생을 덜 하긴 했어도 그래도 홀몸으로 시부모와 5남매를 키우느라 원체 고생을 하느라 당연히 자기 남편도 자기만큼 늙었을 줄 알았고 그래서 생각보다 훨씬 덜 늙은 남편을 아들로 안 것.
- 죽기 직전까지도 아내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며 아내를 그리워하셨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고문사였다는 진실을 밝히는데, 공헌한 부검의 2명. 오연상과 황적준은 중앙대와 고려대 출신 국과수에 속해 있음에도 장기려 박사와 연관이 짙게 되어 있다. 위에서 손주가 다닌 당시 중앙대 의대 교수가 오연상이었고, 황적준은 위에서 소개한 문국진으로부터 부검을 배운 부검의이었다. 국과수로 가기 전에는 고신대 의대에서 있었다는 퇴임 기념 인터뷰에서 밝힌 점으로 보아 장기려 박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 고신대에는 국내에서 유일한 곤충법의학 전공 교수로 있는 문태영은 바로 문국진의 아들이란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립에 장기려 박사가 알게 모르게 세운 업적이 있지 않는가란 의문이 발생한다는 시각이 나오고 있다.
- 장기려가 죽기 직전에 장기려의 애제자들이 장기려의 흉상을 만들어주려 했는데 중환으로 죽어가던 장기려는 분노하여 "내 흉상을 만드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라고 일갈했고 제자들은 기겁하여 주저앉아 버렸고 놀란 사진기사는 방밖으로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진정한 복음주의 기독교인이었던 장기려 박사에게 흉상을 만든다는건 십계명을 어긴다는것과 같은 의미였다는거... 그런데 문제는 장기려 박사가 이렇게 화를 냈는데도 흉상은 결국 만들어 졌다(...)
- 시장에서 바가지 씌우려는 상인들이 부르는 값보다 언제나 비싼 값을 주고 물건을 샀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박사님이 그래서 바보 소릴 듣는겁니다. 그게 바가지#s-3 씌우는 값인줄 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라고 하자 "그 바가지#s-3 씌운 값을 깎으려 해봤자 그 사람들이 앞으로 바가지#s-3를 씌우지 않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올려서 주면 앞으로 겁이 나서라도 그러지 않겠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 목사와 약간의 인연이 있다. 마취 기사이자 비서로 장기려와 함께 일하며 '장기려의 막내아들'로 불릴 정도로 장기려와 가깝게 지낸 손동길이란 사람이 있는데, 손양원의 조카이다(손동길의 숙부가 손양원). 다만 손양원과 장기려가 직접 만난 적은 한번도 없다.
5 관련저서
- ↑ 본래 10월 19일 한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다친 그들을 치료했으나 약 2개월 뒤인 12월 4일, 북한 공산당이 중공군들과 평양으로 다시 들어온 다는 소식에 아내의 권유에 따라 남으로 피난했다.
- ↑ 아무래도 예수같은 인물이 되기를 바랬던 모양일 가능성이 높아 너무하신 것 아니냐는 불만도 있다.
- ↑ 사실 엄밀히 말해서 재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수중에 천만원 정도는 남아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천만원을 자신의 병수발을 들어주었던 어느 아주머니에게 전부 주었다.
- ↑ ET 할아버지로 유명해지는 채규철, 김서민 등과 함께 설립. 아직 부산 전포동에 청십자병원(행복한병원)으로 남아있다.
- ↑ 사실 장기려 박사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북에서 납남되었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장기려 박사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대우를 받고 살 수 있었던 것인데 만일 정부의 말을 듣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긴다.
- ↑ 차남 장가용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의사가 되었고, 2008년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