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始皇陵 | ||
전국중점문물보호단위 중화인민공화국 국무원 공포 | ||
분류 <#A6A6A6> | 고묘장(古墓葬) | |
시대 <#A6A6A6> | 진 | |
일련번호 <#A6A6A6> | 1-164 | |
소재 <#A6A6A6> | 중화인민공화국 산시 성 시안 시 | |
등재 <#A6A6A6> | 1961년 |
유네스코 세계유산 | ||
파일:Attachment/unesco-worldheritage.png | ||
이름 | 한글 | 진시황릉 |
영어 | [1] | |
프랑스어 | [2] | |
국가·위치 | 중국 시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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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재유형 | 문화유산 | |
등재연도 | 1987년 | |
등재기준 | (i)[3], (iii)[4], (iv)[5], (vi)[6] | |
지정번호 | 441 |
목차
1 개요
정말 순수한 의미로 대륙의 기상. 인류 최고의 등신대 피규어 콜렉션
중국 산시성 시안시 린퉁구에 있는 진시황의 무덤으로, 1974년에 병사, 말 등의 테라코타 모형(병마용)이 8000점이나 발견되었다.
2 건설 과정
사기 진시황본기에 따르면 진시황이 즉위한 직후부터 만들기 시작했는데 우선 여산(驪山)에 터를 잡고 흙을 깊이파서 구리로 바닥을 깐 뒤 궁궐을 본딴 건물을 세우고 신하와 부하들 모양의 도기 인형 을 만들어 넣었다. 그외에도 천장에는 천문도를 바닥에는 지도같은 구조로 만들고 강과 바다는 당시 귀금속이던 수은으로 만들고 기계장치로 계속 흐르도록 만들었다. 그위를 다시 흙으로 쌓았는데 자신의 무덤이 크면 클수록 오래 산다 믿었기에 약 100m로 쌓았다. 근데 진시황은 크기는 제일 크고 52세에 사망... 현재는 크기는 비바람에 의해 53m 정도로 작아졌다. 수은에 관련된 기록은 진시황릉 근처 흙에서 수은 함량이 정상의 50배로 검출되어서 어느정도 사실로 추정되지만 단순히 환경오염탓이라는 주장도 있다.
당연히 규모에 걸맞게 거대 공사였는데 위에서 언급한대로 즉위 직후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통일 이후부터는 70만명(총인원으로 추정)을 동원해서 지었지만 35년(즉위년 기준) 넘게 지어도 완성하지 못하고 진시황이 먼저 죽었다. 이후 2세황제 호해는 여러동물과 진시황의 후궁과 그 자녀들 그리고 공사인부들을 순장시켜서 무덤공사를 끝냈다.
실제 진시황릉의 배장품(陪葬品) 구덩이에서는 사람이 묻힌 무덤도 여러 곳 발굴되었는데 무덤의 부장품이나 관은 호화로웠으나 유골은 나이도 젊고 건강 상태도 좋았음에도 불구하고 두개골에 화살촉이 박혀 있거나 사지가 토막나는 등 잔혹한 처형을 당한 상태였다. 이는 진 이세황제 호해가 죽인 그의 형제자매들의 무덤이나 순장된 사람들로 추정되고 있다. 특히 사기 이사 열전에 보면 호해의 형제 중 유일하게 공자 고(高)는 먼저 죽음을 청했기 때문에 호해가 은혜를 베풀어 자살을 허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실제로 이 순장 희생자들 중 딱 남자 유골 1구만 외상이 없이 멀쩡한 상태여서 이것이 공자 고의 유해라고 추정되고 있다.
2.1 부장품
부장품은 정말 세계적인 수준으로, 전세계에서 부장품이 가장 많은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사람모양의 흙인형인 토용을 만들었는데 후술할 병용이 가장 유명하지만 신하들이나 궁중 광대 같이 다양한 사람들을 실제 사람크기에 사람과 흡사할 정도로 잘 만들어 묻었다. 병마용으로 추정컨데 실제 진나라 궁정에 일하던 사람 수만큼 넣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병마용은 레고처럼 여러 부분을 만들어 구운 뒤, 하나의 형태로 조립을 한 것으로 여겨진다. 오늘날 제조업 공장의 생산라인처럼 분업 형태로 인형 제작이 이뤄어졌다. 정부의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품질관리를 위해서 제작소들은 모든 제작된 물건에 그 이름을 새겨야했는데, 이 덕분에 역사학자들은 어느 작업소가 병마용의 인형들을 제작하는 데 동원되었는지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완성된 인형은 계급과 역할에 맞춰서 당시 진나라 군사 진형(陣形)을 정확하게 따른 형태로 구덩이 속에 배치되었다.
병마용 제1호갱의 (저작자: Maros M r a z #)
병용은 키가 184cm에서 197cm로 큰 편이며, 장군은 병사보다 크게 만들어져 있다. 병마용은 경무장 보병, 중무장 보병, 궁병, 전차병, 기병, 말, 장교 등 다양한 병과의 군인들을 표현하고 있다. 얼굴은 약 8가지 복제 틀을 사용해 제작하였으며, 기본형에 수염 등 세부적인 변형을 가해 개개인이 전부 달라 보인다. 무슨 토탈워 시리즈 병사 모델링도 아니고 발굴된 4개의 갱도 중 3곳에 모두 8천여 점의 병사와 130 개의 전차, 520 점의 말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이미 발굴된 것보다 더 많은 수가 아직흙 속에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직 채색이 남아있는 토용들 |
원래는 실제 사람과 말을 모델로 채색되었으나 수천년의 시간이 지난 상태인지라, 발굴될 때 외부 공기와 접촉하면서 순식간에 옻칠 코팅층이 바스라지거나 탈색되었다고 한다. 제작 당시 채색과 함께 옻칠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오랜 시간동안 습기를 머금은 토양 속에서 보관되다가 발굴 후 건조한 공기와 접촉하자 이 옻칠 코팅층이 건조되면서 채색층과 함께 작은 알갱이로 수축했고, 이 수축된 알갱이들이 떨어져 나가면서 함께 사라진 것이다. 학자들도 색의 퇴색을 막기 위해 병마용갱의 발굴을 예전부터 미뤄 두고 있었다. 다행히 요근래 기술이 개발되면서 다시 발굴을 시작하고 있다. 그 외에도 병마용들은 원래 모두 실물 크기의 청동제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오랜 세월 동안 무기들은 많이 파손되어 병마용의 숫자보다 적은 수가 발굴되고 있다. 칼 같은 일부 무기들은 10 ~ 15 마이크로미터 두께로 산화크롬 처리가 되있어서 2,0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녹슬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후 한나라 시대의 몇몇 묘들에서도 병마용들이 발견되었으나 규모도 작고 인형의 완성도도 진시황릉의 병마용보다 훨씬 떨어지는 수준이다. 크기도 진시황릉과는 달리 사람이 한 손으로 집어서 들고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작다. 본격 고대의 12인치 피규어 진나라 때 장인들이 전부 순장당했나? 일단 발굴된 한나라 시대때 묘들이 전부 황릉이 아니긴 하지만, 진시황의 병마용과 비견되는 병마용을 만드는 것은 국고에서 재물을 퍼부어야 하고, 더구나 세밀하게 만드려면 시간까지 많이 들여야 한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리고 재밌는 점은 이따금 병마용 중에는 비단을 걸치고 있던 흔적이 있다 카더라. 문경지치래도 돈지랄 하려면 다 한다.
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은 한나라 시대에 이런 병마용을 못만든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무덤덕후질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만든 사건에서 교훈을 얻은 한나라 사람들이 인형으로 대리만족하는 선에서 끝낸 것이라고 주장한다. 맞는 주장같다..아무리 무덤이 좋아도 일찍 무덤 들어갈 일을 일부러 할 사람은 없지...
토용 말고도 진시황의 전용 마차인 온량거의 1/2 크기 청동제 모형(동마차갱)이나, 진시황이 기르던 말이나(기마갱), 학, 자이언트 판다 등 진기한 동물 등(동물갱) 수십마리, 부식되지 않도록 돌조각을 엮어 만든 실물 크기 갑옷과 투구등(개갑갱) 등이 현재까지 발굴되었다. 기마갱과 동물갱에서는 동물들을 돌보던 하인의 실물 크기 모형까지 함께 묻혀 있었다.
3 재발견
하지만 진시황이 죽고난 뒤 겨우 4년만에 진나라가 멸망해버렸다. 이후 함양(咸陽)에 들어온 항우의 군대는 진나라 왕들의 무덤을 도굴하기 시작했고, 당연히 가장 큰 무덤이고, 6국의 원성을 가장 많이 산 진시황의 무덤이 도굴 1순위였다. 다만 사기의 항우본기(項羽本紀)같은 곳에 직접적인 기록은 없고, 한고제본기(漢高帝本紀)에 광무 대치 중 유방이 항우를 비난하면서 항우의 죄 10가지를 나열하면서 진시황릉 도굴을 간접적으로 언급하고 있어서, 일단 진시황릉을 발굴해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항우는 진시황의 무덤을 도굴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만약 진짜 도굴하지 않은 진시황의 묘실이 남아 있다면 투탕카멘을 초월하는 대발견이 될것이다. 비록 항우가 도굴을 했었어도 항우조차 진시황릉의 엄청난 규모는 미처 파악하지 못해서 상당히 많은 묘실이 도굴되지 않고 남아있었고, 그렇게 여산 인근에 황제의 무덤이 있다는 식으로 이야기만 구전되었지 진시황릉은 그후 2,000년 가까이 잊혀졌다.
그러던 중 1974년 3월 29일, 양신만(楊新滿) 등 동네 청년 6명이 우물을 만들기 위해 땅을 파던 중 도기 조각을 발견한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인형 모양의 도기 조각을 더 캐내게 되자, 앞서 언급한 구전에 관한 얘기를 떠올리고는 혹시 이 도기 파편들이 그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하여, 이를 박물관에 알리면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고, 얼마 뒤 약 수천점의 도기제 병사 인형이 묻힌 거대한 공간 병마용이 발견되었다. 이후 동마차갱, 기마갱, 동물갱, 수십마리, 개갑갱등 수십개의 부장품 구덩이들이 발견되면서 잊혀졌던 진시황릉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최초 발견자 중 하나인 양신만은 인기스타가 됐다. 몇년 전 국내 모 프로에서도 이 농부의 당시 근황이 나왔는데, 나름 유명인사로 관련 책자도 팔고 기념 사인회까지 열 정도로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다. 발견 당시 중국 정부에서 보상으로 경운기 1대를 지급했다고 한다. 한편 진시황릉 발견 전만 해도 그 땅은 평소 귀신붙은 땅이라고 불리며 작황이 안 좋아 현지 주민들이 기피했던 곳이였다고 한다. # 지하에 거대한 공동이 있으니... 1974년에 발견된 것만 따져봐도 정말 운이 좋았다. 만약 더 일찍 발견되었더라면 문화대혁명 당시 싸그리 개발살 났을 테니까...
4 병마용의 주인은 진시황이 아니다?
"병마용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모다."라는 설도 있다. 재야 고고건축학자인 천징위안(陳景元)은 '병마용의 진상'이라는 책을 통해 60여 개의 근거를 제시하며 병마용의 실제 주인은 진시황의 고조 할머니로, 강력한 섭정을 펼쳐 '2,000년 전의 서태후(西太后)'라고 불리는 '진나라 선태후(宣太后)'라고 주장했다.
천징위안은 일반 사병들도 갖췄던 투구를 진시황의 친위 군단이 착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의상 역시 빨간색과 보라색이 주조를 이루는 것은 검은 색을 숭상하도록 법령으로 공포할 만큼 검은색을 선호했던 진시황과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또한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직후 화폐와 문자, 도량형을 통일시키면서 용이한 전술 운용을 위해 전차의 너비도 통일했는데 병마용 갱 내에서 출토된 차량들의 바퀴 너비가 일정치 않다고 지적했고 이와 함께 용맹무쌍하기로 이름났던 당시 진나라 병사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무사용들은 수염을 기른 늙은이 형상에 우울하고 기운 없는 표정을 짓고 있는 점도 의문이라고 한다.
윗줄에 상방(相邦) 여불위(呂不韋)라 새겨진 꺾창 |
하지만 이 설은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에게 반박당하고 있는데, 위 사진처럼 병마용갱 안에서 발견된 꺾창에 여불위의 이름이나 진시황이 6국을 통일한 후에 설치한 관청 이름이 새겨진 점, 병마용갱의 바닥에 깔린 벽돌이 진시황릉 곁에서 나온 다른 부장품 구덩이의 벽돌과 동일한 점, 병마용갱 외에도 위에서 설명한 많은 부장품 구덩이가 진시황릉 곁에 있다는 점 등이 병마용갱은 역시 진시황릉의 부속 시설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고 한다. 그리도 다른 근거인 채색도 원래 이 무덤의 도기 인형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채색이 되어있었는데 세월이 지나면서 사라진것 뿐이지 색이 남아있는 일부 인형은 검은색으로 칠한 것이 많다.
또한 천징위안이 주장한 투구 문제는 두 가지 설명으로 반박 가능하다. 우선, 진시황릉의 다른 부장품 구덩이인 개갑갱에서는 돌조각으로 만든 모형 갑옷과 함께 투구가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병마용들은 전투에 돌입하기 전 전투준비태세를 갖춘 상태를 모형화 한 것이므로 투구를 아직 쓰지 않은 것으로 형상화했을 것이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두번째로는, 진나라 이후 한나라 시기까지도 무기, 도구의 주류는 청동기였는데, 청동제 무기로 베기를 할 경우 날이 부러지기가 쉬워서 무기의 대부분이 창 같은 찌르는 무기였다. 이에 근거리에서 머리에 칼 등으로 가격을 당할 가능성이 낮아지고, 찌르기 공격이 집중되는 가슴 부위에는 갑옷을 착용하여 방어를 단단히 하는 반면에, 투구는 구태여 착용하지 않고 대신 관모를 쓰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는 설명이다.
천징위안이 선태후의 무덤이라고 주장하는 병마용갱 바로 옆의 아직 발굴되지 않은 대형 무덤 또한 선태후 시대 무덤 구조와는 다르고, 오히려 위에 나온 진시황의 자녀 무덤으로 추정되는 배장묘와 구조가 거의 같다는 점도 천징위안의 주장의 설득력을 떨어뜨리는 정황 증거다. 참고로, 진시황릉 주변에 주인이 밝혀지지 않은 진한대(秦漢代) 왕릉이 아직도 무수히 있다.
5 대중매체에서의 병마용
5.1 영화
5.1.1 미이라 : 황제의 무덤 (2008)
원래는 황제의 친위부대로 황제가 불사의 저주를 받아 병마용으로 변했을때 궁궐밖에 대기하고 있던 병사들도 저주를 받아 병마용이 되어 황제의 무덤에 같이 매장되어 황제의 무덤을 지켜왔던 것이다.[7] 영화 초반부에 황제의 무덤을 발굴하던 알렉스 일행이 무덤을 찾아 들어 갔을때 일렬로 서있는 웅장한 모습과 강력한 도굴 방지 장치[8]으로 인상을 주었다. 그리고 황제가 저주를 풀고 진정한 불사의 힘을 얻었을때 자신의 무덤으로 돌아가 병사들을 일으키는데 무덤 주위의 땅이 열리며 그안에서 나타나는데 웅장한 bgm까지 깔리며 무지막지한 포스를 풍기며 나타난다. 숫자는 겨우약 8000명이다. 황제는 이들을 이끌고 세계정복을 시작했다.
그런데 병사 구성을 보면 창병(사진)하고 궁병(정확히는 노병 사진)만 보이고 병마용갱에 있는 기병이나 전차병은 안 보인다.뭐여[9] 거기다 무덤 앞에 만리장성(...같이 보이는 다 허물어져가는 커다란 벽)을 넘어가야 병마용들이 불사신이 된다는 설정까지 있어서 무녀가 불러낸 언데드들과 치고박고 싸우다 부서지거나[10] 총알세례를 맞고 부서지거나 폭탄에 박살나기 일쑤다. 릭 오코넬: 20세기에 온 것을 환영한다! 거기다 원래는 움직이지 않는 토우가 움직인다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지 병마용들의 관절 부위가 갈라져 있는 모습이라 매끈한 원래 모습과는 달라서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여주며 주인공 일행에게 마구잡이로 당하는 잡몹같은 모습도 보여줬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검을 든 장교에 맞춰 움직이는데 검을 든 병사가 후반에 갈수록 많아진다. 게다가 노궁병은 노궁말고도 보조무기가 없다. 그러나 하반신이 날아가도 상대에게 끊임없이 접근하는 모습도 보인다. 결국 황제가 릭 부자에 의해 사망하자 흙먼지로 돌아가 무덤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버린다.
5.1.2 그외의 영화
병마용과 진시황릉을 다루고 있는 영화들은 거의 중국영화가 많은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영화는 장예모감독이 주인공으로 출연한[11]의 '진용 (1989)'이라는 영화다. 여기서 주인공 몽천방은 진시황[12] 암살 시도를 물리친 걸로 총애받는 장군이었는데 불로불사역을 찾기 위해 서불과 떠나던 궁녀 한동아[13]와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결국 들키고 온몸에 진흙이 발라진 채로 불에 구워져 인간 병마용이 된다.[14] 그러나 완전히 구워지기 전에 한동아가 입으로 전해준[15] 불사약을 먹고 죽지 않은 상태로 병마용이 된 후 오랜 세월이 흐른다. 1930년대 초반, 몽천방은 진시황릉에서 나오게 되고 3류 배우들을 앞세운 사기꾼 백운비[16] 일당과 만나게 된다. 백운비를 따르는 여배우 주리리가 옛날 한동아의 환생임을 직감한 몽천방은 스토커처럼 그녀를 쫒는다. 하지만 백운비는 진시황릉을 도굴할려던 도굴꾼이었고 그를 따르며 톱스타가 되려던 주리리는 결국 죽는다. 죽기 직전에야 주리리는 자기가 옛날 진시황의 궁녀 한동아의 환생임을 깨닫고 몽천방 앞에서 죽어간다. 다시 시간이 흐르고 시황제릉이 본격적으로 발굴되어 세계 각국에서 시황제릉과 그 속의 병마용을 보러 관광을 오는 1990년대 초 몽천방 불사인데 나이는 먹은 듯은 병마용갱 발굴 현장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일본인 단체 관광객들 중에서 한 앳된 소녀가 슬며시 웃고는 사라진다. 몽천방은 한동아이자 주리리의 환생임이 분명한 그 일본인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걸로 끝난다.
주윤발과 임청하가 함께 출연한 영화 '몽중인 (1986)' 역시 진시황 때의 연인이 병마용이 발굴되면서 전생의 기억을 되찾아 옛 연인을 만나 사랑을 나눈다는 설정으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참고로 주윤발의 베드씬을 볼 수 있다.
성룡, 김희선 주연의 영화 '신화 (2005)'에서는 진시황릉을 다루고 있지만 병마용은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알려진 진시황릉은 가짜고 진짜가 불로불사의 약과 함께 어딘가에 숨겨져 있다는 배경설정이다. 참고로 여기선 주인공의 전생이었던 장수가 불로불사의 약을 찾았으나 조고와 이사의 수작때문에 진시황제는 이를 먹지 못하고 얼마 안가 죽었다고 나온다.
그대신 성룡의 전생이었던 장군이 가져온 불사약은 그것이 진짜인지 확인하라며 여주인공인 김희선과 성룡의 동료 장수가 먹었고 이후 성룡이 환생한 현재까지 살아 있었다. 이후 진시황릉을 찾게 되는데 반중력을 내뿜는 돌이 박혀 있는 석상들로 인해 거대한 공동에 병마용과 마차, 그리고 궁궐처럼 꾸며진 진시황의 묘소가 공중에 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후 불사약을 찾던 악당들과 싸우다 함정을 건들게 되면서 반중력을 지탱하던 석상이 무너지면서 무덤은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고 주인공 성룡만이 탈출하게 된다.
5.2 애니메이션
5.2.1 진 연희무쌍
3기 애니메이션인 연화대란의 종반부에 등장한다.
작중 이름은 병마요로[17] 먼 옛날에 대륙을 통일했던 시황제가 자신 만의 군대를 만든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군단으로 우길이 태평요술서로 부활시켜 낙양을 향해 진격시키면서 공사 중 이긴 해도 관문을 쓸어버리는 무시무시한 모습을 보여줬으며, 주인공 연합에 의해 많은 수가 쓸려나가는 잡몹같은 모습을 보였지만, 애초에 생명체가 아니기 때문에 절대 지치지 않으며, 인간이 맞으면 죽는 타격에도 멀쩡히 움직인다. 더 많은 수로 몰아붙이는 인해전술로 주인공 연합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그러나 주인공 연합에게 우길이 죽고 태평요술서가 봉인되자 활동을 멈춰 정지되었다.
5.2.2 그외의 애니메이션
전세계의 유적지를 무참히 박살내는배경으로 하는 애니메이션 '몬타나 존스 (1994)'에서 잠시 등장한다. 모든 등장인물이 수인인 작품 특성상 병마용들도 모두 동물 머리의 수인이다. 물론 이 작품에 등장한 죗값으로 처참히 박살났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카 2 (2011)'에서도 등장한다. 이번엔 형태가 자동차 형태다.
5.3 게임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의 불가사의로 병마용이 나온다. 고전시대에 건설 가능하며, 효과는 30초마다 경보병 1기를 생산하는 것으로 물량전으로 나갈때 필요한 불가사의 중 하나다.
- 문명 5의 신과 왕 확장팩에서 초기 문화 +6 보너스를 제공하는 불가사의로도 등장. 브랜드 뉴 월드 확장팩에서는 효과가 바뀌어 문화 보너스가 없어진 대신 건설시 보유하고 있는 지상유닛을 병종별로 하나씩 해당 도시에 추가로 제공해준다.
- 삼국지 조조전의 가상모드에 등장하는 흙인형은 병마용에서 모티브를 따온 것이다.
-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확장팩 판다리아의 안개의 레이드 던전 모구샨 금고의 마지막 우두머리 황제의 의지의 모티브로 추정된다.
- 크레이지레이싱 카트라이더의 차이나 테마에 시안 병마용을 주제로 한 트랙이 둘 있다. 물론 병마용 모델은 크레이지 아케이드 캐릭터들.
- 바람의 나라(게임)의 중국 장안성에 위치해있다. 몹들이 마법을 쓰고 강하므로 1차 혹은 2차승급이후에 가는 것이 좋다.
5.4 기타
병마용과 진시황릉에 대한 교양서로는 웨난 저 부활하는 군단과 장점민 저 제국의 빛과 그늘을 추천한다.
한번은 시각장애인들이 단체 관람을 온 적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앞이 보이지 않는 이들에게 어떻게 병마용의 위대함을 가르쳐 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특별히 그들에게만 병마용을 직접 만져볼수 있도록 허락했다고 한다.오오 대륙의 기상[19]
독일인 행위 예술가가 발굴된 토기 병사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병마용에 기어들어가 포즈를 취하는 "예술"을 했다. 이걸 관리 측에서는 눈치를 못 채고 있다가 나중에 체포하려고 했는데 너무 분장을 잘 하고 숨어있는 바람에 예술가를 잡는데 한참 시간이 걸렸다고 한다.현실에서 윌리를 찾아라를 시전하는 독일인
유한양행의 숙취해소제 '내일엔'의 신문광고에 등장했다. '3000년만에 숙취에서 깨어나다!'라고. 병마용이 광고에 등장한 것은 '내일엔'의 원료인 황칠나무가 진시황이 찾아헤매던 '불로초'이기 때문이라는 듯.
일본쪽에서는 저 병마용이 나란하게 수많이 늘어선 모습을 보고 코미케같다(...)라는 농담같지 않은 농담도 있다.[20] 예전에 한 일본쪽 웹에 제목학원풍 유머로 병마용갱 사진을 올려놓고 코미케라고 묘사한 페이지가 있었다.
진시황릉은 현재까지 발굴이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있으며, 중국 정부 또한 후세에 물려주기 위해 완전한 발굴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21] 하지만 전세계의 중국사나 아시아 역사학자들은 아직까지 거의 밝혀지지 않은 진나라 시대의 유물들이 온전히 매장되어 있을 진시황릉의 발굴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 형식이 도입되었다는 학설이 있다. 이로 인해 또한 유럽인 DNA의 흔적도 근방에서 발견되었다고 하기에 그리스인들이 진시황릉을 지은 것이 아닌가하는 의견도 있다. 아마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때 떨어져나간 일부가 중국으로 흘러들어갔을 것이라는 썰. 하지만 그리스인이 직접 연관된 것이 아니라 인도 유럽어족중 가장 동쪽에 살던 토카리인의 DNA가 아닌가 하는 의견도 있으며, 미술 형식도 간다라 미술이 전파된 식으로 간접적으로 퍼진 것이 도입된 것이란 의견도 있다.- ↑ Mausoleum of the First Qin Emperor
- ↑ Mausolée de l'empereur Qin
- ↑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
- ↑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
- ↑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
- ↑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
- ↑ 황제가 저주를 받을때 병사들의 눈에서 진흙이 흘러나오고 있었고 무녀가 궁을 탈출할때 그때까지 서있던 병사들 대신 병마용들이 서있었다.
- ↑ 연속 발사되는 쇠뇌와 병마용을 가볍게 관통하는 톱날 바퀴, 그리고 닿자마자 피부를 녹여서 끔찍한 고통 속에 죽게 만드는 수은증기 장치 등
- ↑ 일단 진시황의 청동전차는 영화 중에 나오긴 한다. 다른 전차병들이 안나와서 문제지 그러나 이것은 황제의 무덤에만 있는지라 단순히 장식품일수도 있다..
- ↑ 이 언데드들든 당시 동원되었다 순장당한 자들이다.
- ↑ 이 영화의 감독은 천녀유혼의 정소동이다.
- ↑ 84부작 삼국지로 유명한 육수명이 연기했다.
- ↑ 공리가 연기했다.
- ↑ 사실 진시황은 자기 목숨을 구해준 공로로 사면할려고 했으나, 몽천방이 스스로 선택했다.
- ↑ 한동아는 이 후 불에 뛰어들어 자살한다.
- ↑ 신삼국의 관우로 유명한 우영광이 연기했따.
- ↑ 요자는 妖자로 요괴의 요자다.
- ↑ 여담이지만 영화 미이라3와 달리 관절부분이 부드럽게 묘사되어 있어 진짜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다.
영화가 게임보다 못하냐 - ↑ 꼭 중국 뿐이 아니라,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에서도 시각장애인들을 위해 전시품을 만질 수 있게 해주는 공간이 있다.
- ↑ 근데 농담으로도 툭 던지기가 힘든게, 코미케 현장에 도착후 스탭들이 그 수많은 인원을 줄세워 정리한 모습을 보면 딱 그거같다. 특히 동홀 주차장 대기열이.
- ↑ 유물을 전부 다 발굴한 뒤 그것들을 어찌 할 것이냐란 뒷처리와 보존 문제 또한 큰 걸림돌이다. 게다가 사마천의 사기에 진시황릉에는 도굴을 막기 위한 각종 함정들이 설치되어 있다는 글이 실려 있어 무턱대고 파들어갔다가는 자칫하면 인명 피해는 물론 최악의 경우 유물까지 손실할 수도 있다.