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튼 워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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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무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 ~ 1950년 12월 23일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1950년, 낙동강 전선을 시찰하며 한국군 장병에게.

한국전쟁에서 대한민국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준 영웅 2세대중 아버지
맥아더와 더불어 한국전쟁에서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1]
워커힐 호텔의 창립자

1 개요

1912년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관총부대의 중대장으로 참전한 것으로 군 생활을 시작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조지 S. 패튼이 지휘하던 제3야전군 산하의 20군단장으로 참전했는데 빠른 기동성과 활약으로 그의 부대가 '유령 군단'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다만 나이에 비해서 진급이 늦었다는 평을 들었으니, 6.25 전쟁에서 보듯이 비정치적이었고 기자들이나 외부인사들의 방문을 아주 싫어했다고 한다.[2]

2 6.25 전쟁 참전

6.25 전쟁이 발발하자 미8군 사령관[3][4]으로 한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낙동강 전선에 참전했는데 중장이라는 높은 계급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전선 최전방에 맨 앞에 서서 부하들을 진두지휘했다. 또한 당시 대위였던 늦둥이 외아들 샘 워커 역시 한국전에서 활약한다.

당시 6.25 전쟁의 상황에 대한 두 가지의 사실이 있는데, 아래와 같다.

2.1 New Korea Plan

6.25 전쟁 초기 한국군과 유엔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에 고전하자, 미국 정부에서는 한국의 정부요인 및 피난민을 합친 62만명의 인원을 배에 태워서 당시 뉴질랜드령이었던 서사모아 제도 내 어느 섬으로 이주시키고 망명정부를 구성하는 계획이 있었다.

이 계획은 이른바 New Korea Plan으로 당시 미국정부가 미8군사령관을 통해, 한국 육군참모총장에게 영천 방어선이 붕괴되면 이승만 대통령과 서사모아로 가서 망명정부를 구성할 것을 요청했다는 기절초풍할 제안이 실제로 존재했었다는 것.참조 항목

다만 이 사실과는 달리 말 그대로 한국의 정부 인사와 군 관계자들에게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던 계획에 불과했다. 일단 제주도대만화는 제주도가 식수가 부족하고 척박하다는 이유로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일본의 경우는 대한민국 망명정부를 세우기에는 반일감정 및 일본 내 우익 세력의 테러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한국 정부가 재일교포들을 한국 국민으로 편입시켜 인적 자원을 확보하려 들 텐데 과연 일본이 그걸 용인하겠느냐는 문제도 존재했다.

비밀 문서 해제에 따라서 일정을 보면 국군 고위 장교 및 그 가족, 정부 인사 및 그 가족을 우선으로 하고 아직 전투력을 보전한 한국군 약 몇 개 사단을 주축으로 한다는 것이다. 민간인은 서사모아에 정착하고 군인들은 미군 지휘 체계에 통합한 다음 아시아 방위에 이용한다는 내용. 하지만 서사모아 정착도 말처럼 쉽지가 않은 게 한국 민간인을 수십만에서 많게는 100만 단위로 정착시키면 당연히 기존 원주민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고 이후 양측의 마찰은 상당할 것이 분명하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은 말 그대로 제안이다. 그것뿐이겠지만, 만에 하나 낙동강 전선이 쓸려나갔으면 남한의 사람들은 정말 어디론가 가서 망명정부 차렸을지도 모른다.[5] 목적지가 서사모아건 제주도건 간에.

그 당시의 전황 판단, 그리고 현재의 판단으로도 미루어 볼 때 낙동강 전선은 남한을 위해서 반드시 지켜냈어야 할 보루였음이 실로 명백하다. 밀려나면 남한은 끝장이었을테니까.

그런데...

2.2 맥아더 사령관은 남한을 포기하려 했다?

미국 정부의 입장에서 정말 낙동강이 쓸려나가면 남한 전국민을 집단 이주를 보내야 하는건가 싶었던 그 당시에, 미국 정부는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항목 맨 마지막 비문 내용에 다시 나온다.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사령관도 남한을 포기하는 것을 고려했었다. 본국에서 준비한 'New Korea Plan'은 둘째치고 전면 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으니...파죽지세로 북한군에 거의 모든 지역을 점령당한 당시 상황에 비추어볼 때 객관적으로도 남한은 승산이 없어 보였다.

남한 사수가 힘들어지면 일시적으로 일본으로 패주한 후 재정비를 고려하거나 아니면 저 망할 New Korea Plan처럼 서사모아로 가는 것을 머릿속에서 생각했을 것이다. 애초에 더글러스 맥아더가 사령관이면 이런 일련의 상황들을 모를 리가 없는 것도 그렇고...

그러니까 미국 정부는 전황이 어두워지니까 우리 철수해요. 이러고 있었다는 거다. 앞서 말한 대로 낙동강에서 밀리면 알지도 못하는 섬으로 남한의 국가수반 + 전국민이 이사를 가야 하는 마당이었다. 거기다 대고 안됨. 우리 무조건 버텨보겠음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워커 중장이다.

3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워커 중장은 맥아더에게 남한 사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맥아더는 일본에 있었고 워커 중장은 한국에 있었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 장병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전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그리고 미국 장병들에게 아래와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이 사람이 미군 장병들에게 내질렀던 전설적인 명언은 다음과 같다.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

문제는 좁디좁은 낙동강 전선에서도 전개한 유엔군의 병력은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말 그대로 버티기도 어려울 정도로 얇은 선을 그은 건데, 결국 부대 전체가 일종의 소방대처럼 한쪽의 위기가 발생하면 다른 쪽의 병력을 빼서 그쪽을 틀어막는 전략…. 그나마 방호산[6]이 마산 쪽으로 급습을 시도하는 바람에 이 전략도 무너질 뻔했다. 어렵고 어려운 상황이었다.

4 월튼 워커의 결단, 그리고...

사실 워커 중장의 무자비한 한국 사랑에 대한 이유는 알 길이 없다. 갑작스런 사고로 순직했기에 자서전 등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어쨌든, 워커 중장은 인상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아닌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미국 장병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게 마땅한가?라거나 버티지 못하면 죽어라? 조국도 아니고 다른 전선에서 이러는 건 마치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하던 명령과 차이가 뭔가?와 같은[7]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나마 맥아더가 군국주의? 뭘 모른다. 워커의 말은 역사상 많은 장군이 흔하게 내리던 명령일 뿐이다. 그런 것에 민주주의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라는 발언을 하면서 그를 두둔해주었다. .[8]

워커 중장은 미국 정부도 사령관도 집어 치우고 집에 가자!고 말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버텨보겠다고 발벗고 나섰다. Stand or die란 발언 덕에 본국 의회에서 논란을 일으켜서 한참을 욕 먹어가면서도 한국 꼭 지켜야 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미국 정부와 사령관을 설득하고, 한국 장병한테는 내가 죽더라도 한국을 꼭 지켜줄게라고 하면서 한쪽으론 미군 장병들한테 못 버틸 거 같으면 죽어버려!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다녔다(...).[9]

워커 중장은 최전선에서 방어에 힘썼고 한국군과 미군 병사들이 모두 미숙한 훈련병들 위주였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타흐신 야즈즈 소장이 이끄는 1개 사단 + 1개 여단의 터키군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버는 데에 성공하여 방어선을 굳혔다.

참고로, 영천전투에서 북한군 전차에 시달리던 한국군이 제발 한 대라도 좋으니 탱크 좀 보내달라고 워커 중장에게 부탁했는데, "탱크는 보병과의 협동 없이는 고철에 불과하다. 한국군은 보전협동훈련을 받지 않아 보내줘도 쓸모없음."이라고 말해 단념했다. 그런데 말로는 그렇게 해놓고 M26 퍼싱 5대를 보냈다. 츤데레? 이걸 본 한국군의 장병들이 만세를 불렀다는 일화가 남아있다. 출처

이후에 맥아더의 낙동강 전선 시찰이 이루어진다. 이 시찰 덕분에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 구상이 가능해졌고, 워커 중장은 사령관을 도와서 인천 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무훈을 세웠다. 성공 확률 1/5000이라는 전쟁영웅의 업적인 인천 상륙작전도 워커 중장이 낙동강을 지켜내지 않았다면 시작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다.

4.1 한국에 대한 애정?

다만, 일각에서의 월튼 워커의 한국 사랑이라는 표현은 과장이 있다.

사실, 맥아더의 극동 사령부는 맥아더 패밀리 만으로 구성되는 폐쇄적 조직이었다. 맥아더의 참모들은 맥아더가 태평양 지역 사령관으로 병력과 장비 부족으로 고생하던 시절부터 함께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한마디로 인맥 위주로 굴러가는 또다른 작은 사회였던 셈. 맥아더는 당시의 고생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았다고 평가되던 유럽 전선 출신 장교들에 대해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월튼 워커는 출신 성분이 유럽전선이었다. 게다가 무뚝뚝한 성격 탓에 같은 유럽전선 출신이면서도 눈치 빠르게 알랑거려 맥아더의 신임을 얻은 10군단장 알몬드 소장과 달리 워커 중장은 맥아더의 입장에서 볼 때 '굴러들어온 골치아픈 노땅' 에 불과했다.

이것이 극명하게 드러난 부분이 바로 낙동강 방어전인데, 맥아더는 어떻게든 미 본토의 합참을 구워삶아 다수의 병력을 지원받았으나, 이들 대부분을 인천상륙작전 병력으로 전용했고 병력이 부족해 방어선에 구멍이 나고 있는 워커에게는 병력 지원을 하지 않았다.

워커의 입장에서는 서럽고 서러운 상황이었다. 맥아더 패밀리에 들어가지 못해 왕따당하는 것도 서러운데, 병력지원은 안해주고 방어선은 틀어막으라고 명령을 했으니... 워커 입장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사랑보다 곧 전역해야 할 장성으로써 자신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오기로라도 임무를 완수해야 할 상황이었다.[10] 더욱이 그냥 밀리기만 하면 또 모르겠는데 실제로는 이미 인천상륙작전이 계획되고 병력이 충원되는 마당으로, 상륙작전까지 버티지 못하고 전선이 붕괴되면 모든 책임은 자신이 뒤집어 쓸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당시 일화를 보면 그의 휘하 부대 연대장들 상당수는 무능하고 보신주의에 빠져서 전선이 붕괴되는 것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고, 워커는 직접 연락기를 타고[11] 북한군 머리 위를 날며 상황을 체크하고 연대 지휘소를 찾아 다니며 휘하 연대장들을 닦달해 전선을 틀어막아야 할 판이었다.

즉 워커의 입장은 '자포자기 될대로 되라'가 아니라 '더러워서 오기로라도 버틴다'는 식에 가까웠다고 보는게 맞다. 그렇게 워커는 낙동강 전선을 지켰고, 그 와중에 상륙작전에 쓰려고 병력을 안주는 극동사령부의 참모들과 싸웠다. 워커의 적은 전선의 북한군과 내부의 극동사령부 맥아더 패밀리(참모)들로 사방에 널려있었다.

사실 인천 상륙작전이 전세를 돌려놓은 것은 맞으나 정말 아무 대책도 세우지 못하고 당할 정도로 엄청난 위험 요소는 아니었다. 김일성은 생각보다 머리가 많이 모자랐고, 모택동은 일본내 첩자를 통해 다수의 상륙전 선단이 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모택동과 그의 참모들은 상륙작전의 효과가 가장 큰 곳이 인천이라고 판단했고, 이미 김일성에게 경고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은근히 모택동을 '디스'했던(사실 북한이 중국에 바짝 달라붙은 것은, 북한지역을 거의 다 뺏기고 중공군에 의지하게 된 이후부터다)[12] 김일성으로서는 한국군과 미군이 인천에 오기 전에 부산을 점령하는게 더 빠를 것이라고 판단, 서울 등 수도권 주둔 병력까지 빼서 총공세를 퍼붓는데 골몰하고 있었다. 이후 김일성이 뒤늦게 불안을 느끼고 인천 인근에 병력을 재배치했을 때[13]는 이미 모든 것이 늦은 상태였다.

결론적으로 말해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그 선택이 가능케 만들어 주고 절망적인 병력부족 상황을 오기로 견뎌낸 것은 워커의 공이다. 사실 인천 상륙 전에 방어선이 뚫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나빴기에 인천 상륙으로 인한 대전환의 공을 따지자면 7 대 3 정도로 워커의 공적이 맥아더의 공적보다 크다 하겠다.

그래서 워커는 생전에 매우 불운했던 장성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나마도 맥아더의 훼방 때문에 재평가받은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편이다.

4.2 그의 전술 방식과 평가

워커의 전략은 패튼 전략의 한국화이지만 지나친 기동전 및 기동 전략으로 인해서 부대간 지원에 구멍이 생기는 경우가 많다. 이 때문에 1950년의 중국군 개입 당시 전선 붕괴 당시 상황과 비교되는 일도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북진 전략은 모두가 맥아더 사령부의 작품이라는 게 정확한 표현이다. 워커의 8군이나 알몬드의 10군단은 그 스케쥴을 이행하는 장기말에 불과했다. 오히려 지나치게 무리하게 스케쥴을 강행했던 알몬드의 10군단이 어떤 꼴을 겪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워커는 그나마 잘 대처한 편이다.

참고로, 무리하게 휘하 해병대까지 다그쳐서 장진호를 따라 북진했던 알몬드의 10군단은 선도부대인 육군 보병 7사단 예하 매클린 기동대(연대급으로 7사단 예하 연대전투단을 의미한다. 후에 지휘관인 매클린 대령의 전사로 차순위인 페이스 중령의 이름을 따 페이스 기동대로 이름이 바뀐다)의 경우 직속 상관인 육군출신 알몬드 군단장의 명령을 무시하지 못하고 무작정 진격하다가 장진호 북단에서 중공군에게 완전히 섬멸되었다.

장진호 전투하면 해병대만이 싸운 걸로 오해하기 쉬우나 실제는 육군 7사단과 영국군 해병대도 동참하고 있었고, 특히나 앞서 언급한 매클린 기동대와 같은 보병 7사단 병력은 너무 빠른 진격으로 중공군과 접촉 부대가 아작나다가 철수길에 중공군에게 섬멸되었다. 당시 기록을 보면 차량 이동중 중공군의 습격으로 각개격파 당했고 장비를 뺏기지 않으려고 미군은 섬멸된 미군 차량부대 위에 네이팜을 투하해 완전히 소각시켰다. 극히 일부 생존자만이 얼어붙은 장진호 위를 기어서 해병대 진지로 돌아왔다.

그나마 해병대는 소속이 달라 알몬드의 통제가 어려웠고, 해병 1사단장 스미스 장군이 사보타주 수준으로 느리게 이동하면서 도처에 물자 집적소를 마련해 둔 덕분에 후퇴할 때 그 물자를 쓰며 간신히 철수가 가능했다.

이에 비하면, 워커의 8군의 경우 철수 과정에서 일부 사단장의 어처구니 없는 판단 때문에 일부 부대(2사단이다. 사단장이었던 카이저는 낙동강 전선 때부터 무능한 지휘로 워커에게 찍힌 인물이었다)가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을 제외한다면 비교적 전력을 보전해 신속히 퇴각할 수 있었으니 무조건 워커의 실책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애초에 북진 자체가 병력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갈수록 작전 정면이 늘어나는 지형에서 싸워야 했고, 후세 사가들은 맥아더의 "크리스마스 전에 병사들을 집에 보내주겠다"는 정치적 구호에 따른 무리한 전략이 아니었다면, 청천강 선에서 병력을 정비하고 방어에 중점을 둔 다음, 이듬해 공세를 시작해야 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애초에 한겨울에 기후와 지형을 고려치 않은 맥아더 사령부의 후방 책상물림 참모들의 어처구니 없는 전략의 탓이다.

특히, 한국군에서 중공군을 생포하고 사실을 보고해도 극동 참모부의 맥아더 심복 윌로비 장군같은 정보참모는 있는 정보조차 맥아더에게 보고하는 걸 지연시키고 정보를 은폐하려 들었다. 중공군에 대한 대비가 없이 미군이 카운터 펀치를 연타로 맞게된 원인은 이들 머저리 같은 참모들의 의도적 정보은폐 탓이지, 일선에서 이들이 세운 무리한 일정표를 메꾸느라 뺑이친 워커의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다.

5 안타까운 사고

하지만 1950년 12월 23일,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도중, 양주군 의정부읍으로 가는 서울특별시 외곽의 어느 도로[14] 에서 맞은 편에서 주차빼던 한국군[15] 사병이 운전하던 탄약 운반 삼륜차 트럭이 갑자기 마주오던 워커 중장과 부관, 운전병, 호위병 네 사람이 타고 있던 지프 앞으로 부딪혔다. 지프는 트럭과의 충돌을 피하려다 그만 도로 옆의 도랑으로 추락했고, 워커 중장은 지프의 앞유리창을 깨고 창밖으로 튕겨나가 땅바닥에 부딪히면서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즉사한 뒤였다. 이승만은 사고를 일으킨 한국 사병을 포살하라고 명을 내렸지만 워커 가족들이 말린 데다가 조사 끝에 과실이라는 게 확인되어 처벌되지 않았다.[16]

6 기타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미군M41 워커 불독이란 경전차를 개발했는데, 전차의 명칭은 워커 장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월드 오브 탱크에서 9.3 패치에 7티어 미국 경전차로 나왔다. 워커 장군님을 기억하고 싶다면 구입하는 것을 추천한다.

한국 정부는 안타까운 워커 장군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서울 아차산의 지명에 워커힐이라는 이름을 사용한다.워커힐 아파트와 워커힐 호텔, 광진구에 있는 그 쉐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의 워커힐이 바로 이 지명을 의미한다. 해외에서는 "쉐라톤 호텔"들이 종종 보이지만 한국에선 특별하게도 쉐라톤 워커힐이라는 이름을 공식적으로 사용한다. 워커를 기리는 기념비 및 동상도 세워졌으나 맥아더와 견주면 철저하게 잊혀졌다. 워커힐 호텔이라고 하면 대한민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그 워커힐이 워커 장군이라는 군인을 기려서 지어진 명칭이란걸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아래는 쉐라톤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맥아더 자신은 워커에 대해서 썩 좋은 감정이 없었고. 그냥 저냥 늙다리이자 버거운 부하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워커의 공이 잊혀진 것도 사실. 어떤 연구에 따르면 워커가 순직하지 않았다면 맥아더에 의해서 해임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실지로 워커 사후 워커의 참모들 중 상당수가 리지웨이에 의해서 전출되는 일이 벌어졌다.

쇼맨십이 특기인 맥아더나 어느 정도 기자들에 대해서 온화한 리지웨이에 비해서 딱딱거리는 편이 많아서 기자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마거릿 히긴스의 회고담에서도 은근히 돌려서 깔 정도. 사실 워커의 공이 이런 이유로 묻힌 것도 있다. 실지로 워커에 대해서 나온 전기는 단 두편(...) 그것도 한편은 사망 직후에 나온 전기이다. 동시대의 역대 미 8군 사령관들이 이전이나 이후 커리어 때문에 전기가 굉장히 많은것과는 좋은대조를 보인다. 사진만 봐도 알겠지만 불독 전형적인 무골이었던듯.

워커 중장의 사고 이후 이승만은 워커 중장의 부인에게 북진 도중 영변 근처에서 노획한 김일성의 소련제 리무진을 선물로 주었다. 워커 부인은 1951년 7월 로스엔젤레스에서 이 자동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 차가 고장나는 바람에 미국제 경차로 교환했다. 그 후 김일성의 리무진은 여러 수집가의 손을 거쳐오다 198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2014년 6월에는 용산 전쟁기념관에 있다. 거액을 주고 기부를 했다는 후문이 기부 전시실에 있다.

워커 중장의 사고건에 대해서 여러 이야기가 있던터라 북한에서는 대대적인 선전의 자료로 사용하고 있다. 내용인 즉슨 최종훈 최종운이라는 하전사가 특수부대를 이끌고 유엔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일련의 작전에서 워커가 거느린 대규모 후퇴 대열을 기습해서 전멸시켰다는 이야기. 지금도 심심하면 잡지에서 떠들어대는 이야기이다. 참고로 일본의 검은 안개에서는 아예 후퇴중에 워커가 탱크에 깔려죽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부경대학교 대연캠퍼스에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구내 식당이 있다. 이름은 워커 하우스(Walker House). 설명에 따르면, 건물이 6.25 전쟁 당시 미 8군의 사령부로 사용되었다고.

대구광역시에 그의 이름을 딴 미군부대인 캠프 워커가 존재한다.
  1. 이전엔 맥아더가 그를 별로 신용치 않아 가려졌다는 평이 많았는데 일부에선 맥아더가 그를 탐탁치 않았다는 주장이 과장된 것이라는 연구도 있다. 실제로 워커가 여러 발언으로 곤란할 때 가장 먼저 그를 변호한 것이 맥아더여서 둘의 사이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도 어렵다.
  2. 그의 상관이었던 맥아더는 기자들을 잘 활용해서 화려한 언론 플레이를 했으며, 워커의 사망 후 후임으로 들어온 매튜 B. 리지웨이의 경우 기자들에게 어느 정도 관대했다는 사실과는 꽤 대조된다.
  3. 워커 장군은 한국전쟁이 발발해서 갑작스레 8군사령관에 임명된 것이 아니다. 전쟁이 일어나기 수년전인 48년에 임명되었다. 워커장군이 야전군사령관으로 일본에 부임할 당시 많은 주일미군의 경우 1947년까지 태평양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의 대다수가 제대했으며 몇안되는 숫자만이 군에 잔류했고 나머진 햇병아리들로 가득했으며 전형적인 무사안일태평의 군기가 가득했다. 이에 워커장군은 보다 전투적 군기를 세우려고 시도했으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결과는 한국전 초기의 미군이 겪었던 파국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다.
  4. 독일이 항복하기 직전인 45년 3월에 중장 계급을 달았으며 종전 직후 미국 본토의 5군사령관을 지냈다가 일본으로 부임했다.
  5. 냉전 종결 후 기밀 해제된 미국 비밀문서에 따르면, 1951년 1.4 후퇴 이후 미국 정부에서 다시 한번 이보다 더 체계적인 한국 정부 망명계획을 준비했다고 한다. 게다가 이번에는 완벽하게 패하는 상황이 아니라 중국군이 특정 방어선(금강 - 소백산맥 방어선)을 넘어오기만 하면 바로 실행한다고 결정한 상태였다.
  6. 方虎山. 한국전쟁에서 최고의 기동전을 구사한 팔로군 출신의 북한군 지휘관이다. 후퇴 당시에도 부대편제를 유지하면서 북으로 귀환하여 드물게 이중영웅 칭호를 받았다. 그러나 전후엔 연안파에다 반김일성 성향 때문에 영웅칭호와 군적을 모두 박탈당하고 숙청됐다.
  7. 24사단장인 딘 소장이 실종(나중에 북한군의 포로로 잡혔다는 것이 확인됨)되는 지경까지 초래했으니 미국 의회의 충격은 대단했다. 장성급 장교가 실종될 정도니….
  8. 맥아더의 말이 사실이긴 하다.
  9. 물론 미군들은 이런다고 일본군처럼 알겠다고 죽을 이들이 아니었다. 이런 말이 전해지자 미군들은 저 미친 놈이라고 워커를 씹었고 우리가 질 것 같고 달아날 수 있다면 달아나지 미쳤다고 여기서 죽냐고 비아냥거렸다. 당시 참전한 김성환 화백은 워커 사진에 침을 뱉으며 욕하던 미군도 봤다고 하니 미군들에겐 은근히 욕을 많이 먹었던 걸 알 수 있다.
  10. 물론 한국을 팔아 감성팔이를 했을 의도였는지 정말 한국을 사랑해서였는지 그건 본인만이 정답을 알 것이고 그렇지 않는 이상 추측만이 난무할 뿐.
  11. 오죽했으면 워커의 부관이 연락기에 그려진 삼성장을 지울 정도였다.
  12. 오히려 김일성은 소련파라서 중국과 가까웠던 연안파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13. 인천 상륙작전 며칠 전인 시점으로 일부 병력을 인천 인근으로 돌리려다가 유엔군의 대규모 공습으로 주저했던 기록이 있다.
  14. 당시 행정구역으로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현재 위치로는 도봉역 2번 출구 건너편
  15. 정확하게는 한국군에 파견나간 반공청년단 출신의 민간인이다.
  16. 이전 서술과 다른 건 한국에서 나온 워커 사건에 대한 기록들 전부가 풍문이거나 사건에 대해서 직접 보고 받은게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어떤 서술에는 워커가 철모도 안쓰고 손수 과속운전하다가 당했다는 서술도 여과없이 실었으니... 꽤 큰 사고임에도 이야기가 제각각인건 워낙 워커가 듣보잡이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2014년에 대한민국에서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당시 사건기록을 토대로 사고 자체를 재구성한 논문이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